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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경 위의 등불 (막 4:21-25)

오늘 우리가 마가복음 4장의 말씀을 읽었는데요. 이 본문의 말씀은 한 구절씩 한 구절씩 읽어보면, 그렇게 어려운 말씀들이 아닙니다. 분명히 그 뜻을 알 수 있는 말씀들인데, 그런데 이 말씀들이 하나로 뭉쳐져 있어서, 모아져 있어서 오히려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이 말씀들이 다 흩어져 있습니다. 21절에 해당하는 말씀이 이곳에서 나오고, 22절에 해당하는 말씀이 다른 곳에서 나오고, 각각 흩어져 있는 말씀들인데, 마가복음에서는 이 말씀들이 하나씩 하나씩 다 연결되어서, 묶어서 한꺼번에 등장하고 있는데, 도대체 오늘 읽은 이 본문의 말씀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가 있다고 한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걸 확인하기가 좀 어려워요. 하지만 한 절씩 한 절씩 우리가 분석해 보면서, 어떤 의미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들려주시기를 원하시는지, 한번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21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1절 말씀이죠.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냐?”라고 예수님께서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등불을 가지고 온다면, 등불을 가지고 온다면, 그 등불을 말 아래 놓지 않는다. 말이 뭐죠? 말이 짐승 말이 아니고, 이런 됫박 같은 거잖아요. 됫박보다 큰 말, 바가지 같은 거. 그 속에 집어넣어서 보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등불을 가져오는 게 아니고, 평상 아래 집어넣는 것이 아니고, 등불은 왜 가지고 오는가? 가지고 와서 방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보기 위해서 등불을 가져오는 것이다. 지당하신 말씀을 예수님께서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22절 말씀에서는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22절은 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4장 22절의 말씀은 우리가 좀 이해하기가 좀 어려운데요. 이것은 좀 직역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춘 것이 없다고 하는 이 말씀은 의역을 하게 되면, “모든 것이 다 드러나게 돼 있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숨겨져 있던 것 감추어져 있던 것 결국에는 다 밝혀진다. 결국에는 다 진실이 드러나게 된다고 하는 말씀이 바로 4장 22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21절과 22절 말씀을 연결하면 어떤 의미의 말씀이 될까요? 등불을 가지고 와서 밝히면, 감추어졌던 거, 다 드러난다. 등불을 가지고 오면, 숨겨졌던 것 다 밝혀지게 되어 있고, 진실은 드러나게 되어 있다. 진리의 빛이 비치게 된다면, 지금까지 다 감추어져 있었고, 은밀하게 숨겨져 있었던 것, 모든 은폐되어 있던 것들도 결국에는 다 드러나게 되어 있다고 하는 말씀이 21절의 말씀과 22절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무슨 말씀이 연결되냐면 24절의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24절에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주제가 또 바뀌어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24절의 말씀은 무슨 이야기냐면, 그러니까 우리가 자꾸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다른 사람을 욕하고 다른 사람들이 잘못됐다고 그렇게 판단하고 헤아리는 일들을 우리가 하게 되면, 그러면 우리들도 우리가 헤아린 그 헤아림으로 우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고, 우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내가 비판을 받을 것이고, 내가 남을 공격하면 공격한 그대로 내가 공격을 받게 될 거라고 하는 말씀이 24절의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연관이 없는 말씀처럼, 이렇게 다 떨어져 있는 말씀처럼 보이는데, 그런데 우리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연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연관이 돼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자꾸만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는데요. 왜 우리가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말합니까? 그것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 한 심리를 우리가 꼽는다고 한다면, 우리가 남을 비판하는 그 순간에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냐면, 나는 그 비판에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고 하는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이 나쁜 놈” 하면서, “이 잘못된 사람들아”라고 말을 하고 정의를 부르짖게 되면, 어떤 착각이 생기냐면, 나는 그러한 잘못에서부터 면제되어 있는 사람, 나는 그런 잘못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는 인상을 다른 사람들에게 심겨주는 것이고, 그리고 스스로도 “나는 저런 인간들하고는 부류가 달라. 나는 저 나쁜 사람들하고는 차원이 달라. 그러니까 나는 의로운 사람이야.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하는 그런 착각을 하게 되기가 쉬운 것이죠.

하지만 24절에서 들려주시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냐면, 그런데 사실은 너도 똑같은 죄인이다. 사실은 너도 그런 똑같은 죄를 짓고 있는 것이고, 똑같은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정죄하면서 나 자신을 포장한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내 죄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내 잘못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숨기는 걸 어떤 방식으로 숨깁니까? 남을 비판하면서 정의를 부르짖으면서 내 허물을 숨기는 것이죠. 하지만 내가 그렇게 숨긴다고 해서 숨겨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께서 나의 더러운 모습들을 보시고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은 다 이 말씀들이 다 똑같은 하나의 주제로 연결되어 있는 말씀인 것이죠. 우리가 우리의 죄악을 숨기기도 하고, 감추기도 하는데, 그렇게 숨기고 감추는 방법으로서 가장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 무엇이냐면,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면서, 우리 자신의 허물들을 자꾸 숨기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게 숨긴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다 드러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숨겨도 다 드러나게 될 것이다. 깜깜한 방에 무엇인가 숨겨져 있으면 찾기가 어렵지만, 그러나 등불을 비치게 되면 빛이 그 안에 들어오게 되면,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다 그 등불 아래 보이게 되는 것처럼, 결국 하나님의 빛이 우리들에게 비치게 된다면, 결국 우리들에게 있었던 모든 허물들 내 안에 있던 모든 잘못들도 하나님 앞에 다 드러나게 될 것이고, 결국은 그 하나님 앞에 우리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내가 아무리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면서, 정의를 부르짖고 죄악을 지적하면서 그래서 나 자신을 포장한다고 하더라도, 불꽃같은 눈으로 바라보시는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악과 잘못들이 다 드러나게 되고, 우리가 헤아린 그 헤아림으로 우리가 헤아림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게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23절 말씀에 우리를 향해서 경고하시는 것이죠. 23절에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 이 말을 잘 듣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고요. 만일 그렇게 안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25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있는 자는 받을 것이오,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내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고, 나는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고 한다면, 그 있는 것마저도 다 탈탈 털려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있는 사람은 없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게 25절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맨 처음에는 21절부터 25절까지가 전혀 연관성이 없는 말씀들을 하나씩 하나씩 그냥 아무 의미 없이 묶어놓은 것처럼 보였던 이 말씀들이 쭉 이렇게 연결해 놓고 나니까, 전체를 한마디로 요약할 수가 겠습니다. 어떻게 요약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들이, 우리가 남을 비판하면서까지 내 자신의 허물들을 숨기려고 한다고 하더라도, 빛 되신 하나님의 그 빛이 우리들에게 비친다고 한다면, 불꽃같은 눈으로 바라보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게 된다면 우리의 모든 허물들이 다 드러나게 될 것이니, 우리는 조심해야 되고 회개해야 되고, 우리가 남을 비난하면서 자신을 정당화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며 회개하며 나가야 된다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들려주시는 말씀일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것 같은가요?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먼저 발견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그 하나님은 등불과 같은 하나님이시죠. 어두운 밤에 빛이 비치면 그동안 안 보이던 것들이 다 보이게 되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등불과 같아서 우리의 허물들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이신 것이죠.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느 것도 숨길 수가 없는 겁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 13절 말씀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것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도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시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어떻게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는 옷을 입어요. 그러니까 괜찮아 보여요. 옷을 입으니까, 멋있어 보여요. 멋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멋있어 보여요. 하지만 하나님 앞에는 어떻게 서게 될 것인가? 마치 투명 인간처럼, 우리의 옷이 다 벌거벗겨져서, 우리의 나체를 보듯이, 벌거벗은 것처럼,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가장 은밀한 부분까지라도 다 꿰뚫어 보신다고 하는 것이 성경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우리의 심령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러한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자꾸만 속이려고 들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라고 하는 부부가 있었는데요. 그 초대교회 시절에 정말 은혜가 넘치던 교회에서 갑자기 사망하게 되는 죽게 되는 그런 안타까운 결과를 맞이한 사람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였습니다. 이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교회의 모습을 보는데, 교회 내에서 성도들이 자신의 재물을 다 팔아서 교회에 헌금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교회에 헌금하는 그 모습을 볼 때 사람들이 너무나도 좋아하고 박수 쳐주고 정말 그 사람들을 인정해 주는 그 모습을 본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서 그렇게 헌물하는 그 모습을 볼 때, “야, 저 사람은 정말 믿음이 있는 분이구나. 저 사람은 정말 교회를 사랑하는 분이구나. 저분은 정말 주의 일에 헌신적인 분이구나.” 하는 그런 인정함을 받는, 그 모습을 보았을 때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라고 하는 부부도 자신들도 그러한 영예를 얻고 싶었어요.

다 바쳐야만 되는 것 아니었습니다. 누구나 다 신앙생활하기 위해서는 재물을 다 갖다 바쳐야만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자신의 것들을 다 팔아서 교회에 바친다고 광고했습니다. 다 가지고 왔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 몰래 그 재산 가운데 일부를 남겨둔 것이죠. 모를 줄 알았습니다. 아무도 몰랐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셨고 그것을 책망하신 것이죠.

구약시대 때 아간이라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리고성을 점령할 때에 여리고성에서 모든 물건들을 다 태워버리고 하나도 취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 진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아간이라고 하는 사람은 여리고성을 점령하는 가운데 정말 좋은 물건들을 보고 그것을 훔쳐버렸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 텐트 밑에 숨겨놓았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단 한 사람도 눈치채지 못하게 훔쳐버렸는데, 그런데 그것을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보셨고 그 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치셨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의 종은 나아만에게 가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아주 선한 일을 하는 것처럼 우리 선지 생도들을 위한 일을 하는 것처럼 근사한 말로, 그 나아만 장군을 멋있게 속였고 그래서 많은 재물들을 취해서 숨겨 놓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아무도 몰랐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 사람들을 다 속여도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고 하는 이 사실을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보신다고 하는 이 사실은 한편으로는 두려운 것이고 한편으로는 위로가 되는 것이죠. 두려운 것은 누구에게 두려움이 됩니까? 죄악을 저지르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되는 것이죠. 은밀한 가운데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다 꿰뚫어 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또한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아도, 내가 정말 주를 위해서 헌신해도 다른 사람들을 몰라준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알아보시기 때문입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고, 주님께서는 우리가 고통받고 있을 때 사람들은 몰라줘도, 주님께서는 아신다고 하는 그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결론은 무엇입니까? 비판하는 것을 중단하고 남을 욕하고 헤아리는 것을 중단하고, 이제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며 겸손하게 서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비판한다는 이유는 그것은 내가 정의롭게 보일 것이라고 하는 착각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비판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 우리는 그 비판에서부터 면제된다고 하는 그런 착각을 할 때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누군가 방귀를 뀌면 어떻게 해요? 제일 먼저 “누가 뀌었어?”라고 외치는 그 순간, 나는 그 혐의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착각을 하는 거죠. 사람들이 그렇게 비판하는 이유는 그렇게 비판하는 그 순간에 나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잘못된 인상을 심어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사회에서는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들을 보면 오히려 환호하고, 그 사람에 대한 아주 열정적인 추종자들이 생겨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해서 속지 않아요. 사람들은 그렇게 내가 비판하고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면 그 사람은 정말 정의로운 사람이고, 저 사람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속아 넘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비판하지 말라. 왜냐하면 우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우리가 비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1절에서부터 5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오.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우리가 비판을 하게 되면, 우리 스스로는 생각하기를 나는 그 비판에서부터 자유로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나는 죄가 없는 것이고, 허물이 없는 것이라고 착각을 하지만, 성경의 일관적인 가르침이 무엇이냐면, 우리가 비판하면 그 비판 그대로 우리가 비판을 받을 것이고, 우리가 남들을 헤아리고 판단하면 우리가 헤리고 판단했던 그 기준으로 우리가 헤아리고 판단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비판을 받게 되고 헤아림을 당하게 된다라고 하는 것은 누구한테 비판을 받게 된다는 말일까요? 우리는 생각하기를 사람들에게 그런 비판을 받게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표현 가운데 하나가 어떤 표현이냐면 신적 수동태라고 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divine passive라고 하는 그런 표현인데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발설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말을 할 때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생략하는 방식을 자꾸 고안해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심판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라고 표현하지 않고 어떻게 표현했냐면, “당신이 심판을 당할 것입니다.” 누구에 의해서? “하나님에 의해서”라고 하는 말을 생략해버린 거죠. 하지만 이 수동태로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심판을 받을 거라고 하는 말이에요. 너희가 소금의 맛을 잃게 되면, “너희가 밟히게 될 것이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 밟히게 된다고 하는 것은 누구한테 밟히게 된다는 말이에요? 우리 생각에 사람들에게 밟힐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 사람들에게 밟힌다는 얘기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밟히게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맛을 잃게 되면 하나님에 의해서 밟히게 된다는 이야기고, 오늘 이 말씀 가운데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고,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게 된다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에 의해서 비판을 받게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무엇인가요? 비판해라? 비판하지 말라? 비판하지 말라. 남을 판단하지 말라? 해라? 말라.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 가운데 어떤 문제가 있고 어떤 잘못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된다고 하는 말일까요? 그러면 입 다물고 있어야 된다는 말일까요? 입 닥치라고 하는 말일까요? 어떤 문제가 있고 잘못이 있어도 못 본 척하고, 분란 일으키지 않는 것이 은혜롭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일까요? 오늘 우리의 이 말씀만 읽으면 그런 의미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말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말씀도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항상 전체적으로 읽어야 되는데요. 전체적으로 읽지 아니하고 어느 한 부분만 읽게 되면 성경을 오해하게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의 허물들이 다 드러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시면 우리의 모든 단점들이 다 드러나게 될 것이고, 심지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헤아리면서 나 자신을 의롭게 포장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의 잘못들이 다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는 이 구절을 통해서 보면, 그러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지도 말고 잘못하는 것이 있어도 입 닥치고 있어야 되고,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그게 가장 성경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지만, 성경에 다른 말씀이 또 있어요.

어떤 말씀이냐면 갈라디아서 6장 1절의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어떻게 하라? “바로 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어떤 죄가 있다고 한다면, 어떤 잘못이 우리 가정 가운데 공동체 가운데 있다고 한다면, 잘못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면, 비판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어야 하는 것이고, 그리고 모른 척하고 분란 일으키지 않는 게 그게 가장 은혜로운 거라고 하는 그런 오해가 우리 교회 가운데 많이 퍼져 있는데요.

사실은 성경에서는 다른 이야기를 또 하고 있는 겁니다. 만일 우리 사회가 잘못된다고 하면, 만일 우리들의 공동체 가운데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어떤 잘못이 심각한 잘못이 있다고 한다면, 교회와 가정 가운데 어떤 사람의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한다면, 그냥 침묵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라고 하는 종교 개혁자는 중세 교회가 잘못된 길로 갈 때, 교회 전체가 교황을 비롯해서 추기경이나 모든 신부들이 잘못된 길로 갈 때, 그 잘못을 보면서도 비판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아무 말하지 않아야 되겠다. 헤아리지 말라고 했으니까,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야 하겠다고 그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95개 조를 붙이면서,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면서 종교 개혁의 기치를 높이 열었던 것이죠.

여기서 헷갈립니다. 그래서 왜냐하면 성경이 두 가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헷갈리는 것이죠. 그러면 어느 장단에 춤춰야 됩니까? 비판하지 말고 헤아리지 말라고 했으니까,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맞습니까? 바로 잡으라고 했으니까, 바로 잡는 게 맞습니까? 어떻게 하는 게 맞습니까? 어느 장단에 춤춰야 맞습니까? 여기서 고민해야 되는 거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고민해야 되는 것이죠. 어떻게 하면 비판하는 게 되고, 어떻게 하면 바로잡는 게 되는 것입니까? 무엇은 비판이고, 무엇은 바로 잡는 것입니까? 과연 어떤 죄의 문제, 악의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우리가 처리하는 것이 가장 성경적인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비판이 되고 어떻게 하면 바로잡는 것이 되는가 그 기준을 생각해 보면, 저는 사랑하는 마음이 기준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비판이 될 수도 있고, 바로잡는 것이 될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죠. 만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상대방이 잘못을 하고 있다는 것에 분노하며, 그래서 그 잘못을 비난하고 지적하고 욕하는데 우리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한다면, 그래서 그 사람을 끌어내리고 파괴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성경에서 금하신 비판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위반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래서 저 사람이 저렇게 잘못된 길로 가면 안 되는데, 그렇게 해서 망가져버리면 안 되는데, 그 사람을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바른 길로 돌아오게 만들 수 있을까? 그런 사랑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도와주려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가장 큰 기준이 있다고 한다면 나에게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가 가장 큰 기준이 될 거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고요. 더 나아가서 사랑하는 마음만 있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하는 마음을 어떻게 지혜롭게 표현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게 아니에요. 있어요. 우리 자녀들을 볼 때, 우리 교회에서 또 여러 상황 가운데서 정말 잘못된 그 문제를 가지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고쳐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그런데 그것을 표현할 때 지혜롭지 못하게 표현해서, 우리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망가뜨리는 결과가 나오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는 것이죠. 우리 자녀들을 보면서 우리 자녀들이 잘못된 길로 가면 안 되겠다고 하는 그런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들에게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할 때 잘못된 방식으로 표현하고, 그리고 분노하는 방식으로 표현을 해서 그래서 그 아이들을 제대로 된 길로 돌아오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발하고 오히려 더 잘못된 길로 더 가게 만들어버리는 역효과를 가져오게 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고 하는 것이죠. 우리 아이들을 누가 망칩니까? 사랑이 많은 우리 부모들이 망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들은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 되는가?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그 사랑의 마음을 지혜롭게 표현하는 그런 지혜가 있어야 되는 것이죠.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너무나도 사랑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망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 그리고 죄악 가운데 쓰러지면 안 된다고 하는 것 때문에 애통하는 마음으로 울부짖었던 것이죠. 따라서 예레미아 선지자는 눈물의 선지자라고 그랬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해야 되는데, 그 마음이 너무나도 애통한 한 마음 가운데 울부짖으면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것이죠. 왜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에 그래요.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 왕을 보면서 사울 왕이 잘못된 길로 갈 때, 그 사울 왕을 책망하기도 했는데, 그 사우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이 사울 왕이 잘못되어 가고 있는 그것이 너무나도 슬퍼서, 밤새도록 울부짖으며 밤새도록 하나님 앞에 매어 달리는 가운데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것이죠.

나단 선지자도 역시 다울 왕의 다윗 왕의 잘못을 이야기할 때, 그 마음 가운데 그 다윗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떻게 하면 바로 돌아오게 만들까를 하는 그런 마음으로 그렇게 말씀을 전했던 것이죠.

하지만 바리새인들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보면서 바리새인들은 경멸하기 시작한 것이죠. 교만한 태도로 무시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들의 마음 가운데는 사랑하려고 하는 마음은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저런 더러운 인간들하고는 같이 상존할 수 없다고 하는 그런 교만한 마음 가운데 비난하는 것이었던 것이죠. 더 나아가서 우리가 직접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뒤에서 수근수근거린다고 한다면 큰 죄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성경은 뒤에서 수근수근거리는 것도 죄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바리새인의 길이 아닌 정말 선지자의 길을 갈 수가 있을까요? 첫째는 사랑의 마음이고, 둘째는 지혜로운 표현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우리가 더 하나 더 생각해본다고 한다면 겸손한 마음일 것입니다. 너는 죄인이지만 나는 의롭고 나는 옳다가 아니라 나도 똑같은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곧 돌아보면서 나도 저런 죄에 빠질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러한 그 자신이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 1절 다시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요.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내버려 두라고 아니고, “바로잡고” 더 나아가서 어떻게 하라고요?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내가 바리새인처럼 의로운 자라고 하는 그런 교만한 마음으로 경멸하고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똑같이 넘어질 수가 있겠구나. 나도 똑같이 망가질 수가 있겠구나. 나도 이런 똑같은 죄에 빠질 수 있겠다고 하는 그런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서 그 안타까운 심령을 가지고 바로 잠들려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부모들이 자녀의 신앙 교육에 있어서 실패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바리새인들처럼 접근했기 때문이고, 그리고 우리가 지혜롭지 못했고 교만했기 때문인데요. 나도 똑같이 죄를 지을 수 있는 그런 연약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다가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우리를 향해서 사랑을 베풀어주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가 죄로 인해서 망가지게 되었을 때, “저 더러운 놈” “저 악한 사람” 하면서 심판해 버리고 끝내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는 친히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들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 죄를 감싸주셨어요. 허물로 망가진 우리들을 안으셔서 그 모든 죄를 주님께서 뒤집어쓰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죠. 우리를 비난해버리고 끝내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바로잡기 위하여 사랑의 피를 흘려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저와 여러분들이 받은 줄로 믿습니다.

그 사랑을 우리가 받았다고 한다면 오늘도 우리가 겸손하게 주님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자신의 더러운 모습도 아무리 꽁꽁 감추어도 주님 앞에 드러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겸손하게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가운데 주께서 주시는 은혜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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