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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강좌 5 –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1. 세월호 사건과 하나님의 뜻

지난번 강의를 마치면서 질문이 하나 들어왔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냐면, “세월호 사건이라고 하는 안타까운 사건이 우리나라에 벌어졌었는데, 과연 그 세월호 사건이 벌어진 것이 하나님의 뜻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느냐?”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죠. 대답하기가 어려운 질문인데, 지난 시간에 제가 강의를 한 시간 열변을 토하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대답을 하느라, 시원하게 대답을 잘 못해드린 것 같아서, 오늘 다시 한번 그 문제를 또 짚어서 정리하고 넘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이 질문은 우리 주기도문 강좌와 관련이 없는 질문이 아니고 사실은 아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그 기도와 관련이 있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주기도문의 강좌를 듣는다고 한다면, 반드시 나와야 할 질문 중에 하나인 것이죠.

그런데 이 질문은 대답하는 것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굉장히 어려운데, 지금까지 수천 년의 역사 동안에 이와 비슷한 질문에 질문들이 많이 던져졌고, 그 질문에 대해서 대답을 여러 각도로 해 봤는데, 대답을 하면 할수록 자꾸만 더 꼬이는, 대답하면 “아, 그렇군요.”라고 속시원하게 마음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대답하면 또 다른 문제가 제기가 되고, 이렇게 대답하면 이런 질문이 생기고 해서, 대답하면 대답할수록 오히려 더 미궁에 빠질 수밖에 없는, 아주 난해한 질문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이 질문이 많이 던져지고 있고, 불신자들도 많이 우리를 향해서 질문을 던져지게 될 텐데, 우리가 쉽게 함부로 대답을 하게 되면, 그러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분노하게 만들고, 오히려 더 기독교에 적대적이게 만드는, 그래서 대답해봤자 별 이득이 없는 그런 대답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대답에 대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잘 해 나갈 필요가 있을 것인데요. 이 세월호 사건이 이 땅에서 이렇게 벌어졌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관련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허용하셔서,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인가?”라고 하는 질문을 우리가 먼저 던져본다고 하면, 우선 제일 먼저 대답해야 할 대답이 있다고 한다면, 이 대답은 순서가 있어요. 순서가. 순서를, 앞뒤를, 이렇게 똑같은 얘기이긴 하지만, 먼저 대답할 것을 나중에 대답하고, 나중에 대답할 것을 먼저 대답해버리면, 굉장히 곤란해지는 그런 대답이 되겠는데요.

그래서 제일 먼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할 때는 무엇부터 대답을 해야 되냐면, 이런 세월호 사건 같은 것이 일어난 게, 세월호 사건만이 아니죠. 우리 가운데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일어납니다. 그런 일들이 일어날 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냐라고 묻는다고 하면, 제일 먼저 대답할 대답이 있다면, 그건 “이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라고 대답해야 될 필요가 있어요. “이건 하나님의 뜻하고는 상관이 없다.”라고 대답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사건이 왜 일어나고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인 겁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져야 되는데,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돌아가야 되는데,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는 정반대의 일들을 우리가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배치되는 일들을 하는 가운데, 이런 악하고 나쁜 일들이 일어나는 단적인 예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선하시고 좋으신 뜻은 그야말로 우리가 잘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죠.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시고, 우리가 모든 일들이 참 좋은 일들이 일어나기를 원하시는 게, 그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마치 우리 부모님들이 자녀들에 대한 가지고 있는 뜻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 자녀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 그게 부모님의 마음인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정말 좋은 일들이 정말 행복한 일들이 일어나기를 원하시는 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지, 이렇게 악하고 나쁘고, 그리고 절망적인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먼저 대답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기는 한데, 왜 하나님의 통치 하시는 그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 왜 일어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사탄의 뜻이 이 세상에서 활개를 치고 있고, 이 사탄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그 결과로 이런 악한 일들이 일어난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죠.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라고 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정말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인데요.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의 주도권을, 이 세상에 대한 통치권이 하나님에게 있었는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통치권을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그 통치권이 사탄에게 넘어간 셈이 되어 버렸고, 결국 사람들은 이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 가운데서 탐욕을 추구하면서 사는 가운데, 결국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사탄의 지배는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사탄의 뜻대로 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될 거라고 하는 그런 유혹이 있었지만, 그런 약속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준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를 아주 비참한 결과로 쳐 넣게 된 것이죠. 세월호 사건이라고 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통치에 적극적으로 순종한 것이 아니라 사탄의 통치를 따르게 된 것이죠. 사탄의 통치에 복종한 것이죠. 그래서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돈이라고 하는 우상을 섬기면서, 안전을 무시하면서까지 배를 불법적으로 개조하게 된 것이고, 생명을 경시하면서 무리하게 운행을 한 것이고, 결국 또 실제 사고가 일어났을 때는 선원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보다는 사탄의 유혹에 따라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승객들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하는 일을 외면하면서, 그저 자기 자신을 먼저 살리는 데 빨랐던 인간의 죄악의 결과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국가를 책임진 사람들은 자신들의 책무를 외면했고, 타태하게 행했을 뿐만 아니라, 그저 자신들이 그러한 책임에서부터 면피하기 위해, 그저 권력자들에게 아부하는 일을 함으로 말미암아, 더 사고를 키운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고요. 언론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돈만 쫓아가는 언론이 되어 버려서, 사실 보도에 충실하고 정말 정의를 위해서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엉터리 추측 기사나 그리고 베껴 쓰기 기사 등을 통해서 제대로 된 보도를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정치인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서 정말 진지하게 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른 당과 경쟁해서 자당의 이익만을 위해서 추구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서 정권을 취득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 버린, 그래서 이용만 해버리는 그런 결과가 세월호 사건에 일어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결국 총체적으로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보다는, 사탄의 뜻에 순종하면서 사탄의 지배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이런 정말 끔찍한 사건이 우리 가운데 일어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우리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죠.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자리를 잡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느껴질 수 있게끔 그렇게 순종할 수 있게 하는 그런 결단도 필요한 것이고요. 그렇게 순종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이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탐욕 때문에 또 여러 가지 문제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하나의 뜻에 순종하기보다는, 늘 넘어지고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보다는 사탄의 뜻에 순종하는 가운데, 우리 사회에 이런 악하고 슬픈 이런 일들이 자꾸만 일어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면 일단은 한편으로는 대답이 됩니다. 어떤 면에서 대답이 되죠? 이러한 세월호 사건과 같은 이런 끔찍한 사건들 왜 하나님께서 그냥 이렇게 일어나도록 허락했는가라고 하는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되기는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면 대답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대답하면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해 버리는 것이죠.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 되나요? 무능한 하나님이 돼버리는 거예요. 사탄이 판치는 데, 손도 쓰지 못하는, 그런 무능한 하나님이 되어 버리는 그런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는 대답인 것이죠.

그래서 제가 첫 번째 내린 그 대답이 한편으로는 대답이 되면서도 또 한편로는 대답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럼 하나님이 그렇게 무능한 하나님이냐? 사탄이 그렇게 이 세상을 장악하고, 움직이고 있는데 “하나님은 도대체 뭐 한 거냐?”라고 하는 그 질문에 대해서 정확한 대답이 되지 못하는 것이죠. 그래서 또 다른 대답이 또 필요하게 되는 겁니다. 무슨 대답이 필요하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이 속수무책으로 당해서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이러한 악들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그런 뉘앙스가 아닌, 일어나는 것을 그냥 허용해 주는, 그런 섭리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대답을 해야만 하는 그런 또 다른 대답이 필요한 것이죠.

이것은 마치 성경의 욥기에서 욥의 고난이 그냥 아무런 통제 없이 무한대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제 속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설명이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탄이 욥을 시험하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boundary를 정하시는 것이죠. 욥을 시험하기는 하지만, 욥의 몸은 건드리지 마라. 자식을 건드릴 수 있고, 재산을 건드릴 수 있지만, 이번에 몸은 건드리지 마라 했다가, 나중에는 몸은 건드리지만, 생명은 건드리지 마라. 어느 정도 하나님의 boundary(경계) 안에서 사탄이 활동하게 되는 그런 설명이 욥기에 있게 되겠는데요.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탄의 그 역사로 인해서 악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데, 그런데 그 사탄의 움직임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필적할 수 있는, 그런 대등한 하나님과 대등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사탄이라고 하는 게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 있다고 하는 것이 성경에서 대답하고 있는 또 하나의 대답이 되는 것이죠.

이렇게 얘기하면 어떤 문제가 또 발생합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이런 악과 고통에 대한 최종 결재권자냐? 그래서 “하나님에게 최종 책임이 있느냐?”라고 하는 그런 질문이 또 나오는 거예요. 이렇게 대답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일 수는 있지만, 선하신 하나님이 안 된다고 하는 그런 문제가 발생해 버리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과 관련이 없다고 해도 문제고, 하나님과 관련이 있다고 해도 문제가 되는, 어떻게 대답해도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질문이 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성경에서는 이 두 가지를 다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현실이 다 이야기해야만 맞아요.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이것을, 악을 원하지 아니하신다고 하는 것을 성경에서는 이야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악이 일어나고 고통이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에게서부터 벗어난, 하나님의 boundary를 벗어난 상태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주권 하에서 일어나는 것이다라고 설명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하나님의 선하신 뜻 이런 것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겠는데, 결국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주권 하에 놓여져 있다라고 대답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은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다고 하는 그런 결론으로 갈 수도 있는데, 그런 위험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야기를 해 주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왜 그런 얘기를 하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승리하실 것이다. 결국에는 악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최후의 승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고, 이 세상에서 악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대로 뜻대로 결국에는 움직일 거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렇게 이 악이 일어나는 거, 고통이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 하에 여전히 있다. 주권적인 섭리 가운데 있다라고 대답을 하게 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아무리 이 세상에서 악한 일들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궁극적으로는 선한 목적을 위해서 사용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요셉과 같은 사람은 팔려가기도 했고, 노예로 살았고 감옥으로 끌려가게 되었지만, 그 모든 것들이 다 악한 모습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잖아요? 형제들의 나쁜 마음, 그리고 보디발의 아내의 나쁜 마음, 이런 것들이 결국 요셉을 그쪽으로 몰아넣게 됐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악마저도 결국 선한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해내는 그런 걸로 사용해 주신 것이고, 그런 것을 말하기 위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악이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일어난다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겁니다.

이 가지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인데, 우리의 부족한 머리로서는 그 하나님의 오묘하신 그 섭리와 계획과 뜻에 대해서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고, 그저 우리가 그 일부분만을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중에 우리가 천국에 가면 그때 가면 이제는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지만, 여전히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그 정도까지만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해가 됩니까? 더 이해가 안 되시나요? 예 고맙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무엇인가 우리의 기도는 어처구니 없는 이런 일들이 우리 땅에서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우리의 기도와는 달리 정말 절망적인 일들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그 절망적인 일들이 이 사탄의 영향력 속에서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주권적인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이것마저도 선하게 사용하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신뢰하면서, 우리가 인내하며 믿고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과연 그런 끔찍한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선한 목적으로 사용하실지는 잘 몰라요. 근데 지금까지 적어도 제가 경험한 바로는, 적어도 제 인생에 있어서는 제게 있었던 모든 나쁜 일들 여러 가지 슬픈 일들 고통스러운 일들이 사실은 그 모든 것들이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그것으로 주님께서 사용하셨다고 하는 것을 고백할 수가 있겠는데,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으로 귀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이해하시고 기대하시고 기도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질문 이해됐습니까?

2.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표현의 차이

그러면 오늘 우리가 다룰 기도의 제목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마태복음의 주기도문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에 이 제4청원 “오늘날 우리에게 인용할 양식을 주소서.”라고 하는 기도 제목이 들어있는데요. 그런데 가만히 원문을 살펴보면 마태복음의 표현과 누가복음의 표현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한번 원문을 한번 보죠. 원문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헬라어 원문 한번 읽어보실래요? “톤 아르톤 헤몬 톤 에피우시온 도스 헤민 세메론.”입니다. 빨간색으로 되어 있는 것은 누가복음이고, 파란색으로 되어 있는 것은 마태복음의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매일의 빵을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되어 있는데요. 마태복음에서는 “도스” 달라. “도스”라고 하는 말로 표현이 돼 있고, 누가복음에서는 “디두”라고 하는 말로 표현이 돼 있어요. “도스”하고 “디두”하고 다 똑같이 “달라”고 하는 말인데,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도스”하고 “디두”하고 어떤 차이가 있냐면, 시제의 차이가 있습니다. “도스”는 소위 “부정 과거형”으로 되어 있고요. “디두”라고 하는 것은 “현재형 명령형”입니다. “도스”는 과거 명령형이고 “디두”는 현재 명령형입니다. 그런데 이 명령형에는 시제의 의미가 없어요. 시제가 있기는, 시제로 표현을 하기는 하지만, 시제를 나타내는 시제(tense)가 아니에요. 뭐를 나타내는 시제냐? 그 동작의 유형(aspect)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도스”라고 하는 명령과 “디두”라고 하는 명령이 과거와 현재형으로 돼 있는데, 과거에 달라. 현재 달라가 아니고, 주는 행동의 양식, 그 유형이 약간 뉘앙스 차이가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럼 어떤 차이가 있느냐? 과거로 쓰이면 어떤 의미고, 현재로 쓰이면 어떤 의미냐? 문법학자들이 그것을 연구를 많이 했고, 저도 고든 코넬(Gordon-Conwell)에 있으면서 과거 명령형이 가지는 aspect, 그 특성에 대해서 연구를 좀 해봤는데, 근데 그건 언어 학자들이 그렇게 세밀하게 구분하는 것이지, 사실 우리들에게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시하셔도 됩니다. 마치 무엇과 같으냐면, 영어에서 Thank you so much하고 Thanks a lot하고 의미상의 차이가 뭐가 있어요? Thank you so much하고 Thanks a lot하고 의미상의 차이가 뭐가 있을까요? 채수정 장로님, 혹시 그 둘 사이에 무슨 의미상의 차이가 있나요? 없어요. 언어 학자들은 여기에 무슨 감사의 의미가 어느 정도, a lot으로 말하면 어떤 차이가 있고, so much로 하면, 어떤 차이가 있다라고 문법학자들 언어 학자들은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 일반인들은 그냥 쓰는 거예요. 그냥 써요. a lot이나 so much나,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예요. 의미상의 차이가 있느냐면,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나에게, 우리에게 주소서. “도스 헤민” “디두 헤민” 하나, “도스 헤민” 하나 “디두 헤민” 하나 그 의미가 크게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같은 의미라고 보셔도 무방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 차이가 있는데, 무슨 차이가 있냐면, 마태복음에서는 “세메론”해서 “오늘 주세요”가 되어 있는 반면에, 누가복음에서는 “토 카뜨 헤메론”이라고 해서 “매일 주세요.”라고 하는 그런 의미로 돼 있습니다. 여기는 좀 의미가 차이가 있죠? 예. 오늘 달라고 하는 거하고, 매일 달라고 하는 거하고 의미상의 차이가 있기는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실제적으로 기도의 내용을 따진다고 하면 별 차이가 없어요. 그냥 주님 오늘 주세요. 매일 주세요. 그게 다릅니까? “오늘 주세요.” 한 사람은 “내일 안 줘도 돼요.”하고 기도한 건가요? 아니죠. 오늘 주세요라고 기도한 사람도 내일 또 또 이렇게 기도하는 거니까, 매일 달라는 얘기고, 매일 달라고 한 사람도 매일 달라고 하는 것이고, 표현상의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그러나 마태복음의 기도문이나 누가 복음의 기도문이나 큰 의미상의 차이는 없는 것으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해가 되십니까?

3. “에피우시온”의 뜻

그런데 문제는 뭐가 문제가 있냐면, “에피우시온”이라고 하는 이 단어의 문제가 있습니다. 요 “에피우시온” “에피우시온”이라고 하는 그것은 어떤 뜻일까요? 사전을, 헬라어 단어의 뜻을 모르면 뭘 찾아보면 돼요? 사전을 찾아보면 되잖아요? 근데 그렇게 사전을 찾아서 뜻을 알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한번 그 그림 한번 보여주세요. “에피우시온”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얼마나 자주 사용되었느냐면, 주기도문에서만 사용된 겁니다. 그러니까 신약 성경에 “에피우시온”이라고 하는 단어는 주기도문 외에서는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는 단어예요. 그렇게 된다고 한다면 이 단어의 뜻을 우리가 우리는 생각하기를, 단어의 뜻 그러면 “사전 보면 되지.”라고 하는 게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이잖아요? 그런데 사전은 누가 만들어요? 사전은 하늘에서 “너희는 이 단어를 해석하려면 무조건 이 단어의 뜻으로 해석해야 해.” 하고 하늘에서 사전이 뚝 떨어져서, 절대로 변할 수 없는 사전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것인가요? 사전은 누가 만들었어요? 사람이 만든 거게요. 사람이 어떻게 만들었어요? 단어의 용례들을 연구해가지고, 이 단어가 여기서는 이렇게 사용됐구나. 저기서는 이렇게 사용됐구나. 단어의 뜻의 용례들을 자꾸 자꾸 연구해가지고, 그 연구를 바탕으로 해서 사전을 만드는 겁니다.

우리나라 국어 사전은 우리가 신뢰할 수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나라 말을 많은 사람들이 다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 말들을 다 연구하면서 아 이 단어는 무슨 뜻이다라고 하는 것들이 서로 합의된 그런 사전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게끔 정립된 것이 우리나라 말 국어 사전이고, 영어 사전이고 그런 겁니다.

헬라어 사전하고 히브리어 사전은 뭐냐면, 이미 거의 그 죽은 언어에요. 그러니까 지금 헬라어도 마찬가지고 히브리어도 마찬가지고 아람어도 마찬가지고,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이 히브리어를 쓰고 있는데, 그 히브리어가 성경 히브리어랑 같느냐면, 같지 않아요. 우리가 훈민정음에 있는 그 한글 읽으면 읽을 수 있어요? 못 읽잖아요.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경에 있는 히브리어 읽으라고 그러면 잘 몰라요. 헬라어도 마찬가지예요. 헬라어도 지금 그리스 사람들이 헬라어로 대화를 하고 글씨를 쓰고 있지만, 성경 보여주면서 이 헬라 해석해보라고 그러면, 그 사람들은 그 헬라어 봐도 몰라요. 우리가 훈민정음 보면 모르듯이, 그러니까 그 당시 성경에 쓰여 있는 헬라어, 히브리어 이런 것들의 단어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알아야 되냐면, 그것들 용례들을 다 조사를 해가지고 이게 이런 뜻으로 사용됐겠구나라고 하는 걸, 딱 정리해가지고 이게 이런 뜻입니다라고 학자들이 연구해서 그 사전을 만드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전을 만들 때 “에피우시온”이라고 하는 단어는 학자들이 이 뜻입니다라고 딱 사전 연구를 해서 내놔야 되는데, 그렇게 연구해서 내놓을 용례가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어디에만 나와? 주기도문에만 딱 달랑 나오는 거예요. 주기도문에도 나오는데 주기도문에 나오는 그 단어가 문맥이 있게 나와요? 그냥 툭 튀어나왔어요? 툭 튀어나왔단 말이에요. 예를 들어서 너 참 무엇무엇하다. 그러면 그 사람이 “아 좋아라.” 그러면 이것은 무엇무엇하다라고 하는 표현이 아주 칭찬하는 표현이구나라고 하는 걸 알 수 있잖아요? 문맥에서 알 수 있잖아요? 단어 몰라도 분위기를 보면, 이게 좋은 뜻이구나 하는 걸 알잖아요?

“에피우시온”이라고 하는 단어도 문맥이 딱 어떤 그런 문맥 속에서 딱 나오면, 그 단어의 뜻을 딱 추리해 나갈 수 있는데, 갑자기 뜬금없이, 주기도문에서 툭 튀어나온 단어이기 때문에, 이 단어의 뜻을 알 방법이 없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이 추측을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추측한 게 뭐냐하면 “에피”라고 하는 것은 “위에”라고 하는 전치사고, “우시오스”라고 하는 것은 내가 존재하다라고 하는 존재라고 하는 말이니까, “생존에 꼭 필요한”이라고 하는 뜻이 아닐까라고 추측해 보는 거예요. 또는 “오늘을 위한” 양식이 아닐까라고 추측해보는 것이고, “내일을 위한” 혹은 “미래를 위한” 그런 의미로 추측을 해보고 있는 것인데, “매일매일의” 그런 의미로도 추측해 보고 하는 것인데, 이 단어의 의미는 확실하게 이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라, 그냥 추측에 불과하다라는 것만 아시면 좋겠어요.

아마도 생각하기에는 가장 가능성 있는 것은 매일 “매일매일의 빵을 주소서”로 해석하든지, 아니면 “우리에게 필요한” 빵으로 해서 가든지, 아니면 “오늘 먹을” 빵으로 해서 가든지, 아니 그런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가 있겠습니다.

4. 우리의 필요를 위한 기도

자. 더 나아가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에게 빵을 주세요. “양식을 주세요.”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빵이 무엇인가요? 빵, 양식, “아르톤”이라고 하는 것은 밀가루 반죽해서 만든 빵을 의미하겠죠? 빵을 주세요. 우리나라 (성경에서)는 (주로) 떡으로 번역이 돼 있습니다마는, “빵을 주세요.” 했는데, 이 빵이 뭔가요? 빵, 빵은 양식인데, 이것은 뭐냐 하면, 제유법적인 표현입니다. 성경에 보면 제유법적인 표현이 굉장히 많이 나와요. 제유법적 표현이 뭐죠? 일부를 사용해서 전체를 나타내는 표현 방법이에요.

예를 들어서 요람에서 무덤까지라고 하는 것은 요람이라고 하는 일부를 사용해서 무덤이라고 하는 일부를 사용해서 탄생과 죽음을 의미하듯이, 펜이라고 하는 그 일부를 통해서 문학이나 언론을 의미하고, 칼이라고 하는 일부를 통해서 무력이나 전쟁을 의미하듯이, 제유법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특별한 것을 사용해서 전체를 나타내는 의미이죠. 그러니까 “하나님 빵 주세요”라고 기도하라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은 빵만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한 건가요? 다른 것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가 있나요? 하나님 밥 주세요. 할 수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예수님께서 빵 달라고 기도하라고 그랬는데, “왜 밥을 달라고 기도해?”라고 하면 돼요? 안 돼요? 안 돼요. 왜 빵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나타내는 재유법적인 표현이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주님 우리에게 빵을 주세요라고 하는 얘기는 빵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건강 주세요. 하나님 물질도 주세요. “하나님 이런 저런 것 주세요.”라고 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포괄하는 제휴법적인 표현이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우리가 군인들처럼 기도하면 안 돼요. 군인들은 어떻게 반응하죠? “오늘 점심시간인데 식판 갖고 집합” 하면 뭘 갖고 집합해요? 식판만 딱 들고 갔어요. 숟가락은 안 가지고 와요. 젓가락은 저기 숟가락은 안 갖고 왔어요. 점심 먹으러 가는데, 왜 식판만 갖고 왔냐고 숟가락도 갖고 와야지? 식판 갖고 오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그런단 말이에요. 20명 중에 두 명은 있어요. “식판 갖고 집합”했을 때, 식판은 무슨 의미로 사용됐어요? 제유법적 의미로 사용됐단 말이에요. 점심을 먹을 수 있게 위한 모든 음식 담을 수 있는 식사를 위한 도구들을 다 의미하는 의미로 식판 갖고 집합하라고 제유법적으로 명령한 것을 제유법적으로 알아들어야죠.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에게 빵을 주세요라고 예수님께서 가르쳤으면 빵만 위해서 기도하는 게 맞아요? 아니요. 빵뿐만이 아니라 지혜와 건강과 이 모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기도해야 되는 것이죠. 다행스러운 것은 하나님은 군인이 아니라는 게 다행이죠.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다 알고 이해하신다는 것이죠. 따라서 오늘 이 제4청원은 우리의 필요를 위한 기도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부족한 게 너무나도 많아요. 특별히 영적인 전투 하나님 나라의 군사로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 필요한 것이 많고, 보급품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필요를 위해서 기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5. 우리의 필요가 어떻게 채워지는가?

그런데 그러한 필요들은 어떻게 채워집니까? 우리에게 필요가 있을 때, 그 필요들은 어떻게 채워지죠?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지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채워질 수 없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 하나님께 달라고 기도해야 되는 것이 마찬가지죠. 당연한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기도만 하면 되는 건가요? 필요한 것을 위해 기도만 하면 되는 건가요? 아니죠. 동시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돼요? 수고해야 돼요.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면 그렇게 기도만 하고 있으면 되나요? 안 되나요? 안 돼요.

물론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내가 수고하지 않아도 주실 때가 있어요. 하나님 앞에 “하나님, 이게 필요합니다.”라고 기도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하는 곳에서, 전혀 내가 수고하지도 않았는데, 어떤 도움의 손길을 통해서 까마귀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양식을 주는 그러한 기적적인 체험들을 할 때가 있어요. 그러한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도움을 주신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경우도 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무엇인가 필요할 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하나님 빵 주세요.”라고 기도만 하고 있는 것은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옳지 않아요. 옳지 않은데 어떻게 옳지 않아요?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나쁜 짓이에요.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양식을 달라고 하고 하나님께서 양식을 주실 거라고 믿기 때문에, 내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은 옳지 않은데,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사탄이 시험하기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 그러면 성경이 약속하기를 천사를 동원해서, 다치지 않게 해줄 거라고 했으니까 뛰어내리라고 했어요. 그렇게 해서 정말 성경에서 나를 발을 다치지 않게 해준다고 했으니까 뛰어내려도 됩니까? 안 돼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걸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고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대답해 주셨어요. 왜 시험하면 안 되는 건가요? 왜냐면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들에게 살 수 있는 길을 주셨기 때문에 그래요,

생명을 주시는 분이 누구예요? 하나님이시죠.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살리실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살려주세요 하면서 하나님이 살려줄 걸 믿고 곡기를 끊으면, 하나님께서 살려주시나요? 예? 아니요. 밥을 먹어야 돼요. 밥을 먹어야 살아요. 밥을 먹으면서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게 맞는 것이지, 밥을 안 먹으면서 곡기를 끊으면서, 하나님께서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뭐예요?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가다가 여러 가지 일들을 하다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실 것을 위해서 기도해주지 기도하지만, 일부러 물속에 뛰어들어가고, 일부러 불속에 뛰어들어가고, 일부러 밥도 안 먹고, 일부러 병원에도 안 가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일도 하지 않으면서 돈이 벌리기를 기도하고, 일도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기를 기도하고 하는 것은 바른 생각이 아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당연하겠죠.

그래서 아브라함의 종은 이삭의 아내를 찾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어디로 갔어요? 라반의 집으로 가서 찾았어요. 다윗은 하나님 이 전쟁에서 이기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러 골방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누구한테 갔어요? 골리앗과 싸우러 간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그냥 하나님께 양식을 달라고 기도만 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해야 돼요. 일해.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라고 하는 말이 성경에 있는데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말의 의미는 무엇이에요? 때때로 하나님께서 정말로 도와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실감하게 하기 위해서, 아무 일도 안 해야 되는 경우가 있기는 해요. 간혹 가다가. 하지만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이야기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두려워하고 벌벌 떨고 있지 말라고 하는 그런 의미죠.

6. 영적인 양식인가 육의 양식인가?

빵을 구하는 것은 우리가 천박하고 유치한 기도를 하는 게 아닙니다. 종종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교적인 관념들이 많아지고, 우리가 빵을 위해서 기도하고 우리에게 물질을 위해서 기도하고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그건 아주 저급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크리스찬들이 종종 있어요. 그렇지 않아요. 우리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가고 성공하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하는 것들이 그게 나쁜 게 아니고 저급한 게 아니에요.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에 빵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것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반드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해요. 그런데 이것이 언제 저급해지는가? 정욕으로 쓰려고 할 때 저급해지는 것이죠. 야고보서 4장 1절에서부터 3절의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 1절에서부터 3절까지의 말씀이죠.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 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과도한 욕구 탐욕 때문에 구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우리가 주의 일을 하면서 필요한 것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를 당연히 해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7. 우리를 위한 빵

그런데 여기서 제 4청원에서 볼 수 있는 건 뭐냐면, 그런데 나에게 달라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주소서?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얘기했기 때문에, 우리 모두를 위한 기도인 것이죠. 나 혼자만 성공하는 기도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잘 살기 위한 그런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이고요. 그 다음에 매일 달라 혹은 날마다 달라라고 기도하고 있는데,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이러한 기도는 매일매일 주님 앞에 겸손하게 겸손의 기도죠. 우리가 무슨 일을 하면서도 내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간구하면서 기도하는 제목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8.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할까?

[질문]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게 옳은 것일까요? 예를 들어 배우자를 위한 기도를 하면서, 키가 몇 센티미터 등등 이렇게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게 좋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은 아닐까요?

[답] 하나님을 제한한다? 일단 기도는 정답을 말한다기보다는, 내 마음의 소원을 말하는 것이 옳다고 봐요.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 자꾸 주저주저하기보다는 솔직한 우리들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기왕이면 좋은 대학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예를 들어서 어느 대학 가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도 있겠고, 배우자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한다면, 우리 김현창 장로님처럼 큰 그런 배우자를 달라고 그렇게 기도할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 채수정 장로님처럼 머리가 비상한 그런 사람을 좀 달라고 기도할 수도 있겠고,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나쁜 것이라기보다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은 들어요.

그러나 기도하면서 늘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기를, 우리가 오픈을 해놔야 되는데, 왜냐하면 우리들의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생각이 훨씬 더 옳고, 내가 기도하는 것보다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좋은 것을 주시기 때문인데요. 때로는 우리들에게 나빠 보이는 것이 사실은 내게 더 유익할 수 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기도는 할 수 있고, 그것을 굳이 제한할 필요는 없겠으나,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기도를 어떤 식으로 응답해 주실지에 대해서는 마음을 열어놓을 필요는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 특별히 이제 예를 들어서 결혼에 관해서 기도한다고 한다면, 이렇게 구체적으로 내가 원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다 이렇게 지정해 놓으면, 결혼 못 하는 거죠. 결혼 못 해요. 이미 그런 대상자는 다 결혼했어요. 그리고 그런 배우자가 나에게 유익하지도 않아요. 그리고 결혼 생활의 성공은 그런 세속적인 조건에 따라서 성공하는 게 아니고, 불신자들은 결혼의 성공을 어디서 보냐면, 나랑 딱 맞는 궁합 적절한 완벽한 사람을 만나야, 그래야 결혼에 성공을 한다고 생각하는 게 이 세상 사람들의 관점이죠.

하지만 성경적인 관점은 너무나도 연약하고 죄인인 한 남자와 너무나도 미성숙하고 역시 죄인인 한 여자가 만나서 서로의 약점들을 부딪혀가면서 서로 보완해주고, 또 싸우면서 또 다듬으면서 두 사람이 같이 살아가는 가운데, 같이 영적으로 성숙해져 나가서 서로의 약점들을 보완해서 같이 성숙해져 나가 잘 맞추어 가서 성숙해져 나가는 것이 결혼의 목적이라고 한다면, 사실은 이제 그런 구체적인 기도보다는 하나님께서 누구를 나의 짝으로 맺어주시든지 간에, 내가 정말 진실하게 사랑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한 기도가 되기는 하겠죠.

그래서 아무튼 뭐 우리가 자신이 포기하지 못하는 게 있으면 일단 기도는 하시지만, 그러나 좀 더 성숙한 기도를 한다고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모든 것들을 다 이겨낼 수 있는 힘과, 하나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능력과 그런 걸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훨씬 더 낫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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