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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해석학 강좌 제4강 – 문맥을 고려하라. 구속의 관점을 고려하라. 문자적 의미에 충실하라.

7. 고정된 의미에 얽매이지 말고, 문맥을 고려하라

오늘은 “고정된 의미에 얽매이지 말고, 문맥을 고려하라”라고 하는 제목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미 언급을 해드렸습니다마는 언어라고 하는 것은 죽어있는 게 아닙니다. 언어는 죽어 있는 게 아니고, 자꾸만 변하는 것이고, 발전하는 것이고, 상황에 따라 많이 달라집니다. 요즘 우리 젊은 아이들이 하는 말들을 좀 이해하실 수 있습니까? 도무지 외계 언어를 쓰는 것처럼 못 알아들어요. 왜냐하면 새로운 단어들이 만들어지고 있고, 그다음에 우리가 기존에 쓰는 단어들도 다른 의미를 입혀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기성세대들이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도대체 무슨 얘기인지, 분명히 한국말은 한국말이고, 외국어가 아닌데,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발생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언어는 죽어 있는 언어가 아닙니다. 언어는 늘 변하고 발전하고 하게 되어 있는 것이 언어인 것이죠. 따라서 어떤 단어나 어떤 표현이나 이런 것들이 고정돼 있지 않습니다. 고정돼 있지 않습니다. 항상 그 의미는 변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단어의 의미 문장의 의미를 잘 깨닫기 위해서는 그 돌아가는 상황을 잘 살펴봐야 하는 것이죠.

문맥을 잘 살펴봐야, 그래야 그 의미를 우리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인데요. 우리 성도들이 많이 혼란스러워하는 게 바로 그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어의 의미가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을 해요. 어떤 단어의 의미를 알고 있으면, 그게 그 단어의 의미가 전부인 줄 알아요. 그래서 그 단어의 의미를, 성경에서 그 단어가 나오면, 다 그런 의미인 줄 알고 무조건 대입해서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에 해석이 꼬이는 겁니다. 엉터리 해석이 나오는 것이고, 말도 안 되는 그런 해석들이 나오는 겁니다. 그 단어가 사용되는 곳곳마다 문맥에 따라서 의미가 천차만별 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육체라고 하는 단어도 한번 살펴봤으면 좋겠습니다. 육체라고 하는 단어는 헬라어로 “사륵스”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24장과 사도행전 2장과 고린도전서 15장과 로마서 7장에 똑같이 이 사륵스, 육체라고 하는 단어가 다 사용되어 있습니다마는, 번역을 할 때 육체라고만 번역하지 않았어요. 뭐라고 번역을 했냐면,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사륵스와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거든요. 여기서 사륵스가, 그리고 뼈가 없다고 말씀하실 때, 사륵스의 의미는 뭐냐 하면, 살이 없다는 말이에요. 사륵스의 뜻을 살로 번역할 수가 있는 것이죠.

하지만 사도행전 2장 26절에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사륵스도 희망에 거하리니”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사륵스는 어떤 의미일까요? 육체가 희망에 거한다. 육체가 희망에 거한다고 하는 말은, 여기서는 인간, 사람, 육체를 통해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겁니다. 우리가 희망에 거하게 된다. 우리 사람들이 희망에 거하게 된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죠.

고린도전서 15장의 말씀은 그냥 일반적인 의미의 육체입니다.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요.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짐승의 육체요. 새의 육체요. 물고기의 육체라.” 여기서 육체는 육체라고 하는 의미로 사용이 된 것이죠.

그런데 로마서 7장에서의 육체는 무엇인가?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체로는 죄의 범을 섬기노라”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육체는 우리의 육체를 의미하는 거겠습니까? 아니요. 여기서는 “죄의 본성을 가진 그런 존재”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똑같은 단어도, 이 단어가 사용된 문장에 따라서 그 의미가 각각 달라질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해드렸냐면 어린아이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어요. 어린아이라고 하는 말도 어떤 곳에서는 어린아이가 무엇을 나타내냐면, 겸손하고 자기를 낮추고 아버지 부모님을 의지하는, 그런 어린아이를 나타내기 위해서, 어린아이라고 하는 말이 쓰인 반면에, 어떤 구절에서 그 어린아이라고 하는 말은 성숙하지 못하고, 유치하고 아직 자라지 못한, 정말 덜 떨어진 그런 존재를 나타나기 위해서, 어린아이라고 하는 말을 쓸 수 있다고 말해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단어라고 해도, 문맥에 따라서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겁니다.

계명성이라고 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계명성의 뜻이 뭐예요? 한자로 계명성이 무슨 말이죠? 새벽별. 어떻게 하셨어요? 새벽에 일찍 드는 별을 가리켜서 샛별, 새벽별, 혹은 계명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영어로 “모닝 스타” 새벽에 뜨는 별이죠. 그런데 이 계명성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나타내느냐? 문맥에 따라 다른 겁니다. 예를 들어서 이사야서 14장 12절에서는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라고 하는 말씀이 있는데, 이사야서 14장에서 나타내는 계명성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이겠습니까? 사탄을 의미하는 거죠. 사탄이 계명성이라고, 계명성이라고 하는 것은 라틴어로 루시퍼예요. 루시퍼라고 하는 그 계명성이 떨어져, 정말 비참한 상태에 이르게 됐다. 사탄의 그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사야서 14장에서는 계명성, 새벽에 뜨는 별이라고 하는 표현을 쓴 겁니다.

하지만 계명성이라고 하는 말이 또 누구를 나타낼 수 있어요? 예수님을 나타낼 수도 있는 겁니다. 계시록 22장 16절 말씀에 보면,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신지라.” 예수님을 가리켜서 뭐라고 표현하냐면, 새벽 별이라, 계명성이다라고 표현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라틴어로 하면, 예수님을 뭐라고 부르는 거예요? 루시퍼다라고 부르는 거예요. 계시록에서는 루시퍼라고 하는 말이 새벽 별이라고 하는 말이고, 계명성이라고 하는 말이에요. 그런데 그 계명성이라고 하는 말이 이사야서에서는 사탄을 나타내기 위한 그런 표현으로 사용된 반면에, 요한 계시록에서 누구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됐어요? 예수님을 루시퍼라 계명성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루시퍼하면 무조건 사탄으로만 생각하시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는 거죠.

그런데 우리 크리스천들 중에 일부, 일부 무식하고,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며, 선무당 같은 사람들이 루시퍼라고 하는 말만 나오면, 경기를 하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천주교에 가면, 천주교에서 부르는 찬송가 가운데, 챈트를 하잖아요? 이렇게 하면서 천주교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운데, 천주교에서 사용하는 찬송가 중에 하나가 무슨 찬송가가 있냐면, “루시퍼를 찬양합니다”라고 하는 찬양이 있어요. 동영상 혹에 그게 나온 게 있는 걸 보실 거예요. 그러면서 천주교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미사를 드리면서, “루시퍼, 당신을 경배하며 찬양합니다”라고 하는 그 라틴어로 노래하는 영상이 있거든요. 그걸 보고 일부 몰지각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조금만 알고 선무당 같은 그런 사람들이 천주교에 대해서 비난하면서 하는 말이 “천주교는 루시퍼 사탄을 경비하는 종교다”라고 비난하는 영상을 만들어서 욕하는 영상을 올려놓은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자기가 무식하다고 하는 걸 드러내는 일밖에 안 되는 거예요. 성경에서 예수님을 루시퍼다라고 계시록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어리석은 반응을 보이면 안 되는 것이죠. 루시퍼 하면 무조건 사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면 안 되는 겁니다.

사자도, 사자도 누구를 나타내요? 마귀를 나타낸 거죠.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너희를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는데, 그 사자는 그러면 무조건 사탄을 나타냅니까? 마귀만을 나타냅니까? 하나님은 사자와 같은 하나님이시라고 또 다른 곳에서는 이야기하잖아요? 그래서 문맥을 제대로 살펴보지 아니하면, 잘못된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이죠.

마태복음 8장 22절에 보면 죽은 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쫓으라”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빨간색으로 되어 있는 죽은 자들, 죽은 자는 누구를 의미하는 걸까요? 파란색으로 쓰인 죽은 자는 누구를 의미하는 걸까요? 파란색으로 쓰인 죽은 자는 우리의 육신이 죽은 자를 가리키는 것이죠. 그렇죠? 죽어서 지금 장사 지내야 될 상황에 있는 그런 죽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파란색인데, 빨간색 죽은 자는 무슨 빨간색 누구를 가리키는 죽은 자입니까? 실제로 육신이 죽은 자를 가리키나요? 아니요. 멸망받을 사람들, 하나님의 구원을 받지 못할 사람들, 이 세상 사람들을 의미하는 거예요. 죽은 자로 하여금, 즉 하나님의 구원을 받지 못할 이 세상의 사람들로 하여금, 지금 죽은 그 사람을 장사하게 하라고 하는 말인 겁니다.

그러니까 같은 문장에서도, 똑같은 죽은 자라고 하는 표현이 나오는데, 앞에 있는 죽은 자의 의미와 뒤에 있는 죽은 자의 의미가 다른 것이죠. 또한 로마서 9장 6절에서도 이스라엘을 말하고 있는데, 앞에서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라고 말했을 때, 앞에 쓰여 있는 빨간색 이스라엘은 누구를 가리키는 거예요? 야곱,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거잖아요? 야곱, 조상 야곱에게서부터 태어난 사람들이 즉 이스라엘 지파 사람들이, 파란색 이스라엘은 누구를 가리키는 거예요? 이스라엘, 구원받을 이스라엘 구원받을 사람이라고 하는 의미에서의 이스라엘을 나타내는 것이죠.

그러니까 똑같은 단어가 쓰여 있다고 할지라도, 각각 다르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말도 마찬가지예요. 사랑, 애정 이런 표현이 있는데요. 애정이라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이죠? 애정, 애정이 무슨 뜻이에요? 문맥에 따라 달라요. 예를 들어서 저 남자와 저 여자가 애정 행각을 벌이고 있다 할 때, 애정은 뭐예요? 그거예요. 그런데 “너는 어떻게 일을 하면서 애정이 없냐?”라고 할 때 애정은 뭐예요? 열정의 애정이에요. 똑같은 애정이라고 하는 단어인데, 그 애정이라고 하는 단어가 어떤 문장에 쓰여 있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겁니다. 애정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가 결정되어 있는 게 아닌 거예요. 그 말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사랑한다고 하는 말이 더 좋은 겁니까? 좋아한다고 하는 말이 더 좋은 겁니까? 좋아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을 거라고 우리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좋아한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을 어떤 상황에서, 어떤 문맥에서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요. 예를 들어서 좋아한다는 말도, “난 너 좋아해” 그러면 그거 좋은 말이 아니에요? 좋은 말이에요. 그렇죠? “근데 너 좋아하는 것 가지고, 결혼할 수 없어. 사랑의 단계로 가야 해”라고 할 때에 좋아하다고 하는 말은 뭐예요? 사랑과는 좀 다른 차원에서 좋아함을 이야기하는 거, 그러니까 이 똑같은 단어도, 우리가 어떤 문맥에서 어떤 맥락에서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데, 마치 단어의 의미가 결정된 것인 양 생각하고서, 성경을 해석하게 되면, 아주 큰 오해를 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흔히 성경에서 많이 오해하고 있는 단어 중에 하나가 아가페 사랑과 필레오라고 하는 사랑의 차이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뭐고, 필레오의 사랑은 뭐예요? 네? 뭐가 더 좋아요? 아가페의 사랑이 더 좋다고 그러잖아요? 그렇죠? 필레오의 사랑은 그냥 사랑인 반면에, 아가페의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많이들 알고 계실 거예요. 그렇죠? 그렇게 많이 들었을 거예요. 그렇게 많이 설교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성경에서 정말 그러느냐? 아니에요. 그 문장이 어떻게 쓰이고 있느냐에 따라 다른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필레오 사랑으로 사랑하셨어요. 나빠요? 그러면 좀 뭔가 부족한 사랑을 하나님께서 하신 거예요? 아니에요. 필레오도 좋은 거예요. 하나님이 사랑하셨다잖아요? 하나님, 필레오, 우리를 사랑하사 아가페의 사랑만 좋은 게 아닌 거예요.

심지어 이 아가페라고 하는 말이 어떤 상황에서도 사용됐는가? 데마는 세상을 사랑해서 딴 길로 갔다고 할 때도 아가페가 사용이 돼요. 그러니까 그 의미가 그 문맥에 따라 달라지는 겁니다. 그런데 아가페와 사랑과 필레오의 사랑을 구분한 것은, 나중에 아주아주 아주 오랜 후에 성경이 쓰이고 난 다음에, 그리고 한참 지난, 예를 들어서, C.S. 루이스 같은 사람이 사랑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명을 하면서, 사랑을 이런 사랑 저런 사랑 이렇게 구분하면서 말할 때, 자기가 아가페의 사랑은 이런 사랑이다라고 하면서 설명을 해줬기 때문에 그 설명이 전부인 줄 알아요. 근데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않고, 단어의 뜻은 어디서 고정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항상 무엇을 살펴봐야 한다? 문맥을 살펴보고, 그 문맥에서 무엇을 가르치는가를 살펴보지 아니하면, 그리고 천편일률적으로 그 단어의 의미를 대입하게 되면, 잘못된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해가 되셨나요? 이상합니까? 이해가 되십니까? 네. 감사합니다.

8.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관점을 고려하라.

두 번째로 우리가 생각해 봐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관점을 고려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역사를 우리가 잘 알고 있는데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창조한 세상이 망가져 버렸습니다. 왜 망가졌나요?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타락하게 되었고,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이죠. 그 상황 가운데서 우리 인류가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약속하시기도 하고, 또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기도 하고 해서 쭉 역사가 이어져 왔다가, 그러다가 구원의 사건이 누구를 통해서 이루어졌어요?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죠.

그래서 이 구원의 사건 때문에,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누구 때문에 구원을 받게 됐어요? 예수님 때문에 구원을 받게 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 겁니다. 따라서 성경에 여러 가지 말씀들이 있는데, 구약의 율법들이 여전히 오늘날 우리들에게 유효한 것일까요? 유효하지 않는 것일까요? 유효하지 않게 되어 버렸습니다. 왜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면서, 율법의 모든 요구들을 다 성취하셨고, 그래서 폐지시켜버렸고 완성시켜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모세의 율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그런 많은 율법들이 더 이상 우리들에게 적용이 되지 않는 것이죠.

로마서 7장의 말씀을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요. 어떻게 기록돼 있습니까? 로마서 7장 6절 말씀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어떻게 됐다고요?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오. 율법 조문에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구약의 율법 가운데 대부분의 많은 것들이 어떻게 됐다는 거예요? 우리를 더 이상 얽매지 않는다. 우리에게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히브리서 10장 1절 말씀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에” 무엇일 뿐이오? “그림자일 뿐이오.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그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구약의 율법들이 우리에게 적용이 되지 않는 겁니다.

우리가 매일매일 번제를 하나님 앞에 드릴 필요가 있어요? 번제? 아니요. 속죄제 드릴 필요 있어요? 아니요. 여러 가지 정결 규례, 이런 거 지킬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왜?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운전을 잘못해가지고 벌금을 맞게 됐는데, 그래서 벌금을 내려고 하는 통지서가 날아왔어요. 그런데 그 통지서를 본 제 아내가 벌금을 내버리면, 제가 벌금 낼 필요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없어요. 왜? 이미 다 지불해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거기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에 많은 것들이 더 이상 우리들에게 적용이 되지 않는 것이고, 우리는 자유하게 되었다고 하는 그 구속의 관점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되는 것이죠.

순대를 먹어도 됩니까? 안 됩니까? 돼요. 성경에 피를 먹지 말라고 돼 있는데, 피를 먹지 말라고 되어 있어도, 우리는 더 이상 그러한 구약의 율법에 얽매이지 않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것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우리를 더럽히는 것이 아니오.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힌다고 말씀하시면서, 마가복음 7장 19절 말씀에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라고 선언해 주신 겁니다. 그러니까 돼지고기 먹어도 돼요? 안 돼요? 돼요. 장어 먹어도 돼요? 안 돼요? 돼요. 맛있더라고요. 우리가 머리를 둥글게 깎아도 돼요? 안 돼요? 옛날에는 깎지 말라고 돼 있었는데, 돼요? 문제없어요. 구약에 있는 수많은 그런 규정들이 더 이상 우리들에게 적용이 되지 않는 거죠. 우리가 혼방으로 된 옷을 입으면 돼요? 안 돼요? 섞어 짜지 말라고 그랬는데, 돼요? 왜?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이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구약의 모든 것들이 다 더 이상 우리에게 필요 없는 것이 되었는가? 아니죠. 구약의 율법을 그래서 우리는 종종 세 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도덕법, 의식법, 시민법으로 나눌 수가 있겠는데요. 도덕법이라고 하는 것은 만고불변의 법칙이고, 항상 우리가 따라야 하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법을 가리켜서 도덕법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고 하는 것은 도덕법적인 규정이 되겠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것은 도덕법적인 규정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 성경에 나와 있는 그런 도덕법들은 여전히 우리들에게 유효한 법이고, 우리는 지켜야 하는 법이 되는 것이죠. 하지만 의식법, 예를 들자면, 제사를 어떻게 드려야 되는지 등등 이런 모든 규정들은 의식법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이제는 더 이상 의식법은 지킬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왜? 그것은 그림자였을 뿐이고, 완전한 것이 왔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들에게 지켜야 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죠.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다 성취되어서, 더 이상 의식법을 우리가 지킬 필요가 없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꼭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켜야 하나요? 그럴 필요 없어요. 안식교 교인들은 그걸 모르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채식만 해야 되나요? 그럴 필요 없어요. 안식교 교인들은 그걸 모르는 거예요? 그러면서 억지로 갖다 붙이는 거예요. 채식하면 좋다. 돼지 먹으면 혈압 올라간다 하면서, 강의를 하고 있는데, 다행스러운 것은 그런 강의에 앞장섰던 이상구 박사가 안식교에서 떠나서 이제는 완전히 이쪽으로 돌아왔다고 그래요. 자신의 입장을 포기해버렸는데, 아무튼 의식법은 더 이상 우리들에게 적용이 되지 않고, 또 하나의 법이 있는데, 그게 뭔가요? 시민법적인 규정이 있는 것이죠. 시민법적인 규정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 나라로서 신정 국가로서 살아갈 때 필요한 법들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법들이 있습니까? 만일 도둑질을 했다고 한다면 5배로 갚아줘라. 네 배로 갚아줘라. 어떤 죄를 저지르면 사형을 시켜라. 등등, 이런 시민법적인 규정들이 있는데, 그런 규정들도 더 이상 우리들에게 적용되지 않습니다. 왜 적용이 되지 않아요? 우리는 신정 국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부모를 때리는 아이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성경에 보면 부모를 때리는 아이는 어떻게 하라고 돼 있어요? 죽이라고 돼 있단 말이에요. 우리 우리 아기가 아빠 엄마 막 때리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죽여요? 죽이지 말아요? 죽이면 안 돼요. 왜? 부모를 효도해야 되고, 부모에게 공경해야 된다고 하는 것은 도덕법적인 규정이기 때문에 지켜야 하겠지만, 그렇게 도덕법을 어긴 사람을 어떻게 처리할까에 대한 규정은 시민법적인 규정이기 때문에, 그걸 따를 이유는 없는 겁니다. 그렇죠?

우상이 있어요. 그래서 그 우상을 보면 훼파하라고 성경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크리스천들은 절 옆을 지나가다가, 우상을 보면 가만히 분노하면서, 그 불상을 때려 부수어야 돼요? 부시지 말아야 돼요? 구약성경의 우상을 때려 부수라고 돼 있는데, 때려 부수어야 돼요? 부시지 말아야 돼요?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는 것은 도덕법적인 규정이지만 그런 우상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관한 규정은 시민법적인 규정이 되는 것이죠.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민족은 그 땅에 우상을 세울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부수는 것이 당연했고, 부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율법을 가지고 있었던 다니엘조차도 다니엘의 세 친구조차도 느부갓네살이 세운 금신상을 보면서 달려가서 그 금신상을 때려 부수었나요? 왜 안 부셨어요? 하나님의 뜻을 그렇게 잘 섬긴다고 하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왜 안 부수고 그냥 절만 안 했어요? 힘이 없어서? 힘이 없으니까, 내가 때릴 힘은 없으니까, 참는다. 그러고 있는 거예요? 아니에요. 바벨론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요. 하나님의 신정 국가가 아니에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나라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국가 안에서 구약 시대 때 그런 도덕법을 어겼을 경우에 어떻게 행할 것인가에 대한 규정들이 있었던 것이고, 그것을 지켜야만 했었던 것이죠. 이스라엘의 왕들은 그것을 지켜야만 했었던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는 그런 상황에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도덕법적인 규정을 지키기 때문에, 우상을 섬기지 않아야 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러나 오늘날도 우상을 부수어야 되겠다고, 부시는 것은 잘하는 일이 아니에요. 왜? 남의 재산을 파괴하면 되나요? 안 되죠. 성경 신약 성경에 가르치면 또 무슨 말씀이 있어요? 우상 숭배하면, 어떻게 하라? 사귀지도 말라가 아니고, 그냥 그냥 같이 지내면 돼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구원을 베풀어주신 그 사건을 관점으로 성경을 바라보지 않게 된다고 한다면, 그러면 정말 모든 것들이 우리가 정말 불편해지고 여러 가지 해석이 어려워지는 겁니다.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구약 성경에 쓰여 있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그 말씀대로 우리가 따라야 되는지, 그래서 그걸 따른다고 하면서 무리를 하게 되는 경우들이 종종 있는데, 그런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되겠다 하는 것입니다.

9. 상상의 나래를 함부로 펼치지 말고, 문자적 의미에 충실하라.

세 번째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 말고 문자적 의미에 충실하라라고 하는 원리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성경의 말씀을 우리가 해석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문자적인 의미”를 그대로 발견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종종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해석하면서 문자적인 의미에 만족하지 않고, 영적인 의미를 발견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했었어요. 그게 어디서부터 유래가 됐냐면, 옛날 고대 초대교회 시절부터 계속 그런 일들이 있었는데, 그런 일들이 천주교를 통해서 많이 강화됐던 것이 있던 겁니다. 그래서 보통 천주교 쪽에서 무슨 얘기를 했냐 하면, 의미는 네 가지 의미가 있다. 사중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을 했어요.

초대교회 교부들이 생각하는 사중 의미가 뭐냐면, 첫째는 문자적인 의미, 두 번째는 도덕적인 의미, 풍류적 비유적 의미, 네 번째는 천상의 의미 영적인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도시를 의미하지만, 도덕적 의미로는 인간의 영혼을 의미하고, 그리고 비유적인 의미에서는 교회를 의미하며, 천상의 의미는 천국을 의미한다라고 보는 것이죠. 그래서 예루살렘 그러면, 예루살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천상이라고 생각하고서 해석하는 그런 영적인 해석을 하고, 상상의 나래를 자꾸 펼치는 해석들을 많이 해왔는데, 그러한 해석들은 잘못된 해석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겠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면,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갔는데, 그것은 천성을 떠나 죄악의 도시로 갔다는 의미고, 강도 만난 사람은 바로 아담이며, 그리고 강도는 악마고, 제사장과 레위는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의미하며,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이고, 상처를 싸매는 것은 죄악을 억제하는 것이고, 포도주와 기름을 바른 것은 소망의 위로와 선행의 권고를 하는 것이며, 여관으로 데려갔다고 하는 것은 교회로 데려간 것이고, 나귀는 성육신 한 것이고, 네 발은 사복음서를 의미하고, 다음 날은 부활하신 다음 날을 의미하며, 두 데나리온은 사랑의 이중 개명을 의미하고, 그 선한 사마리아가 다시 온다는 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해석을 한 거죠. 그럴듯해요. 하지만 이런 해석은 엉터리 해석인 겁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해 주신 것은 우리 인간이 어떻게 타락을 해서, 어떻게 구원받고, 예수님의 구원을 어떻게 받는가에 대한 그것을 말씀해 주시기 위해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한 것이 아니라, 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어요? 너희도 사마리아인이 원수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좀 “원수를 사랑해라”라고 하는 그 의미를 주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해 주신 것인데, 상상의 나래를 자꾸 펼쳐서 엉뚱한 해석을 하는 것은 은혜스러울 수는 있지만 정당한 해석은 아니다.

우리가 많이 듣던 해석 중에 하나가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에 대한 해석입니다. 법궤를 돌려보낼 때, 벧세메스로 가는 암수에 실어서, 법궤를 돌려보냈는데, 벧세메스는 천국이고, 암소는 천국으로 가는 성도고, 그 암소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지 않았던 것은 믿음의 길을 똑바로 걸어가야 한다고 하는 의미이며, 수레라고 하는 것은 성도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의미하고, 나중에 그 암소가 번제물로 태워져 드림이 된 것은 성도가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며 드리는 삶을 살아야 된다라고 해석하는 설교를 많이 들어봤죠? 처음 듣습니까? 처음 들어요? 많이 들었죠?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의 이야기는 왜 기록됐어요? 이 재앙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가? 우연히 일어났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블레셋 사람들이 만든 장치인 거죠. 그런데 벧세메스의 암소가 똑바로 가는 게 정상입니까? 새끼에게로 되돌아가는 게 정상입니까? 새끼에게로 돌아가는 게 정상인 거예요. 그러니까 블레셋 사람들은 이 재앙이 하나님께로부터 올 리가 없다고 하는 결론이 분명하게 드러나게끔 세팅을 해놓고, 암소에다가 법궤를 실어놓은 거죠. 그리고 스스로를 안위하는 겁니다. 거 봐. 암소가 다시 돌아오잖아? 암소가 벧세메스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오잖아? 새끼가 있으니까 당연히 돌아오는 게 정상이잖아요? 그러니까 “이 재앙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일 수가 없어” 하면서 안심하려고 만들어 놓은 장치가 그 장치예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무엇이냐면, 그 벧세메스의 암소가 그냥 벧세메스를 향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똑바로 가는 그것을 통해서, 이 재앙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임한 재앙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보여주신 그런 엄청난 사건이었던 거죠. 그것만 깨달으면 돼요 그 이상의 다른 영적인 의미를 깨달으려고 하는 그런 해석은 재밌고, 신비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우리의 생각을 성경 속에 집어넣는 잘못된 해석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되는 것이죠.

다행히 종교개혁자들은 천주교에서 만연되어 왔던 네 가지 의미 해석법을 배척했습니다.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된다? 문자적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성경의 평범하고도 분명한, 그런 문자적인 의미를 제대로 받아들이는 게,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는 것이지, 마음대로 상상의 날개를 펴서 영적으로 마음대로 꾸며내는 해석을 하는 것은 그것은 바른 해석이 아니다고 하는 것을 누가 주장했다고요? 칼빈 루터 등등 종교개혁자들이 주장을 했어요.

500년이 지난 지금 그 원칙이 망가져 버리고 있어요. 안타까운 일이죠.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엉터리 해석들 성경의 단어에다가 함부로 의미를 입혀서 영적인 의미를 자꾸만 이렇게 설명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속아 넘어가면 안 되겠다 하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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