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인내하는 자가 복되다 (약 5:7-11)

지난 시간에 우리는 야고보서 5장 1절에서부터 6절 말씀을 묵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5장 1절에서부터 6절까지의 말씀은 부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거라고 하는 경고의 메시지였는데요. 이 본문의 말씀은 모든 부자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라기보다는, 불법을 저지르면서, 믿음의 사람들을 압제하고 착취할 뿐만 아니라, 조롱하고 있는 불신 부자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라고 제가 설명을 드린 바 있습니다.

단순히 부자에 대한 말씀이라기보다는, 악을 저지르면서도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자들을 향한 말씀이죠. 하나님을 거부하고, 그리고 성도들을 박해하고 착취하는 그런 악한 부자들에 대한 말씀이라고 볼 수가 있는데요. 그들은 지금 아주 잘 나가고 있는 겁니다.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 같은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무엇이었습니까? 그 승리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끝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말씀을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야고보서 5장 7절에서부터 11절의 말씀은 바로 그러한 사실에 바탕을 두어서 우리 성도들을 향해서 주시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성도들을 향해서 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보면, “인내하라. 참으라.” 권면하고 있습니다. 인내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죠. 야고보서 5장 7절 8절 말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마치 농부가 열매를 얻기 위해서 기다리듯이, 씨를 뿌릴 때는 땅바닥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씨를 땅에 심어 놓으면 흙만 보이지 씨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다리다 보면, 그 땅에서 싹이 솟아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고, 그 연약한 싹에서 무슨 열매가 있을 수 있겠는가 생각이 되었는데, 그것이 자라면서 비를 맞고, 해를 맞으면서 자라나다가, 결국 때가 되면, 열매를 맺는 것이죠. 시간이 지나면 열매를 맺는 그 열매를 농부가 알기 때문에, 인내하고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음을 강하게 먹으면서, 참고 기다리라 하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들을 향해서 주시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농부가 참고 기다리게 되면, 열매를 맺게 되듯이, 결국 하나님께서 악인들은 심판하시고, 그리고 성도들의 눈에서는 눈물을 닦아주시고,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그리고 우리가 수고하며 애쓴 그 선한 일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실 그날이 있기 때문에, 지금 당장 악한 자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고,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을 당하는 것처럼 보이고, 억울한 일이 계속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황당한 상황 가운데서도, 참고 기다리며 믿음을 가지고 있으라 하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 모두를 향해서 주시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면 세 가지 F 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그 세 가지 F 반응이 무엇이냐 하면, 첫 번째는 Fight죠. 싸우는 반응을 보이는 겁니다. 두 번째는 Fear, 두려움입니다. 세 번째는 Flight, 도피하는 것이죠. 도망가는 반응입니다.

먼저 첫 번째로 우리는 싸우는 반응을 보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떤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그 어려움과 더불어 싸워 이긴다고 한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가 제일 먼저 보이는 반응이 무엇이냐면, 동료들과 싸워요. 같은 편끼리 싸우는 겁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싸우게 되는 것이죠. 어떤 어려움이 오게 되고, 재정적인 문제가 생기고, 자녀들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서로가 서로를 원망하면서, 남편과 아내가 싸우는 일들을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죄성으로 가득한 우리 인생들이 보여주는 일반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서로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면서, 예전에 그랬으니까, 우리 아이가 이렇게 잘못되었다고 남편을 원망하고, 아내가 잘못한 것을 지적하며, 그래서 서로 원망하는 가운데 그 가정은 깨어져 버리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공동체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공동체가 어떤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한다면, 그때부터 지도자를 향해서 원망하고 불평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함께 힘을 모아도 힘들고 어려운 것인데, 서로 같은 편끼리 서로 욕하고 비난하면서, 싸우면서 자중지란이 일어나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얼마나 많이 경험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사탄이 노리는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땅에서부터 나와서 홍해 바다라고 하는 암초를 만났을 때였습니다. 앞에는 홍해 바다가 가로막혀 있어서 도무지 건널 수 없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추격해 와서 이제는 독 안에 갇힌 쥐처럼 되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그 순간에 모세를 향해서 원망하기 시작해요. 모세를 향해서 원망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모세를 원망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죠? 해결되지 않아요. 모세를 원망한다고 해서 전혀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닌데, 놀랍게도 이스라엘 민족은 그 순간에 모세를 향해서 원망하는 일을 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싸우기 시작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부로 붙여주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혼자 살아가는 것이 좋지 못하고, 남편과 아내가 함께 만나 살아가게 만드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서로 원망하고 비난하게 하는 것보다는, 그런 일을 하라고 같이 있게 만든 것이 아니라, 서로 낙망하고 있는 배우자를 향해서 위로해 주고 격려하며, 힘을 북돋아주라고, 함께 만나게 만들어주신 것이죠. “괜찮아. 힘내” “이거 아무것도 아니야. 괜찮아.” 서로 말하면서, “내가 힘 더 써볼게. 내가 더 노력해 볼게.” 말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면서, 위로를 받고 의지하라고, 하나님께서 남편과 아내를 붙여주신 것이죠. 한 사람이 넘어지면 이렇게 세우고, 한 사람이 병에 걸리면 간호해 주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함께 도와서, 함께 그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남편과 아내로 붙여주신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사탄은 우리들의 죄성을 자극시켜서, 정말 위로가 필요하고 사랑과 격려가 필요한 사람을 향해서, 비난하고 원망하고 싸우게 만드는 일이 있는 것이죠. 교회도 마찬가지인데요. 교회도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만나게 되면,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함께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보다는, 과거에 누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어떤 책임이 있는지, 서로 원망하고 비난하면서, 망해가는 것이고, 그 어떤 공동체도 그 이런 싸움 속으로 몰려들게 된다면 자중지란 가운데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싸우게 된다고 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운만 빠지는 것일 수밖에 없는데, 놀랍게도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는가? 싸우는 선택을 할 때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야고보서 5장 9절 말씀은 그러니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원망하지 말라. 문제가 있으면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들이 보여주는 일반적인 반응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두려워하는(fear) 반응입니다. 무서워하는 것이죠. 정말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엄청난 장애물 어려움을 만나게 될 때,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을 것처럼 생각이 될 때, 우리는 갑자기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는데요. 어쩌면 그것이 우리들이 흔히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도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될 때, 두려움 가운데 빠지게 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12명의 정탐꾼들 가운데서, 10명의 정탐꾼들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우리는 저 가나안 땅을 싸워서 이길 수 없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 정탐꾼의 말을 듣고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저 가난한 민족이 너무나도 커 보여서, 그 강한 군사들을 보고, 더 이상 그들과 싸울 수 없다고 하는 생각 때문에 두려운 마음이 든 것이죠.

엘리사 선지자를 공격하기 위해서 아람 민족이 도단성을 에워싸게 되었을 때, 엘리사의 종은 그 둘러싼 군인들을 바라보면서 무서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선지자여, 어떡하면 좋습니까? 큰일 났습니다. 우리 성을 저 아람 군대가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 군대들을 바라보면서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 것이죠.

예수님과 함께 호수를 건너려고 했던 그 제자들은 그 호수 가운데 풍랑이 이르게 되는 그 순간이 되었을 때, 그래서 그 바다 가운데 빠져 죽게 되었을 때, 두려운 마음이 들게 되었습니다. 풍랑을 바라보게 될 때 이제는 꼼짝없이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겠다고 하는 그 두려움이 그들에게 엄습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두려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던 것이죠.

어쩌면 이것이 우리들이 만나게 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가 있겠지만, 하지만 결코 바람직한 반응은 아닙니다. 전후 좌우가 다 막힌다고 할지라도, 모든 면이 다 꽉 막힌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되고, 군인들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저 천군 천사들을 바라봐야 하는 것이고, 가나안 땅에 정탐했던 그 12명의 정탐꾼들 가운데, 10명의 정탐꾼들의 말만 들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해야 되는 것이죠. 하나님의 약속은 허허벌판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인도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곳에 가나안 민족이 있고, 브리스 족속이 있고, 암몬 족속이 있고, 모든 민족들이 있는 그 땅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고 했으니까, 그곳에 장대한 민족이 거주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구나”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했어야 하는 것이죠. 제자들이 그 갈릴리 호수에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이 일어났을 때, 그 풍랑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기억해야 되는 것이죠. “우리가 함께 건너가자”라고 말씀하셨던 그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두려움을 이겼어야 했을 것인데, 우리들은 너무나도 연약해서 조금만 어려움이 있으면 두려움의 반응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시편 42편 5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 영혼아, 내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낙심이 생기고, 두려운 마음이 들 때, 우리가 현상을 바라보면서 두려운 마음이 들 때, 그것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의 말씀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두려워하는 반응을 보일 것이 아니라, 그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담대하게 믿음으로 승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마태복음 6장 30절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나님께서 세심하게 새들을 먹이시고, 하나님께서 세심하게 그 들풀도 입히시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것들보다도 훨씬 더 소중한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우리를 하나님께서 내 팽개쳐 두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가지고 계신데, 우리를 그냥 방치해 두겠는가? 생각하면서, 주님을 바라보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들이 보이는 세 번째 반응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도피하는(flight) 것입니다. 도망가 버리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죠. 문제는 그대로 있고, 문제를 잠깐 피해 가는 것뿐입니다. 도피하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도피의 방법을 사용해 버립니다. 잠에 빠져버린다든지, 술에 취해서 잊어버리기를 원한다든지, 마약에 취해서 그냥 좋은 기분만 가지고 살려고 한다든지, 아니면 그 문제의 자리를 떠나버려서 문제를 보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해결했다고 생각할 때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도망간다고 해서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우리 가정에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를 내버려 두고 산속으로 혼자 도망가서 혼자 참선을 하면서, 속세를 버리고, 아무런 내 마음을 괴롭게 하는 모든 것들을 다 내 팽개쳐 버리고, 저 산속에서 들어가서 혼자 도피 생활하고 있으면, 보지 않으니까 마음이 편한 것 같고, 보지 않으니까 문제가 해결된 것 같고, 내 마음이 괜찮은 것 같으니까, 괜찮은 것 같지만, 그러나 그 문제가 이 속세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자들은 계속해서, 고통과 아픔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죠. 그것을 내가 억지로 잊으려고 하고 있으니까, 잊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잊는다고 해서 잊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너무나도 어리석은 선택인 것이죠. 도피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더 크게 만드는 것이고, 그 자리를 떠나가 버리면 문제가 안 보이는 것 같아서 행복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게 도피해버려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대면하고, 그리고 그것을 복음으로 해결하고, 그리고 화해하고, 사랑으로 감싸고 회복시키는 것이 바른 해결책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러한 잘못된 F 반응, 우리가 싸우거나(fight) 두려워하거나(fear) 아니면 도피(flight)하는 그런 반응이 아니라, 참된 F 반응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Faith, 믿음의 반응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들을 다 믿음의 반응으로 보여야 합니다.

어떻게 믿음의 반응을 보일 수가 있겠습니까? 야고보서 5장 8절 말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참된 믿음의 반응은 무엇이냐면, 참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인내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악한 자들이 자꾸만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악한 자들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영원히 그 세력이 끝까지 계속될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분명하게 믿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신다는 거예요.

결국은 그들의 심판대 앞에 세울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어야 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우리의 수고가 헛된 것처럼 보일 겁니다. 인내하는 우리들의 모습,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그 모습, 이것은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고, 인정받지도 못하고, 우리의 수고는 정말 보잘것없는 것처럼 그렇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성경의 약속은 무엇이냐면, 결국 그 우리의 수고가 헛된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의 말씀에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라고 하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인내해 나가다가, 농부의 인내를 배우다가, 인내하는 가운데 믿음의 승리를 해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런 인내의 싸움은 나 혼자만 하는 게 아닙니다. 인내의 싸움은 지금까지 수많은 신앙의 선조들이 해왔던 싸움입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은 어려운 일들을 만나지 않아서 믿음을 잘 지켰던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도 정말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습니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을 겪었을 때 믿음에 인내를 해왔는데요. 첫 번째는 우리가 그런 선지자들을 바라보아야 하는 겁니다. 믿음으로 인내했던 선지자들을 바라보아야 되는데, 야고보서 5장 10절 말씀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선지자들은 정말 힘든 상황 가운데서 사역을 했어요. 선지자들은 정말 완고한 이스라엘 민족들 가운데서 사역을 한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선포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때 이스라엘 민족은 귀를 닫아버리고, 전혀 그 선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환영하고 박수 쳐준 것이 아니라, 그 선지자들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전혀 반응이 없고, 오히려 고난만 당하는 그런 선지자들이 아무런 열매가 보이지 않고, 아무런 회개의 반응이 보이지 않아서, 그래서 낙망스러울 상황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그 상황 가운데서도 선지자들은 참고 인내하며 믿음을 지켰던 것인데, 그런 선지자들의 모범을 우리가 모범으로 삼아서 믿음을 지켜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야고보서 5장 11절의 말씀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요.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요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어쩌면 욥이 가장 큰 고난을 당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믿음을 가지고 살다가 욥처럼 고난을 당한 사람을 찾기는 어려울 겁니다. 모든 재산도 잃어버렸고, 자녀들도 잃어버렸고, 그리고 육신마저도 완전히 망가져버린 그 상황 가운데서, 그 욥이 당한 그 엄청난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상황 가운데서, 욥은 인내하고 참았던 것이죠. 그 참고 힘들게 살았던 믿음의 길이, 그런데 결국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주셨는가? 하나님께서 그 욥에게 회복시켜주는 것을 욥기서의 말씀 가운데서 읽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의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우리로 하여금 그 이야기를 읽고 보고 배우며, 우리도 욥의 인내를 본받아 믿음으로 승리하라고 기록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내해야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인내가 헛된 것이 아니라, 결국 소망 가운데 열매를 얻게 될 것임을 믿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사는 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쉬워본 적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십자가의 길이고, 믿음으로 사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아닌 길로 간다고 하면 쉬워요. 넓은 길이에요.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세상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쉽고 간단한 겁니다.

하지만 믿음의 길은 어떤 길입니까? 어려운 길이에요. 고난을 당해도 원수를 갚을 수가 없어요. 어려운 일을 당해도 내가 원망할 수 없어요. 믿음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길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하지만 그 믿음의 길을 우리가 참고 인내하며 승리해야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그 인내를 보시고, 인정해 주시고, 갚아주시며 믿음을 지키는 자들 가운데 생명의 면류관이 약속되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새벽에 아주 좋은 소식이 들렸습니다. 라리가에서 뛰고 있는 이강인 선수를 혹시 아십니까? 성경 얘기를 하면 반응이 없는데, 축구 선수 얘기를 하니까 반응이 좋네요. 그 이강인 선수가 시즌 두 번째 골을 성공시켰어요. 아침에 일어났더니 그 뉴스가 뜨는 것을 보았습니다. 수비수 3명을 한꺼번에 제치고, 그리고 볼을 차서, 골이 성공되기 어려운 각도에서, 정말 골을 넣기 어려운 그런 상황 가운데서, 볼을 차서 골을 시켰는데, 그래서 결국 역전승의 주인공이 되어서, 2대 1로 이강인 선수가 소속된 마요르카가 승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상대 (여기에 아멘을? 해도 됩니다마는) 아무튼 그 상대팀이 누구냐면, 이강인 선수가 원래 있었던 옛날 친정 팀이에요. 발렌시아라고 하는 팀과 적이 되어서 만나서 경기를 했는데, 그 친정팀 자기를 방출해 버린 그 팀을 향해서 어쩌면 시원하게 복수하는 골을 이강인 선수가 넣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 이강인 선수가 골을 넣고 기쁨의 세리머니를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자신의 옛날 팀 선수들 그리고 팬들을 향해서 미안하다고 하는 사과의 세리머니를 하면서 경기를 마쳤는데, 그 선수가 인터뷰하는 장면이 유튜브에 올라와 있어서 한번 인용을 해보려고 합니다.

이강인 선수가 이런 말을 했어요. “발렌시아는 저에게 모든 것을 준 팀입니다. 제가 성장한 팀이고 잘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있을 때 나를 지지해준 팬들에게 감사하고 싶습니다. 제가 골을 넣고 제가 지금까지 느껴본 느낌 중, 가장 이상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골을 넣었을 때 10년 동안 이곳에 있었던 추억들이 기억이 났습니다.”라고 인터뷰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강인 선수가 발렌시아에 있었을 때의 그 경험이 그렇게 좋은 경험은 아닙니다. 아주 유망주로서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실제로 그 발렌시아에서 경기를 오래 뛰지 못했고, 벤치 신세를 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선수로 뛰다가 교체되어 나가면, 그것이 너무나도 속상해서 벤치에 앉아서 울고 있었던 모습이 종종 잡혔던 것이 이강인 선수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 이강인 선수를 엔트리에서 제외시켜버려서, 할 수 없이 새로운 팀 마요르카를 찾아 떠나야만 했었던, 어쩌면 씁쓸한 기억의 팀이 발렌시아라고 하는 팀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강인 선수가 골을 넣고 하는 말이 “발렌시아는 내게 모든 것을 준 팀입니다. 내가 나로 여기까지 성장할 수 있게 만들어준 팀”이라고 하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얼마나 감동이 됐는지 모릅니다. 그때 힘들었던 기억들, 울었던 기억들 아팠던 상처들 많이 있었지만,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 모든 과정들이 유익했었다고 보는 것이죠.

어쩌면 우리들의 인생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지금 고난의 한가운데 있다고 한다면, 어려움의 한가운데 있다고 한다면, 도대체 왜 내게 이런 문제가 생기는지,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런 어려운 일이 생기는지,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인생의 퍼즐 가운데, 그 어느 한 짝도 결코 무의미한 퍼즐은 없는 것이고, 우리의 인생은 그 모든 퍼즐들이 다 맞춰져야 되는 것이죠. 성공한 퍼즐뿐만 아니라 실패 경험조차도, 아픔의 경험조차도, 그 모든 것들이 합쳐져서, 우리들을 빚어 나가고 있는 것이고, 진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조개에 상처가 생겨야, 그 상처를 통해서, 그것이 여물어 가는 가운데, 상처와 생채기가 합작하여 결국에 아름답고 멋있는 진주가 만들어지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그 고난의 순간 가운데 하나님 앞에 울부짖은 겁니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정금같이 나아오리라.”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잠금같이 나올 거라고 하는 믿음의 고백을 하면서 인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원망하지 마세요. 힘들다고, 욕하지 마세요. 괴롭다고 말하지 마세요. 불평하고 원망할 게 아니에요.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너무나도 두려워하며 벌벌 떨며 숨어 들어가지 마세요. 도망 다니지 마세요. 그것이 우리를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기억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사,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지금도 빚어가고 계시며, 단련시키고 계신 후에는 정금같이 나오게 하실 거라고 하는 그 믿음의 고백으로, 오늘 또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바로 예수님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들에게 상처만 있고 실패만 있다고 한다면 무슨 소망이 있겠어요? 만일 우리를 우리 자신만 이 세상에 내버려 두셨다고 한다면, 우리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세상에 내려오셨고, 우리를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서, 주님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시고, 물과 피를 쏟아주시며 저와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켜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 놀라운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에 있다고 할지라도, 믿음으로 인내하며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Loading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