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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아들 (잠 13:1-5)

한 절 한 절이 참 지혜의 말씀이고, 우리들에게 은혜가 되는 그런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한 절씩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 싶은데요. 13장 1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인가?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고, 아무 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그런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의 훈계를 듣는 사람이다 이 말입니다. 아버지의 훈계를 듣지 않고, 아버지가 꾸지람을 하는데도, 그 꾸지람을 듣지 않는, 그런 거만한 자는, 그런 사람은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 어리석은 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겠죠.

히브리어 원문을 한번 살펴보고 싶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지혜로운 아들은 “벤 하캄” 지혜로운 아들은 아버지의 훈계를. “아버지의 훈계를” 동사가 없어요. 어떻게 한다는 동사가 없는데, 그런데 뒤에 9절에서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듣지 않는다. “샤마” “로샤마” “로샤마”는 듣지 않는다는 것인데, 듣지 않는다고 하는 말이 있기 때문에, 지혜로운 자의 아들은, 지혜로운 아들은, “벤 하캄” 지혜로운 아들은, 아버지의 훈계를 들으나, 동사가 거기에 있는 것으로 보고서, 해석을 하고 번역을 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나라 말은 이런 생략법이 없습니다마는, 영어나 유럽 언어, 그리고 샘 언어 이런 데서는 생략법들이 많이 나옵니다. 반복될 경우에는 생략이 많이 되어 있는 것이죠. 아무튼 지혜로운 아들은 누군가? 여기서 아들이라고 하는 말은 남자만 이야기하는 거 아닙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죠.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아버지의 훈계를 듣는 사람이고,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거만해서 그래서 듣지 않는 겁니다. 꾸지람을 할 때, 충고를 할 때, 책망할 때, 그 책망을 듣지 않는 것이라고, 오늘 잠언서 13장 1절 말씀 가운데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은 누굽니까? 인간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셔서, 하나님은 그 누구의 충고도 필요하지 않은 것이죠. 하나님의 판단은 완전하고, 하나님의 판단은 모든 것이 흠잡을 것이 없고, 완벽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의 말을 듣고서 판단하거나, 그 누구의 것을 이야기를 들은 다음에서야 어떤 결정을 내리셔야 될 분이 전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 모두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든지,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지, 지도급에 있던 사람이든지, 아니든 사람, 아닌 사람이든지, 그 누구라도 우리나라 최고의 자리에 올라간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어리석은 사람은 말을 듣지 않는 거죠. 말을 듣지 않고 자기만 말을 하는 거죠. 간담회를 한다고 하면서도, 자기만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누군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볼 수 있는 시각은 오로지 전면만을 볼 수 있는 겁니다. 모든 면을 다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한쪽 측면만을 볼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파악하지 못한 부분이 있고, 내가 바라보지 못한 부분이 있고,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내가 직접 보았다고 하는 것은, 내가 경험했다고 하는 것은, 아주 큰 능력이긴 하지만, 그러나 우리를 무너뜨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무나도 확신에 차서,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확신하게 만드는데, 사실은 그 경험이 전부가 아니거든요. 내가 경험한 것은 진리의 일부분만을 경험한 것이지, 진리 전체를 경험한 것이 아닌데, 그 진리 전체를 경험한 것인 양, 내가 경험한 것이 모든 것인 양 착각해서,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내가 이 사물을 바라보았을 때, 이 사물이 동그랗게 생겨서, 이건 정말 동그랗다고 이야기하겠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은 동그랗게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네모라고 말하는 것이죠. 나는 동그랗다고 확신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은 네모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고, 그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게 될 때, 내가 본 것이 동그라미가 아니라 사실은 원통이고, 그 원통에 동그란 면을 보았을 뿐이고, 내가 보지 못한 것은 그 원통에 네모난 부분을 보지 못했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인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내가 모른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자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잠언서 13장 1절 말씀에서 누구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냐면, “아비의 훈계”를 듣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아들은 누구의 말을 듣는가? 아비의 훈계를 듣는다. 아버지의 훈계, 아버지의 꾸지람을 듣는다고 오늘 13장 1절 말씀 가운데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아버지의 훈계를 듣는다고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아버지의 훈계, 다른 사람이 아닌 아버지의 훈계를 들으라고 하는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면 어머니의 훈계는 들을 필요가 없다고 하는 말인가요? 어머니의 훈계와 아버지의 훈계가 있으면, 어머니의 훈계는 듣지 말고 아버지의 훈계를 들어야 된다는 말일까요? 이웃이 훈계를 하고 아버지의 훈계가 있다고 한다면, 이웃의 훈계를 듣지 말고 아버지의 훈계를 들으라고 하는 말일까요? 선생님이 훈계를 하고 아버지가 훈계를 하면, 선생님의 훈계는 무시하고 아버지의 훈계를 들어야 되는, 그러니까 아버지의 훈계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에 무조건 아버지의 말만 들어야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겠습니까? 종종 어떤 바보들은 그렇게 해석을 해요. 성경을 봐라. 성경에 보니까, 아비의 훈계를 들으라고 되어 있지 않느냐? 어디 어미의 훈계를 들으라고 되어 있느냐? “아버지의 훈계를 들으라고 되어 있지 않느냐?”라고 그렇게 해석하는 바보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여기서 아버지의 훈계를 들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이유는 아버지의 훈계가 그 어떤 다른 사람의 훈계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아버지의 훈계를 반드시 들어야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훈계를 들으라고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이것은 문학적인 표현 방식으로 소위 제유법적 표현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대유법적이라고도 말할 수도 있겠고, 제유법적 표현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겠는데요. 이 제유법적 표현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면, 일부를 가지고서 전체를 나타내는 표현 방식인 것입니다. 일부를 들어서, 대표적인 것 하나를 언급함으로 말미암아 전체를 나타내고자 하는 때, 이런 제유법적인 표현을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아버지의 훈계를 들으라고 하는 그 이야기는 아버지 말만이 중요한 것이고, 어머니의 말이나 삼촌의 말이나 이웃의 말이나 아내의 말이나 자녀의 말이나 그런 것들은 다 의미가 없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니라, 그 누가 이야기를 하든,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던,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가 이야기를 하고, 어머니가 아닌 선생님이 이야기를 하고, 아니 선생님이 아닌 아내가 말을 하더라도, 그 말의 충고를 우리가 받아들여야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충고를 하는 사람의 대표적인 예를 들어서 아버지의 훈계라고 말을 한 것이죠. 아들을 향해서 훈계하는 아버지가, 어쩌면 가장 자연스럽게 그 이 시대에, 어쩌면 가장 자연스럽게 보이는 그런 훈계의 구조라고 할 수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훈계는 꼭 아버지에게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어머니에게서 올 수도 있는 것이고, 때로는 형이나 누나를 통해서, 혹은 친구들을 통해서, 혹은 아내나 남편을 통해서, 때로는 자녀들의 입을 통해서도 우리들에게 훈계가 주어질 수 있게 될 텐데,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버지의 훈계가 아니니까 듣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그 누가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훈계가 주어진다고 한다면, 그 훈계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하는 게 오늘 본문의 말씀일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왜 훈계를 들어야 합니까? 왜 우리는 아버지의 훈계를 들어야 합니까? 그것은 아버지의 훈계가 100% 옳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꾸지람이 언제나 진리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가운데, 자녀의 생각이 옳을까요? 아버지 부모님의 생각이 옳을까요? 누구의 생각이 옳을 가능성이 훨씬 더 많습니까? 부모의 생각이 옳을 가능성이 많습니까? 자녀의 생각이 옳을 가능성이 훨씬 더 많습니까? 누구의 생각이 훨씬 더 옳죠? 네? 부모님의 생각이요? 여러분들이 부모님이니까, 그런 말 하는 거예요. 누구의 생각이 옳냐면, 그 누구의 생각이 옳은 게 아니고, 옳은 게 옳은 거예요. 잘못된 게 잘못된 것이고, 누가 이야기를 하든, 옳은 말이 옳은 말이고, 잘못된 말이 잘못된 말일 것입니다.

물론 아직 경험이 짧고, 아직 세상을 다 경험하지 못한 어린아이의 생각보다는 그래도 인생을 더 많이 산, 인생의 경험을 더 많이 한 어른들의 말이 맞을 가능성이 훨씬 더 맞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항상 부모님이 옳은 것은 아닌 것이죠. 하지만 왜 아버지의 훈계를 들으라고 하는가? 틀려도, “옳다, 그르다”라고 하는 그런 판단 자체를 유보한 채, 무조건 부모의 말이라고 한다면, 무조건 따라야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유교적인 관점에서는 부모님의 말씀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어야 되는 게 유교적인 관점이잖아요?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그래서 이런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관점은 옳은 게 옳은 것이고, 잘못된 게 잘못된 것이지, 누가 어른이기 때문에 무조건 옳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여기서 아버지의 훈계를 들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부모님이 자녀를 바라볼 때, 그 자녀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 때, 악한 길로 가고 잘못된 길로 나가고 있을 때,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부모가 자녀들을 향해서 사랑의 권고를 하고, 되돌아오라고 이야기할 때, 그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이 말씀을 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자녀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면 우리는 들을 필요가 없는가? 아니요.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본다고 한다면,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고 자기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는 독불장군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 사람은 망하게 되어 있는 거예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반드시 패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우리가 최고의 자리에 올라가 있든지, 아니면 우리가 부모의 자리에 있든지, 그 어떤 위치에 있다고 할지라도, 내 생각이 옳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이 아니잖아요? 우리는 하나님일 수가 없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처럼 똑같이 바라볼 수가 없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다른 사람들의 관점이 무엇인지 항상 들어야 하고, 그래서 내가 혹시 잘못 생각하지 않았는지, 내 생각을 고쳐나가고, 그리고 내 행동을 고쳐나갈 필요가 있다고 하는 점을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통해서 들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종종 우리가 이 말씀을 오해해서 꼰대 짓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으리라.”라고 하는 이 말씀을 가지고서, 자녀들을 향해서 우리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들을 향해서 꼰대 짓을 하는 것이, 그것이 정당한 것이며, 또한 성경적으로 옳다고 착각하시는 분들이 종종 계셔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 전체를 다 읽어봐야 돼요. 이 말씀은 자녀를 향해서 주시는 권면이고, 그 자녀를 향해서 아비의 훈계를 들으라고 그렇게 권면해 주고 있으니까, 우리 부모님들이 이 말씀을 보면서는 의기양양해가지고, “이거 봐라. 이 말씀에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지 않았느냐? 부모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지 않았느냐?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면서, 우리는 자녀들을 향해서, 우리의 생각을 강요하기 쉽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자녀를 하게 윽박지르면서 억지로 따라오게 만들려고 하는, 그리고 그래서 그 성경을 우리의 그 꼰대 짓 하는 일에 성경을 악용하려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을 겁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부모님들을 향해서 권면해 주시는 그 권면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성경에 쓰여있잖아요? 그것은 부모님들이 안 읽어요. 자녀들만 읽어요. 자녀들만 그 구절을 알고 있어요. 부모님들은 다 까먹었어요. 그 구절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성경 말씀에 우리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빌립보서 2장 1절에서부터 4절 말씀 가운데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이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무슨 마음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어떻게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내가 너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야. 내가 너보다는 인생을 몇 년을 더 살았어. 내가 밥 먹은 밥그릇이 너보다 몇 개 나가 더 많은 줄 알아? 하면서 그렇게 교만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도 똑같은 죄인이오. 나도 똑같이 넘어질 수밖에 없고, 나도 늘 시험당해서 늘 무너질 수밖에 없는 그런 연약한 인생이오. 우리가 너무나도 큰 허물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나보다 남을 낮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라고 주님께서 말씀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을 듣고 들고서 우리 자녀들에게서 윽박 지는 것이 아니고, 정말 사랑의 마음으로 사랑의 권면을 해주셔야 하는 것이죠. 왜 우리는 들어야 합니까? 왜 우리는 아버지의 훈계를 들어야 하고, 왜 우리는 어머니의 훈계를 들어야 되고, 왜 우리는 목사님의 훈계를 들어야 되고, 왜 우리는 장로님의 훈계를 들어야 되고, 왜 우리는 아내의 훈계를 들어야 하며, 왜 우리는 자녀들이 우리를 향해서 해주는 그 말을 들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고요.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의 훈계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 우리가 더 영적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다른 훈계를 듣는 것, 우리 자신을 향해서 들려주시는 그 사랑의 꾸지람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고, 그러한 지혜로운 삶을 우리가 살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영적인 가족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영적인 가족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우리 가운데 그 누군가 넘어졌을 때 못 본 척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으로 권면하고 돌보아주어서, 다독여주어서, 믿음으로 잘 일어설 수 있도록, 행동을 변경시킬 수 있도록 서로가 서를 도와주어서, 영적으로 같이 성숙해져 나가는 그런 믿음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우리 사랑의 공동체가 사랑의 가족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3장 2절 말씀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을 누리거니와, 마음이 궤사한 자는 강포를 당하느니라.” 히브리어 원문이 어떻게 생겼는가 한번 보았으면 좋겠는데요. 입술의 열매로부터 좋은 것을 먹는데, 신실하게 신실하지 않게 행하는 자의 혼은 폭력을 어떻게 한다? 동사가 사라졌죠? 그런 의미입니다. 입술의 열매를 통해서 선한 것을 좋은 것을 누린다. 먹는다. 하지만 신실하게 행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폭력을 폭력에 폭력을 당하게 된다. 강포를 당하게 된다. 그런 의미의 말씀이 되겠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말로 천냥 빚을 갚는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요. 우리가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질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입술의 열매로 좋은 것을 먹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신실하게 행하지 않는 것과 대조가 되어 있는데, 그렇게 앞 구절과 뒷 구절이 서로 대조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에 주목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입술의 열매로 좋은 것을 복락을 누린다고 하는 것은, 내가 말을 했을 때, 그 말하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실하게 행하는 것이 따라와야 되는 것이죠.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자가 복락을 누린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되겠습니다.

누가 좋은 것을 먹을 수 있겠는가? 누가 복을 누릴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어떤 사람인가? 자기가 한 말에 대해서 그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인 것이죠. 다시 말하자면 신실하게 자신의 말한 대로 언행일치가 되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오늘 읽은 잠언서 13장 3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생명을 보존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는 멸망이 오느니라.” 히브리어 원어도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요. 입을 지키는 자는 자기 생명을 보존하게 되겠지만, 자기 입을 크게 벌리는 자는 파괴가 자기 자신에게 온다는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보면 입을 꾹 다물고 지키고 말을 잘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보존하게 되겠지만, 그러나 입을 자꾸 벌려서 말을 많이 하고 하는 사람은 곧 멸망하게 될 것이다. 패망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됩니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그렇다고 한다면 그냥 침묵하고 있는 게 가장 좋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종종 우리 교 종교의 훈련 방식 가운데 하나 수행 중에 하나가, 침묵 정진이라고 하는 것이 있죠. 묵언수행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말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삶의 아주 고차원적인 그런 신앙의 단계인 것처럼 그렇게 설명하는 그런 종교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잘못된 가짜 종교들은 인간의 욕망들을 자꾸만 억제시키는 것만이 자연스러운 감정이나 자연스러운 욕망이나, 이런 것들을 악하게 보고 그것을 다 제거해야만 그것이 마치 높은 단계의 신앙인 것처럼 그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결혼을 하지 않아야 된다든지, 먹는 것을 중단해야 된다든지, 혹은 뭐 잠을 안 잔다든지, 혹은 말을 하지 않는다든지, 아니면 귀를 닫고 말을 안 듣는다든지, 등등해서 모든 자연스러운 것들을 일부러 그렇게 금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그런 종교들이 있는데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여기서 말씀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우리가 말을 하지 않고 지내는 게 가장 바람직한 게 아닙니다. 말을 하셔야 돼요. 입은 말 하라고 있는 것이고, 사랑의 말을 하고 격려하는 말을 하고, 도와주는 말을 하고 서로 대화하라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말이고, 이 말을 통해서 하는 일을 자꾸만 하면 좋은 것인데, 그런데 정작 중요한 말은 하지 않으면서, 그리고 필요한 말은 하지 않으면서 나쁜 말만 해버린다고 한다면 문제가 되는 것이죠.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좋다는 것이 아니라, 침묵을 하고 있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 아니라, 신중하게 말하고 신중하게 말하고, 함부로 말하지 않아야 되는 것이고, 그리고 일단 말을 했다고 한다면, 그 말에 따라서 신실하게 그 말에 책임을 지는 행동을 해야 한다 하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의 의미가 되겠습니다.

야고보서 1장 19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9절의 말씀이죠.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거대하여 성내기도 더디 하라.” 우리가 하는 말로 참 많은 사람들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로 사는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똑같은 말로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생명을 불어넣어 줄 수도 있습니다. 특별히 참 우리 자녀들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우리 자녀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지 모릅니다. 따라서 우리가 늘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엎드리면서, “주님, 정말 지혜로운 말을 할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주셔서, 우리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생명을 살리는 말이 되게 해 주시고, 용기를 잃었던 사람들의 용기를 다시 한번 얻을 수 있게 해 주시고,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말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잠언서 13장 4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 부지런함과 게으름에 대해서는 이미 수차례 여러 번에 걸쳐서 말씀드렸으니까, 그 말씀들을 참조하시면 좋겠습니다.

잠언서 13장 5절 말씀에서는 이런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거짓말을 미워하나 악인은 행위가 흉악하여 부끄러운 데에 이르느니라.” 의인은 거짓말을 미워하는 겁니다. 하지만 악인은 어떤 사람이겠죠? 정반대죠. 거짓말을 자꾸만 좋아하는 것이죠. 거짓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짓말을 통해서 위기를 모면하고, 거짓말을 통해서 무엇인가 이득을 얻고, 거짓말을 통해서 무엇인가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그 방식으로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일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분명하게 기억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거짓말을 하게 되면 결국은 흉악하여 부끄러운 데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5절의 말씀을 우리 모두가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다 연약해서 늘 실수합니다. 늘 넘어집니다. 조금만 그 이득 때문에 우리의 양심을 팔아버릴 때도 있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에 우리의 양심을 걸어버릴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의 잘못이고 우리들의 연약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이 발각될 때 우리들은 너무나도 부끄럽잖아요? 너무나도 창피하잖아요? 그래서 그 순간에 우리는 그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가장 손쉽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거짓말이죠. 거짓말로 그 위기를 모면하려고 하는 겁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은 또 다른 죄악을 저지르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더욱더 멀어지는 접경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잘못했다고 한다면, 우리 인생은 잘못하지 않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잘못을 인정하고,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그것을 한순간에 실수로 인해서 잘못 생각했습니다. 잘못 생각해서 나쁜 짓을 했고, 잘못 생각해서 거짓말을 했고 잘못 생각해서 훔쳤고, 잘못 생각해서 이런 나쁜 짓을 했는데 그런데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렇게 인정하고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 그게 사는 길이에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들을 꿰뚫어 보시는 것이죠. 우리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그 하나님 앞에서 가린다고 해서, 우리의 그 더러움이 가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나뭇잎으로 가린다고 한들 그 무엇으로 가린다고 한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더러움이 가려질 수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할 것이고, 회개하며 나아가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와 사랑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바로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완벽해서 아무런 죄도 없고, 우리가 완벽해서 아무런 실수도 하지 않고 우리가 완벽해서 정말 모든 것들이 흠잡을 데 없다고 한다면, 굳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야 될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바로 우리들의 그 연약함 때문입니다. 나의 그 옹졸한 마음 때문에 거짓말을 해버리고 나의 그 연약한 모습 때문에,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일들을 너무나도 쉽게 해 버린, 우리들의 그 잘못들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기 위해서 사랑의 피를 흘려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그 주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면서 우리가 자꾸만 거짓말을 하고 또 숨기고, 또 악을 계속해 나가면서 발각되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감추고 또 감춰서 그래서 안전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면, 그것이 가장 위험한 일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고 한다면, 발각시켜줘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면 우리의 잘못을 드러나게 해 줘요. 왜냐하면 그냥 감춰두면 썩을 수밖에 없고, 감추어두면 망할 수밖에 없고, 거짓말로 덮고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좋은 선한 것으로 덮고, 선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를 숨기기에 가장 좋은, 정말 멋있는 나를 가장 잘 숨길 수 있는 것이 선한 행위인데, 가난한 자를 돕는 것처럼 정말 착한 일을 하는 것처럼, 그런 선한 일로 나의 더러움을 온전히 다 덮어버리면 그러면 내가 괜찮은 줄 알아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 괜찮은 게 아니라, 그건 썩어 문들어지는 것이고 망하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더러움을 들추어낼 때, 그것을 또 다른 거짓말로 덮어 씌워서, 또 다른 선한 일을 하는 것을 남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통해서, 그것을 자꾸 들추어내서, 영원히 안 들키게 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들켰구나 생각될 때,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주님 제가 또 실수했습니다. 또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정반대로 행동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엎드리고 자복하며 나아갈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로 우리를 씻으시고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주님 앞에 자복하며 나아가는 놀라운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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