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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지혜 (잠 13:13-19)

오늘 우리가 잠언서 13장에 몇 구절을 함께 읽었는데요. 이 구절의 내용들은 여러 주제의 말씀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통일된 주제를 가지고 있기보다는,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 한 절씩 한 절씩 우리가 그 구절의 의미들을 살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먼저 13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자기에게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받느니라.” 히브리 평행법적인 표현으로 볼 수가 있겠는데요.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자기에게 패망을 이루지만,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받는다고 하는 두 이야기를 병렬시켜 놓은 구절이 바로 잠언 13장 13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18절 말씀에서도 비슷하게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18절 말씀을 보면, “훈계를 저버리는 자에게는 궁핍과 수욕이 이르거니와, 경계를 받는 자는 존영을 받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명, 이것을 우리가 잘 받아들이고 순종한다고 하면, 그 계명을 잘 따르게 된다고 한다면, 상을 받게 될 것이고, 뿐만 아니라 성공하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그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계명을 멸시하고, 안중에 두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게 된다고 하면, 그 사람은 결국 멸망하게 될 것이다. 패망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일관되게 우리를 향해서 가르쳐주시는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말씀을 해 주셨는데요. 계명을 우리들에게 주셨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어떤 이유로 이런 계명을 주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고, 하나님께서는 왜 법칙을 주셨고, 왜 계명을 우리들에게 주셨을까요? 그것은 우리를 속박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계명을 보면, 우리를 속박하는 것 같고,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 같고, 우리가 움직이지 못하게, 우리를 가두어 놓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을 느끼게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러한 계명을 주신 이유는, 우리를 그렇게 가두어 두기 위해서, 우리를 속박하기 위해서 이것을 주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들에게 복을 주기 위해서 계명을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먼저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계명을 주신 목적이 우리로 하여금 복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잘 살아가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이 계명을 주셨다고 한다면, 그 계명을 잘 순종하고 따르고, 그 말씀대로 살아간다고 한다면, 상을 받을 것이고, 그 말씀대로 순종한다고 한다면, 복된 인생이 될 것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산다면, 행복한 인생이 될 거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정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멸시하면서 따르지 않는다고 한다면, 결국은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가? 패망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면, 망하게 될 것이다.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게 되면, 결국은 우리는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게 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에는 사용법이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최근에 저희 집에서 가전제품을 하나 구매했는데요. 그 가전제품을 샀더니, 가전제품만 오는 것이 아니라, 종이 쪼가리가 따라왔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사용 설명서입니다. 사용법입니다. 가전제품을 샀는데, 그 가전제품을 판매하면서, 왜 그 사용 설명서를 그 안에 넣어 두었을까요? 사용법을 거기에 아주 간단하게나마 적어놓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 방법대로 사용해야, 이 가전제품을 최대한으로 잘 활용할 수 있고, 유익하게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속박하기 위해서, 우리를 제한하고, 우리로 하여금 옴짝달싹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런 법칙으로 그 사용법을 준 것이 아니라, 이 가전제품이라고 하는 것을 최대한으로 엄청난 유익을 누리게 만들기 위해서, 이 가전제품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성능을 마음껏 누리게 하기 위해서, 사용법이라고 하는 것을 적어주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는 안타깝게도 법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계명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기쁘기보다는 찜찜합니다. 불편합니다. 법이라고 하는 게 좋게 느껴지는 분 계십니까? 계명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 편하고 좋다고 느껴지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게 아니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계명이라고 한다면, 법률이라고 한다고 하면, 늘 불편한 마음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법이라고 하는 것이 때때로 납득이 되지 않고, 정말 말도 안 되는 법들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불합리한 법들이 우리 사회에 정말 많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불합리한 제도들을 볼 때마다, 불합리한 법률들을 볼 때마다, 굉장히 힘든 것이죠.

저는 운전을 하고 가면서 언제 불합리함을 느끼냐면은 학교 앞에 있는 30km 속도 제한을 볼 때마다 늘 불합리한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납득이 잘 되지가 않아요. 물론 어린이의 생명이 소중하고, 어린이를 보호해야 하겠다고 하는 그 취지에 대해서,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이의 생명을 잘 보호해야 되겠고, 그리고 그 생명이 정말 소중하기에 그 아이들의 생명을 잘 정말 잘 보호해야 한다고 하는 그 취지와 그 목적은 100%, 아니 그 이상 공감하는 바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운전하고 갈 때 어떤 생각이 드냐면, 아이들이 하나도 없어요. 밤 열한 시 12시 1시 2시 새벽 2시 이런 때 아무도 없는 그 거리에서, 30km 속도 제한 사인을 보면서, 저 거리를 천천히 천천히 가야 한다고 했을 때, 정말 불합리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고, 까딱 잘못해가지고, 그것을 잘 인식하지 못해서 벌금이 날아왔을 때에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닌 것이죠. 혹시 벌금 맞아 보신 기억 계십니까? 저는 몇 번 맞았어요. 얼마나 돈이 아까운지 모르겠어요.

제가 미국에 살 때는 어린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스쿨존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이 스쿨존이라고 하는 것은 학교 등교할 때 30분, 하교할 때 30분 신호등이 반짝반짝반짝할 때만 그때만 천천히 가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가 아니면, 정상 속도로 환원되는, 그런 것이 있는데, 이런 식의 법을 만들어 놓고, 천편일률적으로 무조건 천천히 가라고 하니까, 빨리빨리에 익숙한 우리 한국 사람들로서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고, 법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아, 고맙구나.” 이 법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는 것이고, 우리의 안전을 위한 것이고, 모두가 잘 살게 만들 것이라고 하는, 그런 좋은 취지의 법을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짜증이 나고 불편하게 느끼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코로나 상황 가운데서, 코로나를 대응했던 방법도 역시 마찬가지였는데요. 코로나를 막아보자고 하는 그 취지와 정신에는 100% 공감하고, 그 이상 공감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타난 제한들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어요. 너무나도 불편했는데, 공평한 방법이 아니라, 차별적으로 제한을 둬버리니까, 넓은 공간에도 20명만 들어와 있으라고, 우리를 향해서는 말하면서, 다른 곳에서는 지하철에서는 바글바글해도 괜찮고, 식당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밥을 먹어도 되는데, 어느 곳에서는 밥을 먹지 말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고, 법이라고 하는 것이 왜 이 모양 요꼴인가? 어떤 사람들은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아무런 감옥에 가지 않고 떵떵거리며 살 수 있게, 그냥 느슨한 법이지만, 정말 가난한 사람들은 라면 하나 훔친 것 때문에 수십 년 동안 감옥에서 살아야 되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법들을 보면서 과연 법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이라고 하는 그런 의문을 가질 때가 많이 있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계명은 그렇게 불합리하게, 우리들에게 편파적으로, 잘못된 방법으로, 우리를 속박하고, 우리를 구속하는 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영적인 유익을 얻게 만들기 위해서 주어진 하나님의 법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따라서 순종하며 지키는 것이 복된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고, 믿음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성도님들이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도, 하나님의 계명을 읽으면서도, 그 계명이 세상 법률처럼 불합리하다고 느껴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성도님들하고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꿀과 같이 달고, 송이꿀처럼 너무나도 좋다고 그렇게 고백하시는 분들도 있는가 하면은, 어떤 분들은 이 말씀을 보면서, 왜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불합리한 것 같아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제대로 자유를 주지 않는 것 같아요.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셔야 되는지 하면서, 불만을 터뜨리는 경우를 많이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왜 그런 느낌을 가지게 될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 법률과는 달리, 사람들이 만든, 인간이 만든 허점 투성이의 법률과는 달리, 영원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그 만유의 주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 하나님의 법칙은 온전하고, 모두를 영적으로 우리를 충족시켜주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주어진 법인데,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을 그렇게 느끼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동안 우리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에, 마치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성경을 접근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주의로 바꾸어 버려서 이것을 행했느냐? 행하지 못했느냐? 우리가 이것을 행한다고 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행해야 하느냐? 등등과 같은 율법 조항들로 세분화시키고, 그래서 율법을 지켰느냐 지키지 않았느냐를 따지는 율법주의로 성경을 접근했던 것입니다. 그런 바리새파 사람들의 신앙 습관을 우리 한국 교회 성도님들이 너무 많이 닮아버렸어요. 주일 성수하는 것이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든, 또한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하는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 사랑의 관계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해 주셨으며,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것인가?”라고 하는 사랑의 관점으로 성경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마치 율법주의로, 그래서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혼나고, 지키면 복을 받고 하는 식으로 해서, 율법주의적으로 성경을 접근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율법을 계명을 보면서, 마치 불합리하다고 느끼거나, 또한 자기가 그러한 율법을 조금이라도 잘 지키면,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서 정죄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게 되어, 결국 이 복음의 관점을 가지지 못했을 때, 이 율법이라고 하는 것이 귀찮고 정말 거추장스러운 그런 율법이 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과제가 무엇이냐면, 그러한 율법주의적인 관점을 극복하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피 흘려주신 그 놀라운 사랑에 근거하여, 이 하나님의 말씀을 복음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고, 회복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4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혜 있는 자의 교훈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지혜 있는 자의 교훈은 생명의 샘이어서, 그래서 사망의 그물에서, 사망의 덫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지혜 있는 자의 교훈”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지혜 있는 자의 교훈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똑똑한 사람의 훈계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혜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이기 때문에, 지혜 있는 자의 교훈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게 된다고 하면, 그것이 곧 무엇이 된다? 생명의 샘이 된다. 샘에서 물이 계속 솟아오르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산다고 한다면, 역시 우리들에게 생명을 공급해준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될 것이고요. 그다음 행에서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했으니까, 결국 우리를 죄악의 길로, 파멸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영적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게 되면, 결국 영적으로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말씀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는 상을 받을 것인데,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는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일 것입니다.

15절서부터 17절의 말씀을 한번 보겠습니다. “선한 지혜는 은혜를 베푸나, 사악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 무릇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행하거니와, 미련한 자는 자기의 미련한 것을 나타내느니라. 악한 사자(使者)는 재앙에 빠져도, 충성된 사신(使臣)은 양약이 되느니라.” 15절 말씀에서 선한 지혜는 은혜를 베푼다고 말씀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선한 지혜라고 표현하고 있으니까, 우리 생각에 그러면 “지혜는 선한 지혜도 있고, 악한 지혜도 있는 것일까?”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지혜는 선한 것이지만, 악한 것은 도무지 지혜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 잠언서에서 말하고 있는 관점일 것입니다. 잠언은 악한 것을 지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나쁜 사람이 기발한 꾀를 내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고, 악한 방법으로 무엇인가를 얻어내고 하는, 그 모든 것을 가리켜 잠언서에서는 그것을 지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잠언서에서 말하는 지혜는 무엇인가? 선한 것이 지혜예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지혜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지혜라고 가르쳐주고 있으므로, 선한 지혜라고 하는 말의 의미는 이 지혜 가운데 선한 것도 있고, 악한 지혜도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선한 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라고 하는 것 자체가 선하다고 하는,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의미에서 선한 지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15절과 16절 말씀을 평행으로 놓고 보면 “사악한 자”를 16절에서는 “어리석은 자”라고 표현하고 있다고 하는 점을 보시면 좋겠습니다. 15절을 한번 보시고 16절 성경 말씀을 한번 가만히 보시기 바랍니다. 15절과 16절을 평행 구절로 본다고 한다면, 15절에서 “선한 지혜는 은혜를 베푸나, 사악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라고 말했잖아요? 15절에서 사악한 자의 길은 험하다고 그랬는데, 16절에서는 뭐라고 얘기했냐면, 미련한 것을 나타내느니라. “미련한 자가 미련한 것을 나타낸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15절과 16절이 같은 내용을 반복한 것이라고 한다면, 15절과 16절이 평행으로 되어 있는 표현이라고 한다면, 15절에 사악한 자를 16절에서는 뭐로 표현하고 있어요? 미련한 자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선한 자는 지혜로운 것이고, 사악한 자는 미련한 것입니다.

사악하면서도 지혜로운 것이 아닌 겁니다. 나쁜 사람들이 꾀를 낼 수도 있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질 수도 있지만, 그것은 진정한 지혜로 말할 수 없는 것인데요. 왜냐하면 결국 그 사악한 자의 꾀라고 하는 것은 결국 패망의 길로 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15절에서 말씀에서는 “사악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라고 번역을 했는데, “험하니라”라고 하는 번역은 좀 아쉬운 번역입니다. “험하다” 그러면, 견딜만하다는 얘기입니까? 아주 아주 나쁘다는 얘기입니까? 험한 것은 좀 견딜 만하다는 의미가 좀 포함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사악하면, 좀 힘들고 말겠구나”라고 정도 생각하기가 쉽도록 번역을 해놨는데, 그런 의미가 아니라, “사악한 자는 험하니라”가 아니라 “패망하게 될 것이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문의 의미를 살피는 것이 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19절 말씀을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9절 말씀. “소원을 성취하면 마음에 달아도, 미련한 자는 악에서 떠나기를 싫어하느니라.” 소원을 성취하게 되면 어떻다는 겁니까? 마음이 달다. 기쁘다는 얘기죠. 행복하다는 얘기죠. 그런데 소원이 성취되지 않는 것은 어떻게 됩니까? 힘이 빠지죠. 절망적이죠. 축구에서도 보면 두 팀이 팽팽하게 경기를 하다가, 골을 한번 넣게 되면, 갑자기 그 팀의 에너지가 솟아오르기 시작합니다. 갑자기 잘하게 되는 겁니다. 이번에 우리나라가 브라질과의 싸워서 안타깝게 졌는데요. 브라질 주전 선수들은 3차전에서 다 쉬고 나온 선수들이라, 아직 기가 펄펄 살아 있는 선수들이었고, 우리나라 선수들은 3차전에도 최선을 다해서 뛰었기 때문에, 완전히 체력이 바닥이 난 상태에서, 그 세계 최강의 선수들과 싸우는 바람에, 싸워서 이긴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것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더 힘들었던 건 뭐냐면, 골을 먹히게 되니까 더 힘든 거예요. 우리가 먼저 골을 넣었다고 한다면, 힘이 났을 거예요. 그런데 브라질 선수들이 먼저 골을 넣고 나니까, 브라질 선수들은 하늘에 솟아오릅니다. 기뻐서 날 뜁니다. 그렇게 기뻐서, 날뛰고 힘이 나는 사람들을 대하기가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소원이 성취가 되면, 힘이 나고, 아주 능력이 생기고, 더 잘하게 되고 그렇게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소원이 성취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절망하게 되고,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일까 하면서, 스트레스받게 되고, 하는 것도 제대로 못하게 되고, 자꾸만 낙심하게 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소원의 성취를 하는 게 아주 중요하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소원을 성취할 수 있다고 그랬습니까? 지난 시간에 소원의 성취, 그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당연히 해야 될 것이지만, 또 하나의 법칙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죠. 최선을 다해서, 구하고 두드리고, 내가 최선을 다할 때, 소원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19절의 말씀에서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19절 하반절에 보면 “미련한 자는 악에서 떠나기를 싫어하느니라.”라고 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19절 말씀도 히브리 평행법적으로 본다고 한다면, 소원을 성취하는 것과 미련한 자가 서로 대비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요. 다시 말하자면, 여기서 말하는 미련한 자는 누구를 의미하겠습니까? 소원을 이룰 수 없는 자를 말하는 거죠. 소원을 성취하는 지혜로운 자는 마음이 달게 되겠지만, 소원을 성취할 수 없는 미련한 자가 있는데, 그 미련한 자는 왜 소원의 성취를 이룰 수 없는가? “악에서 떠나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소원을 성취할 수 없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소원을 성취하는 방법 중에 또 하나의 방법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악에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인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 오늘 본문의 말씀들이, 다양한 말씀들이 서로 주제와 연관 없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주제는 잠언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일관적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선한 자고, 지혜로운 자고, 그러한 자가 성공하는 자고, 소원을 이루는 자인 반면에, 누가 미련한 자인가? 누가 어리석은 자인가? 누가 성공할 수 없으며, 누가 실패할 수밖에 없고, 누가 패망할 수밖에 없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있는 자는 결국 망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게 오늘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들의 결론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 이 말씀이 우리를 속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그 풍성하심에 동참하게 만들기 위한, 인간을 사용할 수 있는, 인간을 최대의 유익을 나타내며 살 수 있는 사용 설명서가 바로 이 성경 말씀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쁨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늘 그럴 수 없는 유혹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회개해야 되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해야 됩니다. “주님, 주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순종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내 생각이 아니라, 내 욕심이 아니라, 우리들의 육체의 소욕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소중하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 알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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