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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해석학 강좌 제8강 – 묵시문학의 특징을 이해하라

21. 묵시문학의 특징을 이해하라

지난 시간에 성경에는 다양한 종류의 장르(genre)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성경의 장르가 무엇인가, 그 성경의 문학적 종류가 무엇인가를 알고, 그것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고 하는 것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다양한 종류의 장르(genre)가 있는데요. 우선 일어났던 일을 그대로 적은 책들이 있습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같은 책들은 마치 역사책처럼 보이는 그런 책들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무엘상, 사무엘하, 또 열왕기상, 열왕기하, 또 어떤 것이 있을까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사도행전 이런 것들은 다 있었던 일을 그대로 기술하는, 마치 역사책을 쓰듯이, 혹은 전기책을 쓰듯이, 있는 사실을 적어놓은 그런 종류의 책들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시편은 무엇이죠? 시(詩)입니다. 시. 그것은 시요. 노래요. 찬양인 겁니다. 또 잠언이나 전도서 같은 것은 지혜의 문학이죠. 지혜의 문학. 또 성경에는 또 다른 종류의 글들이 있는데,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이런 에스겔서 다니엘서 이런 것들은 어떤 것들이죠? 예언의 책들입니다. 예언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그런 책들이 그런 책들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성경 가운데는 편지글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로마서 고린도 전후서 갈라디아서 등등 신약에 있는 많은 부분들이 편지글로 되어 있습니다. 편지글이기 때문에, 누가 누구에게 보낸다. 인사말도 있고, 등등 그 교회에 해당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야기들을 많이 기록한 그런 편지글 형식으로 된 것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 이것이 어떤 종류의 책인가를 알아야, 그래야 성경을 잘 해석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도 대화할 때 말의 종류가 다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끼리 친구들끼리 농담할 때 하는 말과 그리고 우리가 진지하게 해야 될 말이 분위기가 다른 것이죠. 텔레비전에서도 여러 가지 방송이 나오는데, 개콘, 코미디 빅리그 이런 것에서는 무슨 내용이 나오죠? 코미디가 나오는 겁니다. 9시 뉴스, 8시 뉴스에는 무엇이 나오죠? 뉴스가 나오는 겁니다. 드라마 시간에는 무엇이 나오죠? 드라마가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 중에서 뉴스에 나오는 거 하고, 코미디 프로그램에 나오는 거하고, 그 종류가 다르죠? 뉴스에 나오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됩니까? 대부분은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이 많죠. 하지만 무조건 진실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왜? 객관적이고 아주 공평한 하나님께서 방송을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의도를 가지고, 잘못된 정보를 줄 수도 있어요. 약을 팔아먹기 위해서 정보를 줄 수도 있고, 주식을 팔아먹기 위해서, 가짜 정보를 흘릴 수도 있고, 돈을 받고 잘못된 뉴스를 전파할 수도 있고, 권력의 압력을 받아서 잘못된 뉴스를 전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심지어 뉴스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잘 분별해서 이게 진짜인가, 아닌가, 잘 생각해서 뉴스를 소비해야 되는 것이죠.

하지만 대부분, 예를 들어서 날씨를 방송해 줬다. 날씨에 대해서 뉴스를 해줬다 하면, 대부분 대부분 신뢰하면서 가는 겁니다. 왜? 날씨 때문에 일부러 거짓말할 일은 거의 없으니까, 날씨 같은 것들, 아니면 교통사고가 났다는 등등, 이런 것들은 그냥 다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겁니다. 하지만 똑같은 방송에서 나오지만,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 하는 프로그램입니까? 웃자고 하는 거예요. 웃자고 웃자고 농담하는 겁니다. 실제로 벌어진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웃고 즐기고, 그냥 한 번 호탕하게 웃어버리고 시름을 잃어버리고 하기 위해서, 코미디 프로그램을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게 코미디인지, 뉴스인지, 드라마인지, 이런 것들을 잘, 다큐멘터리인지 아니면 픽션인지, 이런 것들을 잘 구분해서 받아들여야 되는데, 코미디를 보면서 “전쟁이 났습니다.” 코미디에서 하는 소리 듣고, 방공호로 숨어 들어가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는 거죠! 왜? 코미디에서 나오는 “전쟁이 났습니다.” 하는 얘기는 진짜 전쟁이 나서 전쟁이 난 것이 아니고, 웃고 즐기기 위해서 전쟁이 났다고 하는 가정 하에서, 코미디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코미디는 코미디로 즐기면 돼요 하지만 뉴스에서 “전쟁 났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빨리 대책을 세워야 돼요.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시가 있습니다. 역사가 있습니다. 서신서가 있습니다. 대부분은 이런 것들은 우리 성도님들이 해석을 잘해요. 왜? 역사니까, 역사를 있는 그대로 잘 받아들이면 됩니다. 시(詩)는 시(詩)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서신은 서신서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겁니다. 하지만 가장 어려움을 겪는 성경 종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묵시 문학으로 되어 있는 성경입니다. 묵시문학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한번 도표를 봤으면 좋겠는데요. 묵시라고 하는 것은 미래에 일어날 것에 대한 예언을 한 책이 묵시라고 하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고, 아무튼, 그런데 이 묵시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누구이며 어떤 상황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물론 예언이 포함되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우리가 보고 해석해야 하는 것이죠.

묵시문학으로 되어 있는 성경을 우리가 꼽는다고 하면 어떤 성경이 있을까요? 요한계시록이에요. 아주 훌륭합니다. 우리 교인들은 그냥 알아요. 요한계시록이라고 하는 성경책은 묵시문학으로 되어 있는 성경책입니다. 구약 성경 가운데 다니엘서에 나와 있는 내용 일부가, 또 역시 묵시문학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묵시문학으로 되어 있는 것들은 우리가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가? 단순히 역사로 해석해서도 안 되고, 그리고 이것을 단순히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만 해석해도 안 되는 겁니다. 묵시는 무엇인가? 묵시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대부분은 오늘날의 현실을 빗대어서, 우리들의 현실을 들여다보게 만들어주는 거울과 같은 책이 바로 묵시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라이언킹 얘기를 했는데, 라이언킹의 한 장면을 한번 또 보도록 하겠습니다. 라이언킹에 등장하는 심바라고 하는 어린 사자가 아빠를 죽인 것 같다고 하는 그런 두려움 때문에 도망가 가지고, 저 먼 곳에서, 원래의 가정 밀림에서부터 멀리 떠나, 저 먼 곳에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노래를 부르면서 생활을 하죠? “하쿠나마타타” 하면서, 될 대로 돼라. 마음대로. 그냥 이렇게 인생을 책임 없이 살아가고 있는 그 심바에게 원숭이가 나타나서, 이 호수를 들여다보게 만들죠. 호수를 들여다보게 만들었을 때, 이 심바는 그때서야 비로소,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됐습니다. 심바는 지금까지 자기가 누구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이 뭐예요? 아직도 어린 심바로 생각하는 거예요. 나는 아무런 힘도 없고, 아무런 능력도 없고, 나는 무엇인가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런 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나는 조그마한 새끼 사자야. 그게 내가 나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이에요.

그런데, 그 원숭이가 리피키죠? 리피키가 나타나서, 심바한테 이 호수를 들여다보라고 합니다. 호수에 네 아빠가 있다. 한번 봐라. 그런 겁니다. 그래서 아빠를 찾을 수 있다고 하는 말에, 호수에 가서, 자기 그 호수를 딱 들여다봤더니, 호수에 비친 게 누구예요? 자기 자신을 보게 된 거죠. 아빠인 줄 알고, “아빠” 그랬는데, 알고 보니까, 자기가 아빠처럼 커져 있는 거예요. 호수라는 거울에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때, “아, 내가 이미 성년인 사자가 되었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 거죠. 요한계시록이라고 하는 책이 무엇이냐면, 우리의 진짜 영적인 모습이 무엇인가를 들여다보게 만들어주는 책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힘들게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를 우리가 누구인가 호수를 한번 들여다봐라. 우리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은 뭐예요? 나는 늙은 노인일 뿐이에요. 나는 이 세상에서 실패자예요. 나는 아무런 힘도 없어요. 나는 무엇인가 해낼 능력이 없는, 그냥 일개의 조그만 개인이에요. 교회는 뭐예요?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는 교회는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당하고, 저 덜떨어진 사람들, 저 무식한 사람들, 저 정말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주장을 하는 사람들, 하면서 세상으로 온갖 비난을 받고 있는 그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인 것이죠.

그런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 때 요한 계시록은 그 당시 요한 그 당시에 있던 사람들의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호수라고 하는 거울을 들여다보게 만들어주신 거죠. 우리가 누구인가를 들여다보게 만들고, 그리고 우리를 박해하고 있는 로마와 로마 황제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를 들여다보게 만들어주고, 그들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미 우리 요한계시록 했죠? 기억나십니까? 다 잊어버렸어요? 감사합니다. 잊어주셔야 제가 또 할 수 있어요. 아무튼 그런데 저는 이 시간에, 이 묵시문학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서, 요한계시록을 이야기하고 싶은데, 요한계시록 전체를 한번 다 훑어보는 것도, 다시 한번 복습하는 것도 괜찮겠다. 왜냐하면 요즘 우리 주변에 요한계시록으로 우리 성도들의 마음을 미혹하는 이단들이, 너무나도 많이 우리 주변에 있고, 심지어 교회 안에도 이단들처럼 주장하는 그런 요한계시록 설명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교회 안에도 들어와 있습니다.

왜? 장르(genre)를 모르니까, 이 요한 계시록이 어떠한 책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잘못 해석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미혹시키고 있는 경우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제 생각에, 아무래도 요한계시록만 하면 끝날 것 같아요. (오늘 성경대학은). 그래서 하는데, 요한계시록에 나온 여러 가지 이미지들을 한번 보겠습니다.

일곱 금촛대의 환상을 보게 되는 것이죠. 일곱 금촛대가 있고, 그 사이에 주님께서 거니시는 모습을 요한 사도는 환상 가운데 본 겁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우리 성도들이 우리 현실을 보면, 보이는 현실이 무엇이냐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당하고 있어요. 뿐만 아니라, 교회가 완벽한 교회냐면, 완벽하지 않아요. 7개 교회 가운데 완벽한 교회가 있었나요? 물론 두 개 교회, 서머니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는 책망이 없기는 없었지만, 아무튼 7개 교회 중에서 5개 교회는 책망할 게 있었고요. 책망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완벽한 교회였냐면, 사실 그렇지 않아요. 여러 가지 흠이 많은 교회고, 또 뿐만 아니라 순교를 당하며, 위태위태하면서 신앙생활하고 있는 게 보이는 현실인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요한 사도에게 거울을 들여다보시면서, 너희가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주시는데, 어떻게 보여주느냐면, 교회는 금촛대와 같다. 우리는 쓰레기인 줄 알았는데, 우리는 하찮은 그런 허잡한 존재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신가? 금촛대와 같은, 소중한 금으로 만든 것이오. 그리고 우리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당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해서 빛을 비추는, 세상의 길을 인도하는, 많은 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그런 어마어마한 사명을 가진 교회일 뿐만 아니라, 교회는 지금 위태위태하면서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그런 상황 가운데 있는데, 우리 주님께서는 교회를 내팽개쳐 버리고, 모른 척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주님께서 그 교회들 사이를 움직이시면서, 교회와 함께하시고, 고난당하는 자들과 주님께서 함께하시고, 주님께서는 그 교회를 보호하시고, 결국은 승리케 하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곱 금촛대의 환상을 보여주신 거예요.

그다음 장면을 보면 보좌 앞에 24 장로들이 하나님 앞에 찬양하는 그런 환상을 보게 됩니다. 이 환상을 보면서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보이는 현실은 무엇이냐면, 로마 황제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온 세상을 다스리며, 교회를 핍박하고 있는 게,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이에요. 그래서 그 로마 황제에게 복종해야 겨우 살아갈 수 있고, 그 로마 황제 밑에서 정말 목숨이 위태위태하게 하면서, 한숨만 나오는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게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이에요. 그런데 보좌 앞에 24 장로들이 찬양하는 그 영광스러운 장면을 보여주시면서, 하나님께서 해주신 것은 무엇이냐면, “아니다. 로마 황제가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있는 것이고, 지금은 세상 모든 나라가 로마 황제를 향해서 경배를 올려드리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니라, 모든 장로들이 하나님 앞에 찬양을 올리고, 모든 민족과 나라가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결국은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이 세상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쁨과 감격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죠.

그다음에 보면은 일곱 인이 박힌 두루마리의 어 환상을 보게 됩니다. 두루마리에 7개의 인이 박혀 있어서, 아무나 그 두루마리를 펼 수가 없는데, 그 인을 하나씩 하나씩 뗄 때마다, 엄청난 재앙이 닥친다고 하는 이야기가 기록돼 있습니다. 흰말이, 하나를 띠니까 흰말이 나타나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두 번째는 붉은말이 나타나고, 또 죽임을 당하고, 등등 여러 가지 인을 하나씩 하나씩 뗄 때마다, 엄청난 고통이 닥치고 있는데, 이 이야기는 무엇이냐면,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해석하면서 뭐라고 해석하냐면, 이것은 “미래에 있을 고난이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발생하게 되는 것을 예언해 준 것이다”라고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묵시문학의 특징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엉터리 해석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묵시문학에서 지금 이렇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이냐면, 지금 교회가 고난을 당하고 있잖아요? 로마 황제 밑에서 엄청난 고난을 당하기도 하고, 기근에 처하기도 하고, 먹고살기도 힘들고, 죽임을 당하기도 하고, 그리고 정말 순교를 당하기도 하고, 막 그래서 정말 엄청난 재난 가운데에 있는 성도들이 지금 그런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그 고통이 무엇이냐? 보여주는 거예요. 이 환상을 통해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뭐예요? 이런 고난이 너희들에게 닥치고 있지만, 이 고난이 어쩌다 보니까, 우연히, 재수 없어서 일어난 고난이 아니라, 무엇이에요? 하나님의 계획 안에 들어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두루마리 안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하나씩 하나씩 재난을, 지금 이 세상 가운데 보내주는 가운데 이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거예요. 마치 우리가 코로나 바이러스를 위한 면역 주사를 맞는다고 한다면, 면역 주사 1차를 맞고, 그다음에 몇 개월 뒤에 2차 맞아야 돼요? 의사가 정한 그 기간 안에 2차를 맞아야 되고, 2차를 맞고 난 다음에, 또 의사가 정한 몇 개월 뒤에 또 3차를 맞고, 몇 개월 뒤에 또 4차를 맞고, 왜 맞아요? 우리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하는 것인 것처럼, 지금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엄청난 고난을 당하면서 살고 있지만, 이것은 재수 없어서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런 고난마저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환상이 바로 이런 환상인 것이죠.

또 그다음 환상에는 금향로의 환상이 나타나는 겁니다. 금향로가 있어서, 금향로를 천사가 가지고 나가서, 재단에 쏟으니, 그 재단에 쏟아지는 상황 가운데, 우레가 나고, 지진이 흔들리고, 큰 음성이 나고, 번개가 쏟아지는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보이는 현실이 무엇이냐면, 우리 성도들이 기도해도 아무런 응답이 없어요. 아무리 “하나님, 이 저 로마 황제의 그 박해를 좀 제거해 주세요. 지금 이 어려운 일을 벗어나게 해 주세요.” 엄청나게 기도를 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전혀 응답해 주지 않는 것 같아요. 현실은 아무 변화가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것이 무엇이냐면, “너희들이 기도하는 그 기도는 하나님에게 그냥 의미 없는 소음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성도들이 기도하는 그 기도는 그냥 잡음일 뿐이다. 그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보시는 관점은 무엇인가? 성도들의 기도는 금향로에 담겼다는 거예요. 소중하게 담겨서, 하나님 앞에 상달된다는 거예요. 천사들이 그 기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가는데, 그리고 그 기도가 하나님 앞에 쏟아지게 될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가 아니라, 우르릉 쾅쾅 세상이 바뀌고, 지진이 나고, 엄청난 역사가, 이 세상을 바꾸는 그런 어마어마한 역사가,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일어나게 되는 것이라고 하는 영적인 현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다음 장면은 해산한 여인이 나타나고 그리고 붉은 용이 그 해산한 여인의 아기를 죽이려고 하는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이죠. 해산한 여인이 아기를 낳으려고 했는데, 그 용이 나타나서 그 아기를 죽이려고 했으나 실패해 버립니다. 이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냐면, 바로 예수님의 이야기잖아요?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을 때, 사탄은 그냥 가만 내버려 둔 것이 아니라, 헤롯 대왕을 충동질해서, 결국 그 근처에 있던 두 살 이하의 모든 남자아이들을 죽이기도 하고, 엄청난, 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박해가 있었지만, 그러나 그 죽임 가운데 예수님께서 목숨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애굽 땅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나사렛으로 가는 그걸 통해서,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신 그 이야기를, 다시 한번 영적인 관점에서 들려주면서, 우리 주님께서는 그렇게 탄생해서 메시아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만들어주셨는데, 보이는 현실이 무엇이냐면 악한 세력이 도사리고 있어서, 그래서 곧 무너질 것 같지만, 그러나 영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실패가 없고, 마귀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환상으로, 이것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두 짐승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다에서부터 짐승이 나오고, 그리고 육지에서부터 짐승이 나오는데, 그 짐승의 머리에는 머리가 막 몇 개씩 달려 있고, 뿔도 막 있고, 어마무시한 짐승이 바다 위에서 나오고, 육지에서 나와 가지고, 그래서 그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통치하고, 막 박해하고, 그러면서 666표를 받아라. 짐승의 표를 받아서, 그 짐승의 표를 받는 사람들은 매매할 수 있지만, 짐승의 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매매조차도 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을 하게 만드는 것이죠. 그것은 우리가 살다 보면, 먼먼 훗날에 666이 나타나서 그런 일들이 일어날 거다. 그러니까 “그런 때가 되면 666표를 받지 않아야 된다.”라고 하는 그런 예언을 해 주시기 위해서 이런 환상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상황을 묘사해 주는 거예요. 지금 성도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무엇이냐면, 숨 막히는 상황이에요. 신앙을 방해하는 사악한 통치에 의해서, 숨 막히는 상황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지금처럼 자유롭게 살 수 있었나요? 2,000년 전에는, 아니요. 2,000년 전에는 “나, 크리스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했어요? “이 나쁜 놈” 하면서, 돌을 던졌어요. 물건을 사러 가면, “크리스천한테는 안 팔아.” 그런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크리스천이 견뎌낼 수가 있겠어요? 요즘은 우리가 힘이 세져가지고, “우리말 안 들으면, 죽어.” 그 역전이 돼버렸습니다마는, 그 당시에는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이름을 내걸고는 살 수가 없는 거예요. 동네 사람들이 왕따를 시켜버리는 거예요. 크리스천이라고 하면, 물건도 안 팔아요. 아무런 도움도 안 줘요. 그래서 나 크리스천이 아니고, 나 그냥 신앙 버리고 산다고 하면, 그때서야 매매가 가능한 거예요. 그때서야 겨우 살아갈 수 있는 그런 힘든 상황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데, 이 두 짐승의 이야기는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2천 년 전 바로 성도들이 경험하고 있는 그 실제의 상황을, 그들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너희들이 지금 당하는 고난이, 이런 두 짐승이 나타나서 활개 치는 것과 같은 고난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하지만 이 이야기를 통해서 들려주시는 또 하나의 메시지가 뭐예요? 하지만 기간이 정해져 있다. 두 짐승이 영원히 계속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두 짐승이 망하는 거예요. 결국 하나님이 승리하는 거예요. 결국 믿음이 승리하는 거예요. 우리는 완전히 죽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두 짐승이 별거 아니에요. 왜? 더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니까, 아무 문제가 안 된다. 아무리 두 짐승이 나타나고, 너희들을 괴롭힌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하는 메시지를 전해주기 위해서, 두 짐승의 이야기를 해주는 것입니다.

이런 묵시문학과 비슷한 방법으로 문학 작품을 쓴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냐면 바로 존 번연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존 번연이라고 하는 사람은 <천로역정>이라고 하는 그런 책을 지었는데요. 아주 유명한 책이죠. 이 천로역정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들은 다 묵시문학과 비슷한 방법으로 쓰인 책입니다. 성도가, 크리스천이 천성을 향해서 가는 가운데, 두 마리의 사자가 으르렁거리면서, 그 성도의 앞길을 막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고, 무섭다.” 하고, 도망가려고 하니까, 저 앞에 서 있는 사람이 크리스천을 향해서 말합니다. “도망가지 말고, 자세히 봐라. 저 사자를 가만히 봐라. 사자에게 무엇이 매어져 있는가? 체인(chain)이 묶여, 쇠사슬로 묶여 있지 않은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그저 가운데로만 똑바로 가면, 털끝 하나 상하지 않고, 믿음의 길을 승리하며, 갈 수 있다”라고 하는 그 천로역정의 이야기가 사실은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두 짐승의 이야기랑 똑같은 거예요.

두 짐승이 나타나서 엄청나게 박해를 하고, 매매도 못하게 하고, 그래서 숨 막혀 죽을 것 같은 현실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데, 요한계시록의 이야기를 통해서 들려주시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면,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들을 꺾으시고, 이들에게는 기간이 정해져 있고, 이들이 영원히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성도가 승리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승리하게 될 거라고 하는 소망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왜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렇게 이런 환상을 통해서 묵시문학을 통해서 이런 요한계시록을 쓰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지금 요한계시록을 읽으면, 보안 검열에 걸리겠습니까? 안 걸리겠습니까? 안 걸려요. 왜? 거기에 로마 황제를 욕하는 내용이 나와 있습니까? 안 나와있어요. 그 주변 사람들이 박해하는 것에 대한 비난이 있습니까? 없어요. 그냥 동화책 같아요. 그냥 멋있는 “아바타” 그런 영화 같은 책이에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와 가지고, 군인들이 와 가지고, 성도들이 요한계시록 책을 읽고 있네? 요한계시록 어디 한번 보자. “이거 불온서적 아니야” 하고, 쫙 펼쳤는데, “동화책이네” 하고 가는 거예요. 하지만, 성도들은 그 동화책 같은 요한 계시록을 보면서, 무엇을 봐요? 자신들의 현실을 보는 거죠. 그 당시 우리들을 박해하고 있는 군인들, 로마 정부들, 그리고 이웃 주민들에 대한 그들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이야기가 그 책에 쓰여 있는 것이죠. 그걸 보면서 위로를 받고, 힘을 얻고, 믿음 생활을 해나가는 거예요.

예전에 우리,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우리 반 아이는 무슨 서적을 가지고 왔더라고요. “ㅈㄷㅎ에게” 하면서 거기다가 막 욕을 막 써놨어요. 나중에 잡혀가더라고요. 왜? 누구 욕하는지 뻔히 아니까. 근데 요한계시록은 동화책 같아요. 잡혀가지 않아요. 왜? 묵시문학이니까. 로마에 대한 이야기가 한마디도 쓰여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안 잡혀가는 거예요. 왜? 묵시문학으로 쓰여 있으니까. 그래서 이 이야기는 사실은 정말 박해하는 그 세력에 의한 고난을 당한 성도들에게 주어진 책이지만, 이 묵시문학을 읽으면서 우리가 이러다가 망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승리하는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책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계속해서 봅니다. 시온산의 어린양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원산에 어린양이 서게 되고, 어린양의 혼인 잔치로 들어가게 되는데, 14만 4천 명의 성도들이 주님의 혼인 잔치 가운데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지금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서 엄청난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결국 짐승들은 심판을 당하게 될 것이고, 참 믿음을 지킨 수많은 성도들이 주님 앞에 인도될 거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14만 4천 명이라고 하는 얘기는 구원받을 사람이 딱 14만 4천 명만 있다는 이야기입니까? 어떤 이야기입니까?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성도들이 주님 앞으로 인도될 거라고 하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지금 초대교회 상황 가운데서는 참 성도가 몇 명이예요? 몇 명 없어요. 지금 같이 신앙생활하다가 어떤 사람은 순교당해서 죽었고, 같이 신앙생활하다가 변절해 가지고, “나 신앙생활, 더 이상 안 할래.” 하고 나가떨어지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은 그 상황 가운데서, 초대교회 성도들의 숫자가 몇 명이겠어요? 14만 4천 명이나 되겠어요? 안 되는 거예요. 겨우 몇 명 남은 거예요. 겨우 조금 남은 거예요. 그래서 “아이고,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 몇 명 안 되겠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이 요한계시록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도들 몇 명이냐? “14만 4천 명이다”라고 얘기해 줘요. 엄청난 숫자를 얘기해 주는 거예요.

마치 엘리야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하소연합니다. “하나님,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변절해 버리고 나만 남았습니다. 나만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나는 어떡합니까?” 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이 뭐예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7,000천 명이 있다. 엄청나게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다. 네 눈에 한 명도 안 보이지? 네 눈에 한 명도 안 보이니까, 너 혼자 있는 것 같지? 하지만은 7천 명이라고 하는 사람이, 이스라엘 방방곡곡에 숨어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것이죠.

결국 주님과의 혼인 잔치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고, 순교당한 사람은 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된 것이고, 바벨론이 무너졌다고 주님께서 선언하시고, 그리고 짐승의 표를 받은, 아까 두 짐승이 막 나와서 했을 때, 그래서 로마 황제에게 복종하고, 짐승의 표를 받는다고 하는 얘기는 그 로마 황제의 지배를 받는다는 거예요. 로마 황제의 소유물이 돼서, 그 로마 황제의 종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걸 의미하는 거예요. 신앙을 버리고 불신의 세계로 간다고 하는 걸 의미하는 거죠. 근데 그 사람들이 지금은 성공하는 것 같아요. 마치 왜정 시대 때 일본 사람들에게 항복해 가지고, 일본의 밀정 짓이나 하고, 일본 순사 앞잡이 노릇이나 하면, 성공하는 것 같은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이 바로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이나 똑같은 사람들이, 그런데 오늘 이 시온산 위에 어린양의 이야기를 해주면서, (말씀) 해준 것이 무엇이냐면, 그렇게 지금 잘 나가는 놈들은 결국 진노의 포도주를 받아 멸망당하게 될 것이고, 성도들은 결국 하나님 앞에 나가게 되어, 혼인 잔치의 기쁨 가운데 들어가게 될 것이다. 너희들 믿음을 끝까지 지키고 살라고 하는 그런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이죠.

또 천사들이 나타납니다. 이번에 일곱 대접을 가지고서, 그 대접을 하나씩 하나씩 쏟을 때마다, 재앙들이 막 일어나고, 이 대접을 쏟을 때마다 엄청난 재앙들이 나타나는데,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어떤 재앙이에요? 그 옛날 애굽, 출애굽 할 때 있었던 재앙과 비슷한 재앙들이에요. 그리고 또 무엇이 비슷해요? 출애굽 당시에 재앙이 일어났을 때, 그 재앙이 누구에게만 미쳤어요? 애굽 사람들에게만 미치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미치지 않았듯이, 이런 일곱 재앙의 대접들이 막 쏟아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을 보호해 주신다고 하는 겁니다. 아마겟돈 전쟁도 일어나게 되고, 무슨 전쟁도 일어나고, 엄청난 고난의 일들이 있는데, 그러니까 이런 일곱 재앙의 대접들이 있으면, 무서워해야 됩니까?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까? 무서워할 필요가 전혀 없어요. 아무리 큰 전쟁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보호해 주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다 보면, 어느 순간에 2020년이 되면 2050년이 되면 2060년이 되면 그러면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날 거다. 그걸 예언해 주는 것이 아니고, 지금 그들이 당하고 있는 재난, 그들이 당하는 고난을 이런 식으로 다시 한번 설명해 주는 것인데요. 보면은 지금 이스라엘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을 여러 번에 걸쳐서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자꾸만 설명해 줍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일곱 인을 뗄 때마다 재앙이 나타나기도 했고, 나팔을 불 때마다 재앙이 나타나기도 했고, (아까 설명했어야 했는데 그냥 넘어갔습니다)

대접을 쏟을 때마다 재앙이 나타나기도 했는데, 똑같은 재난을 왜 이렇게 반복해서 자꾸만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강조하기 위해서 그런 거예요. 바로왕이 꿈을 꾸었을 때, 이삭에 대한 꿈을 꾸고, 또 소에 대한 꿈을 꿔서, 두 번 두 종류의 꿈을 꿨으니까, 그러니까 풍년 다음에 7년 흉년 7년, 풍년 다음에 7년 흉년 해가지고, 한 4×7=28, 28년 동안에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꿈을 두 번 알려준 건가요? 그게 아니잖아요? 하나의 이야기를 강조하기 위해서 두 번 반복해서 들려주시듯이, 지금 이스라엘 지금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설명해 주고, 저런 식으로 반복해서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붉은 짐승을 딴 음녀의 이야기도 환상도 보이게 되는데요. 붉은 짐승을 탄 음녀가 등장하는데, 일곱 천사가 대접을 쏟을 때, 여러 가지 재앙들이 나타나고, 막 그러는데, 그 가운데 붉은 짐승을 탄 음녀가 등장하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음녀는 무엇인가요?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들이 음녀죠.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음녀예요. 성경에서 영적인 간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게 음녀예요. 그러니까 이 음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그런 사람들을 말하는데, 그러니까 이 붉은 짐승을 탔으니까, 결국은 이 세상의 권력에 편승하고, 이 세상의 권력에 빗대어서 지금 승리하고 있는 그런 사람을 상징하는 게, 붉은 짐승을 단 음녀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이 짐승이 이 음녀를 죽여요. 왜? 결국 이 세상의 것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배신당하고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을 따르는 자는 승리하게 될 것이지만, 짐승을 따르는 자는, 결국은 짐승에 의해서 배신을 당하게 될 거라고 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죠.

그다음에는 백마 탄 사람이 등장합니다. 백마 탄 사람은 누구일까요? 신실한 자, 진실한 자, 만왕의 왕, 만유의 주라고 되어 있고, 만국을 쳐서 다스리고 진노의 포도주틀을 밟는 그런 백마 탄 자가 등장하는데, 이건 누구를 가리킬까요?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죠. 이 모든 그런 재난들이 있지만, 그리고 이 세상에서 박해들이 많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예수님께서 승리하시고, 하나님께서 승리하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이야기해 주는 것입니다.

또 천년 왕국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천년왕국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천년왕국은 용을 결박하여, 천년 동안 무저갱 속에 가두어 둡니다. 그래서 그 용이 활동하지 못하도록 가두어 버리고,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는 기간이니, “천년 기간이다”라고 말하고 있어요. 이 이야기는 이 천년이라고 하는 기간이 먼 미래에, 언젠지는 모르지만 저 미래에 일어날 일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까? 지금 이 세상이 천년 왕국이라고 봐야 맞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지금은 천년 왕국이 아니라고 생각을 해요. 왜? 천년 왕국은 천사가 사탄을 용을 사로 잡아가지고, 체인(chain)을, 쇠사슬을 채워서 무저갱 속에다 팍 집어넣고, 활동을 전혀 못하게 막아버려서, 용이 활동을 전혀 못하게 하는 가운데, 성도들이 천 년 동안 다스리는 거니까, 지금은 사탄이 활동하고 있어요? 활동하고 있지 않아요? 활동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지금은 천년 왕국일 리가 없어. 지금은 천년 왕국이 아닌 이유는, 사탄이 아직도 활동하고 있으니까, 천년 왕국이 아니야라고 결론을 내리고, 미래의 어떤 그 순간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때, 천년 왕국이 오게 될 거다. 천년 왕국이 오게 되면, 그때는 어떤 징조가 나타날 것이고, “그때가 되면 이런 일들이 있겠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것은 묵시문학의 특징을 몰라서 하는 이야기예요. 묵시문학의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천로역정> 같은 거라고 그랬잖아요? <천로역정> 크리스천이 지금 천성을 향해서 가는 그 길에 사자가 등장하는데, 그 사자에 무엇이 채워져 있어요? 쇠사슬이 채워져 있단 말이에요. 래서 성도가 가운데 길로 똑바로 가면, 그 사자가 크리스천을 건드려요? 못 건드려요? 못 건들어요! 하나도 못 건들어! 털끝 하나 상하게 할 수 없어요. 그런데 성도 여러분, 털끝 상해요? 안 상해요? 상하고 있잖아요? 우리가 다치고 있잖아요? 우리 많이 고통을 당하잖아요? 어려움을 많이 겪잖아요? 이 세상 살면서 많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어요. 당하고 있지만, “절대로 너희를 건들지 못한다”라고 하는 메시지를 주는 거예요. 왜? 용이 무저갱 속에 들어가서 꼼짝도 못 한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왜? 그 용이 우리를 결코 이길 수 없다. “우리는 용에 의해서 정복당하는 게 결코 아니고, 결국 주의 은혜 가운데 승리할 것이다”라고 하는 메시지를 전해주기 위해서, 이런 표현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묵시문학적인 관점으로 본다고 한다면, 실제로는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상처들이 많습니다. 사탄과의 싸움에서 엄청난 상처들을 당하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천사를 동원해서, 그 용을 무저갱 속에 집어넣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성도들에게 들려주시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면, “그 바이러스가 너를 망하게 못하는 거야”라고 말씀해 주시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면역 주사를 맞았는데, 막 열이 올라요. 면역 주사를 맞으니까, 그러니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걱정이 생기잖아요? 나 코로나 이기려고 면역 주사 맞았는데, 코로나 증상이 나타나요. 열이 나타나요. 어떻게 해요? 그러면 의사가 뭐라고 얘기해요? “걱정하지 마세요. 금방 괜찮아질 겁니다.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 들어와도, 이겨낼 겁니다.”라고 이야기해주는 거죠. 지금 이 천년 왕국에 대해서 이야기해주는 게 그거예요. 우리 주님께서는 이미 십자가 위에서 사탄의 권세를 밟아 눌러 이기셨습니다.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권세를 완전히 박살 내버리고, 영원한 왕으로 등극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사탄은 결코 이길 수가 없고, 결코 성공할 수가 없고, 결코 성도를 해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것을 드러내주기 위해서 천년 왕국의 그림으로 묘사를 해주는 거죠.

새 하늘과 새 땅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가면, 새 예루살렘이 생기는데, 거기는 성전이 없어요. 왜 주님께서 그곳에 계시기 때문에, 성전이 필요 없는 것이죠. 생명수가 흐르고 열매가 맺혀 있는데, 그것은 지금 우리가 악의 고통 가운데 살아가고 있지만,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들의 눈물을 닦아줄 날이 머지않았다고 하는 예언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묵시문학에서 그려주고 있는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가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가? 큰 그림으로 봐야 돼요. 큰 그림. 큰 그림. 큰 그림으로 보지 않고, 세밀한 부분을 가지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이 묵시문학을 오해할 가능성들이 많습니다. 제가 요한계시록을 강의할 때 보여줬던, 그림 중의 하나인데요. 어떤 아이에게 “너희 가정을 어항 속에 물고기로 한번 그려보라”라고 했더니, 어떤 꼬마 아이가 자기 집안을 그렸어요. 어항 속에 물고기로 표현한 거죠. 엄마는 문어로 표현했고, 아빠는 어항 저 구석에 있는 메기로 표현했고, 동생은 저 위에 있는 물고기, 그리고 나는 수초 사이에 숨어 있는 그런 꽃게로 그려놓은 겁니다. 왜 엄마를 문어로 그려놨나? 왜 그려놨겠어요? 집안의 모든 것들을 다 엄마 손에 의해서, 다 모든 게 다 움직여지니까, 엄마는 꼬마 아이의 눈에 볼 때 문어 같은 거예요. 아빠는 왜 매기로 그렸어요? 자기 할 일만 하고 있어요. 저 밑에서. 집안일엔 관심 없고, 자기 할 말만 하고 있는, 그 아빠. 다른 그림들은 설명하지 않겠지만, 나를 꽃게로 그려놓은 겁니다. 너를 왜 꽃게로 그려놨니? 왜 수초 속에 숨어있니? 저는 다른 사람들이랑 만나기 싫어요. 나 혼자 있고 싶어요. 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수초 사이에 숨어 있는 거예요. 그리고 누가 만일 나를 건들면, 콱 물어버릴 거야. 나한테 뭐라고 얘기하면, 확 물어버릴 그런 태세를 하고 있기 때문에, 꽃게로 자기 자신을 그려놓은 거죠.

이 그림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가? 큰 그림을 봐야 되는 거죠. 아 엄마를 왜 문어로 그렸을까? 아빠를 왜 메기로 그렸을까? 왜 동생은 저 위에 떠 있는 물고기로 그렸을까? 그리고 자기 자신은 왜 저 꽃게, 수초 사이에 숨어 있는, 그 수풀 사이에 숨어 있는 꽃게로 그렸을까? 큰 그림을 봐야죠. 근데 안타깝게도 수많은 우리 크리스천들이 요한 계시록을 해석하면서, 어떤 질문을 던지냐면, 이 꽃게 다리가 몇 개지? 어, 꽃게 다리가 이게 이렇게 접혀 있네? 문어에는 이 빨판이 몇 개지? 빨판이 여기에 이렇게 붙어있네? 메기에 수염이 이게 두 개 달려있네? 메기수염이 두 개인 이유가 뭐예요? 이쪽 두 개, 이쪽 두 개인 이유가 뭐예요? 왜 그렇게 그려놨을까요? 아무 의미 없어요! 왜 수초는 3개 그렸을까요? 수초를 여러 개 안 그리고, 왜 세 개만 그렸을까? 거기 무슨 의미가 있죠? 의미 없어요! 성경을 해석하면서 큰 그림으로 봐야 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겁니다.

묵시문학 특히, 다른 거는 그렇지 않을 수 있어요. 다른 성경에서는. 그러나 묵시문학에서는 큰 그림으로 봐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요한계시록의 학자가 되다 보니까, 세밀한 부분에 관심이 가지고, 그래서 그 세밀한 부분에 의미가 뭐가 있지 않을까 하다 보니까, 삼천포로 빠지는 거예요. 학자들도 많이 삼천포로 빠지고, 목회자들도 많이 삼천포로 빠지고, 성도들도 많이 삼천포로 빠지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요한계시록은 어느 날 미래에 있을, 어떠한 예언의 이야기가 주안점이 아닙니다. 모 이단 집단에서는 그 교주가 백마를 탄 사진을 찍었어요. 왜? 요한계시록에 나온 백마 탄 자가 자기라고 하는 것을 은연중에 자기 신도들한테 어필해 가지고, 추종하게 만들고, 복종하게 만들기 위한 방법을 쓴 거죠. 옛날에 박태선이라고 하는 이단은 뭘 했습니까? 자기가 뭐래요? “두 감람나무다.” 두 증인, 두 감람나무, 왜 두 명이죠? 증거 할 땐 보통 둘씩 증거 하잖아요? 구약시대 때 법이 한 사람의 증거는 증인으로서의 가치가 없고, 두 세 사람이 증언해야만, 증언이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항상 두 명의 증인이 나오는 거예요. (내가 이거 설명했나요? 안 했죠? 넘어간 것 같습니다.)

두 증인이 있는데, 이 두 증인이 뭐냐면, 우리 성도들의 모습을 가리키고 있는 거예요. 초대교회 당시에 성도들이 복음을 전하러 다니는 겁니다. 전하러 다니는데,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라고 하는 사실을 초대교회 성도들이 전하고 다니는데, 초대교회 성도들이 복음 전하다가 좋은 꼴을 봤을까요? 아주 험악한 꼴을 당했을까요? 험악한 꼴 당하는 겁니다. 전도하러 갔다가 두드려 맞는 겁니다. 전도하러 갔다가 그냥 잡혀가기도 하는 거예요. 엄청난 괴로움을 당하면서 전도하고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그 전도자들이 돌아와서 고통 가운데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참 이렇게 전도하는 게 너무 힘들다. 아무도 우리들의 말을 받아들여주지 않는다. 과연 이런 전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고 낙심하고 있는 우리 초대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이 그림을 보여주는 겁니다. 두 증인을 해하려 하면, 불이 나와 그들을 삼켜버리고, 그 증인들이 말하는 것에 따라서, 비가 오지 않게 되거나, 물이 피로 변하거나, 여러 가지 능력들이 나타나는 그런 일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무저갱에서 나온 짐승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지만, 다시 살아나 하늘로 올라가고, 그런 모습들을 보여주면서, 하나님께서 이 초대교회 성도들 증인들에게 들려주신 것이 무엇이냐면, 너희들이 전하는 그 복음 전파가 아무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엄청난 영적인 파워를 가지고, 지금 엄청난 일들을 너희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의 선포가 위태로워 보이지만, 그러나 사실은 너희들의 전하는 그 복음 전파로 인해서 사람들이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고, 권능의 역사가 일어나고, 승리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봐라. 그걸 말해주기 위해서, 이런 두 증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어느 날 이단이 나타나서 “내가 감람나무요”라고 말할 게 아니다 이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이 요한계시록을 마치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실에 대한 그러한 것들로 대비시켜서 말하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666이라고 하는 것은 컴퓨터다. 그런 얘기 들어봤죠? 666은 바코드다. 666은 RFID다. 666은 뭐 뭐다.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진짜 그래 막 깜짝깜짝 놀라요. EU(유럽연합)이 10개 나라가 있으니까, 열 뿔이 있다고 그랬잖아? EU 연합이 10개 나라니까, EU가 바로 그 짐승의 나라다. 지금 EU가 몇 개국이에요? 10개가 아니고, 스물몇 개 되죠? 그러니까 이 현실에, 막 요한계시록을 막 이렇게 억지로 꽤어 맞히면, 그냥 얼렁뚱땅 숫자 하나 맞고, 이렇게 맞을 수는 있으나, 엉터리 해석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예언적인 해석은 그건 바람직한 해석이 아닌 것이죠.

그래서 요한계시록이라고 하는 것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주어졌던 그 위로와 아 격려의 메시지로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이고요. 그러면 이 메시지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사실은 초대교회 상황과 우리의 상황이 다르지 않은 겁니다. 우리도 아주 초대교회와 비슷한 상황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우리도 때때로 실패하기도 하고, 우리도 세상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기도 하고,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 너무 힘들기도 하고, 이 세상의 방법대로 살아야만 겨우 목에 풀칠할 것 같은 이 세상에, 그 명령에 듣고 따르는, 그 이마에 내가 종이 되었다고 하는 그 표시를 하고 살아야만, 겨우 살 것처럼 보이는 세상 가운데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읽으면서, “아 그게 아니구나.” 우리는 실패자들이 아니라, 승리자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셔서, 주님과 함께 온 세상을 다스릴 왕적인 그런 제사장과 같은 그런 권한을 부여받은 그런 믿음의 승리자들이다. 결국 우리가 승리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요한 계시록을 통해서 배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옆에 사람을 보면서 한번 얘기해 봅시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은 정말 위로의 책이에요. 망해가고 있는 사람들 망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위로의 책으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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