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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반대말은 거만함 (잠 14:5-9)

우리가 매주 수요일마다 잠언서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고 있는데요. 벌써 14장. 거의 중간 정도에 오게 됐습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서 특별히 5절의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평상시는 한 두 절, 석 절 살펴봤는데, 다섯 절이니까, 양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서 간단간단하게 말씀을 살펴보면서, 은혜를 누리고자 합니다.

먼저 5절 말씀을 살펴보고 싶은데요. 5절 말씀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신실한 증인은 거짓말을 아니하여도, 거짓 증인은 거짓말을 뱉느니라.” 오늘 본문의 메시지는 재판정에서 증언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재판정에서 진실한 증언을 할 것인가? 거짓 증언을 할 것인가 하는 그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인데요. 사실은 재판정에서뿐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 전반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사실은 재판정에서만 재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도 재판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하는 말에 따라서, 우리가 증언하는 바에 따라서, 사람들이 어떤 사람에 대해서 평가하고 판단하게 되는 것인데, 우리가 하는 그 말이 진실한 말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거짓을 말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점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성도님들은 가짜 뉴스, 가짜 정보, 가짜 증언들을 퍼 나르기보다는 과연 진실한 것인지, 우리가 한 번 정도는 더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죠. 우리 성도님들이 우리가 들은 대로 그냥 전달하게 되면, 나는 들은 것을 말한 것이니까, 나는 들은 것을 이야기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우리가 그렇게 들은 것이 진실인가 거짓인가에 따라서, 우리는 거짓의 동참자가 될 수가 있는 것이고, 거짓말에 동참자가 될 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서 결국 많은 피해자가 생길 수 있고, 거짓 정보로 인해서, 거짓 증언으로 인해서, 정말 나쁜 그런 피해를 당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이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우리가 판단해보아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가운데, 우리에게 들려지는 모든 정보들은 다 객관적이고 그리고 모든 것이 다 투명한, 진실만이 우리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편파적이고 그리고 곡해되고 그리고 이기적인 탐욕적인 목적에 따라서, 사실을 왜곡한 정보들이 우리 주변에서 많이 떠돌아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의 그런 탐욕을 위해서, 사실을 왜곡하는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내가 이 물건을 잘 팔아먹기 위해서, 어떤 약을 판다든지, 어떤 식품을 판다든지, 어떤 생산물을 판다든지, 아니면 부동산을 판다든지, 무엇을 팔든지, 그것을 더 많이 팔고, 더 많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 거짓 정보를 보여줄 수가 있는 것이죠. 이것을 먹으면 마치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선전하는 겁니다. 그런 악한 마음을 가지고, 거짓 정보들을 퍼트리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가 그냥 들으면, 들은 그 모든 것이 객관적이고 사실이고 진실이니까, 그렇게 추정하고서 무조건 전달할 게 아니고, 우리는 이것이 과연 진실인지 거짓인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 있어서, 많은 부분에 있어서, 거짓 정보들이 넘쳐날 수가 있겠는데,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거짓 증언에 참여하는 사람이 아니고,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거짓말을 하게 됩니까?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이 우리들의 우상이 되어 있을 때, 우리는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이죠. 거짓말은 그래서 우상숭배의 죄에 빠지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는 진실을 전하기 위해서,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 대단한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우리의 내 모습을 속이고 포장하고, 잘못된 모습들을 보여주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보다도 내 체면이 더 중요하고, 하나님보다도 내 이익이 더 중요하고, 하나님보다도 내 명성이 더 중요하고, 하나님보다도 재물이 더 중요해서, 우리는 거짓말을 하게 될 경우가 많이 있게 되겠는데,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참되고 진리의 말씀만을 참된 말만을 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6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만한 자는 지혜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거니와, 명철한 자는 지식 얻기가 쉬우니라.” 여기서 거만한 자라고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요? 거만한 자라고 하는 것은 비웃는 자, 경멸하는 자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단어를 이렇게 번역한 것인데요. 그렇게 거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경멸하고, 비웃는 사람은 지혜를 구하여도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지혜는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반대로 생각하면 되겠죠. 거만하지 않은 사람, 비웃지 않는 사람, 경멸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인데요. 따라서 겸손한 자가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거만한 자는 왜 지혜를 얻을 수가 없을까요? 왜냐하면 거만한 자는 그 지혜를 알아볼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 주어진다고 할지라도, 그 좋은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을 알아볼 수 없다고 한다면, 무용지물이죠.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이죠. 지혜는 누구에게 보이는가? 겸손한 자의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거만한 자는 옆에서 사람들이 충언을 해주어도, 사람들이 이야기를 해주어도, 그 말을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교만하기 때문에 내가 제일 똑똑하고, 내가 제일 잘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것이고, 그 다른 사람들의 조언과 충언을 아주 하찮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결국 그 거만한 자는 그 지혜를 얻을 수가 없다고 하는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거만함이라고 하는 안경을 쓰고 있으면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는 거만함이 있어요. 늘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겠지만은, 젊었을 때 교만한 마음이 있으니까, 아무것도 배울 수가 없어요. 정말 훌륭한 사람이 있고, 정말 멋진 사람이 있고, 대단한 업적을 이루어놓은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에게서 내가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저 사람에게는 어떤 장점을 배울 수 있을까? 저 사람에게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 하면서 배워야 하는 것인데, 내 마음속에 교만함이 있다고 한다면, 무시해 버리고,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 내 앞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을 무시해 버리고 배울 수가 없는 것이죠. 거만함에 안경을 쓰고 있다고 한다면, 아무것도 장점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 지혜를 얻을 수 있는가? 그 거만함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는 겁니다. 겸손하게 낮은 곳으로 내려오면, 그때서야 진리가 보이고, 지혜가 보이게 되는 것이죠. 이 사람에게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저 사람에게는 어떤 장점을 배울 수 있을까? 심지어 우리 꼬마 아이들에게서조차도 배울 것이 있는데, 우리가 어른이라고 하는 그런 거만한 마음을 가지고, 이 조그마한 녀석들이 무엇을 알겠는가라고 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한다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는 것이죠. 오히려 우리는 어린아이들 앞에서도 겸손한 마음으로 이런 어린아이들에게서도 배울 것이 없을까? 겸손함의 자리로 내려와야, 낮아지는 자에게 지혜가 발견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이라고 했을 때, 어린아이는 어떤 자를 어린아이라고 하나요? 자기 자신을 낮추는 자죠. 자기 자신을 낮추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8장 3절 4절 말씀에,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고,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내가 연약하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자기 자신을 낮추어야 천국을 발견할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것인 반면에, 지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혜도 누가 발견할 수 있는가? 어린아이처럼 자기 자신을 낮추고, 나는 부족하고, 나는 배울 게 더 많고, 그렇게 자기 자신을 낮추어야, 결국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점을 우리가 기억하면서, 혹시라도 우리의 삶 가운데서 교만함이 있다고 한다면, 내가 경험도 많고, 내가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내가 이런 높은 위치에 있고, 이러한 것들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우려고 하는 자세가 없다고 한다면, 지혜를 얻을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겸손하게 지혜를 구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절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너는 미련한 자의 앞을 떠나라. 그 입술에 지식 있음을 보지 못함이니라” “너는 미련한 자의 앞을 떠나라”라고 오늘 말씀해 주고 있는데요. 미련한 자의 앞을 떠나라고 하는 말씀의 의미는 무슨 의미일까요? 미련한 자에게서 떠나라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미련한 자가 있으면, 그런 사람들하고는 상종을 하지 말라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만일 우리 집의 옆집에, 미련한 자가 살고 있다고 한다면, 그런 미련한 자하고는 인사도 하지 말고, 아는 척도 하지 말고, 그 사람하고는 아예 거리를 끊어버리라고 하는 그런 의미로 말씀해 주시는 것일까요? 만일 우리가 결혼을 했는데, 내 아내나 내 남편이 미련한 자면, 이혼해 버리라고 하는 그런 의미로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어떤 의미일까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지혜로운 자들과 어울려 살겠다고 한다면, 그것이 가능할까요? 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보통 우리 성도님들의 마음 가운데는 어떤 열망이 있냐면, 정말 순수한 공동체를 만들고 싶은 열망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어떤 열망이 있냐면, 정말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싶은 열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늘 기쁨이 넘치고 늘 감사가 넘치고 정말 행복하고 그랬으면 좋겠는데, 안타깝게도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그런 일들도 있지만, 기분 나쁜 일도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어요! 있어요.

어떤 사람을 보면 정말 저 사람은 아닌 것 같고, 저 사람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고, 저런 사람이 어떻게 신앙인일까? 어떻게 저 사람이 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까? 생각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열망이 생기냐면, “저런 엉터리 신자들, 저런 가짜 성도들, 정말 부족한 성도들, 저런 사람들 없이 정말 믿음이 좋은 사람들끼리, 우리 교회를 이루어서, 정말 좋은 교회를 만들면 어떻겠는가?”라고 하는 그런 생각이 문득문득 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신앙생활하다 보면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성도가 있을 수 있어요.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 지도자가 있을 수 있어요. 그럴 경우에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이 드냐면, 그저 그런 가짜 성도들, 잘못된 성도들은 다 내 팽개치고, 우리끼리 정말 믿음 있는 사람들끼리 함께 우리 그룹을 만들어서, 그래서 “정말 믿음이 순수한 사람들끼리 신앙생활을 하면, 기쁘고 즐겁고 정말 그 공동체는 행복한 공동체가 되지 않을까?”라고 하는 그런 소망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역사를 통해서 그렇게 정말 순수한 믿음의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열망들이 여러 번 표출이 된 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교회는 교회는 정말 믿음이 좋은 건강한 성도들의 공동체가 교회가 아니고, 교회는 영적인 환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의사가 필요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해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따라서 교회라고 하는 곳은 무엇인가? 교회는 무엇인가? 영적으로 건강하고 믿음이 좋은 사람들끼리 모여 있는 곳이 교회가 아니고, 사실은 교회라고 하는 것은 연약한 사람들이 모인 것이에요. 삭개오와 같은 사람들, 여러 가지 부족한 사람들이 모여서, 그 교회 안에서 영적으로 성숙의 길을 걸어가는, 함께 건강 영적인 건강을 위해서 같이 노력하면서 나아가는 교회가 그게 정말 교회라고 하는 점입니다.

우리들은 갈망하죠. 교회는 어떤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는가? 사람이 넘치기보다 사랑이 넘치는 교회, 섬김을 받기보다는 내가 섬기는 그런 교회, 이런 교회가 되게 하여 주소서 하면서, 우리는 그런 소망을 가지고 있는데, 사실은 그런 소망을 그대로 이루기 위해서 좋은 성도들끼리 모이면, 그게 좋은 교회가 되느냐?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혜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어리석은 자에게서 떠나라라고 말씀해 주고 있으니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이 드냐면, 맞아. 어리석은 사람들하고 괜히 섞일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들과 같이 정말 힘들게 고통을 당하면서, 그렇게 살 것이 아니라, 지혜 있는 자들끼리, 서로 우리들의 리그를 만들고, 지혜 있는 사람들끼리, 우리가 그룹을 만들어서, 우리끼리 어울리고 우리끼리 같이 즐기고, 우리끼리 같이 교제한다고 한다면, 너무나도 좋을 것 같다고 하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마는,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런 우리들의 생각을 옳다고 해주는 말씀처럼 생각이 들 수가 있지만, 사실은 이 말씀의 의미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이 말씀은 지혜자들만의 그룹을 만들어서, 그 안에서만 교제할 것이고, 어리석은 사람이 있으면 일절 상종도 하지 말고, 그런 사람은 아예 무시해 버리고, 그런 사람은 쫓아내 버리고, 그저 지혜자들끼리만 그렇게 살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너는 미련한 자의 앞을 떠나라” 그랬는데, 미련한 자의 앞을 떠나라고 하는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시편 1편 1절의 말씀과 같은 의미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시편 1편 1절의 말씀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예 교제를 하지 말라고 하는 의미가 아니라, 악한 사람이 우리가 같이 악을 행하자 할 때, 그 악에 동참하지 않는 것이죠. 악인의 꾀를 따라서, 악한 일에 동참하지 말라고 하는 의미고, 죄인들의 길에 서서, 같이 죄인들과 함께 죄를 짓는 그 길에 동행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함께 앉지 말고, 겸손의 자리로 내려오라고 하는 것이고, 미련한 자에게서 떠나라고 하는 이야기는, 그런 사람과 절대 상종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로 하여금 죄악의 길로 가게 만들고, 하나님을 떠나는 길로 가게 만들고,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할 때, 그들에게 이끌리어서, 그들과 함께 죄악의 길로 걸어갈 것이 아니라,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삶을 살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미련한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아이큐가 낮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잠언서에서 말하는 미련한 자는 어떤 사람이 미련한 자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잠언서에서 말하는 지혜로운 사람은 누굽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고, 미련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인 것이죠. 그들에게서 떠나라고 하는 말은 그들과 전혀 교제하지 말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만일 내 아내가 내 남편이 그런 사람이라고 하면 이혼해 버리라고 하는 그런 말이 아니에요. 만일 그게 우리 이웃이라고 한다면, 그런 이웃과는 아예 담장을 쌓아버리고, 절대로 이야기도 하지 말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들에게서 떠나라고 하는 말은 그들의 악행에 동참하지 말라. 그들의 불신앙에 동참하지 말라고 하는 의미인 것이지, 그저 지혜자들끼리, 그저 엘리트 그룹들끼리, 그저 신앙이 좋은 사람들끼리 끼리끼리 모여서, 우리가 우리끼리 있으니, “너무 좋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변화산상 위에 올라가게 되었을 때, 그때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아와 함께 이야기하는 그런 모습을 본 베드로는 너무나도 좋았어요. 이 세상에서는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습니까? 이 세상은 저 로마 병정들의 압제 가운데 살아야 하는 삶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바리새인들 그리고 제사장들 서기관들이 종교 지도자들이 정말 악한 짓을 하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살아야 되는 세상이 이 세상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온갖 나쁜 것들이 많은, 그 세상에 살다가 변화산 위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고, 모세가 나타나고 엘리야가 나타나는 그 모습을 볼 때, 이 베드로의 마음이 너무나도 좋았어요. 그래서 예수님에게 간청하는 겁니다.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서 우리가 지냅시다. 내가 초막을 만들겠습니다.”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모세를 위하여 엘리아를 위하여 만들겠다고 하고, 그곳에 있고 싶어 하는 그 베드로를 향해서, “우리가 저 산 밑으로 내려가자. 거기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 하나님의 법에서부터 떠난 그런 사람들, 그리고 여러 가지 병자들 다 고치고 치유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 사명의 현장으로 들어갔다고 하는 점을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왜 우리들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 불신앙의 사람들에게서부터 떠나가야만 합니까?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과 함께하면, 결국 망하는 길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종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바른 길로 인도하는 삶을 살라는 겁니다. 그들의 영향에 빠지지 말고, 오히려 그들을 믿음의 길로 바른 길로 인도하는 삶을 살라고 하는 것이 그 미련한 자들에게서 그 앞에서 떠나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다니엘서 12장 3절 말씀에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미련한 자의 앞을 떠나라고 하는 얘기는, 그런 사람들과 상종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향을 받지 말고, 오히려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며, 지혜의 길로 인도하고 하나님에게로 인도하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될 줄로 믿습니다.

8절 말씀 읽어봅니다. “슬기로운 자의 지혜는 자기의 길을 아는 것이라도,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은 속이는 것이니라.” 9절 말씀도 함께 읽습니다.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 정직한 자 중에는 은혜가 있느니라.”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지혜로운 사람은 죄가 무섭다고 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기 때문에 죄가 무섭다고 하는 것을 아는 것이죠. 하지만 미련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죄를 가볍게 여기는 거죠. 죄를 짓는 것을 별거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마치 술 먹고 운전하면 될까요? 안 되죠. 음주운전을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왜? 음주 운전하게 되면 큰 사고가 일어나게 될 것이고, 내 목숨도 위태로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위태롭게 만드는 그런 처참한 결과가 빚어질 것을 알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은 술을 마시고 운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미련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술을 마시고 운전을 하는 거죠. 왜? 그것이 얼마나 큰 결과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해서, 그냥 무시해 버리고, 그렇게 술 먹고 운전하는 거예요. 음주 운전에 대해서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 되는 것이죠. 그런 사람은 미련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와 마찬가지로,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는 무엇입니까? 죄라고 하는 것은 아주 무서운 거예요. 지을 때는 달콤할 수 있어요. 지을 때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어요. 지을 때는 그냥 오히려 내 기분을 속 시원하게 만들어줄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죄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죠. 죄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옵니까? 사망이라고 그랬어요. 로마서 6장 23절의 말씀에 “죄의 삯은 사망이오.” 그랬어요. 죄의 삯이 사망이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죄를 가볍게 여길 것이 아니라, 이 죄가 정말 무섭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죠. 모든 행동에는 결과가 따르는 것인데, 죄는 죽음의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그것을 보지 못한다고 한다면, 어리석은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몰랐기 때문에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은 겁니다. 먹는 게 그게 뭐 대수로울까? 오히려 지혜롭게 하고, 오히려 눈이 밝아질 것 같기도 하고, 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죠. 라멕은 사람을 죽이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엘리의 두 아들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의 제사를 모욕하고 죄를 짓는 것이 아무런 마음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별 문제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마음껏 죄를 저질렀던 것이죠.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끔 그렇게 거짓말했다가, 결국 사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내가 아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모르고, 그냥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리석은 사람들인 것이죠.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지혜로운 사람은 이 죄를 짓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지혜로운 사람을 찾는다고 하면, 누구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요셉을 찾을 수가 있는 것이죠. 요셉은 어느 날 주인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유혹을 당했을 때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에게 대답을 합니다. 창세기 39장 8절 9절 말씀에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니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까?” 아무도 보지 않는 그 상황 가운데서, 내가 이 죄를 짓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짓는 죄고, 이것이 엄청난 죄라고 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는 단호하게 거절한 것이죠.

하나님 앞에 서는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를 가볍게 여길 것이 아니라, 심각하게 여겨야 되는 것이고,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해 왔던 그런 잘못들을 우리는 그 죄가 얼마나 큰 죄인가 우리가 늘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왜 죄를 짓습니까?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해서, 죄를 짓는 것이죠. 심상이 여겨서 죄를 짓는 것이죠.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삶이 정말 중요한 삶인데,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으면서도, 이것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되는데, 엎드리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그냥 사는 거예요. 정말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 정말 중요한데, 그냥 무시해 버리고 사는 것이죠. 괜찮은 것 같아요. 다 잘 사는 것 같아요.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아요. 거짓말하고 분노하고 또한 용서하지 아니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악한 생각을 품고 뿐만 아니라, 우리만 사랑하고 나만 사랑하고 이웃에 대해서 사랑을 표하지 않는 그런 모습, 이런 것들이 그냥 자연스러운 것이라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 생각하며, 그냥 타성에 젖어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그냥 예배의 자리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몸은 여기에 와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 예배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 우상이 되어서 그 우상을 섬기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모르고, 우리는 그냥 타성에 젖어서 살아가는 것이죠.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29절의 말씀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이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죠. 지혜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내가 선택한 그 선택이 이 선택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까지 내다볼 수 있는 자가 지혜로운 자요. 바둑을 누가 잘 돕니까? 한 수 앞을 더 내다볼 수 있는 사람이 바둑의 고수가 되는 것이죠. 내가 세수를 바라본다면, 다른 사람은 네 수를 바라보면, 그 한 수 더 앞을 보는 사람이 고수인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신앙의 고수는 누구입니까? 내가 하는 그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행했는데,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이고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늘 어리석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보다는, 지혜로운 자의 길을 가기보다는 어리석은 선택을 할 때가 너무나도 많은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가야 합니다. 늘 넘어질 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씻겨 주옵소서. 그리고 다시 한번 주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나아가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들이 되게 해 주옵소서. 우리가 타성에 젖어버린, 그냥 늘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그냥 “괜찮을 거다” 하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사는 삶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 앞에서 지혜자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될 수 있게 해달라고 주님의 십자가 앞에 또 나아가고 또 나아갈 수 있는 그런 귀하고 복된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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