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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고통과 즐거움 (잠 14:10-13)

오늘 읽은 잠언서 14장의 말씀 가운데 10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은 타인이 참여하지 못하느니라”라는 말씀입니다. 히브리 병행법으로 되어 있는 이 구절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는 고통이든, 아니면 기쁨이든, 그 어떤 것이든, 그 마음을 온전히 아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는 것이지, 사실은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의 아픔 그 사람의 기쁨, 더 나아가서 여러 가지 고민과 생각과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근심 걱정들, 그 모든 것들을 사실 제3자가 알 수는 없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겠습니다. 여기서는 고통과 즐거움에 대해서만 표현하고 있지만, 즐거움뿐이겠습니까? 고통뿐이겠습니까? 우리들의 삶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들을, 내가 가지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을 제3자가 안다고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 읽은 잠언서 14장 13절의 말씀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웃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저 사람은 행복하겠구나” 했지만, 하지만 그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근심이 있는 것이고요. “저 사람은 정말 좋겠구나”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근심과 걱정거리, 또한 슬픔 이런 것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사실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정확히 안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남의 마음을 안다고 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이죠. 아무리 이해력이 높고, 공감하는 능력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깊은 속마음, 그 사람의 깊은 그 상황, 처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죠.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부모님들이 몰라주는 겁니다. 부모이지만 그 자녀들의 근심과 걱정, 학교에서 어떤 아픔이 있는지, 학교에서 어떤 고민이 있는지,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부모님들이 정확히 잘 몰라주기 때문에, 부모와 자녀 사이에 갈등이 생겨나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지도자의 마음을 몰라주기도 하고, 역으로 일반 대중의 마음을 지도자들이 몰라주기도 하기 때문에, 결국 모든 것들이 삐걱삐걱거릴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들이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일부만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 전부를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죠. 100퍼센트를 다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없고, 그저 수박 겉핥기 정도로, 그냥 보이는 것에 따라서 판단하고, 그냥 나타난 것에 의해서 쉽게 편견을 가지고, 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는 그런 경우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러한 다른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있는,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잘 안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는 이 말씀을 들을 때, 그럼 어떻게 하라고 하는 말일까요? 어차피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알 수도 없고, 그 사람의 고통을 알 수도 없고, 기쁨도 모르는 것이니까, 그냥 포기하라고 하는 말일까요? 그냥 “될 대로 돼라.” 하면서, 그냥 포기해 버리고 살라고 하는 그런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게 아니라, 정반대의 말씀이죠. 우리가 잘 모르지만, 그러나 알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그 고통, 그 사람 마음속에 있는 그 즐거움,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그것을 알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해야 되는 것이고, 그 사람 마음 깊은 곳에 들어 있는 것을 알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죠. 어떻게 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좀 더 귀를 기울이는 데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9절의 말씀 가운데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어떻게 하고?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라고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들어라.” 이 말이에요. 들기 위해서 노력하라고 하는 말이죠. 그냥 보이는 대로 쉽게 판단하고 화낼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그냥 분노부터 해버릴 것이 아니라, 우리 아이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을까? 왜 이런 아이가 이런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 아이의 마음, 그 아이의 고통, 그 아이의 고민을 알기 위해서, 우리가 부단히 귀를 열어서, 그 아이의 마음을 알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잘못된 일을 한다고 한다면, 무슨 악한 일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친구들하고 싸우고, 온갖 나쁜 짓을 하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 아이들이 왜 그런 나쁜 짓을 하고 있을까? 질문을 던져야 하는데, 알고 보면 사실은 부모님의 사랑이 그리워서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내가 가만히 있으면, 부모님은 나에게 아무런 관심을 가져주지 않기 때문에, 내가 나쁜 짓을 해야 부모가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나에 대해서 주목하고, 나에게 무엇인가 관심을 보여주는, 그런 부모를 보면서, 내가 나쁘게 행동해야, “그래야 부모가 나를 조금이라도 아는 척해주구나” 하는, 사랑의 결핍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이죠. 따라서 보이는 행동만 보고서 함부로 화내고 함부로 말하게 될 것이 아니라, 과연 이 아이의 마음에 어떠한 깊은 속마음이 있을지, 이 아이의 근심이 무엇이고, 고통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부단히 들어야 한다고 하는 것인데, 들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그냥 귀를 열고만 있으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 그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서, 상대방의 마음이 무엇인가를 알아내기 위해서, 우리가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상대의 마음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아주 중요한 전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할 때, 우리는 비로소 조금씩 들을 수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하는 교만함이 있다고 한다면, 아무것도 그 깨달을 수가 없고, “내가 알고 있는 그 모든 것이 전부이고, 내가 아는 것이 정확하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맞다.”라고 하는 그런 교만함이 있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은 발전도 없을 것이고,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과의 화해도 일어날 수가 없고, 오히려 분노와 불편함만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무엇이냐 하면, 겸손함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온전치가 못하구나.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구나.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고 하는 겸손함이 먼저 내게 있어야, 그래야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직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는 그런 겸손함이 있어야만,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지, 그리고 내가 이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알 수 없다고 하는, 그러한 나의 부족함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조금씩 열리게 된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의 마음 가운데 불편함이 있다고 한다면, 혹시 어떤 사람이 하는 행동에 대해서 우리에게 화가 일어나고, 분노함이 일어나게 되는 일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실제로 그 사람이 나쁜 짓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내가 그 사람을 제대로 잘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많은 겁니다. 내가 그 사람을 제대로 안다면 화낼 일이 아니에요. 내가 그 사람의 형편을 안다면, 오히려 도와주고 싶고, 오히려 측은하게 여기고, 여러 가지로 도와주려고 하는 그런 마음들이 생기게 되는 것이 정상일 겁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질문을 던져보아야 되는 거예요. 내가 이 사람을 향해서, 상대방을 향해서, 저런 사람들을 향해서 우리가 관계하고 있는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 우리 자녀들이든지, 우리 부모님이든지, 우리의 친구들이든지, 아니면 같이 일을 하고 있는 동역자라든지, 그 어떤 사람이든지, 그 사람에 대해서,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 저 사람에 대해서는 뭔가 기분이 나빠. 뭔가 불편해. 화가 나는 일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대부분 우리가 그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 사람을 제대로 안다면, 그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 근심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런 고통을 알고, 그 사람 내면에 있는 여러 가지 상황과 아픔들에 대해서 우리가 알게 된다고 한다면, 분노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긍휼한 마음이 솟아오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모든 정보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분노를 일으키고 화를 일으키는 그런 정보들을 만나게 된다고 한다면, 대부분의 그런 정보들은 가짜 뉴스일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실제로 그 사람이 그러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사람을 내가 제대로 알지 못해서 분노가 일어나는 겁니다. 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급하게 분노하기보다, 성급하게 미워하기보다, 내가 그 사람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은 무엇이 있을까? 내가 저 사람에 대해서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아보지 않고, 내가 교만하여 다른 사람에 대해서 미워하고 멸시하고, 분노하고 의심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내가 교만한 것일 뿐이지, 내가 바른 판단을 내린 것이 아니라고 하는 점을 우리가 잘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분노 가득하다면, 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면, 의심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면,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저 사람에 대해서 더욱더 잘 알기 위해서 귀를 기울여야 하고, 그 사람의 마음에 공감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역으로 이제는 내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입장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해해주지 못할 때에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해서 분노하게 되는 그런 경우들을 생각해 봤는데, 역으로 사람들이 나를 제대로 이해해주지 못해서 답답하고, 사람들이 나를 제대로 잘 알아주지 못해서 분노가 일어나고,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제대로 이해해주지 않기 때문에, 온전하게 대우해주지 않는 그런 참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만나게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때에는 절망할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우리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제대로 알아줄 수 있는 능력이 안 되는 게 사람들입니다. 오늘 말씀에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마음의 고통을 자기만 할 뿐이지, 다른 사람이 알아줄 수 없고, 마음속에 있는 그 즐거움을, 나는 즐거워도 타인은 그 즐거움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는, 이 하나님의 말씀 잠언의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발견해야 되는 진리가 있다고 한다면, 결국은 내 문제를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알아줄 수 없다는 거예요. 그게 한계라는 걸 가는 거예요. 남편이 못 알아줘요. 아내가 못 알아줘요. 우리 부모님이 못 알아주고, 우리 자녀들이 못 알아주는 겁니다.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다 알 수 없는, 그러한 한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들을 온전히 이해해 주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저도 어렸을 때는 우리 부모님을 보면서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왜 우리 부모님은 저렇게 행동하는 것일까? 이해가 안 됐어요. 어른들을 바라보면서, 왜 어른들은 저렇게 행동할까? 이해가 안 됐어요. 왜 자꾸만 저런 행동을 할까? 이해가 안 됐어요. 안경을 가지고 자꾸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하고 하는데, 왜 자꾸 안경을 만지고 그럴까? 그랬는데 사십이 되면서 안경을 쓰다 보니까, 이게 초점이 이상해지기 시작하니까, 제가 그러고 있어요. 나이를 먹어가면서 젊었을 때 이해하지 못했던 그런 것들을 조금씩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왜 저 할아버지는 소리를 꽥꽥 지를까 했더니, 귀가 먹어서, 이제는 제가 꽥꽥 소리를 지르면서 살아요. 그러나 아무리 아무리 해도 누구의 마음을 제3자가 알아줄 수 있는가? 나의 마음을 제3자가 알아줄 수 있겠는가? 아무리 사랑이 많은 우리 딸들도 나의 아픔과 고민을 못 알아줄 수밖에 없는 거예요. 평생을 같이 살았던 남편도, 평생을 같이 함께하는 아내도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알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사실을 바라보면서 절망할 것이 아니라, 분노할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이해가 한계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이해하면서 인정하고 나아가야 할 뿐만 아니라, 그리고 온전히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 주님은 우리를 온전히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아시되, 나를 나보다도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시고, 주님께서는 우리의 상황을 속속들이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며, 그리고 우리의 눈에 눈물을 닦아주실 유일한 분이 주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위로와 소망을 사람들에게 둘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두며, 하나님 앞에 우리의 속사정을 아뢰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그런 은혜를 바라볼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1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 당연한 말씀이죠. 악한 자의 집은 망한다. 그리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한다”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말씀인데요. 그런데 이 세상은 당연하지 않은 것처럼 들리는 말입니다. 이 말은 누구 언제 할 수 있는 말인가? 악한 자의 집이 망하고, 정직한 자의 집이 흥한다고 하는 이 말은 전제가 하나 있어야만 성립이 되는 말입니다. 그 전제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전제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이 세상이 이루어진 것이, 우리가 이렇게 태어나게 된 것이 어쩌다 보니까 우연에 의해서, 우리 인생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어쩌다 보니까 친화가 되어서, 무기물이 유기물이 되고, 유기물이 단세포가 복잡한 세포로 진화하고, 그래서 사람으로 진화할 정도로 그렇게 수억 년에 걸친, 그 진화의 과정에 의해서, 어쩌다 보다 어쩌다 보니까, 이렇게 사람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가 빅뱅에 의해서 갑자기 터져서, 어떻게 이 우주가 이렇게 형성도 되고, 저렇게 형성되고 하다가, 어쩌다 보니까 지구가 만들어지고, 어쩌다 보니까 적당한 거리에 태양도 만들어지고, 어쩌다 보니까 지구가 저절로 자전을 하고, 회전을 하면서 살게 된, 그 지구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악한 자의 집이 망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정직한 자의 장막이 흥할 것이라고 하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아무런 방향도 없이, 어쩌다 보니까 인생이 만들어지고, 어쩌다 보니까 이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이 과정의 마지막이 선한 자에게는 상을 베푸시고 악한 자에게는 벌을 내리시며, 하나님께서 공의로 이 세상을 만드실 거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확신할 수가 없는 것이죠.

악인이 판치고 있지만, 그 악인이 결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거라고 하는 기대를 할 수가 없는 것이며, 정직한 자가 지금은 고난을 당하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신원해 줄 거라고 하는 그 사실을 우리가 확신할 수 없는 것이죠. 오로지 무엇이 성립될 때에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 천지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이 인정될 때라야만이 악한 자의 집이 망하고 정직한 자의 집이 장막이 흥할 것이라고 하는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소망 가운데 일어나고, 소망 가운데 잠에 드는 겁니다. 오늘 이 아침에 여러분들은 일어나면서 무엇을 바라보셨습니까?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세상이 다시 돌아가는 것이 보이지 않았습니까? 아침에 눈을 뜨니 이 세상이 질서 있게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방향대로 질서 있게, 이 아침이 다시 뜨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길을 걸어가는데 나무에 꽃망울이 새 망울들이 돋아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겨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봄이 찾아오고 있구나!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가운데, 이 세상이 돌아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이 세계가 정말 놀라운 세계이며,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다스리고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을 목격하면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소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지금도 다스리고 계시고, 지금 당장은 어려운 일 당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결국에는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결국에는 정직한 자를 흥하게 하시고, 악한 자는 파멸로 이끄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소망 가운데 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게 되는 것이죠. 갈라디아서 6장 9절의 말씀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런 말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이 세상이 우연으로 돌아간다고 한다면, 이런 말을 할 수가 없는 거죠. 하지만 하나님께서 계시기에, 선을 행하면서도 낙심하지 않는 겁니다. 지금 당장 아무런 결과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하지 않는 겁니다. 우리가 수고한 모든 것들이 헛수고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절망하지 않는 것,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결국에는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게 하겠고, 선한 자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게 하실 거라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이 참된 것이고,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질 거라고 하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소망 가운데 서는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바라보면서, 소망 가운데 바라보는, 선한 일을 하되 멈추지 말고, 끝까지 믿음으로 신뢰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두렵고 떨리게 하는, 떨리게 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정직한 자의 장막이 흥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악한 자의 집은 망할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악한 자는 어떻게 되는가? 지금 괜찮아 보여도 망하게 될 거라는 거예요. 지금 승리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거라고 하는 게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지금 아무리 괜찮아 보이고,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괜찮다고 안심할 것이 아니라, 만일 우리가 죄 가운데 거하고 있다고 한다면, 심판이 머지않았음을 알기에 두렵고 떨릴 수밖에 없는 말씀인 것이죠. 똑같은 말씀인데 의인에게는 소망의 말씀 악인에게는 두렵고 떨린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만일 우리가 죄악 가운데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하는 것이죠. 누가복음 13장 3절의 말씀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괜찮아 보여도 회개하지 않으면 말할 것이다. 괜찮아 보여도 괜찮은 것이 아니라, “결국 망할 것이다.”라고 하는, 이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오늘 또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회개의 길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12절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내가 의롭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의로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옳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옳다고 생각해도, 사실은 잘못된 게 있을 수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이 정직한 자의 집은 흥할 것인데, 악한 자의 집은 망할 것이라고 하는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되돌아봐야 되는데, 우리가 어떻게 되돌아봐야 되는가? 스스로를 생각하면서, “괜찮겠지. 아무 문제가 없겠지.”라고 스스로를 정당화할 게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게 망하는 길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사기 시대의 문제가 무엇이었나요? 구약 성경 사사기에 있는, 그 사사 시대에 있었던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이었냐면, 그들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거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순종한 게 아니라, 내가 보기에 괜찮아 보이면 행동하는 겁니다. 내가 보기에 좋다고 생각하면 행동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예요? 내가 좋다고 하면 좋은 게 되나요? 아니요. 독약이 있는데 먹어도 괜찮겠다고 내가 생각하고 먹으면, 안 죽나요? 아니요. 위험한 거예요.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게 정말 무엇인가? 그게 중요한 것이죠. 기준이 누구에게 있는가?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기준이 달려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기준이 달려 있는 것이지요. 우리의 소견이 옳지 않을 수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성이 타락해서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오염된 이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양심이 타락해서 마비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합리화를 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죄가 아니다”라고 말하게 하는 것이죠. 그리고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같이 모여서 이건 죄가 아니다. 이건 죄가 아니다. 이건 나쁜 짓이 아니다. “이건 괜찮은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면 괜찮은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우기면 죄가 죄가 아닌 것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나쁜 일이 나쁜 일이 안 되는 것이 아니고, 나쁜 일은 나쁜 것이요. 하나님의 기준이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 눈에 바르게 보일 수 있다면 괜찮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준을 하나님 앞에 두지 않으면, 우리가 죄를 행하면서도, 마치 정당한 것인 줄 생각하고, 바른 길처럼 생각하지만 결국에는 패망의 길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항상 묵상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까? 아닙니까?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죄를 짓는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교회에서 싸우면서, 분쟁 가운데 있으면서, 그리고 자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잃어버리고, 신앙을 저버리게 되는 그런, 소자를 넘어지게 하는, 연자맷돌을 매고 지옥에 떨어질 것 같은 그런 큰 중죄를 저지르면서도, 사람들은 내가 나쁜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의를 위해서 일하고 있다고 말하고, 나는 주님을 위해서 일하고 있다고 말하고, 정의를 위해서 일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사실은 엄청난 큰 죄를 하나님 앞에 짓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늘 묵상해야 합니다. 주여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까? 기뻐하지 않는 일입니까? 우리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서야 되는 우리들의 삶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다고 했던 그 말씀대로 우리가 망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겸손하게 주님 앞에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들은 너무나도 연약합니다. 우리들은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가야 되고, 주님 앞에 우리의 모습을 내어놓으면서, 주님 저희들을 변화시켜 주옵소서 넘어질 때마다 다시 돌아오고,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로 다시 죄 씻음을 받으며, 주님의 뜻 가운데 살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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