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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 믿음 (잠 14:14-16)

잠언서 14장에서 세 구절을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먼저 14절의 말씀을 보면, “마음이 굽은 자는 자기 행위로 보응이 가득하겠고, 선한 사람도 자기의 행위로 그러하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무엇을 얻게 될 것인가? 자기가 심은 대로 얻을 것이고, 자기가 뿌린 대로 거둘 것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반대로 거둘 수는 없다고 하는 그런 말이겠죠. 악을 행했는데, 선한 열매를 얻을 수가 없고, 선을 뿌렸는데 악한 열매를 거둘 수가 없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우리가 거두는 것은, 모든 보응(報應)들은 우리가 한 것에 대한 보응들을 얻게 되는 것이지, 우리가 한 것과는 정반대의 보응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게, 오늘 14절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결론은 무엇입니까? 선한 것을 뿌려야죠. 의를 행해야죠. 좋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 선한 열매를 얻기 위해서, 정말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선한 씨앗들을 뿌려야 되는 것이고, 의롭게 살아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야 한다라고 하는 것이 결론이 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상황을 살펴보면서, 환경을 불평하거나 원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좋지 못한 그런 주변의 상황들을 보면서, 불평하고 원망하고, “내 인생이 왜 이렇게 참 힘든가? 내 삶이 왜 이렇게 어려운가?”라고 한탄하기도 하고, 불평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요. 사실은 그런 불평을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거두는 것은 바로 우리가 심은 대로 거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 말씀에 보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라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만일 우리의 삶 가운데 불만스러운 환경들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한다면,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고, 정말 고통스러운 일들이, 불평할 만한 일들이 자꾸만 만들어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선한 것을 심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건강이 좋지 못하다고 한다면, 그동안 내가 식습관을 잘못했던 까닭이 있는 것이고, 내가 운동을 그만큼 하지 못했던 까닭인 것이고, 내가 건강을 그만큼 챙기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내 삶 가운데서 무엇인가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그냥 어쩌다 보니까 우리들의 삶 가운데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심은 대로 거두게 된다고 하는 것이 크게 보는 하나님의 법칙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지금 내가 거두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과거에 내가 뿌린 것을 거두는 것이고, 지금 우리가 뿌리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가 거두게 될 것입니다. 저희 집 베란다에는 아름다운 화초들이 아주 풍성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 집 베란다에 그렇게 화초가 풍성하게 자라고 있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오성은은 아파트가 아주 좋은 아파트이기 때문에 그럴까요? 그게 아닙니다. 제 아내가 지금까지 온갖 정성을 들여가면서, 매일 아침마다 화초를 가꾸고, 물을 주고, 또 어떻게 하면 이 화초가 잘 자랄 수 있을까? 연구해 가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한 때문에, 화초가 풍성하게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집에 햇볕이 잘 안 드는 집이라서, 우리 화초에 LED 등도 비춰가면서, 부족해도 빛까지 비춰가면서 자라게 하도록, 엄청나게 많은 노력을 했기 때문에, 사시사철 꽃이 피고, 그리고 화초가 자라고, 아름다운 환경을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는데, 그런 화초들이 저절로 자라난 것은 아닙니다.

집 가운데 쓰레기가 가득 쌓여 있다고 한다면, 그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종종 TV 프로그램 보면, “세상에 이런 일이?” 또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 가운데 보면, 어느 집 문을 열었더니 쓰레기가 가득 차 있는 그런 집들이 종종 소개되는 것을 봤습니다. 혹시 보신 적 있습니까? 아, 그건 보셨군요. 세상에. 세상에 그런 집이 없어요. 발 하나 댈 곳이 없게, 온갖 쓰레기가 가득 차 있는, 그런 쓰레기로 가득 찬 집이 있는데, 그렇게 그 집에 쓰레기가 가득 찬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집에 어떤 자석 같은 게 있어서, 주변의 쓰레기를 다 모아들이는 그런 신비한 집이기 때문에, 그 집 안에 쓰레기가 가득 찼을까요? 그게 아니죠. 버리지 않는 겁니다. 치우지 않는 겁니다. 먹고 그냥 내버리는 겁니다. 그냥 계속 쌓아두고, 또 쌓아두고, 또 쌓아두니까, 그 집안 전체가 쓰레기로 가득 차게 되는 그런 결과가 나오게 된 것이죠.

하나님께선 우리 모두에게 하루 24시간을 주셨고, 일주일 7일을 주셨고, 또 1년 365일을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었는데, 어떤 사람은 자기 집을 쓰레기로 가득 채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자기 집을 더 멋있는 것으로 채우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아야 할 텐데, 왜 그런 일이 생겼는가? 그것은 내가 심은 것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들 가운데는 나는 마치 광야 한가운데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외로운 섬 한가운데, 나 홀로 앉아, 외롭고 쓸쓸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고 하는 그런 느낌을 말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이 왜 이렇게 외로울까? 내 삶이 광야와 같고, 정말 힘들고 어렵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내 주변의 사람들을 다 쫓아내 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칭찬하고 격려하며 사랑하면, 사람들이 주변으로 몰려드는데, 책망하고 비난하고 지적하고 그리고 아무런 사랑을 주지 않는다고 한다면, 사람들이 내 주변에서 하나씩 둘씩 떨어져 나가는 것이죠. 아무런 물을 주지 않으면, 내 주변에 사랑의 물을 주면, 그것이 온갖 푸른 초장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고, 수많은 새들이 날아들고, 꽃들이 피고, 아름다운 정원 가운데 거하게 되는, 정말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되겠지만, 그러나 우리 주변에 사랑의 물을 뿌리는 것을 중단해 버리고, 오로지 나 자신만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과 아무런 관계를 갖지 않고, 단절해 버릴 때, 우리 주변이 점점점점 광야 모래밭으로 변해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의 삶 가운데 푸른 초장과 같은 삶 가운데 있기를 원하신다면, 내가 광야 한가운데 의로운 섬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행복하고 사랑이 넘치는 그런 삶을 누리기를 원하신다고 한다면, 우리 주변에 사랑의 물을 뿌려야 하는 겁니다. 사랑으로 돌봐주고, 선물을 하고, 대접을 하고, 사랑의 모습들을 보여줄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 주변에 몰려들기 시작하는 것이죠. 아무것이 가진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말로써 사랑을 줄 수도 있는데, 칭찬하고 격려하고 장점을 이야기하고, 좋은 점을 이야기하고, 뭐 하나 보면, 좋은 것을 칭찬해 주고, 격려해 준다고 한다면, 사람들이 그 사람 주변으로 몰려들게 될 겁니다.

그런데 몰려드는 사람들이 있을 때, 한다는 이야기가 “이거 잘못됐네” 저것이 잘못됐고, 비난하고, 책망하고, 그리고 정죄하는 그런 모습을 보이게 된다면,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다 떨어져 나가고, “나는 외로운 사람이구나”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종종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교회에 왔더니 교회가 사랑이 넘치지 않고 메말라버리고, 정말 사랑이 없는 교회라고 불평과 원망을 하시는 분들을 종종 만날 수가 있습니다. 교회가 사랑이 없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교회에 사랑이 없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내가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먼저 사랑의 손을 내밀고, 내가 먼저 인사해 주고, 내가 먼저 아는 척해주고, 우리 권사님 머리 스타일이 바뀌었네요. 옷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예쁘네요. 오늘 어디 아파 보이는가요? 자꾸만 관심을 가져주고,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의 물을 뿌려줄 때, 그 사람들로부터 더 많은 사랑을 받게 될 것이고, 내가 뿌린 만큼, 내가 사랑을 심은 만큼, 더 많은 사랑을 내가 받게 되어서, 사랑이 넘치는 교회라고 생각이 들 텐데, 누가 나를 사랑해주지 않을까? 누가 나에게 말을 걸어주지 않을까? 기다리고만 있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 사람을 바라보면서, 다가가지 못하고, 저 사람은 차가운 사람인가? 저 사람은 말을 걸기가 어려운 사람인가? 하면서, 다가가지 못하면서, 결국 사랑이 메말라버리고, 마치 교회 안에 있어도 광야 가운데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14절의 말씀에 마음이 굽은 자는 자기의 행위로 보응이 가득할 것이고, 선한 사람은 자기의 행위로 말미암아, 그렇게 보응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이 말씀을 우리가 보면서, 우리가 정말 내가 심는 것을 내가 거두게 될 것이고, 내가 지금 심은 것은 미래에 거둘 것이고, 지금 내가 거두고 있는 것은 과거에 심은 것을 내가 거두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기왕이면 사랑의 씨앗을 뿌리고, 기왕이면 선한 것들을 뿌리고, 그래서 우리 주변이 행복하고 사랑이 넘치는 그런 가정이 되고 교회가 되고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심지 않으면서도 열매를 거두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수고의 땀을 흘리지 않으면서도, 많은 수확을 얻기를 원하는 그런 마음들이 있는 겁니다. 그 열매는 다 갈망해요. 열매가 많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갈망은 하는데, 수고의 땀을 흘리려고 하지는 않아요. 나쁜 열매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그 나쁜 열매가 맺어지도록 우리는 그런 일을 하면서, 그 나쁜 열매가 맺혀지지 않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법칙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선한 열매를 좋은 열매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노력하지 않은 채, 그런 결과가 있기를 위해서 기도하면 되는가? 기도하니까, 기도는 다 좋은 거라고 생각하기가 쉽겠습니다마는, 결코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가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는 어떻게 기도해야 되는가? 오늘 말씀처럼 우리가 심은 것을 우리가 거두기 때문에, 우리가 심으면서 잘 그 심은 대로 거둘 수 있도록 위해서 기도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냐 하면, 심지도 않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기도만 합니다. “하나님, 우리 가정을 좀 행복하게 만들어주세요. 우리 가정이 정말 사랑이 넘치는 가정이 됐으면 좋겠어요.”라고 기도하는 거예요. “우리 아이가 좋은 대학 갔으면 좋겠어요.”라고 기도하는 거예요. 장사가 잘 되기를 원한다고 기도하는 거예요. 그런데 정작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장사를 하기 위해서 정말 친절하게 미소를 보여주면서, 많은 것을 베풀어가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식당에, 그 가게에 더 많이 오도록 최선의 노력을 하는 그런 사랑의 씨앗을 뿌려가면서, 거두는 노력을 해야 될 텐데, 그런 노력들은 하지 않은 채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 우리 가게가 잘 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이죠. 하지만 그렇게 노력하지 아니하고, 기도하는 것은 기도했으니까 괜찮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런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한 기도가 아니고, 오히려 사실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나쁜 일이 될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하신 이후에, 사탄이 예수님께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한 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워놓고, 그리고 그 성전 꼭대기 위에서 뛰어내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탄은 성경 말씀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시편 91편의 말씀을 인용했는데요. 마태복음 4장 6절 말씀에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시편 91편의 말씀을, 사탄의 입에서 나온 하나님의 말씀을, 마태복음 4장 6절에서 듣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발에 돌에 발이 돌에 상하지 않게 지켜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냐?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뛰어내리라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해주면서, 하나님께서 너의 발을 상하지 않게 해 주실 거라고 하는 그 말씀을 의지하고 뛰어내리면, 하나님께서 보호를 해주실까요? 해주지 않으실까요? 성경에 보호해 주신다고, 시편 91편에 쓰여 있는데, 예수님이 정말 그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렸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보호해 주십니까? 해주지 않으십니까? 그 뛰어내리는 것은 좋은 일입니까?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입니까?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에요.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겠다고 하는 것은, 일부러 내가 자살을 하려고 시도하고, 일부러 내가 교통사고 나는 그런 상황에 뛰어들고, 불 속에 내가 들어가고, 독약을 마시고, 그렇게 죽으려고 안달하는 과정 가운데서, “하나님, 나 지켜준다고 그랬죠? 지켜줘 보세요.” 하면서, 뛰어들면, 그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인가요? 아니요!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해주시는 것은, 우리가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보호해 주시겠다는 겁니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가운데, 어려움을 만나면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겠다는 거예요.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사는 가운데, 어려움을 만나게 될 때, 거기서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겠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지, 하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일부러 죽으려고 달려가고, 일부러 그렇게 나쁜 짓을 하면서, 내가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방어하지 아니하면서,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실 것을 기대하는 것은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입니다.

만일 우리 아이가 좋은 대학에 가기를 원한다고 하면, 열심히 공부하면서, 하나님, 이 아이가 정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열심히 공부하게 하시고, 또 좋은 대학도 가게 하시고, 또 좋은 길로 인도해 달라고 기도한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공부도 안 해요. 아무것도 안 해요. 놀기만 해요. 그런데 하나님 이 아이가 좀 좋은 대학 갔으면 좋겠어요. 헌금 많이 하고 기도 많이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겠는가? 그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지, 참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법칙을 어기고,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위반해 가면서, 내가 마음대로 죄악 가운데 살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기도했으니까, 괜찮은 것이 아니라,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건강해지기 위해서 운동도 해야 되는 것이고, 또한 음식도 잘 조절해야 되는 것이고, 아프면 약과 병원의 치료도 받아가야 하는 것이고 좋은 경제적인 유익을 얻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열심히 일도 하고 수고의 땀도 흘려야 하는 것이죠. 좋은 대학에 가려면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는 것이지, 내가 심지도 않은 데서, 심지도 않았지만, “하나님, 주세요.” 내가 노력하지 않았지만, “하나님, 응답해 주세요.” 하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의 법칙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하는 아주 악한 일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기도하기에 앞서 노력해야 되는 거예요. 우리 남편을 향해서 칭찬의 말을 해줘야 하고, 인정하는 말을 해줘야 되는 거예요. 우리 아내를 향해서, 정말 힘들지? 공감의 말을 해줘야 되는 거예요. 슬펐지? 외로웠지? 내가 알아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이야기를 해줘야 되는 거예요.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안아주기 위해서, 아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되는 거예요. 노력하지 아니하고, 그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우리가 심지도 않고, 하나님께서 많은 것을, 선한 열매를 달라고 하는, 우리가 악한 것을 심고, 선한 열매를 달라고 하는 그런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선한 일에 힘쓸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미래에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5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자기의 행동을 삼가느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모든 말을 다 믿어버린대요. 그런데 슬기로운 사람은 어떻게 하는가? 행동을 삼간다 그랬습니다. 지금 히브리 평행법적으로 되어 있는 것인데, 말을 믿는다고 하는 말과 행동을 삼간다고 하는 말이 이렇게 대칭으로 되어 있습니다. 왜 믿는 것과 행동을 삼가는 것이 대칭으로 되어 있을까요? 우리가 믿게 되면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믿음이 아니고, 행동으로 옮겨지게 되어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따라서 슬기로운 사람은 함부로 믿지 않기 때문에,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 것이고, 그러므로 “행동을 조심해서 하는 것이 슬기로운 사람이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되겠습니다.

자, 믿는 것이 바람직합니까? 믿지 않는 것이 바람직합니까? 무엇이 바람직한 것인가요? 믿는 게 바람직합니까? 믿지 않는 게 바람직합니까? 뭐라고 대답하기가 곤란하죠? 곤란한 게 맞습니다. 왜냐하면 “믿는 것이 바람직한가? 믿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가?”라고 하는 그 질문은, 그 질문만 가지고서는 다른 대답을 할 수 없는 게 맞습니다. 믿어야 할 것을 믿으면, 바람직한 거예요. 그런데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믿으면, 어리석은 거예요. 믿지 말아야 될 것을 믿지 않으면, 바람직한 거예요. 그런데 믿지 말아야 될 것을 믿으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 되는 겁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종종 오해를 합니다. “믿는 게 중요하다. 무조건 믿어야 된다. 믿는 게 가장 중요하다.”라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아무거나 믿어버려서, 큰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교훈이 절대 아닙니다. 성경은 믿으라고도 되어 있지만, 동시에 믿지 말라고도 되어 있어요. 성경을 우리가 전체적으로 다 읽어야 됩니다. 어느 한 부분만 읽을 것이 아니라, 믿으라고 되어 있는 그 부분만 볼 게 아니라, 믿지 말라고 하는 그 부분도 봐야 되는 거예요. 믿는 게 좋은가? 믿지 않는 게 좋은가? 그 질문만 가지고는 바른 대답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 다른 거예요. 믿어야 할 것은 믿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믿지 말아야 될 것은 믿지 않아야 좋은 것입니다.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믿느냐 믿지 아니하느냐가 좋은 것인가 좋지 않은 것인가로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성도님들은, 우리 한국의 크리스천들은 믿어야 될 것도 믿지만, 믿지 말아야 할 것까지 믿어버려서, 그래서 큰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믿지 말아야 될 것을 믿어버려서, 그래서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되는 경우가 종종 우리들의 신앙생활 가운데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 내에서는 믿는다고 하는 것이 너무 강조되다 보니까, 신앙, 믿음이 가장 좋은 것이고 중요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다 보니까, 그 대상이 무엇인가를 따지지도 않고, 묻지도 않고 무조건 믿어버리려고 하는 경향들이 있는데, 그렇게 된다고 한다면, 결국 우리는 우리들의 믿음을 배신하고, 우리를 착취하는, 우리들을 이용해 먹는, 그런 사악한 양의 털을 쓴 이리들, 양의 털을 쓴 늑대들의 밥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며, 우리가 조심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무엇을 믿어야 됩니까? 무엇을 믿어야 됩니까? 진리를 믿어야 돼요. 진리를, 옳은 것을 믿어야 돼요. 바른 것을 믿어야 돼요. 무엇이 옳은 것이고, 무엇이 바른 것입니까? 목사님이 말하면 다 믿어야 되나요?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목사님이 얘기하면 다 믿어야 됩니까? 예? 다 믿으면 안 돼요? 목사의 옷을 입고, 목사라고 하는 신분을 가지고 이야기한다고 해서, 다 믿으면 안 돼요. 제 아내는 잘 안 믿어요. 아 또 뻥치고 있구나. 알지도 못하고 큰소리치고 있구나. 너무나도 잘 알아요. 제가 성경에 대해서는 조금은 알지만, 다른 시사 상식이라든가, 등등 여러 가지는 잘못된 정보가 많습니다. 잘못된 정보를 말할 수도 있고, 때로는 의도적으로 잘못된 이야기를 할 가능성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목회자의 말이라고 해서 무조건 다 믿어버리면 안 돼요. 만일 목사님의 말은 무조건 믿으라고 가르친다고 한다면, 그 교회는 건전하지 않은 교회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조심하셔야 됩니다. 결국 믿게 만들고, 믿게 만들면, 그다음부터는 우리가 어떤 노예처럼, 정신적인 그런 노예처럼 되어버려서, 옳지 않은 것을 이야기함에도 불구하고, 그냥 받아들이게 되고, 그냥 따라가게 되다가, 소경이 소경을 이끌어서, 결국 같이 망하게 되는 그런 엄청난 영적인 피해를 볼 가능성이 존재하는 겁니다. 따라서 함부로 믿어버리면 안 되는 거예요.

오늘 본문의 말씀에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어리석은 자는 무엇을 믿으나? 온갖 말을 다 믿으나, 말이면 말, 그냥 다 믿어버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말을 들었을 때, 그 말이 진리인가? 거짓인가? 분별해야 되는, 근데 그 거짓인가 진리인가를 어떻게 판단해요? 목사님이 말하면 무조건 진리입니까? 아니에요. 강단 위에서 설교시간에 얘기하면, 무조건 진리입니까? 아니에요. 잘못된 이야기도 강단에서 할 경우가 있어요.

더 나가서 우리 편이 말하면, 전부 진리인가요? 우리 편이 말하면? 아니에요. 특히 정치적으로, 정치적으로 우리 편, 정치적으로 우리 편이 아닌 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편의 말은 우리들이 받아들이기가 정말 쉽습니다. 하지만 일단 어느 한 대상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기 시작하면, 결국 우리는 정신적으로 노예가 되어 버려서, 우리는 이용당하게 되고, 결국은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래서 그 정치인들은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우리 안에 자기들의 반대편에 대한 분노를 일으키게 만들고, 상대방에 대한 가짜 뉴스를 이야기하면서, 그래서 우리를 자신들의 노예로 삼고,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 우리들을 활용할 수가 있겠는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정치인들이 우리들의 종으로서, 우리를 위해서 섬겨야 되는데, 안타깝게도 우리가 정치인들을 위해서 존재하게 되고, 정치인들의 그 어젠다(agenda)를 무조건 따라가다가,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피폐하게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는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있는 것이죠.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사람을 믿는 것이 아니고, 그 어떤 것을 믿는 것이 아니고, 기준이 무엇입니까?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에서, 대소요리 문답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가장 중요한 원리가 무엇이냐면,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최고의 판단 기준, 최고의 권위가 있는데, 그게 무엇인가 무엇이에요? 성경만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사랑의 그 마음으로 주신 이 66번 성경만이 우리들의 신앙과 행동과 그 모든 것의 유일한 기준이 된다고 그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질문을 던져야 되는 것이죠. 과연 이것이 성경 말씀에 합당한 말인가? 과연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말인가? 이것이 과연 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인정해주고 있는 것인가? 심각하게 고민해 보면서, 따져보아야 되는 것이고, 그렇게 따져볼 때,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될 것인지, 무엇을 믿지 말아야 될 것인가를 분별해서 믿어야 되는데, 그렇지 아니하고 무조건 믿고 따라갔다가는, 결국 소경이 소경을 이끄는 길에 따라가게 되는 것이고, 또한 우리를 삼키려고, 우리를 삼키기 위해서 양의 탈을 쓰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런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서, 우리가 착취를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심지어 영적으로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믿으라고 하는 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믿지 말라. 어리석은 자나 다 믿는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15절도 역시 마찬가지죠.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러니까 그런, 속에 노략질하는 이리가 들어 있는 그 거짓 선지자들을 믿으라는 얘기입니까? 믿지 말라는 얘기입니까? 목사의 옷을 입고 있다고 해서 무조건 믿으라는 얘기입니까? 믿지 말라는 얘기입니까? 믿지 말라는 이야기예요. 요한일서 4장 1절에서도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성경은 믿으라고 할 뿐만 아니라, 믿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믿게 되면, 결국 우리는 망하게 될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지혜로운 자는 함부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할 것과 믿지 말아야 될 것을 분별하고, 그래서 함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삼가면서, 믿어야 할 것에만 믿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겁니다. 큰일 났습니다. 앞으로 제가 설교하면 안 믿을 것 같아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물론 무조건 의심해야 된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믿어야 될 것은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비슷해 보이지만 아닌 것들이 있는 것이고, 잘못된 가르침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분별력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의 제목은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16절의 말씀을 보면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나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악을 믿는 겁니다. 지혜로운 자는 악을 두려워하면서 피하는 겁니다. 어리석은 자는 무모하기 때문에, 사려 깊지 못하기 때문에, 악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는 사실을 망각해 버리고, 그냥 믿고 따라가다가 망해 버리는 것이죠. 악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할 거라고 하는 것을 알고, 악을 의심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와는 그러질 못했어요. 사탄이 하와를 속일 때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질 것이고, 하나님과 같이 될 거라고 하는 그 달콤한 말을 어리석게도 그냥 믿어버렸고, 그대로 따라 했다가 결국 망하게 된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냥 스스로 믿다가 망하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분별력 있게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옵소서. 날마다 날마다 기도하는 가운데 영적인 분별력들이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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