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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 (잠 14:20-22)

오늘 또 잠언서에 있는 말씀 가운데서 세 구절을 살펴보게 됐습니다. 먼저 잠언서 14장 20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나, 부요한 자는 친구가 많으니라.”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이 겪게 되고, 느끼게 되는 그런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한번 질문을 던져보고 싶은데요. 우리 크리스천들은 가난하게 살아야 됩니까? 부자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가난해야 좋습니까? 부유하는 것이 좋습니까? 네? 부유한 게 좋아요? 가난한 게 좋아요? 아니요? 솔직하게 대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난이 좋은가? 아니면 부한 것이 좋은가? “우리 크리스천들이 가난하게 살아야 되는가? 부자로 살아야 하는가?”라고 하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떠한 맥락에서 질문을 던지느냐에 따라서, 답이 달라질 것입니다. 성경에는 어느 구절에서는 가난해야 된다고 말씀하는 구절도 있는가 하면, 어느 구절에서는 오늘 잠언서의 말씀과 같이, 우리가 부유할 것을 가르치는 말씀도 동시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먼저 한편으로,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성경에서는 우리가 가난해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그런 구절들이 많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구절을 꼽으라고 한다면, 마태복음 5장 3절의 말씀일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누가복음 6장 20절은 똑같은 말씀일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 여기에서는 “심령이”라고 하는 말이 빠져 있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부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고 말을 하지 않고,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 재물이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고 말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에,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말씀만 보면, 우리 크리스천들은 가난해야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더 나아가서 성경 다른 곳에 보면 부자에 대한 경고의 말씀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24절에서부터 25절 말씀에 보면,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그랬습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갈 가능성이 있습니까? 불가능합니까? 불가능하죠. 낙타가 바늘귀로 도무지 들어갈 수 없는데, 그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더 어렵다고 말씀해 주신 것이니까, 누가복음 18장의 말씀에 의하면, 부자가 천국을 간다는 얘기입니까? 못 간다는 이야기입니까? 못 간다는 얘기예요. 불가능한 것보다도 더 어렵다. 아예 불가능한 것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말씀들을 살펴보면, 우리 크리스천들은 부자가 돼야 되나요? 가난해야 됩니까? 가난해야 되는 것이죠. 다행입니까? 불행입니까?

하지만 성경에서 성경 여러 곳에서, 우리가 가난해야 가난해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표현의 말씀들이 있기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리스천들이 정말로 가난하게 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는 성경은 어느 한 구절, 또는 어떤 한 표현에 의지해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모두 다 종합해서, 모두 다 함께 고려해서 같이 결론을 내려야 되기 때문에, 어느 한 구절에만 의존해서 결론을 내릴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우리가 가난해야 하나님의 나라를 얻을 수 있고, 가난해야 하나님의 나라를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는 그 의미는 우리가 실제적으로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어야만, 부자는 도무지 재물이 많은 사람은 도무지 천국에 갈 수 없고, 오로지 재물이 없는, 정말 가난한 찢어지게 가난한 그런 사람들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이 말씀을 해 주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비유적인 의미예요.

마태복음 5장 3절에서 “심령이 가난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가난한 것이 물질적으로 가난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라고 해서, 이 가난함을 비유적으로 사용해서, 영적으로 가난함, 심령이 가난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에서는 심령이라고 하는 말이 빠져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누가복음의 말씀도 역시 비유적인 의미로, 영적으로 가난한 자,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에 간다고 하는 그런 의미이지, 돈이 없는 사람이,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천국에 가고, 부자는 전혀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가난함, 천국에 갈 수 있는 그 가난함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내가 구제 불능의 상태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자각하고, 하나님의 자비로우심, 하나님의 은총 앞에 무릎 꿇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그런 겸손한 상태를 가리켜서, 영적인 가난함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리는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리는 부자였습니까? 가난한 사람이었습니까? 부자였어요.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오직 소수의 유대인들만 부를 소유하고 있었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다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특별히 부자였던 사람들이 누가 있었냐면, 세리들이에요. 세리들은 나쁜 짓을 하면서, 돈을 엄청나게 착취했기 때문에,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부자인 그 세리가 놀랍게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기도할 때 뭐라고 기도했냐면,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 세리가 하나님 앞에 자기 가슴을 치면서, 내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인생이 아니고, 더러운 죄인이기에, 내 힘과 능력으로는 저 하나님 앞에 갈 수가 없고, 오로지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셔야만, 오로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셔야만, 내가 하나님의 그 은총을 받아야만 하겠다고 하는, 그 간절함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렸을 때, 우리 예수님께서는 선언하시기를 하나님께서는 저 세리를 의롭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 천국에 못 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영적으로 가난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심령이 가난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가 저희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의 경우에는 스스로 부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어쩌면 세리보다는 물질적으로는 가난한 사람이었을 겁니다. 훨씬 더 가난한 사람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바리새인은 늘 종교적인 생활을 철저하게 해 왔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일주일에 금식을 두 번씩이나 했고, 십일조를 철저하게 드렸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잘 지켜서, 자기 자신은 의롭다고 생각한 거죠. 나는 저런 더러운 죄인들 하고는 상종을 하지 않고, 나는 저런 더러운 죄인과는 어울리지 않고, 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고, “내가 이 정도면 하나님 앞에 갈 수 있지 않겠느냐?”라고 하는 그런 교만함으로, 영적인 부요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었을 때, 그 바리새인은 물질적으로는 가난했을는지 모르지만, 심령이 부유한 자였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없는, 그저 자기 자신의 자랑만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심령이 부요했던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할 수가 없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성경에서 살펴보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 것은 돈이 있느냐 없느냐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해서, 나는 도무지 구제 불능의 사람이오. 나는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면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고 하는 그런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울부짖으며, 엎드리는 자만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가난함을 말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동시에 우리가 부유할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그 모든 것들은 사실은 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해 놓으신 이 세상의 그 풍성함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에 보면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이 무엇이냐?”라고 하는 그런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인조이(enjoy)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리는 것이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우리가 체험하고, 만끽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의 물질을 죄악시해 버리고, 터부시 해버리고, 그것을 그것과 함께 살아가지 않는 게 좋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들을 잘 활용하고, 우리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땀을 흘리며 씨를 뿌리고 우리가 수고하고 애쓰며, 땀을 흘린다고 한다면, 우리가 노력하게 된다고 한다면 그만큼 얻을 수 있는 것이고, 땀을 흘린 만큼 먹을 수 있는 것이 복된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우리가 열심히 수고하고 애써서, 그에 따른 열매를 얻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잠언서의 말씀을 보면 우리가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면서, 그래서 부를 얻어야 할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내용이 잠언서의 말씀 가운데 많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유함과 가난함에 대해서, 우리가 잘못된 견해, 우리 기독교의 전통 속에서 보면 재물과 관련해서 일부 성경 구절만을 의지해서, 극단적으로 가르치는 사람들이 종종 있고, 그리고 그런 극단적인 가르침을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실제로는 따라가지도 못하면서, 그것이 너무 좋다고 추앙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 우리가 바른 성경적인 관점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오늘 특별히 우리가 잠언서 14장 20절의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잠언서 14장 20절의 말씀에서 가난한 자는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나, 부유한 자는 친구가 많아진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그러니까 “돈이 많은 게 최고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그러니까 부자가 돼야 되겠다. 우리가 부자가 되어야만 그래야 성공한 것이다.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부자가 되어야 되겠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는 내용은 아닙니다. 더 나아가서 단순히 부자가 되는 것이 무조건 좋다고 가르쳐주는 말씀도 아닙니다.

사실 여기서 가난한 자가 미움을 받는다고 했는데, 가난한 자가 미움을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난한 자가 미움을 받는 이유, 사실은 여기에서도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보는 것이 좋겠는데요. 심령이 가난한 자가, 여기서 마태복음에서의 그런 의미가 아니라, 마태복음에서의 의미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연약한 존재임을 깨닫는 자를 가리켜서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말하고 있지만, 잠언서에서 말하고 있는 이 가난한 자, 잠언서에서 말하는 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향해서가 아니라, 이웃들을 향한 가난함입니다. 이웃들을 향해서 사랑을 베풀지 않고, 이웃들을 향해서 마음을 쓰지 않고, 그저 이기적으로만 사는 삶을 가리켜서, 가난한 자라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가난한 자란 누군가? 돈이 없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사람을 말하는 거예요. 다시 말하자면 이웃들을 향해서, 내 주변의 사람들을 향해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을 의미하고 있는데, 이웃들을 향해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그 이웃들에게 미움을 받게 된다고 하는 겁니다. 가난한 자는 그 심령이 가난하기 때문에,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풀 수가 없습니다. 오직 이기적으로만 사는 것이고, 나의 것을 챙기기만 하면서, 이기적으로 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죠. <사랑의 다섯 가지 언어>라고 하는 그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지만 그중에 하나가 무엇입니까? 내가 선물이라도 하면서, 내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을, 선물이라도 하면서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될 텐데,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이기적인 사람이고, 그리고 나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 수 없는 것이고, 사랑을 베풀지 않기 때문에, 자동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까? 나는 외로워지는 것이죠.

우리 주변에 사랑의 물을 뿌려야 우리 주변이 초장으로 변하고, 꽃이 피고, 아름다운 환경으로 변화가 될 텐데, 우리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고 닫아버리고, 사랑의 물줄기를 전혀 이웃 주변으로 뿌리지 않게 될 때, 우리 주변이 점점점점 메말라가서 광야와 같이 되어버리는 것이고, 어느 순간에 내가 광야 한가운데 나 혼자 서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고, 그 이기적인 사람,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사랑을 베풀 수 없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결국 많은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외로움을 달 수밖에 없고, 그리고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부자는 많은 친구가 있을 것이다. “부유한 자는 친구가 많을 것이다”라고 하는 그 말은 그러니까 돈이 많으면 그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든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마음의 부유함을 나타내는 것이죠. 내가 가난해도, 콩 한 조각이라도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돕고 싶은 그 마음,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전해줄 수 있는 그 마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는 마음이 부유한 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단순히 돈이 많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서 받은 그 사랑을 생각하며, 나 혼자 이기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열려 있어서, 마음이 부요로워서 함께 이웃들과 사랑을 나누며 사는 자가 바로 부유한 자라고 말할 수 있고, 그렇게 부유한 자들에게는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어 있고, 친구들이 들러붙게 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절망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가운데는 재정적으로 그렇게 넉넉한 여유가 없는 분들도 계시는데요. “나는 가난하기 때문에, 나는 미움을 받는 존재인가?”라고 절망적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내가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를 이해하게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아무리 가진 것이 없어도, 우리는 충분히 사랑을 표현할 수 있을 만큼 부유할 수 있어요. 아무리 가난해도 사랑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당한 사람도 없어요. 그러기에 우리가 가진 것 여부가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상태가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것이죠. 사랑을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자도 없고, 사랑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부유한 사람도 없다고 하는 그런 찬양이 있는데, 우리는 아무리 가난한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내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마음만큼은 따뜻한 부자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어머니를 보면, 우리들의 아버지를 보면,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들의 어머니 우리들의 아버지는 더 이상 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어요. 하지만 그 마음이 너무나도 따뜻하기에, 그 마음이 부유하기 때문에, 자녀를 위해서 다 주고 싶은 것이 느껴지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그 부모님을 볼 때 사랑하는 마음이 들지 않으래야 들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모습을, 우리가 우리 부모님을 보면서 존경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것처럼, 내가 아무리 가난하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이웃들과 나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가 우리에게 있는 그 모든 것들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죠. 따뜻한 말 한마디로 나눌 수 있는 것이고, 손 한 번 잡아주는 것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모든 것들로 함께 마음이 부유한 자가 된다고 한다면, 사람들을 향해서 충분히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것이고, 그러한 사람들은 수많은 친구들을 얻게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내가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이웃을 향해서 사랑을 표현하지 않고,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넬 수 없는 그런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이웃으로부터 미움을 당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잠언서 14장 21절의 말씀을 보면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앞에 있는 20절의 말씀과 연관 지어서 생각해 볼 수가 있겠는데요. 20절에서는 가난한 자가 사랑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가난한 자는 그 마음의 옹졸함 때문에, 이기적인 모습 때문에, 사랑을 표현하지 못해서, 그래서 이웃들로부터 외면당하고, 혼자가 될 수밖에 없고, 그리고 미움을 당하게 될 거라고 하는 사실을 20절에서 살펴봤는데, 21절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가서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그것은 죄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따뜻한 사랑을 전해주어야 될 텐데, 이웃에게 따뜻한 사랑을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업신여겨버리고 불쌍히 여기지 않고, 사랑을 표현하지 않는, 그것은 결국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죄라고 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입혀야만 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남의 것을 훔치거나, 사람을 죽이거나, 아니면 못된 짓을 하거나,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쁜 짓을 해야만 죄라고 생각하는 그런 경향이 있는데요. 성경의 개념은 무엇이냐면, 그렇게 적극적인 잘못뿐만 아니라, 내가 사랑을 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그것이 죄라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20절의 말씀 가운데서 심령이 가난해서 나누지 못하는, 따뜻한 사랑을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것은 단순히 이웃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 정도를 떠나서, 21절에서는 한 단계 더 나가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죄”를 범하는 자라고 이야기하고, 그것이 엄청난 큰 죄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것이고,

부자는 누굽니까?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부자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인 것입니다. 부자는 우리 주변에 있는 연약한 지체들을 외면하지 않고, 사랑의 말이라도 따뜻한 손이라도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자가 그런 자가 부자인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14장 22절의 말씀 가운데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악을 도모하는 자는 잘못 가는 것이 아니냐? 선을 도모하는 자에게는 인자와 진리가 있느니라.” 악을 추구하는 것은 잘못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죠. 악을 추구하는 자는 잠시 잠깐 동안 성공하는 것 같고, 그리고 때로는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자리에 올라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그 잠깐 동안의 결과가 대단한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악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에는 망하는 길이오.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거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이고요.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무엇이 없을까요? 인자와 진리가 없는 것이죠. 바로 그 뒤에 줄입니다. 선을 도모하는 자에게는 인자와 진리가 있겠지만, 그러나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인자와 진리가 없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앞뒤 구절을 대조해 가면서 볼 수가 있겠습니다.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인자와 진리가 있다고 했는데, 도대체 선을 행하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가 있다고 하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여기서 인자라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이고, 진리라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한번 도표를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인자라고 번역된 말은 히브리어로 헤세드라고 하는 말입니다. 하드 이 헤세드라고 하는 말은 긍휼 은혜 인자 사랑과 같은 말로 번역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헤세드, 하나님의 그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죠. 진리는 뭐냐 에메트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 진리라고 하는 에메트라고 하는 단어는 “진리 참 성실 신실 흔들림이 없음”이라고 하는 그런 표현인데, 헤세드와 에메트는 항상 같이 성경에 등장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 잠언서 14장 22절에서도 인자와 진리가 있느니라 그랬습니다. “인자와 진리가 있느니라” 할 때가 헤세드와 에메트가 있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인자가 있고, 진리가 있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라고 잘 확 마음에 와닿지 않잖아요? 이게 무엇이냐면 소위 헨디아디스(hendiadys)라고 하는 표현법입니다. 헨디아디스라고 하는 표현법인데 이것은 성경해석학에서 지나가면서 한번 간단하게 언급을 했습니다마는 <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고, <디아>는 통하여라고 하는 말이고, <디스>라고 하는 말은 둘입니다. 그러니까 헨디아디스를 번역하면 번역하면 무슨 뜻이 되겠습니까? 두 개를 가지고 하나의 사상을 나타내는 것을 가리켜서, 헨디아디스 용법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지금 이 헤세드와 에메트가 헨디아디스, 두 개를 가지고 하나의 사상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된 거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뭐냐면 “흔들림이 없는 은총” “거짓이 없는 은총” “하나님의 흔들림이 없고 변함이 없고 참되고 신실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나타낼 때 어떻게 표현하냐면, “인자와 진리가 있느니라”라고 표현하는, 그래서 성경에서 은혜와 진리, 인자와 진리, 인자와 성실, 은혜와 성실, 은혜와 신실, 이런 표현이 나온다고 하면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해요? 하나님의 흔들림이 없는 참된 은총으로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이 헤세드와 에메트가 나온 성경 구절들을 몇 개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 얘기는 무슨 얘기냐면,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 하나님의 확고한, 변함이 없는 그 은혜가 충만한 것이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1장 17절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이냐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퍼부어주시는 확고한 그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무엘하 2장 6절 말씀에 보면 “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 했는데, 이 말도 역시 여호와께서 변함이 없는 진실한 은총을 너희에게 베푸시길 원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창세기 24장 27절 말씀에서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르되 나의” 아브라함의 종이 말하죠? “이르되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사랑과 성실을 그치지 아니하셨사오며,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하니라.” 여기서 사랑과 성실로 번역된 것이 헤세드와 에메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신실하신 그 사랑, 신실하신 그 은총을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해 주셔서 라반의 집, 리브가의 집으로 인도했다고 하는 그런 고백을 아브라함의 종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47장 29절의 말씀 가운데서도 “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야곱이 유언을 하면서 내게 인혜와 성실을 보여달라. 다시 말하자면 끊임없는 변하지 않는 진실한 그 은총을 내게 보여주어서, 나를 애굽 땅에 장사하지 말아 달라고 그렇게 부탁하는 내용이 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출애굽기 34장 6절 말씀에서도 하나님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하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와 진실이 많다고 하는 얘기는 뭐냐면, 참되신 은총이 많으신 하나님이다라고 하는 그런 말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 이름을 은혜와 진리라고 지은 교회도 있던데, 이걸 알고 졌는지 굉장히 궁금하기는 합니다.

아무튼 오늘 14장 2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은총이 있을 것이지만,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잘못 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변함없는 은총이 주어질 수가 없다”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는 연약해서 늘 반대로 갈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악을 행한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은총을 기대할 수가 없는 것이죠. 우리가 악을 행하면서 하나님 내게 은총을 허락해 주옵소서 할 수 있나요? 아니요. 악을 도모하는 자는 잘못 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그 확고한 은총을 받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인자와 은총, 인자와 진리 즉 확고한 진실하신 그 은총을 받을 수 있다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1만 달란트 빚진 자의 종 비유에 보면, 왕으로부터 1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사람이 길을 가면서 겨우 백 데나리온 빚진 종을 붙잡고, 그 돈을 갚지 않으면 내가 감옥에 처넣겠다 하는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임금이 화가 나서, 그 일만 달란트 빚졌던 종을 다시 잡아넣었다고 하는 비유를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고 계신데요. 이 비유를 통해서 들려주시는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용서하지 않고, 사랑을 베풀지 않고,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서 하나님의 그 은총을 기대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은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자입니까? 아무런 사랑을 받지 못한 자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은총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마음이 부요한 자가 되어야 됩니까? 가난한 자가 되어야 됩니까? 부유한 자가 되어서 사랑을 보여줘야 되는 것이죠. 사랑을 나누어줘야 되는 것이죠. 아무리 나눌 게 없어도 나눌 수 없는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말로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그 사랑을 베풀며 살고 이웃에게 부유한 마음을 가지고 너그럽게 사랑으로 대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번에 우리 황석연 장로님께서 소천하셔서 장례를 오늘 아침까지 해서 다 장례 절차를 마쳤습니다. 우리 교회 존경받는 은퇴 장로님이신데, 이런 분을 잃는 것이 너무나도 슬픈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은혜 가운데 장례를 잘 마치게 됐는데요. 돌아가시기 전에 우리 장로님이 중환자실에 있는 기간 동안 잠시 우리 장로님을 뵐 수 있는 그런 기회를 가졌습니다. 이선 권사님이 그 장로님을 향해서 참 많은 사랑으로 이렇게 돌보는 모습을 보면서, 엄청난 감동을 받았습니다. 요즘에는 병원이 너무 까다로워져서 중환자실에 들어가면, 면회도 잘 안 시켜줍니다. 예전에는 8시 5시 해가지고, 면회 시간이 있었는데, 요즘에는 면회 시간도 없고, 가족이라도 해도 면회를 잘 안 시켜주는 아주 까다롭게 그런 상황입니다. 그런데 우리 권사님이 면회도 안 시켜주는 그 전북대 병원을 매일 가는 거예요. 매일 가면서 전북대병원을 도는 거예요. 그리고 중환자실 앞에 그냥 서있는 거예요. 빵을 사 들고 가서, 간호사들에게 좀 주고, 나오는 사람들에게 좀 물어보고, 또 물어보고, 매일 그렇게 하니까, 그 간호사들도 너무 잘 알고, 그러다 보니까 살짝 보여주기도 하고, 그래서 지난 지난 금요일에는 저도 같이 중환자실에 들어가게 돼서, 장로님 마지막 가는 모습들을 좀 보게 됐는데, 조금만 가족들만 들어갈 수 있게 해서 잠시만 보고 나와야 되는데, 한 5분 정도 보는 시간이 주어진 것 같아요. 그런데 들어가서, 막 이야기를 하면서, 손도 만지고 양말도 갈아 신기고 하면서, 이제 시간 됐으니까, 이제 다른 가족들이랑 교환하세요. 그러니까 예 알겠습니다. 해놓고 또 안 나가고, 또 붙들고 그래서 이제 시간 됐습니다. 이제 나가세요. 그러니까 예 알겠습니다. 나갈게요. 해놓고 또 안 나가고, 또 그러면서 한 30분을 그렇게 막 그 장로님을 붙들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참 그 사랑과 헌신이 참 너무나도 감동적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면서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도 그렇게 하셨구나. 우리가 죄악 가운데서 영원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을 때, 하나님께서 이 나쁜 놈들 하고, 가망성 없구나 하고 끝내버리고, 그냥 포기해 버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께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가장 소중한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까지, 저와 여러분들을 향한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주신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받았다고 한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의 마음을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나만 하는 그런 영적으로 심령이 가난한 그런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우리들의 마음속에 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부요해져서 그래서 그 부요함이 우리 주변으로 흘러넘치고, 우리 주변에 흘러넘쳐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또 선한 길로 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늘 넘어질 때마다 하나님 다시 한번 회복할 수 있는 은혜 허락해 주옵소서. 영적으로 심령이 부유한 자가 되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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