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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한 대답, 온순한 혀 (잠 15:1-4)

오늘 읽은 말씀 가운데서 2절 말씀에 보면,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는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혜 있는 자의 혀가 지식을 선히 베풀게 된다고 하는 것인데요. 누가 지혜로운 자이며, 그렇게 지식을 선하게 베푸는 자는 누구이겠습니까? 1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다시 말하자면 유순하게 대답하는 자가 지혜 있는 자일 것이고요. 그렇게 유순하게 말하는 자가 선을 베푸는 자, 지식을 선히 베푸는 자가 될 수 있겠다 하시는 말씀입니다.

4절 말씀에서도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온순한 혀는 곧 생명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넉 절의 말씀을 우리가 간단하게 결론을 내린다고 한다면, 온순하게 말하고, 또 온순하게 대답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고, 문제를 가라앉히게 되는 것이고, 사람을 살리는 것이고, 또한 마음을 기쁘게 만들게 되겠지만, 분노 가운데 과격하게 말을 하게 되는 것은,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뿐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의기소침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마음을 상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는 이 말씀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말을 온순하게 해야 합니까? 과격하게 말해야 됩니까? 온순하게 말해야 합니다. 온순하게 말하고, 대답하고, 참 따뜻하게 부드럽게 말을 해야 되는데,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들의 실제 삶 가운데서 그렇게 말하게 되기보다는, 과격한 말이 튀어나오기 쉽고, 분노에 찬 말이 나오기 쉬운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고 하는 속담처럼, 우리들은 화를 일으키는 말을 듣기도 하고, 또 우리들의 분노를 자아내게 만드는 그런 행동들을 목격하기 때문에, 그렇게 좋은 말이 안 나오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 세상이 정말 좋은 일들만 가득하다고 한다면, 이 세상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잘 돌아갈 수만 있다고 한다면, 나쁜 말 과격한 말 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 좋은 말 하고 싶고, 부드러운 말 하고 싶고, 온순한 말을 하고 싶은데,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되는 그런 상황들이 자꾸만 펼쳐지기 때문에, 사람들이 화를 내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고, 말이 과격해지게 되는 그런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것이죠.

집안에서 아이들이 말썽을 피우고, 집안에서 아이들이 문제를 일으킬 때, 엄마 아빠의 속을 썩이게 될 때, 그래서 말이 예쁘게 안 나가는 것이죠. 화가 난 상태에서 말이 나가게 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내가 지불했던, 그 지불했던 것에 비해서 대접을 못하게 받거나, 내가 제공한 것에 비해서 형편없는 대접을 받게 되게 된다고 하면, 또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화가 일어나게 되고, 분노가 솟아오르게 되는 것이죠. 유순한 말이 불가능한 이유가 무엇이냐면, 우리를 화나게 만드는 일들이 널려 있기 때문에, 유순한 말을 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정말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마주하기 때문에, 우리가 분노하게 될 만한 그런 상황들을 만나기 때문에, 유순한 말 좋은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죠.

그런데 그 순간에 유순한 말을 하지 않고, 분노에 찬 대응을 하게 된다면 문제가 해결이 될까요? 해결이 되는 것 같지만 해결되지 않습니다. 내가 분노에 차서, 격한 말, 과격한 말을 하게 되면, 당장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오히려 더 문제를 더 크게 만들거나, 여러 가지 관계가 틀어지고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참 마음에 들지 않는 일들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분노에 찬 대응을 하기보다는 유순한 대답, 또 온순한 혀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로운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악순환을 멈출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용서와 사랑으로 대하게 될 때, 악순환을 멈추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 나에게 나쁜 짓을 하고, 좀 마음에 안 드는 모습들을 보여주게 된다고 한다면, 거기에 따라서 우리가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품고 이해해 주고 온순하게 대한다고 하면, 그 악순환이 멈추게 되는 것이죠. 구약의 법 가운데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는 그런 법이 있습니다. 이 구약의 법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아주 놀라운 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주 옛날 아주 아주 먼 옛날에는 복수를 어떻게 했냐면, 몇 배로 갚아주는 겁니다. 눈을 다치게 하면, 눈만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죽여버리고요. 이를 다치게 하면 이로 갚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리를 부러뜨리기도 하고요. 정말 내가 당한 피해보다도 몇 배로 갚아버리는 일들이 자행하고 있던 그런 시대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법은 적당한 형벌을, 행한 잘못에 대한 적당한 형벌을 줘야 되지, 과도한 형벌을 줘서는 안 된다고 하는 그런 선한 법으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는 법이 과거에 보면, 과거의 그 일들과 비교해 본다고 한다면, 적당한 법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러니까 내가 그만큼 복수해도 괜찮다고 생각이 되게 된다면, 사실은 그 악순환이 멈추지 않게 되는 것이죠. 이 사람이 나에게 눈을 다치게 만들면, 내가 눈을 다치게 만들고, 나를 한 대 때리면 나도 또 한 대 때리고 하면서, 서로 그렇게 응징하면서 살아가는 사회는 정말 삭막한 사회가 되어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마하트마 간디라고 하는 인도의 성인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눈에는 눈으로 대응하면 온 세상 사람이 눈멀게 될 것이다.” 아주 멋진 말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그 말씀을 이 마하트마 간디가 아주 멋진 말로 표현을 한 것이죠. 눈에는 눈으로 갚지 말고 이에는 이로 갚지 말고, 용서하라고 하시는 그 주님의 말씀을 마하트마 간디가 아주 재치 있고 아주 멋진 말로, 만일 눈에는 눈으로 대응하기 시작하면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눈이 멀게 될 거라고 하는 말로 그렇게 재치 있게 표현을 했습니다. 이 표현을 보니까, 저도 좀 재치 있게 하나의 표현을 한번 만들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하나 만들어봤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에는 이로 대응하면, 치과 의사들만 좋아할 거다.” 아무튼 이런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는 복수의 법칙으로 우리가 움직이게 된다고 하면, 그러면 계속해서 악순환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고, 관계는 끊어져 버리고, 그리고 마음은 상해버리고 더 이상 아무런 해결책도 없이 삭막한 세상이 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 가운데서 그런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는가? 오늘 잠언서 15장 1절의 말씀에서 말씀해 주는 것은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유순한 대답이 그 분노를 쉬게 만든다는 것, 저쪽에서 나에게 분노의 말을 하면, 나도 그만큼 똑같이 분노의 말로 대응하면, 그러면 “same, same. 일 대 일로. 그냥 됐구나”가 아니라, 그 말이 서로 왔다 갔다 하게 되면, 악순환이 되어서 도무지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고, 고통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는데, 저쪽에서 나에게 과격한 말을 하고 분노에 찬 말을 하더라도, 유순한 대답으로 반응하면 결국 다툼을 쉬게 만들고, 분노를 쉬게 만들어서, 악순환이 중단될 수 있다고 하는 게 오늘 잠언서의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저쪽에서 나에게 악한 말을 하고, 과격한 말 분노에 찬 말을 해왔을 때, 내가 그 사람에게 대하여 유순한 대답을 하게 되면, 내가 손해를 보는 것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그런 마음이 들까요? 안 들까요? 듭니다. 나를 욕하고 나를 비난하면, 그 사람이 하는 것에 따라서 나도 똑같이 갚아주어야 속이 시원한데, 똑같이 갚지 아니하고, 그것을 누그러뜨리고, 유순한 대답을 해주고, 선한 대답을 해준다고 한다면, 결국 나만 손해 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손해가 없는 게 아니라, 손해가 있어요. 손해 있는 거죠. 내가 그만큼 못 갚아줬으니까, 손해가 있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나에 대해서 나쁜 짓을 했는데, 그만큼 내가 저 사람을 고통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손해가 있는 것이죠. 하지만 손해를 입었기 때문에, 그 손해를 보는 것에 대해서 기분이 나빠서, 그래서 분노의 반응으로 그 사람에게 대응을 하게 되면, 손해가 완전히 없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손해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에요. 분노의 말을 듣고 내가 과격한 말을 듣게 되었을 때, 내가 정말 황당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고 하는 것 자체가 먼저 손해를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손해를 당했을 때, 똑같은 손해를 상대방에게 입히고, 과격한 말로 분노에 대답을 하게 되면, 그래서 똑같이 했으니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손해가 저 사람에게 또 가고, 저 사람이 또 나에게 손해를 주고 해서, 손해가 자꾸 자꾸만 커져가 버리는 거라고 하는 것이죠.

따라서 유순한 손해를 없애 주지는 않겠지만, 그 손해가 기하급수적으로 커나가는 것을 방지해 준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분노를 쉬게 함으로써 더 이상 문제가 확대되지 않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우리가 어떠한 참 억울하고 참 기분이 나쁘고, 여러 가지 마음속에 분노가 차오를 만한 그런 일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똑같이 분노에 찬 대응을 할 것이 아니라, 유순한 대답으로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유순한 대답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 유순한 대답은 어떻게 가능한 것이 되겠습니까? 유순한 대답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목소리의 톤을 낮추는 것으로서 가능한 것일까요? 누군가 화를 내면서 이야기하면, 그렇게 똑같은 억양으로 똑같은 톤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차분히 하고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여유롭게 대답하기만 하면, 유순한 대답이 되는 것일까요? 물론 그렇게 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소리를 높이기보다는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조용조용히 이야기하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유순한 대답이 무엇이냐면, 그렇게 목소리를 낮추는 것만이 유순한 대답이 아니라, 진짜 유순한 대답을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합니다. 첫 번째 전제는 무엇이냐면, 내가 상대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 거라고 하는 깨달음입니다. 내가 저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에게 분노의 마음이 솟아오르는 겁니다. 화는 어디서부터 솟아오르는가? 내가 그 사람을 완전히 다 알지 못했기 때문에 화가 나는 거예요. 누군가 약속을 지키지 않고 나타나지 않습니다. 누군가 약속을 지키지 않고 그 약속을 깨뜨려버립니다. 그럴 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하는 것 때문에 분노가 치밀어 솟아오르고 화가 나기 시작하는데요. 그것은 우리가 그 사람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하는

그 한 면만을 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까? 이 사람이 어떠한 사정이 있어서 이런 엄청난 일을 했을까? 그 사람의 상황을 우리가 더 깊이 알아간다면, 그 사람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 수밖에 없는 아주 긴급한 상황이, 그 사람의 어려운 상황에 대해서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만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분노의 마음들이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대부분의 화가 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사람 그 사람 전체를 알지 못하고, 그 사람이 행했던 조그마한 그 부분만을 보고 있기 때문에, 분노가 치밀어 솟아오르는 것이죠. 정말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내게 대응해 줘야 할 사람이 성의 없이 대응하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화가 나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그 한 면만을 보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그 사람이 정말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있어서, 그래서 정말 나올 수 없는 그런 상황 가운데, 그러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힘든 몸을 이끌고 와서, 지금 그렇게 해주고 있다고 하는 그 사실까지 알게 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어젯밤에 얼마나 힘든 일을 겪었고, 그 사람이 그것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그 사람에 대한 이해를 우리가 하게 된다고 한다면, 화를 낼 것이 아니라, 오히려 측은한 마음이 들 것이고, 그 사람을 알면 알수록 분노가 차오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한 측은한 마음이 솟아오르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가? 내가 무식하기 때문에 분노가 솟아오르는 겁니다. 내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죠. 따라서 진짜 유순한 대답은 어디에서부터 가능한가?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인식할 때, 거기서부터 출발이 가능하는 것이죠. 우리 아이들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우리 아이들이 남을 때리기도 하고, 우리 아이들이 물건을 훔치기도 하고, 우리 아이들이 정말 원하지 않는 일들을 그런 일들을 하는 그런 모습을 볼 때, 부모의 마음 가운데 분노가 솟아오르기 시작해요. 그런데 가만히 알고 보면 왜 이 아이가 이런 일을 하고 있을까? 엄마의 사랑이 그리워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경우도 많아요. 이런 일을 하게 되는 그런 특별한 그 아이의 심리적인 상태가 있어요. 학교에서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했기 때문에 그렇게 그 마음이 그렇게 표현되는 경우도 있고, 정말 그 아이의 심정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할 수만 있다고 한다면, 화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측은한 마음이 들고 그 아이를 감쌀 수 있는 마음들이 생기게 될 텐데,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분노가 솟아오른다고 하는 사실을 먼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조급하게, 알아보지도 않고 무조건 성을 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야고보서 1장 19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하기를 더디 하고, 천천히 하고, 성내기도 천천히 하라고 하는 이야기, 더디 하라고 하는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말을 천천히 해야 한다는 얘기입니까? 그게 아니라 말하기 전에 알아보라는 거예요. 성내기 전에 살펴보라는 거예요. 분노가 생기면 생기는 즉시 쏟아버릴 것이 아니라,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으면 무조건 말하기부터 할게 아니라, 왜 저런 상태인가 살펴보고 이해하려고 하고, 또 알아보고, 전후 사정 다 알아보고, 정말 그 사람이 어떤 상태인가, 다 알아본 다음에 그다음에 화를 내도 괜찮다는 것인데, 그런데 알아보면 화낼 일이 없어요.

두 번째로 유순한 대답이 가능한 것은 무엇인가? 어떤 때 유순한 대답이 가능할 것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하는 일들이 결국은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가운데 발생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유순한 대답을 할 수가 있습니다. 누군가 나를 속이기도 하고, 누군가 나에게 사기를 치기도 하고, 또 누군가 나에게 여러 가지 나쁜 짓을 할 때에도, 그때도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것이 하나 있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일어난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 인정하고 고백한다고 하면,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유순한 대답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피난길에 올랐을 때 다윗을 향해서 욕하는 시므이를 만나게 됐습니다. 피난길에 올랐을 때, 그 다윗을 향해서 욕하는 그 시므이를 바라보게 될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은 그 순간에 그 시므이를 보면서, 화나는 대로 시므이에게 응대한 것이 아니라, 유순한 방법으로 시므이를 바라보았습니다. 어떻게 바라볼 수 있었는가? 사무엘하 16장 11절 12절 말씀에 보면,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자신을 욕하고 있는 그 시므이를 보면서, 하나님이 시므이로 하여금 나를 욕하게 만들었다. 그것을 본 거예요. 억울하지만, 그냥 억울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하나님께서 사용하는 도구가 되어서, 나를 욕하게 만들었고 내 죄를 깨닫게 만들고, 나로 하여금 회개하게 만들고, 나로 하여금 나의 연약함을 볼 수 있는 그런 눈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저 시므이를 사용하셨다고 하는 관점으로 바라보게 된 거예요.

누군가 나에게 나쁜 짓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혹시나 책망하려고 저 사람을 사용하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께서 저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이렇게 인도하시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고 통치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때, 우리는 과격한 말이 아니라 유순한 대답으로 대답할 수가 있는 것이죠.

요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셉이 겪었던 일들은 얼마나 정말 마음이 아픈 일입니까? 형제들이 그를 죽이려고 들었고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그런 사악한 일을 했던 그 형제들의 모습을 볼 때, 그 형제들에게 원수를 갚고 싶은 마음이 왜 그 마음 가운데 인간적인 마음이 안 들겠어요? 하지만 그 요셉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는 것,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세우려고, 형을 사용하여 나를 애굽 땅에 팔아버렸구나! 저 보디발의 아내가 나를 감옥에 넣었고, 나를 이런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길을 겪게 만들더니,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섭리하셔서, 결국 나를 선하고 옳은 길로 하나님께서 나를 빚어나가시는 그 모습을 바라보게 될 때, 원망하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유순한 대답으로 하게 되는 것이죠.

세 번째로 우리가 유순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하는 사실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 죄악을 범했고, 주님을 향해서 배반했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은 사람들이었는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과분한 하나님의 사랑과 과분한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받았다고 한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한다고 한다면, 우리를 향해서 욕하고 비난하는 그런 사람들을 바라볼 때, 우리가 똑같이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해 주셨다고 하는 그 사실 때문에, 감사의 마음으로 유순한 대답을 할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한마디로 어떻게 우리는 유순한 대답을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을 믿어야 돼요! 말로만 하나님 믿는다고 말할 게 아니고, 말로만 교회 다닌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구나! 정말로 그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그 아들을 내어 주셨구나! 정말로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셨구나! 그 하나님을 제대로 믿으면, 유순한 대답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죠.

오늘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마음과 악한 생각들이 자꾸만 나오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일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들을 내가 내 힘과 능력으로 원수를 갚아버리고 복수하고, 그리고 화를 내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다가, 우리는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게 되겠는데요. 그러한 불쌍한 인생의 길을 또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서, 온 세상이 눈먼 인생이 되거나, 치과 의사만 좋아하게 만드는 일들을 할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신 그 사랑을 마음속에 새기며,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오늘 말 한마디 한마디도 하나님의 사랑이 반영되는, 그런 유순한 대답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 나올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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