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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의 제사 (잠 15:6-9)

오늘 잠언서 15장의 말씀 함께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데요. 먼저 6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의 집에는 많은 보물이 있어도, 악인의 소득은 고통이 되느니라.”라고 하는 그런 말씀입니다. 의인의 집에는 많은 보물이 있다. 그런데 “악인의 소득은 고통이 될 뿐이다”라고 하는, 어쩌면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 바로 잠언서 15장 6절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나라 번역으로 된 걸 보면, 동사가 들어가 있지만, 사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동사가 없는 문장입니다. 우리나라 말에는 동사가 반드시 있어야 되는 거죠. 대부분, 대부분의 문장이 동사가 있어야 되는 문장인데, 히브리어나 헬라어나 이런 문장들 중에서는 동사가 없어도 되는 문장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읽은 우리 잠언서 15장 6절은 동사가 없는 문장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한번 히브리어를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보면 위에 있는 것이 히브리어 원본이죠?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잘 안 보이죠. 제가 잘못 만들었네요. 보이게 만들어야 되는데, 저도 잘 안 보입니다. 그런데 안 보여도 괜찮아요. 밑에 한국말은 그래도 좀 보입니까? 이 위에 있는 히브리어를 한국말로 직역해 놓으면, “의인의 집에 많은 보물, 악인의 소득에 고통”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동사는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적당한 동사를 넣어서, 아마 이런 의미의 동사로 번역하면 좋겠다 싶은 동사를 넣어서 번역해 준 겁니다. 의인의 집에는 많은 보물이 있지만, “있지만”이라고 하는 동사를 첨가해서 번역해 준 거고요. “악인의 소득에는 고통이 따를 것이다.”라고 하는 동사를 첨가해서 번역을 해 준 것이죠.

잠언서 15장 6절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먼저 뒷부분을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는데요. 악인의 소득에는 고통이 따른다고 하는 그런 문장을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악인이 소득을 가지고 있어도, 악인이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그 재물은 유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될 뿐이다. “오히려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뿐이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겠습니다.

재물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재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을 편리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재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재물을 얻기 위해서 대단히 노력하고, 수고를 많이 하게 되는 것이죠. 많은 재물을 얻으면 그만큼 더 편리하고,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 그만큼 더 윤택해지고 편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재물을 많이 얻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잠언서 15장 6절에서 6절 하반절 뒷부분에서 해주는 말씀이 무슨 이야기냐 하면, 악인은 그런 재물을 가진다고 한들, 그에게 유익한 것이 아니라 해로울 뿐이고, 그런 악인이 재물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오히려 “고통스러울 뿐이다”라고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이해는 되지만, 실제로 그렇습니까? 성경 말씀대로 정말 악인들은 재물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인가요? 악인이 잘 살고 있는 것인가요?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의 현실도 같이 봐야 되겠는데, 우리가 실제로 느끼는 것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악인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아주 편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한 악인들의 모습을 보게 될 때, 우리들의 마음은 늘 흔들리게 되어 있는 것이죠. 나는 믿음을 가지고 산다고 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고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악한 사람들은 아무 문제 없이 떵떵거리며 살고 있고, 악한 사람들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아주 유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과연 내가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옳은 것인가? “과연 이게, 내가 가는 길이 맞는 것인가?”라고 하는 그런 회의가 들기가 쉬운 것이죠. 그런 회의가 들 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어요.

그런데 우리들만 그렇게 회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성경에도, 그런 회의에 가득 찬 마음들이 성경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시편 73편의 말씀은 아삽이라고 한 사람이 쓴 시편인데, 그 아삽의 시편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오늘 잠언서의 말씀에서는 “악인은 재물을 가지고 있어도 고통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정말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악인들은 재물이 많고, 잘 살고 있고, 고통이 없이 살아가고 있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여서, 그래서 내가 넘어질 것만 같다. “내가 정말 시험이 든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님들은 이런 현실 세계 속에 들어가게 되면서, 믿음이 흔들리기가 쉬운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더욱더 악을 계속해서 저지르는 것이죠. 왜냐하면 악을 저지를 때마다 고통이 생기고, 악인이 재물을 얻어봤자 쓸모없는 것이고, 다 고통스러운 것이고, 정말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한다면, 악인도 악을 행하다가 “아이고, 이런 재물 모아봤자 쓸모없는 것이다.” 하면서, 악을 그만둘 텐데, 괜찮아요. 재물이 있으니까 너무나도 좋아요. 그러니까 악인이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겁니다. 죄를 계속 지어도 아무 문제가 없고,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악인들은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것이고, 믿음의 사람들은 그 악인들이 잘 나가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내가 믿음의 길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옳은가?”라고 고민하면서, 믿음의 길에서부터 떨어지는 경우들도 우리는 많이 만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잠언서 15장 6절의 말씀에서 가르쳐주고 있듯이, 악인의 소득은 고통뿐이며, 악인은, 악인의 소득은 악인을 구원하지 못할 것이며, 악인의 소득은 결국 유익하지 않다고 하는 이 잠언서 15장 6절 하반절의 말씀을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깊이 새길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73편의 말씀에서 처음 부분에는 그렇게 하소연하고, “정말 세상이 왜 이렇습니까? 왜 이렇게 엉망입니까?”라고 울부짖었던, 시편 73편의 첫 부분에서는 그렇게 표현하고 있지만, 이 시편 73편을 쭉 계속 읽어나가다 보면, 뒷부분에 가서는 논조가 바뀌고, 그 표현이 바뀌게 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시편 73편 16절에서부터 19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시편 기자는 악인들이 형통하는 모습을 보면서, 잘 나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세상에 이럴 수가? 내 믿음이 흔들릴 것만 같고, 정말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것만 같은 그런 현상을 보면서, 정말 괴로워했었지만, 그러나 이 시편 기자가 나중에 발견하게 된 결론이 무엇이냐면, 그러나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정의롭게 판단하시고,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고, 그 악인들의 길은 미끄럽게 하시며, 결국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잡는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 시편 기자가 이 73편의 말씀을 아주 바르게 결론짓게 되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죠.

우리는 지금 잠깐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참 이상한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지 않는 것 같고, 악인들은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고, 의인은 아무리 살아도 고통스러운 것만 같은 현상들을 바라보는, 그 짧은 시간만 바라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들의 마음이 미끄러질 수 있겠지만, 그러나 이 아삽의 시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결국에 하나님께서 완전히 바로 잡으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마지막에는 하나님 앞에 찬송하는 그런 시로 바뀌었다고 하는 점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떻게 그것을 깨닫고 확신을 가지게 되었는가? 언제 그렇게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고요? 시편 73편에 보면 내가 어디에 들어갈 때? “성소”에 들어갈 때 깨달았다. 다시 말하자면 무슨 말씀입니까? 성소에 들어간다고 하는 말은 내가 장소적으로 어느 교회에 간다. 장소적으로 내가 성전에 간다. 그런 의미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서게 되었을 때, 그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죠.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그 순간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어떻게 흘러가는가에 대해서 깨닫게 되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됩니까? 하나님에게 두어야 되는 것이죠. 이 세상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는 있는 일들,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런 일들만 바라보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의 시선이 이 땅의 것들에만 눈을 두게 된다고 한다면, 모든 것이 모순 덩어리고, 악한 자들은 승리하는 것 같고, 의인은 다 망하는 것 같고, 그래서 정말 악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될 겁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벌어지는 그런 일들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눈을 어디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하면서,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는, 그 놀라운 결국 미래의 결국들을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혹시라도 의심이 생기고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혹시라도 낙담하게 되고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이 생긴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향해서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15장 6절 하반절을 먼저 살펴보았는데, 앞에 6절에서는 무슨 의미를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일까요? 잠언서 15장 6절 앞부분에서는 의인의 집에는 많은 보물이 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현실 세계에서 보이는 겁니까? 현실 세계에서 잘 볼 수 없는 것들입니까? 현실 세계에서는 별로 실감이 나지 않는 것 같은 이야기예요. 하나님을 섬긴다고 섬기는 사람인데, 지지리도 가난해요. 주를 위해서 정말 의롭게 사는 사람 같은데, 정말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아요. 재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없어요.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도대체 잠언서 15장 6절에서는 의인의 집에 많은 보물이 있을 것이다고 하는 이 말의 의미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그 말은 결국 정말 의로운 자는 지금 재물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결국에는 부자가 되고, 결국에는 많은 보화를 얻게 되고, 결국에는 승리하게 되고, 결국에는 형통하게 될 거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일까요? 아니면 참된 보물이 무엇인가? 참된 보물은 이 세상의 보화가 참된 보물이 아니라, 저 천국이 참된 보물이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이 참된 보물이고, 영적인 축복을 얻는 것이 그게 진짜 참된 보물이니까, 의로운 자는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일까요? 1번일까요? 2번일까요? 2번이요? 1번이요? 잘 모르겠어요. 잘 모르겠어요. 제가 여기 서 있다고 해서, 다 아는 건 아니고, 모르는 게 아직도 너무 많아요. 배워야 될 게 많고, 연구해야 될 게 더 많고 배워나가야 되겠는데, 과연 의인의 집에 많은 보물이 있다고 하는 이 말씀이 과연 어떤 의미일까? 그 말은 결국은 의인이라고 한다면 결국에는 성공하게 될 것이고, 결국에는 부자가 될 것이고, 결국에는 많은 재화를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어렵고, 그렇다고 한다면 이런 보하라고 하는 것이 이 세상의 보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저 천상의 보화를 말하는 것이지, 이 세상의 보화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말아라. 그냥 “우리는 천국의 소망이나 갖고 살자”라는 그런 의미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워요. 그래서 1번이라고 대답하기도 어렵고, 2번이라고 대답하기도 어렵습니다.

제가 생각한 최선의 대답은 무엇이냐면, 뒷부분과 연관시켜서 이해하는 대답입니다. 악인에게는 재물이 있어 보았자 결국 그것이 고통일 뿐이라고 하는 그 말씀과 연결시켜서 생각한다면, 잠언서의 말씀이 대부분은 히브리 평행법적으로 된 것이니까, 같은 내용을 반복하기도 하고, 또는 대조시키기도 하는 그런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악인에게는 재물이 있어봤자 그것이 고통으로 귀결되는 것이겠지만, 의인의 집에 있는 많은 재물들은 그 재물 그대로 있는 것이다. 의인의 집에 재물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긍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고, 그리고 또 이것은 유익한 용도로 쓰이게 되는 것이고, 좋은 것이지, “악인처럼 그 재물이 고통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적어도 그것은 사실이죠. 왜냐하면, 의인은 누굽니까? 재물을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의인이 재물을 가지고 있지만, 재물을 의지하는 사람은 의인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재물을 가지고 있지만, 재물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 의인은 재물이 있어도 그 재물이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재물로 인하여 유익을 누리고, 또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가진 것이 많든 적든 어떤 것이든 그 재물이 유익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생각이 되는 것이죠. 악인의 경우와는 정반대의 경우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들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느냐라기보다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아니라고 한다면, 재물을 가지고 있어도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겠지만, 그러나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는 의인이라고 한다면, 그 재물이 그 재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6절의 말씀을 보면, 우리 모두가 다 악인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의로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그런 결단들이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절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잠언서 15장 7절 말씀에서는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지식을 전파하여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정함이 없느니라.”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지식을 전파한다. 이해가 되시죠? 그런데 그다음 문장은 조금 이해가 안 됩니다. “미련한 자의 마음은 정함이 없다”? 도대체 미련한 자의 마음이 정함이 없다고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잘 이해가 안 됩니다.

그래서 이해가 안 될 때는, 무엇을 봐야 되겠죠? 원문을 한번 봐야 되겠죠. 원문을 한번 봐야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원문을 한번 봤어요. 이번에도 제가 잘못 만들어지고 잘 안 보여서 죄송한데요. 위에 있는 히브리어를 밑으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지식을 퍼뜨리지만, 바보들의 마음은, 어리석은 자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 말에서는 “정함이 없다”라고 번역을 했지만, 히브리 원문을 보니까 “어리석은 자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로켄” “로켄”이라고 하는 말이죠. “그렇지 않다”라는 “로켄” 그래서 한글 개역 성경이 아닌, 우리가 쓰고 있는 개역 성경, 개역 개정 성경이 아닌 쉬운 성경에서는 어떻게 번역하고 있는가라고 보았더니, 쉬운 성경은 번역을 잘해놓았어요. 쉬운 성경은 어떻게 번역을 했냐면,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지식을 전파하나, 어리석은 자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7절의 번역은 조금 아쉬운 번역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지식을 전파하겠지만, 그러나 미련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전파합니까? 못합니까? 못한다. 그런 의미예요.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지식을 전파하겠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지식을 전파하겠지만, 미련한 사람은 지식을 전파할 수가 없다. 그런 의미의 말씀이 7절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라는 말씀일까요? 우리가 지혜로운 자를 따라가야 된다는 것이죠. 지혜로운 자를 따라가면 지혜로운 자의 입술에서 전파되는 그 지식을 우리가 얻게 되겠지만, 지혜로운 자를 따라가고, 지혜로운 자에게서 듣게 되면, 우리가 지식을 얻고, 그리고 그래서 우리가 현명하게 되겠지만, 우리가 지식을 얻게 되겠지만, 그러나 지혜로운 자가 아닌 어리석은 자를 따라가게 되면, 무식한 자를, 바보를 따라가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사람에게서 지식이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지식을 전파해 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깨달음이 없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아무것도 유익을 얻지 못하고 결국 경이 소경을 따라가게 되면 어떻게 돼요? 둘 다 구덩이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따라서 잠언서 15장 7절의 말씀의 결론은 무엇인가? 우리는 지혜로운 스승을 두어야 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이 세상에는 거짓 선생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거짓 선생들을 따라가게 되면, 결국은 우리는 무지 가운데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갔다가는, 그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바보 같은 사람들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결국에 가서 “여기가 아닌 개벼.” 하는 일이 생기는, 그래서 우리는 지혜로운 자를 따라가야 하는 것이고, 결국 지혜로운 선생은 어떻게 우리들을 가르치는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가르쳐서, 하나님의 그 지혜로, 하나님의 지식으로 따라가게 할 것이기 때문에, 스승을 잘 분별해서 따라가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되겠습니다.

잠언서 15장 8절 구절 보겠습니다. 잠언서 15장 8절이죠.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9절. “악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의를 따라가는 자는 그가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제사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미워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말씀을 잘 기억해야 되겠는데요. 하나님께서는 정직한 자의 기도는 기뻐하시겠지만, 악인의 제사, 악인이 하는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제사, 기도”라고 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들이 하는 모든 신앙적인 행위들을 대입해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 하나님 앞에 드리는 그런 예배, 하나님 앞에 드리는 헌신, 헌물, 또한 봉사, 기도, 금식 여러 가지 영적인 그 모든 일들, 우리가 하는 그런 모든 신앙적인 일들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그 모든 예배와 기도와 신앙적인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좋아하실까요? 별로 좋아하지 않으실까요? 정답은 Yes and No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첫 번째로 NO라고 대답을 한다면,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드리는 그 예배, 우리가 하는 그 기도, 우리가 하는 헌신, 그 어떤 봉사, 그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갈망하거나, 그것 좀 나에게 바치기를 원하거나, 그러시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오해하기 쉬운 표현인데요. 무슨 얘기냐 하면, 시편 51편 16절의 말씀과 같은 그런 의미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기뻐하지 않고, 번제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여기서 나오는 “제사, 번제”라고 하는 말을 우리가 하는 모든 신앙적인 행위에 다 대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그 예배, 하나님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그 예배를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우리가 드리는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우리가 드리는 헌금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우리가 전도하는 그 일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우리가 봉사하는 그런 헌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로 대입해도 되는 표현이 바로 시편 51편 16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에게는 필요하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자 여기 맛있는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맛있는 음식을 갖다 주면, 모든 사람들이 다 좋아할까요? 대부분은 다 좋아하겠지만, 누구는 좋아하지 않을까요? 지금 뷔페에 가 가지고 잔뜩 먹어서,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배가 터질 것 같은 그 사람에게 “아이고 이 고기 내가 갖고 왔으니까 드세요.”라고 갖다 주면 그 사람이 좋아하겠습니까? 안 좋아해요. 왜? 이미 뷔페식당 가 가지고, 그냥 엄청나게 먹었어요. 엄청나게 먹어가지고, 그냥 몇 배로 먹고, 그래서 배가 땅땅하게 찰 정도로 미련하게 먹었는데, 그래서 더 이상 들어갈 수가 없어서, 이제 그만 먹겠다고 딱 내려놨는데, “더 먹어” 하면서, 더 가지고 오면, 그 음식을 보면서, “야 맛있겠다”라고 하면서 달려들까요? 안 달려드는 거죠. 하나님께서 우리의 제사를 기뻐하지 않는다. 번제를 기뻐하지 않고, 우리의 신앙 행위들을 하나도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는 그런 의미는 무슨 의미냐 하면, 하나님에게는 그 어느 것도 아쉬운 게 없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이 예배 고파 가지고 막 쓰러져 죽을 것 같은가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헌신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봉사하지 않고 하면, 하나님께서 아 내가 그런 것들이 없어가지고 내가 말라 비틀어 죽겠다. 큰일 났다. 내가 이런 것들을 좀 받아먹어야, 내가 살 수 있을 텐데, “아무것도 안 주네” 하면서 굶어 죽을까요? 하나님께서? 아니요. 하나님은 아무것도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예배드리지 않아도 하나님은 스스로 영광스러우신 하나님,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아무것도 아쉬울 것이 없어요. 모든 것이 충만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다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릴 때, 하나님께서 그것이 내가 정말 필요했는데 너무나도 고맙다고 받아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이미 꽉 차있어서, 이미 완전히 충만하시기 때문에, 그 어느 것 하나 아쉬울 것 없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이 말입니다.

사도행전 17장 24절에서 25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하나님은 뭔가 부족해서 받아야 되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주시는 하나님이시다”라고 하는 것이죠. 하나님에게 뇌물을 드리면, 하나님이 그 뇌물을 기뻐하실까요?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에게는 뇌물이 필요가 없어요. 그 뇌물을 얻기 위해서 안달을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는데,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의 예배를 갈급해하시겠습니까?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의 기도를 갈급해 하시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가짜 종교는 그런데 하나님을 거지처럼 만들어 버립니다. 이 세상의 가짜 종교는 하나님을 거지처럼 만들어서, 우리가 많은 돈을 들여서 굿을 하게 되면, 그러면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내놓을 것이고, 우리가 종교적인 헌신을 더 많이 하면, 더 많은 축복으로 내어주고, 우리가 하나님과 흥정을 잘하면, 우리가 많은 것을 들여서 그래서 흥정을, 잘 구슬리면,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얻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더 많은 것을 줄 것이라고 그렇게 가짜 종교에서는 말을 하고 있는데, 사실은 그것은 신의 이름을 이용해서 우리의 것을 빼앗아 먹기 위한 가짜 종교 사기꾼들이 하는 잘못된 말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제사가 전혀 필요하지 않으신 하나님이고, 다윗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은 번제를 기뻐하시는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제사를 기뻐하지 않는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믿고 고백한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예배 안 드려도 괜찮다고 하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조금 전에 안 기뻐하신다고 그랬는데, 정반대로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왜? 이것이 아쉽고 하나님께 필요해서 하나님에게 부족해서 그것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사는 그 모습을 하나님께서 너무나도 좋아하시고, 정말로 그 영혼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51편 17절의 말씀에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다.” 하나님 앞에 울면서 나아가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하는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영접해 주신다고 하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잠언서 15장 8절 9절 말씀 가운데서는 악인이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 걸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 제사를 드리려는 것이거든요. 하지만 그러한 하나님께 악인이 제사를 드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야 그래도 네가 나한테 100만 원을 바쳤구나. 네가 나한테 1억을 바쳤구나.” 악인이 많이 바치면, 많이 바칠수록,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그런 뇌물이 필요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나님이 필요하기 때문에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스러워서,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도 고마워서, 주님 앞에 겸손하게 나가야 되는 것이죠.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해 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도 감사해서, 내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필요한 것을 제공하고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와 사랑이 너무나도 감사해서,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인데, 그것은 그냥 악인이 제사를 드리는 그런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살아있는 제사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절 2절 말씀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악인의 제사처럼 온갖 나쁜 짓 다 하다가 하나님 앞에 뇌물 바치고 눈 좀 감아주세요. 마치 교통경찰에게 판사에게 뇌물을 바치듯이, 그렇게 바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무엇인가? 예배는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산 제사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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