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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교회사 강좌 1강: 십자군 운동

지금 우리가 우리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보고 있는 가운데 있습니다. 초대교사 강좌를 지난 시간까지 해서 마치게 되었고, 전부를 다 살펴본 것은 아니지만, 우리 기독교회 초기 역사, 그리고 중세의 역사, 그리고 종교개혁의 역사, 근현대사, 그리고 또 우리 한국교회사 등등 이렇게 역사들을 살펴보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이 역사라고 하는 것은 늘 반복이 되는 것이죠. 되풀이되는 겁니다. 예전에 있었던 그 일이 한 번만 있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심성과 품성을 가진 우리 인생들이기 때문에, 비슷한 여건이 만들어지게 되면, 그 옛날에 했었던 그런 반응들이 또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역사를 살펴본다고 하는 것은 아주 귀중한 의미가 있습니다. 과거에 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그리고 과거에서 교훈을 얻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살펴보는 것도 상당히 중요하지만,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아주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종종 우리는 역사를 잘못 사용하는데, 그 역사를 어떻게 사용하냐면, 우리의 교만의 재료로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예전에 이렇게 훌륭했다. 우리가 예전에 이렇게 멋있었다. 참 이 어마어마한 일을 이루어낸 사람들이다.”라고 하는 그런 교만의 재료로 역사를 삼을 때가 많이 있는데요. 물론 그런 자부심을 갖는 것도 어느 정도의 유익한 면이 없지는 않습니다마는, 사실 역사에 가장 큰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본성을 들여다보게 만들어주고, 우리의 모습을 들여다보게 만들어주는 데, 역사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볼 수는 없는데, 그런데 역사를 보면 거기에 우리의 모습이 비쳐 있는 것이죠. 거기에 우리의 그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 상황, 그러한 문제들 속에서, 우리가 그들과 똑같이 행동하고 있는 그런 모습을 우리가 보면서, 그런 과거의 잘못된 역사들을 우리가 반복하지 않아야 되겠다. 마치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 보듯이, 역사를 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비춰보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이제 중세 교회사로 들어가게 됐는데요. 중세 교회사에서 여러 가지 이슈들을 우리가 살펴보게 될 텐데, 오늘은 특별히 십자군 운동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면서, 그 십자군 운동이 어떤 것이었으며,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어떤 교훈을 줄 수 있는 것인지 살펴보면서, 우리가 많은 유익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군 전쟁에 대해서 많이 들어봤죠? 예 감사합니다. 고개를 끄덕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십자군 전쟁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십자군 전쟁은 교회가 주도하여 일으킨 전쟁입니다. 보통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전쟁입니까? 나라와 나라가 싸우는 거잖아요? 그래서 서로 강대국과 약소국들이 서로 싸우기도 하고, 주변 국가를 침공하기도 하고 하는 것인데, 십자군 전쟁은 무슨 전쟁이었는가? 교회가 주도해서 일으킨 전쟁이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 일이 언제 일어났는가? 11세기에 시작해서 13세기에 이르기까지, 약 200년간의 전쟁이 있었어요. 얼마나 참 비극적인 일입니까? 우리나라에 6.25 전쟁이 있었는데, 6.25 전쟁이 몇 년간 있었죠? 예? 3년 동안 있었잖아요? 3년의 전쟁도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고통스러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을 트라우마에 들어가게 만들었습니까? 3년만 전쟁을 해도 정말 고통스러운 것인데, 200년이라고 하는 긴 세월 동안에 종교 전쟁이 있었던 것이죠. 왜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을까? 왜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을까? 그것은 예루살렘과 그 가나안 땅 이스라엘 땅을 638년 이슬람교도가 점령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슬람교도는 이슬람교는 육백 몇 년에 발생을 했잖아요? 그래서 저 중동지방에서 그 이슬람 세력이 점점점점 강성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세력이 예루살렘까지, 그리고 가나안 땅까지 다 차지하게 되었는데, 그래도 이 이슬람교도들이 차지하고 있었을 때, 그렇게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었습니다. 충분히 기독교인들도 가서 볼 수가 있었고, 성지순례 할 수가 있었고, 어느 정도 자유가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11세기에 들어서서 1095년 셀즈크트루크라고 하는 그런 민족이 그 예루살렘 인근을 점령하게 되면서부터 이제부터는 곤란한 일이 생기게 된 겁니다. 이제는 기독교인들이 성지순례 오는 것을 못 오게 막은 겁니다. 탄압을 하기 시작한 겁니다. 엄청난 고난이 닥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큰 문제가 되었었는데요. 왜냐하면 우리 크리스천들은 성지에 한번 가보고자 하는 것이 소망이잖아요? 여러분은 그런 소망 갖고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죠? 성지 한번 가봤으면 좋겠다. 저도 이번 봄에 2월에 성지에 가서 그 성지를 살펴보는데, 너무나도 좋았어요. 너무나도 좋았어요. 그런데 그 옛날 이제 기독교가 지하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승인하고, 몇 년도에 승인했죠? 313년에 승인을 하고,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만들고, 그래서 이제는 기독교인들이 지하에 있던 성도들이 지상으로 나오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권력을 잡게 되었고, 부를 얻게 되었고, 이제는 그 사회의 주류가 되면서 이 사람들이 신앙생활 할 때 예루살렘 성전에 가는 것을 굉장히 소망을 했었던 것이죠. 뿐만 아니라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이 좀 건전한 것이었느냐 하면, 사실은 건전하지 못했어요. 우리 기독교 역사 가운데 정말 건전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때가 언제였을까 생각해 보면, 그렇게 많지 않아요. 사람들은 늘 타락한 품성을 가지고 있어서,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내가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타락한 모습의 신앙생활로 자꾸만 바뀌어 버리게 된 것이죠.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도 지하에 있을 때는 정말 순수한 믿음을 잘 가지고 있었지만, 인정받게 되고 국교가 되고 하면서 지상으로 나오면서 사람들이 이 기독교를 무엇으로 바꿔버렸냐면, 마치 미신과 같이 바꾸어 버린 것이죠. 마치 다른 종교를 믿으면서, 그 다른 종교를 통해서 복을 구하고, 그리고 우상에게 절하면서 복을 구하는 그런 그 모습 그대로, 기독교를 믿는 것이 어떤 것인가?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셨고, 내 죄를 용서해 주셨고, 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 기독교라고 하는 옷을 입고는 있지만, 어떤 신앙생활을 했냐 하면, 마치 미신과 같은 그런 신앙생활을 초대교회 중세 시대 때 했던 겁니다. 그냥 미신의 대상만 달라진 것 같은 그런 분위기인 거예요. 옛날에 우상에게 절하던 사람들이 예수에게 절하면,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에게 절하면, “그분이 나를 복되게 해 주겠지. 복을 내려주겠지”라고 하면서, 미신적인 신앙으로 바뀌어 버려 가고 있는 가운데, 특별히 이 초대교회 성도들, 중세교회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이 들었냐 하면, 내가 기도할 때, 내가 그냥 기도하는 것보다, “유물 앞에서 기도하면 훨씬 더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겠는가?”라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예를 들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예수님의 피를 닦았던 그 헝겊, 그 헝겊이 있는데, 그 헝겊 앞에서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더 잘 응답해 주시지 않겠는가? 예수님께서 썼던 그 가시면류관이 발견되었다고 한다면, 그 가시면류관 앞에서 우리가 기도하면, 더 잘 들어 응답해 주지 않겠는가? 또는 나사렛에서 예수님이 식사하던 그 식기 도구를 갖다 놓는다든지 등등 많은 유물들 앞에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면 훨씬 더 응답을 많이 받을 거라고 하는 그런 생각들이 많이 팽배해져 있었던 것이죠.

그런 생각은 성경적인 생각입니까? 잘못된 생각입니까? 잘못된 생각이신지는 아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잘못된 생각이에요. 잘못된 생각이죠. 마치 이스라엘 민족이 법궤만 가져다 놓으면 전쟁에서 이길 줄 알고, 하나님께 순종함이 없이 그냥 법궤만 갖다 놓고 그 앞에서 복을 달라고 구하는 것과 똑같은 그 모습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죠.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앞에 제사만 드리면 복을 받을 줄 알는 그런 잘못들을 반복하고 있는 일들이 일어나게 된 것이죠. 따라서 성지 순례가 유행한 이유가 무엇이냐? 성지순례에 가서 우리가 그 앞에서 예배하면 더 복을 받겠다고 하는 그런 미신적인 잘못된 생각이 많이 팽배해 있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번에 2월에 제가 성지 순례를 갔을 때 예루살렘에 가보니까, 수많은 기독교 종파들이 로마 가톨릭이라든지, 아니면 러시아 정교회라든지, 에티오피아 정교회라든지, 희랍 정교회라든지 세계의 다양한 여러 종파들에서 그 성지 안에 있는 여러 곳곳들을 다 차지하고 거기서 예배드리는 광경을 봤어요. 어디서 예배를 드려요? 예수님의 무덤에서 예배를 드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던 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예수님이 탄생했던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보니까 7개 종파가 자꾸 시간을 나눠가면서, 이쪽 종단이 와서 예배드리면, 그다음 종단이 와서 예배드리고 하면서, 막 그러는 모습을 봤는데, 그렇게 하는 신앙생활이 잘 된 것이냐? 전혀 그런 것은 바른 신앙생활이 아니에요. 우리 칼빈주의를 신봉하고 있는 개혁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우리 개혁교단들은 하나도 없어요. 거기에. 왜? 그것이 바른 신앙이 아닌 것을 알고 있거든요. 아무튼 그런 일들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데, 그 당시에도 초대교회 그리고 중세교회 교회도 늘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냐 하면, 성지에 가서 유물 앞에서 그렇게 하면 내가 더 많이 은혜를 받겠고, 그리고 내가 기도가 더 응답되겠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쓰던 유물들 앞에서 여러 가지 유물들을 모아가지고 그 앞에서 예배드리면 더 복을 받겠다고 하는 잘못된 관점들이 있어서,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그런데 그게 방해 세력이 나타난 겁니다. 이슬람교가 나타난 거죠.

이슬람교가 예루살렘을 차지하고서,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서, 그래서 이스라엘 유럽에 있는 성도들이 와서 성지 순례를 하려고 하면, 예전에는 세금만 내면 그냥 와서 하게 만들었는데, 셀주크투르크족이 와서 모슬렘 사람들이 와서 점령한 이후에는 아예 못 오게 방해를 하니까, 그것이 우리 크리스천들의 마음 가운데 불편함을 일으키게 되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 성지를 재탈환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강력한 열망이 크리스천들 사이에서 생기게 된 것이죠. 그게 영적인 이유라고 한다면 영적인 이유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두 번째는 정치적인 이유로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정치적인 이유로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는 건 뭐냐? 이슬람 세력이 자꾸만 커져가니까, 이슬람 세력이 자꾸만 커져가면서, 서진하게 되니까, 그러니까 결국 서방 유럽이 위협을 당하게 된 거예요. 제일 먼저 위협을 당한 쪽이 어느 쪽이겠습니까? 지금의 튀르키예 지방에 있던 동방기독교가 위협을 받게 된 것이죠. 당시 로마 제국은 동로마 제국, 지금의 튀르키예 지역인 동로마 제국과 그다음에 지금의 이탈리아 지역인 서로마 제국으로 이렇게 나뉘어 있었는데, 이슬람 세력이 저 아라비아 쪽에서부터 점점점점 세력을 일으켜가지고, 튀르키예 지역 쪽으로 계속 세력을 확장해 오고 있으니까, 이 동로마 제국이 지금의 튀르키예 지역에 있던 그 나라가 모슬렘권에 의해서 위협을 당하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서로마 제국의 교황청에게 도움을 도와달라고 요청을 한 거예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나뉘어 있었는데, 이 동방교회 동로마 제국에 있던 그 황제가 서로마 제국에 있던 교황청 지금의 로마를 말하겠죠. 그 로마에게 로마 교황청에게 도와달라고 우리 지금 모슬렘들이 우리를 지금 점령하려고 하고 있으니까 도와달라고 자꾸만 요청을 한 겁니다. 그랬더니 서로마 제국에 있던 교황청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처음에는 아는 척을 안 했어요. 동로마 제국하고 서로마 제국이 서로 다른 나라니까, 그냥 아는 척을 안 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자꾸만 응답을 도와달라고 요청을 하니까, 우르바누스 2세라고 하는 교황이 드디어 응답을 해서, 좋다. 그러면 우리가 십자군을 일으켜서 너희들을 도와주겠다. “동로마 제국을 도와주겠다”라고 해서, 이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겁니다. 우르바누스 2세는 클뤼니 수도원 출신으로서, 그 옛날 카놋사 굴욕이라고 하는 황제가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눈 속에서 막 빌어서 파문을 취소해 달라고 했던 그 카노사 굴욕의 하일리히 사세를 다시 파문을 시키는 등, 정말 교황권을 강화시켰던 우르바누스 2세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요. 그 사람이 동로마 제국의 요청을 받게 되자 회의를 열어서 클레르몽 회의 1095년 11월 27일 열린 클레르몽 회의에서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십자군 원정을 선포하게 됐습니다. 십자가 전쟁을 선포하면서 뭐라고 말했냐면, Deus lo vult라고 얘기했어요. Deus lo vult가 뭡니까? 바로 그 옆에 쓰여 있잖아요?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신다.” 여기서 그것이 뭐예요?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서 모슬렘 사람들을 박멸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라고 교황이 선포해 버린 겁니다. Deus 하고 Vuly는 라틴어고 lo는 라틴어가 아닌데, 아무튼 우리도 영어와 한국말 섞어서 쓰듯이,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하나님께서 십자군 전쟁을 원하신다”라고 선포하면서 뭐라고 얘기를 했냐면, “나는 이 자리에 참석한 자들에게 말한다. 또한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자들에게도 이 내용이 전달되기를 원한다. 그리스도께서 이를 명령하신다. 전쟁터에서나 혹은 전쟁터를 가다가 육지나 해상에서 생명을 바치는 자들은 즉시 모든 죄의 용서를 받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위대한 선물에 의하여 참전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를 하사한다”라고 선포하기까지 이르게 된 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전쟁하러 가다가 전사하게 되면, 그 사람은 즉각적으로 모든 죄가 용서받고 구원받고 하는 그런 선언을 하게 된 것이죠.

이게 성경적으로 맞는 얘기입니까? 말도 안 되는 얘기죠. 말도 안 되는 얘기인데, 교황이 십자군 전쟁이 하나님께서 원하는 거라고 선포하면서, 십자군 전쟁에 사람들을 동원하기 위해서, 이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언한 거죠. 그리고 “십자군 전쟁에서 죽으면 구원받는다. 죄 용서를 받는다”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십자군 전쟁에 동원하기에 이르게 된 겁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초대 중세 시대 때 유럽 사람들은 모두가 다 크리스천들이었고, 신앙적 열정이 굉장히 좋았기 때문에 그러한 교황의 말에 다 호응해서 십자군에 자원하기 시작한 겁니다. 십자군의 자원에서 은둔자 베드로라고 하는 사람의 영도하에 십자군 전쟁을 하러 가게 된 것이죠. 당시 유럽의 상황은 가뭄과 전염병 등 여러 가지 고통스러운 상황이었는데 그런 상황 가운데서, 아무런 소망이 없던 그 사람들이 십자군 전쟁을 한다고 하니까, 대거 참여하면서 저 모슬렘 사람들과 싸우기 위해서 나가게 된 것이죠.

그래서 1차 십자군 원장은 어느 정도 성공을 했습니다. 1098년에 안디옥을 점령하게 된 것이죠. 그런데 그 안디옥의 성 안에는 충분한 식량이 있었는데, 그런데 이 십자군들은 먹을 것도 별로 없고 정말 힘들었어요. 그래서 5일간 금식 기도하면서 공격하려고 했는데, 그때 십자군 가운데 어떤 사람이 무슨 얘기를 했냐면, 내가 꿈을 꿨는데, 환상을 보게 되었는데, 이 안디옥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찌른 창이 그 안디옥 성에 묻혀 있다고 그 환상을 내가 봤다고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래서 전쟁을 해가지고 막 찾아 들어갔는데, 정말로 안디옥 내에서 창을 하나 발견했어요. 그게 예수님을 찌른 창이었을까요? 그 창이 아니었을까요? 예? 모르죠. 어떻게 압니까? dna 검사를 한 것도 아니고, 몰라요. 모르는데, 그 십자군들은 이 창이 정말 그리스도를 찌른 창이라고 믿은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한다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 거예요. 그러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면서 너무나도 기뻐하고, 그런데 정말 안디옥 성을 점령할 만한 그런 능력이 안 됐지만, 식량도 부족하고 아무튼 여러 가지 여건이 안 좋았지만 금식하고 기도한 후에 놀랍게도 아르메니아 출신 기독교도가 안디옥성 안에서 성문을 열어주는 바람에 들어가 가지고, 점령하고 승리하게 되자 정말 십자군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이다 우리 10주년 감사 예배드리듯이, 모든 것이 은혜 은혜하면서, 너무나도 기뻐하고 안디옥을 점령하게 된 것이죠.

그다음 해 1099년에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6월 7일 날 도착하게 되었는데요. 십자군이 쳐들어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슬람 사람들은 장기전에 대비해서 주변의 밭을 다 불살라버리고, 주변의 우물에는 독약을 다 풀어놓으면서 십자군을 맞이할 태세를 해놓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7월이면 아랍군이 도착해서 도와줄 것이기 때문에 이제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웠던 겁니다. 그런데 그 십자군이 맨발로 예루살렘 성 주변을 돌면서 참회의 송가를 부르면서, 막 이렇게 하다가 한 기사가 예루살렘 성전을 올라가는데 어떻게 올라가게 됐어요? 그러니까 그 뒤를 따라서 막 올라가 가지고 결국 예루살렘 성을 점령하고 승리해 버린 거죠. 그러니까 너무나도 기분이 좋았어요.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겠구나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 이렇게 해서 1차 십자군 원정은 승리로 결과가 되었고 그래서 이슬람 군을 무찌르고 유럽의 그 십자군이 그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지키게 됐습니다.

자 이것으로 해피엔딩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것이 끝이 아닌 겁니다. 이제는 무슨 일이 필요하게 될까요? 예루살렘을 점령했으면, 이제는 이슬람교도들이 공격해 오면, 그걸 또 방어해야 되는 일이 추가적인 과제가 생기게 된 겁니다. 성지 순례가 다시 시작되었지만 계속해서 십자군은 더 필요하게 됐습니다. 그 예루살렘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그래서 성전 기사단이 생기게 되었고 요한 기사단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수도원 운동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수도원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십자군에 많이 자원해서 오게 되었고, 그 수도원에서 일 있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 성전을 지키는 기사단이 되어서, 그 수도원을 예루살렘을 지키는 그런 일들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이 저 유럽에 퍼지게 되었을 때 유럽의 성도들은 가만히 있었을까요? 어떻게 했을까요? 너무나도 좋아서 은혜를 받아서 헌금을 많이 보냈습니다. 헌금이 십자군에게 많이 도달하게 된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십자군의 돈이 많아졌어요. 돈이 많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 돈을 가만 놔둘 수가 없잖아요? 이자놀이를 하기 시작한 겁니다. 은행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겁니다.

(2차 십자군 원정이 있나요?) 2차 십자군 원정은 1144년 알레포 술탄이 에데사를 점령한 것을 계기로 해서, 십자군 원정이 다시 시작됐는데,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게 됐습니다. 3차 십자군 원장은 1187년 살라딘 술탄이 예루살렘을 탈환한 계기로 그래서 프레드릭 바바로사 황제와 영국의 리처드 황제와 프랑스의 필립 2세 황제가 함께 연합해서 그래서 십자군을 이끌고 다시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서 갔는데, 안타깝게도 프레드릭 황제는 예루살렘에 가지도 못한 채 강을 건너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프레드를 따르던 군대는 해산되어 버리고 말았고요. 필립 2세는 프랑스 황제인데 필립 2세는 이렇게 군대를 끌고 가다가 무슨 생각이 났냐면, 지금 이때에 우리가 리처드의 나라를 우리가 공격하면 우리가 땅을 차지할 수 있겠다고 하는 생각이 든 겁니다. 그래가지고 리처드의 왕국을 차지하기 위해서 십자군 전쟁을 하러 가다가 뒤로 돌아가 버렸어요. 뿐만 아니라 필립 2세는 기사단으로부터 많은 돈을 빌린 다음에 돈을 안 갚기 위해서 기사단을 이단이라고 음해하고 숙청시켜 버렸습니다. 리처드 황제는 독일 황제에게 포로로 잡혀 몸값을 지불한 후 풀려나게 되는 정말 이상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게 된 것이죠.

가장 어처구니없는 전쟁은 네 번째 4차 십자군 원정일 것입니다. 사차 십자군 원정은 이집트에 있는 살라덴 본부를 공격하기 위해서 배를 타고 저 베네치아에서부터 이집트까지 가려고 했는데요. 베네치아에 도착해서 배를 타려고 했는데 돈이 부족한 겁니다. 그러니까 배를 타기가 어려웠어요. 그래서 아예 안 되겠다. 우리 전쟁하러 못 가겠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런데 알렉시우스 앙겔로스라고 하는 비잔틴 왕국이 왕국의 왕자가 십자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겁니다. 여러분 내가 뱃값을 지불할 테니까, 저 이집트까지 가는 뱃값을 내가 지불할 테니까, 여러분들 잠깐만 이집트에 가기 전에, 우리 튀르키예 비잔틴 왕국에 와서, 지금 내가 왕이 돼야 되는데, 우리 형제가 우리 형이 왕이 돼버렸으니까, 그 형을 무찌르고 내가 왕위 탈환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한다면, “내가 돈을 지불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십자군 전쟁을 이 모슬렘 사람들을 치기 위해서 왔던 그 십자군을 어떻게 유인했냐면, 동로마 제국 비잔틴 제국의 왕위 탈환전에 십자군들을 끌어들인 겁니다. 그래서 서로마 제국의 십자군이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게 된 거예요. 원래는 동로마 제국이 서로마 제국에게 군대를 좀 보내달라고 해가지고 그래서 좀 도와달라고 해서 십자군 전쟁이 일어난 건데, 이번에는 서로마 제국의 군인들이 십자군이 동로마 제국을 공격해서 같은 기독교인들이 전쟁을 하고 동로마 제국의 성직자들을 살인하고 그리고 그 앙겔로스를 왕위에 올려내기 위한 그러한 이상한 일을 하게 된 것이죠. 결국 그 사람이 돈을 냈느냐? 돈을 안 냈습니다. 그래서 십자군 원정은 4차 십자군 원정은 완전히 다른 곳에서 헤매다가 그냥 유야무야 되어버렸고, 지금까지 로마 제국과 동로마 교회와 서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서로 각각 여러 가지 자기만의 길을 가고 있었는데, 이런 십자가 전쟁 때문에 완전히 분열하게 되는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죠.

뿐만 아니라 소년 십자군도 있었습니다. 1212년 독일과 프랑스에서 일어난 십자군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독일의 니콜라스라고 하는 소년과 프랑스의 에띠엥이라고 하는 소년이 환상을 본 겁니다. 환상을 봤는데 무슨 환상을 봤느냐? 십자군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어른들이 가선 안 된다. 천국은 누구의 것이다? 어린아이와 같은 아이들만 천국에 갔다고 간다고 성경에 쓰여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어린아이들이 일어나서 십자군이 되어 간다고 하면, 그러면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해 주실 것이고, “우리가 저 이슬람 사람들을 쫓아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그런 운동이 막 일어나게 되어서, 수많은 독일과 프랑스의 소년들이 어린아이들이 십자군에 자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군이 이제 저 예루살렘을 향해서 공격하러 갔는데, 그 소년 십자군들은 저 예루살렘에 가기도 전에 도중에 노예상들에게 팔려나가게 되는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죠. 또 그다음 없습니까? 마치니까 그 외에도 5차 십자군 전쟁 별 성과가 없었고요. 6차 십자군 전쟁 역시 별로 성과가 없었고 7차, 8차 십자군 전쟁에도 별로 성과가 없이 실패해 버리고 프랑스 왕은 포로가 되어서 막대한 대금을 지불해야만 되고 결국 열병으로 사망하기도 하는 등 지금까지 있었던 십자군 전쟁이 총 8번 어떤 사람은 9번에 걸쳐서 십자군 전쟁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십자군 전쟁들이 다 실패로 돌아가 버리고 만 것이 그것이 바로 십자군 전쟁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군 전쟁을 하는 동기가 첫 번째는 신앙적인 동기가 있었다고 그랬고, 또 하나는 정치적인 그런 동기가 있었다고 했는데, 또 하나의 동기가 있었다고 한다면 무역상들의 그런 동기가 숨어 있었어요. 무역상들 무역상들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가? 저 인도에서부터 후추를 수입하는 것이 아주 중요했어요. 왜냐하면 당시에는 냉장고가 없었기 때문에 고기를 오랫동안 보관하기 위해서 무엇을 사용했냐면 후추를 사용한 겁니다. 그래서 후추는 고기를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는 그런 재료도 될 뿐만 아니라 또 맛을 내게 해주잖아요? 여러분 삼겹살 구워 먹을 때 후추 뿌리나요? 뿌립니다. 맛있잖아요? 그러니까 이 후추가 당시에 중세시대 때 정말 중요한 소금 후추 이런 것들이 중요한 향신료가 됐었던 것이죠. 그걸 어디서 생산했는가? 인도 쪽에서 생산을 한 것이죠. 그래서 인도에 있는 그 후추를 가져다가 유럽에다 팔면 막대한 이득을 벌어들이던 사람들이 무역상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 무역상들의 그 무역이 막히게 됐어요. 누구 때문에? 이슬람교도들 때문에 막히게 된 거죠. 무역상들의 꿈은 뭐예요? 이 이슬람교도들이 없어져서 우리가 후추를 그냥 쉽게 편리하게 수입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 무역상들의 그런 소망이었어요. 그게 안 되니까, 바다를 건너서 신대륙도 발견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 경제적인 이유가 이 십자군 전쟁의 또 다른 원인도 되어 있었다는 것이죠.

결국 이 십자가 운동으로 인해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동로마 제국의 쇠퇴를 초래하게 되었고, 이슬람과의 관계가 기독교와 이슬람과의 관계가 아주 적대적이 되어버린 것이죠. 이렇게 적대적이기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럴 필요가 사실은 없어요. 우리가 지금 대한민국에서 불교도들하고 우리가 싸우면서 지냅니까? 아니요. 그냥 서로 우리는 우리 신앙생활 잘하고 불교는 불교 나름대로 신앙생활하고 해서 같이 살아가고 있잖아요? 그런데 이슬람과의 관계도 사실은 같이 이웃으로 살면서, 우리가 복음도 전할 수 있고, 그렇게 할 수 있는데, 왜 이렇게 엄청난 악한 관계가 원수지간이 되어버렸는가? 이 십자군 전쟁 때문에 그렇게 되었고요.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을 당하게 되어버렸고, 우리 기독교는 사실 신앙 자체가 처음부터 잘못된 그런 모습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싸움하는 종교로 또 변화되어 버린 것이 있는 것이죠.

안타까운 일인데 긍정적인 세계사적으로 보면 긍정적인 결과들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슬람이 가지고 있던 그런 문화들이 유럽으로 오게 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됐는데, 그래서 그때부터 대학 제도가 발달하게 되었고, 예전에는 유럽은 플라톤 철학으로 많이 점철되어 있었던 것이 유럽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이슬람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과학의 발달이 많이 돼 있었던 것인데, 그런 것들이 많이 유입이 되어서 결국 유럽에서의 그런 학문적인 발달도 많이 이루어지게 된 그런 결과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 십자군 전쟁을 보게 된다고 한다면 이 십자군 전쟁은 바람직한 전쟁이었을까요? 바람직하지 않은 전쟁이었을까요? 바람직하지 않은 전쟁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이런 십자군 운동과 같은 잘못된 일들이 반복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배워야, 오늘 십자군 운동을 배운 의미가 있을 겁니다. 어떤 사람은 이 역사 십자군 운동을 가리키면서, 그 옛날 우리 십자군 운동 때는 목숨을 내놓고 주를 위해서라고 한다면 전쟁도 불사하던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있었는데, 그 신앙의 선조들 본받자.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요. 근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고, 이 십자군 운동은 바람직한 전쟁이 아니었던 것이죠. 특별히 어떤 점에서 잘못된 것인가?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국가를 이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기독교 국가를 위협하면 그게 영적인 대적이라고 간주해 버린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전쟁을 통해서라도, 힘을 통해서라도 그 사람들을 무찌르고 그리고 없애버리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거라고 착각한 것이죠.

그런데 그것은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슨 말씀을 해 주셨습니까? 칼을 도로 내 칼집에 넣어라.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할 거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또 원수를 사랑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우리 우리 집단 이기주의에 빠지면서 집단 이기주의에 빠지는 것이 마치 내가 바른 신앙을 가지는 것인 양 착각하게 될 때가 많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 기독교에 대해서 좀 안 좋은 정책을 피거나 기독교에 대해서 좀 안 좋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똘똘 뭉쳐가지고 우리 기독교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싸움을 불사하고 전쟁을 하는 것이 그게 믿음인 줄 착각하는 경우가 오늘날에도 많이 있다는 것이죠.

사실은 이러한 십자군 운동과 같은 것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 옛날 십자군 운동이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더군다나 이 십자군 운동은 세속적인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이용해 먹은 것이죠. 누가 이용해 먹었어요? 동로마 제국에서 정치 투쟁에서 밀렸던 왕자가 십자군을 이용해서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십자군을 사용한 일들이 있었던 것이죠. 또한 무역상들이 자신들이 돈을 더 잘 벌기 위해서 십자군을 이용해 먹은 것이죠. 안타깝게도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러한 세속적이고 탐욕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들의 신앙적인 그 열정을 자극해서 우리가 무슨 싸움을 하게 만들어 가지고, 그래서 이득을 얻으려고 하는 그런 세속적인 사람들이 우리 안에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잘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적은 누구일까요? 우리의 적이 누구죠? 에베소서 6장 11절, 12절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2절 그냥 가만 놔두시면 좋겠는데, 우리의 씨름이 누구와 싸우는 것이 아니다? 혈과 육과 상대하지 않는다는 얘기는 무슨 얘기예요? 사람과 싸우는 게 영적인 전쟁이 아니라는 겁니다. 저 사람은 공산당이야. 저 사람은 이슬람이야. 저 사람은 불교도야. 저 사람 그 사람과 저 사람은 우리 교회를 힘들게 해. 저 사람은 우리 교회 건축하는 거 방해하는 사람이야. 저 사람 우리가 예배드리는 거 못하게 하는 사람이야. 그렇게 우리를 힘들게 하고 방해하는 그런 사람들과 싸우는 게 우리의 씨름, 우리의 전쟁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의 씨름은 누구랑 싸우는 거예요? 악한 영들을 상대하는 것이죠. 악한 영들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그래 그 사람 미워해라. 저 사람 너를 힘들게 하니까, 저 사람 죽여버려라. 저 사람 싸워버려라. 우리로 하여금 자꾸만 미워하게 만들고, 시기하게 만들고 질투하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사람을 사랑하기보다는 원수를 사랑하기보다는 미워하도록 우리들의 마음을 자꾸만 부추기면서, 우리로 하여금 악한 생각을 갖게 만드는 우리 안에 있는 그 사탄의 세력이 그게 진정한 우리의 원수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기는 것은 이기는 게 아니고 사탄에게 지는 거예요. 오히려 우리가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까지 대면서 지는 것이 우리가 영적으로 승리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수많은 사람들이 정치적인 이득을 위해서 경제적인 이득을 위해서 여러 가지 이득을 위해서 우리 신앙인들의 분노를 자극하고 마치 그런 어떤 세력과 싸우는 게 그게 영적인 전쟁이라고 우리를 속이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말에 속아 넘어가면 안 되는 것이죠. 교황이 뭐라고 얘기했습니까? Deus lo vult. 그게 무슨 뜻이에요?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신다”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정말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신 것인가요? 아니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신 뜻이 아니고, 황제와 교황이 원했던 탐욕적인 목적이었을 뿐이에요. 안타깝게도 오늘날 수많은 성직자들이, 안타깝게도 오늘날 수많은 영적인 지도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남발합니다. 이게 하나님의 뜻이다. 예배당을 건축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가 저 사람들과 싸우는 게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가 전쟁을 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다. 자꾸만 하나님의 뜻을 악용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어요. 근데 그것은 무슨 죄예요? 제3계명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 되이 일컫지 말라고 한 그 범죄를,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성직자들이 범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함부로 이야기하면 안 되는 것인데,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속여서 이야기하고 있을 때, 그것을 하지 않아야 되겠지만, 저는 안 하려고 굉장히 노력을 합니다마는 우리 성도님들도 정신 바짝 차려야 되는 거예요. 아, 이것이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인지, 싸움을 원하시는 것인지 아닌지,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정치적인 목적을 사용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혹은 경제적인 이득을 탐하는 사람들의 그 목적에 이용당하고, 정말 정말 안타까운 죽임을 당하게 되는, 청춘을 낭비하거나 우리의 모든 것을 낭비하게 되는 그런 피해를, 영적인 피해를 볼 수가 있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무엇이 진정한 하나님의 뜻인지 분별할 수 있는 그런 지혜가 우리 가운데 있어야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모든 선한 일들 사실 우리 교회에서 하는 모든 선한 일들이 사실은 좋은 일들이고 정말 바람직한 일들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우리가 함부로 이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다라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안 되는 겁니다. 그 옛날 우리가 십자군 전쟁에 끌려갔던, 그래서 완전히 그런 처참한 죽임을 당했던 중세시대 때 그 어리석은 신앙인들처럼 우리가 그렇게 신앙생활할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분별해 나가는 가운데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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