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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맺은 약속 (창 15:8-21)

지난 시간에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야기와 그 타락한 인간들을 향해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는 가운데도, 우리 사람들을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고 하는 것을 살펴보았는데요. 오늘은 그 이후의 이야기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주간은 20몇 장부터 읽죠? 25장부터 50장까지 읽게 되겠는데, 아무튼 지난주에 있었던 아담과 하와 그 이후의 이야기부터, 창세기 마지막 장까지 큰 그림을 살펴보면서 함께 창세기의 말씀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이번 영상은 리딩 지저스 1번의 세 번째 수업으로 죄가 점진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께서 은혜로 언약을 세우시고, 어떻게 그의 삶을 신실하게 이끄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되고, 죄에 대한 심판으로 인해 인류는 고통과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에는 고통과 죽음뿐만 아니라 회복에 대한 약속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회복의 약속을 이루어 가실까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아담과 하와는 두 아들을 낳고 이름을 가인과 아벨이라고 짓습니다. 하와는 첫 아들인 가인을 언약의 후손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류 최초의 살인이 가인에 의해 벌어집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는 사실에 화를 참지 못하고 아벨을 죽입니다.  

이어지는 창세기의 이야기들도 점차 확대되는 죄의 영향력을 보여줍니다. 사람의 죄악이 가인의 후손들부터 노아 시대에 이르기까지 점점 커져 온 땅에 가득하자,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홍수 심판 이후 인류는 새 출발을 하는 듯 보였지만 인간의 번성과 함께 죄는 더 커져갔습니다. 마침내 인간들은 하나님만큼 높아지기를 바라면서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고 온 지면에 흩으셨습니다. 죄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갈 때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부르셔서 언약을 세우십니다. 바로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 부르는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온 세상을 축복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그 순간 인류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 하나님께서 한 사람과 언약을 맺을 때 시험도 뒤따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시내산 언약 사건과 이어지는 금송아지 사건이나, 다윗의 영원한 왕위에 대한 언약 사건과 뒤이어 나오는 밧세바 사건,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의 최후의 만찬 이후 제자들이 도망치는 사건 등이 그와 같은 예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자마자 그 땅에 갑자기 기근이 닥칩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을 떠나 다시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아내 살해를 누이라 거짓말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을 벗어난 상태였고, 사레는 애굽 왕이 자신의 아내로 취하려고 데려간 상황입니다. 이로 인해 땅과 자손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는 분이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바로를 막으시고 사례를 보호하셔서 아브라함을 약속의 땅으로 다시 돌려보내십니다.


이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들이 하늘의 별처럼 셀 수 없이 많아질 것이라는 약속을 상기시키십니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을 의롭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약속에 대한 확실한 징표를 구합니다. 그 응답으로 하나님께서는 반으로 쪼개진 제물들 사이를 홀로 지나가십니다. 이는 언약 체결 의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원래는 언약의 두 당사자 모두가 쪼개진 제물들 사이를 지나가야 합니다. 언약을 깨뜨리는 경우 이 제물들처럼 둘로 쪼개져 죽임을 당할 것을 맹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홀로 반으로 쪼개진 제물들 사이로 지나가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맺은 언약이 일방적이고 스스로의 죽음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지키실 언약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또다시 심각한 실수를 저지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실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변함없이 이루어 가십니다. 13년이 흐른 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갱신하십니다. 나는 내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라함에게 제안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아브라함으로 사례를 사라로 이름을 바꾸시고, 언약 관계에서 순종의 상징으로 할례를 명하셨습니다. 바로 이러한 할례를 통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며 택함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드디어 아브라함과 사라의 아들 이삭이 태어남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으로 계속해서 빚어가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뿐인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삭을 번제로 바치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룰 통로가 되는 자손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믿음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가늠하는 시험대에 오릅니다. 그리고 결국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함으로 나아갔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는 그 순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내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내가 내 아들, 내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니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께서는 숫양을 예비해 놓으시고 이삭을 대신해 번제로 바치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숫양을 제물로 바치며 그분께서 언약을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내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 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에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아브라함은 이삭을 기꺼이 바치고자 했던 이 시험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언약을 예비하시고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숫양을 제물로 바치며, 그분께서 친히 이루어 가실 약속을 더욱 신뢰하며 믿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자손을 통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고, 그분의 나라를 회복하시리라는 약속을 신실하게 붙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통해서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가 쪼개져야 하는 자리에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를 위한 어린 양이 되심으로 자기 백성들이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맺으신 약속을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심으로 그분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주셨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창세기 4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다고 하는 것까지 살펴봤는데요. 그 이후에 벌어지는 모습들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더 비참하게 타락해 가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낳은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그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음으로 산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언뜻 보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그런 행동을 보통해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았을 때에 그때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만 것이죠.   어떻게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았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았던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이고 어떻게 하면 안 받은 것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잘 모르겠고 그러나 어떻게든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가인은 화가 나서 아벨을 죽이게 되었는데요. 다만 히브리서의 말씀을 보면 아벨의 제사와 가인의 제사의 차이점이 무엇이었는가 아벨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제물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제물을 들이는 그 사람의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알 수가 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아무튼 가인은 불쾌하게 돼서 안색이 변하면서 화를 내게 되었는데 가인이 화를 내게 된 것은 당연한 것입니까? 당연하지 않을까요? 가인이 실컷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받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에 화가 났었는데요. 사실은 그런 반응은 정당한 반응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상황이 되면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제가 무엇이 부족했습니까? 하나님 무엇을 변해야 합니까? 하나님 저를 받으시려고 한다면 어떤 삶을 살아야 됩니까?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부족한 점을 깨닫는 것이 그것이 당연한 자세일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노하고 화를 내게 된 것이죠.  

그런데 그게 어쩌면 우리들의 생각과 비슷합니다. 우리들이 착각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가 하나님에게 무엇인가를 해 드리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는 것 같고, 또 우리가 봉사를 하고 헌신을 하면 우리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처럼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또 우리가 헌금을 하면 하나님께 이만큼 바친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감사하다고 해야 할까요?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기가 너무나도 쉬운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야 하거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아주어야 할 그런 의무가 있는 게 결코 아닌 것이죠. 오로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아주든 우리의 헌신을 받아주든 그것이 하나님께서 받아준다고 한다면 그것이 너무나도 감사할 뿐이고, 받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화낼 것이 없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값진 예물을 가지고 나왔으니까 당연히 하나님께서 받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권한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주느냐 받아주지 않느냐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린 것이지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닌 것이죠.


그 옛날 에스더라고 하는 왕비가 왕 앞에 나아가는 것이죠. 왕 앞에 나아가는데 그 왕이 그 왕비를 받아줘야 될 어떤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아무런 의무가 없어요. 그런데 안 받아주면 에스더를 받아주지 않는 것이고, 에스더가 나왔을 때 그 에스더 왕비를 받아주면 왕에게로 나아가는 그런 관계인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늘 착각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면 우리에게 어떤 권리가 있는 것인냥,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우리에게 어떤 권리가 있는 것이냐 생각할 때가 너무나도 많은 것이죠. 마치 우리들의 자녀들처럼 자녀들이 우리 부모님들에게 돈을 맡겨놨습니까? 한 10억 원 맡겨놨어요? 그게 아니죠. 한 푼도 맡겨놓은 게 없어요. 아무것도 해놓은 건 없어요. 그런데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런 착각을 할 때가 많이 있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한 번은 길을 걸어가시는데 가난한 여인이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라고도 하죠. 그래서 그 여인이 예수님 앞에 뒤에서 울부짖습니다. 예수님 제 자식을 좀 고쳐달라고 간청하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아주 매몰찬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자녀의 떡을 뺏아서 그래서 개에게 줄 수가 없다. 우리나라 말로 개라고 번역했지만 정확하게 번역하면 개 새끼한테 줄 수가 없다 그런 표현이에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주 모욕적인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욕적인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깨닫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이 있었다고 한다면 우리들에게 아무런 권한이 없다는 것이죠. 자격이 없다고 하는 것이죠. 그때 놀랍게도 이 수로보니게 여인은 가난한 여인은 모욕감을 느끼면서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죠. 주여 옳소입니다. 그러나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있으면, 부스러기라도 있으면 달라고 간청할 때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그 여인을 향해서 은혜를 베풀어주셨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는 것이죠.


가인의 착각은 무엇이냐 하면 마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 자신에게 무슨 권한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분노했다고 하는 것인데, 사실은 그것은 이 사람이 죄의 영향 가운데 얼마나 크게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타락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결국 이런 죄악과 이러한 타락의 삶을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소망이 있는 것일까요? 소망이 전혀 없는 것이죠. 소망이 없어서 결국은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고 이제는 아무런 가망성이 없는 그런 삶을 살고 있었던 가인을 향해서 놀랍게도 축복의 약속을 해 주시는 거죠. 하나님께서 표를 주어서 함부로 죽일 수 없게 만들어주겠다고 하는 은혜의 약속을 해 주신 것이고, 이 창세기의 내용을 우리가 쭉 계속해서 이번 주간에도 읽어보게 될 텐데, 이 이야기를 통해서 계속해서 반복해 주고 있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면, 우리 인간들이 계속해서 타락하고 그 죄가 심각해지고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셔서 그런 우리들을 위해서 구원의 약속을 해주시고, 결국은 우리를 구원해 주시겠다고 하는 그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이 창세기를 읽으면서 깨달아야 될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결국 사람들이 계속해서 타락해져 나가는데요. 문화는 발달하지만 그러나 도덕적인 타락이 더 심각해집니다. 성적인 타락이 있어서 라멕이라고 하는 사람은 아내를 둘씩이나 두었고요. 폭력을 쓰기도 했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조롱하고 비방하면서 안하무인으로 살아가는 그런 라멕의 모습 같은 것들이 그 시대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결국 참지 못한 하나님께서는 홍수를 통해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데 그냥 완전히 다 쓸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 한 사람을 선택해 주시는 거죠. 노아라고 하는 한 사람을 선택해 주셔서 다시 새롭게 인류가 시작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고 또 무지개를 보여주시면서 다시는 이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홍수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시는 그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계속해서 주어지는 것이고요.   그래서 계속해서 타락해져가는 인생들에게 아무런 소망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는 또다시 한 사람을 선택해 주는데 그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서부터 3절 말씀에 보면 아브라함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죠.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내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내게 복을 주어 내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타락해져 가버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 어떤 한 사람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복을 받을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주시는 것이죠.


그런데 진짜로 그렇게 복을 받게 됐나요? 아브라함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복을 얻게 됐나요? 그게 아니죠. 오히려 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많이 발생하게 된 겁니다. 애굽에 가서는 아브라함이 거짓말함으로 말미암아 그래서 자신의 아내를 빼앗길 뻔한 사건이 일어나게 되고 그 일로 인해서 하나님이 이 애굽 왕을 치시기도 하고 또 아비에게 집을 치시기도 하고 그러면서 정말 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축복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기가 닥치는 모습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을 이 아브라함이 들어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잘 살게 된 것이 아니라 기근이 있어서 피해야만 했었고, 그렇게 해서 이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든지 그 가정의 모습들을 보면 늘 실패가 있고 늘 문제가 있고 여러 가지 타락의 문제가 있었지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인정해 주시고 복을 내려주시면서,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게 해주겠다. 바닷가에 모래와 같이 많아지겠다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아브라함에게 내어주신 것이죠.
오늘 읽은 창세기 15장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해주시는 거예요. 약속을 해주시면서 내가 너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겠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해주겠다고 하는 그 약속을 하나님께서 이루어 나가시고 그 아브라함에게 수많은 민족 자녀들이 있을 수 있게 해주시겠다는 그 약속을 이루시는 것을 하나님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증표를 좀 보여주십시오. 할 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이 창세기 15장의 이야기를 통해서 아브라함으로 확실히 믿게 만들어 주신 것이죠.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짐승들을 잡아서 둘을 쪼개 놓으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둘을 쪼개놓으라고 해가지고 딱 쪼개놓았는데 그날 밤 아브라함이 잠을 자게 되었는데 꿈에 보니까, 이 횃불이 그 쪼갠 고기 사이로 쑥 지나가는 장면이 보이는 거예요. 이걸 통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해 주셨다고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이게 무엇이냐면 약속하는 만약 한 나라와 한 나라 사이에 조약을 맺는 것 같은 그런 행동을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죠. 오늘날에는 계약을 어떻게 맺습니까? 사인을 하고 도장을 찍고 해서 계약을 맺는 것인데 아주 아브라함 시대에는 어떻게 계약을 맺었냐면 짐승을 반으로 쪼개놓고 그 사이로 사람들이 지나갑니다. 그게 무엇이냐면 내가 이 약속을 안 지키면 내 목숨을 반으로 쪼개가지고 내가 이 짐승들이 반으로 쪼개진 것처럼 내가 약속을 안 지키면 나도 이렇게 내 목숨을 내놓겠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짐승들 사이를 지나가면서 약속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강대국하고 약소국하고 조약을 맺게 되면 그 쪼갠 고기 사이로 누가 지나가게 될까요? 약소국의 왕이 지나가는 거죠.


약소국의 왕이 지나가면서, 우리가 1년에 조공을 얼마씩 받치고 우리가 당신들을 배반하지 않고 그런 일을 어기게 된다면, “우리가 이렇게 짐승이 쪼개진 것처럼 우리가 죽임을 당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그런 약속을 하면서, 그 사이를 지나가고 약조가 맺어지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런 양식을 그런 형식을 통해서 약속을 맺으시면서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것이 무엇이냐면 내가 너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을 주시겠다고 하는 그 약속을 내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목숨을 걸고 그 약속을 지키겠다고 약속해 주신 거예요.


그 얘기는 뭐냐 하면 반드시 이루겠다고 하는 그 약속인 것이죠. 사실 이 약속은 한쪽에서만 약속이 아니라 쌍방 간의 약속인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사랑을 베풀어주시고 축복해 주시겠다고 하는 그런 약속인 반면에 그러한 약속에 대해서 우리 인간들은 어떤 반응으로 하나님 앞에 약속을 해야 되나요?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키며 살겠습니다라고 하는 약속을 하는 것이고, 쌍방 간의 약속을 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 약속을 이루지 못하는 게 우리 인간의 모습인 것이죠. 창세기의 이야기를 보면 계속해서 사람들이 실패하고 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는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는가? 아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어요. 대표적인 예가 어떤 예입니까? 하갈리라고 하는 여인을 통해서 이스마엘이라고 하는 아들을 낳은 것은 하나님을 불신했기 때문에 나온 행동이거든요. 내가 하나님만을 믿겠습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겠습니다라고 했던 그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 하갈을 통해서 아이를 낳으려고 했던 그런 불신앙을 보여주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러한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는가 사실은 약속은 한쪽에서 깨버리면 약속이 안 이루어지는 것인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끝까지 이루어 나가시며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겠다고 하는 게 그게 이 창세기의 내용 가운데서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는 할례라고 하는 그런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게 해 주셨어요. 이 할례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몸의 일부분을 잘라내는 그런 언약인데 마치 짐승을 쪼개는 것과 똑같아요. 할례를 받은 표시를 보면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면 나도 이렇게 잘려나가겠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을 잘 해야 되겠다. 믿음 생활을 잘하면서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것을 생각나게 해주는 언약의 증표가 할례라고 하는 것이죠. 내가 죽어야 되는데 이것이 잘려나가는 것을 통해서 내가 약속을 안 지키면 잘려 나가겠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되는데,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범죄하고 죄악을 저지르면서 살아갈 때 약속이 위태위태해졌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이삭을 통해서 야곱을 통해서 또한 요셉을 통해서 구원해 주시는 이야기가 계속해서 반복되게 되는 것이죠. 이삭을 향해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이삭을 주셨고, 그리고 그 이삭을 바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만을 온전히 신뢰하는가 신뢰하지 않는가를 테스트하시고, 그래서 이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그 과정을 통해서 노아의 방주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 이삭을 죽이는 대신에 양을 대신해서 죽이게 만드는 걸 통해서 또 7년 기간 동안에서 요셉을 통해서 다시 살리시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소망이 없었던 다말에게 아이들이 태어나게 하는 그런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고 그 약속을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 나가시는 그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이 창세기의 말씀 가운데서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이 창세기를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내어주시고, 그래서 궁극적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그런 하나님이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누구입니까?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소망이 있는 것이죠. 만일 우리들에게 소망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들을 우리가 믿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금세 무너질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요 안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의지가 약해서 늘 넘어지고 늘 실패하고 쉽게 분노하고 쉽게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런 우리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신실하셔서 그 옛날 아담과 하와에게 해주셨던 그 약속을 계속해서 대대로 오면서 다시 갱신하시고 또다시 이루시겠다고 하는 그 약속이 반복되는 것을 창세기의 말씀을 읽으면서 그 결과로 그 마지막 약속으로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하는 사실을 바라보면서 이 성경 말씀을 읽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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