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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바르실래 (삼하 19:31-39)

2020년 12월 9일 수요예배 설교

다윗이 쿠데타로 인해서 피난 생활을 하다가, 이제 쿠데타가 진압이 되고, 다시 예루살렘 왕궁으로 돌아가는 그 길에,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나와서 요단강을 건너기까지 그렇게 배웅해 주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르실래라고 하는 사람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데, 이 바르실래가 누구라고 기억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사무엘하 17장을 살펴볼 때 등장했던 사람이 바르실래인데요. 이 사람은 누구냐면,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그래서 갑작스럽게 다윗과 그 일행들이 요단을 건너 피난을 가야 했을 그때에, 그 밤중에 다윗을 맞이하러 나와서, 다윗의 일행들에게 엄청난 양의 음식을 대접해 준 사람이 바로 바르실래입니다.

사무엘하 17장의 말씀에 보면 그 바르실래가 가지고 온 물품의 그 목록들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바르실래는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복식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가지고 와서, 어쩌면 자기가 가지고 동원할 수 있는 대부분의 모든 것들을 다 가지고 와서, 그 피난길에 올랐던 다윗의 일행을 섬기고 음식을 제공해주고 돌보는, 엄청난 그 역할을 했던 사람이 바로 이 바르실래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말씀에 보면 사람이 나그네 되었을 때에 도와주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돕는 것이라고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인데요. 이 바르실래는 그야말로 피난자였고, 그리고 정말 위기 가운데 있었던 다윗에게 엄청난 도움이 되었던 사람이고, 정말 이 긴박한 상황 가운데서 다윗에게 참 기쁨을 주고, 감사의 제목이 나오게 되는, 원수의 목전에서 음식의 잔치 상을 차려주는 것과 같은 바로 그러한 모습들이 바르실래를 통해서 제공된 것이고, 어쩌면 이러한 경험들이 다윗이 시편 23편을 쓰면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하는 그런 고백이 나오게 만들었고, 하나님께서는 내게 이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도 엄청난 잔칫상을 주신다고 하는, 그 시편 23편의 고백이 나오게 만들었던 바로 그 당사자가 바르실래였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설명하고 있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바르실래는 그냥 단 일회적으로 한 번만 다윗과 그 일행을 맞이하고 공궤 한 것이 아니라, 다윗이 피난 가에 있는 바로 그 기간 동안 내내, 다윗의 뒷바라지를 해주며,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는, 참 엄청난 부자였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긴 했지만, 아무튼 이 바르실래는 다윗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준, 그야말로 충신 중의 충신이 바로 바르실래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제 피난 생활을 마치고 이제는 쿠데타가 진압이 되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바로 그 길에 바르실래가 다시 나와서 다윗과 그 일행들을 배웅하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말씀에 기록돼 있는데요. 지금 요단강을 건너가는 그 상황 가운데서 다윗은 바르실래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무슨 제안을 합니까? 나와 함께 같이 예루살렘으로 가자고 제안을 하는 거죠. 정말 이 피난 생활 가운데, 나를 그렇게 사랑으로 공궤 해 주었던 그 바르실래의 고마움을 잊지 못하는 이 다윗이 내가 다시 왕으로 복권하게 된다고 하면, 내가 다시 왕으로서 예루살렘에서 다스리게 된다고 한다면, 너를 모른 척하지 아니하고, 너를 공궤 하며 도와주며, 정말 너에게 모든 것들을 제공해 주고 싶다고 하는 그 마음을 자연스럽게 너무나도 고마운 마음에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나와 함께 같이 예루살렘으로 가자라고 다윗이 이야기했을 때, 바르실래가 했던 대답은 참 단호하면서도 놀라운 대답을 하게 되었습니다. 34절부터 36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르실래가 왕께 아뢰되, 내 생명의 날이 얼마나 있사옵겠기에, 어찌 왕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리이까? 내 나이가 이제 팔십 세라.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이까? 이 종이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사오리이까? 어찌하여 종이 내 주 왕께 아직도 누를 끼치리이까? 당신의 종은 왕을 모시고 요단을 건너려는 것뿐이거늘, 왕께서 어찌하여 이 같은 상으로 내게 갚으려 하시나이까?”라고 대답을 한 것이죠.

바르실래의 대답은 아주 간단한 겁니다. 왕이시여, 이제는 제가 살 날이 며칠이나 남았다고 그 어떤 영화와 어떤 낙을 누리겠다고 예루살렘에 가겠습니까? 저는 그냥 부모님의 묘 곁에서 여기서 살다가, 여기서 마지막 생을 보내는 것이 자신의 소망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자기가 여기 나온 이유가 있다고 한다 하면, 다윗왕과 함께 개선장군이 되어서 예루살렘에 들어가 떵떵거리며 권력을 누리며 살고 싶은 그런 욕망으로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아니라, 내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우리 다윗왕, 내가 너무나도 정말 마음에 지지하고 있는 이 다윗 왕이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길을 겪었지만, 이제 다시 복권돼서 예루살렘으로 왕으로 복귀하는 그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그리고 그 가는 길에 내가 배웅해주고 싶어서, 그것이 너무나도 간절한 마음 가운데 나와서 배웅하는 것이지, 내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행한 것도 아니고, 또 왕께 내가 어떤 상을 바라는 것도 없으니, 그냥 나는 이 시골 마을에서 조용히 살다가 하나님이 부르시는 날까지 살다가, 자신의 생을 마치겠다고 하는 것이 이 바르실래의 대답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바르실래는 그 말을 함으로써 끝낸 것이 아니라,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을 했습니다. 37절의 말씀을 보면 부탁의 말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37절. “청하건대 당신의 종을 돌려보내옵소서. 내가 내 고향 부모의 묘 곁에서 죽으려 하나이다. 그러나 왕의 종 김함이 여기 있사오니, 청하건대 그가 내 주 왕과 함께 건너가게 하시옵고, 왕의 처분대로 그에게 베푸소서 하니라.” 다시 말하자면 지금 자기가 데리고 있던 김함이라고 하는 그런 사람이 있는데, 이 젊은이, 이 김함이라고 하는 사람만 데리고 가셔서, 왕께서 원하는 대로, 왕의 마음에 선한 대로, 이 김함에게 은혜를 베풀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청을 마지막에 덧붙이게 되었습니다.

결국 다윗은 그것을 좋게 여기고 그러한 부탁을 수용하게 됐는데요. 이 김함이라고 하는 사람의 이름은 오늘 본문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이전에 김함이라고 하는 사람이 어떤 일을 했었을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성경이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 바르실래가 데리고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마 바르실래가 다윗을 공궤 하는 그 일에 함께 수종을 들었을 것이고, 다윗을 섬기는 일에 함께 열심을 냈던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많기는 합니다마는, 아무튼 이 김함이라고 하는 사람은 바르실래라고 하는 이름에 비하면, 그동안 한 일이 별로 변변치 않은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지금까지 다윗의 마음 가운데 깊이 각인되어 있는 한 사람의 이름을 찾으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바로 바르실래 이름이 다윗의 마음 가운데 있는 것인데, 바르실래를 말하길 나는 못 갑니다. 그런데 이 김함을 데리고 가십시오. 김함을 좀 돌봐 주십시오라고 했을 때, 김함은 별로 한 일이 없지만, 공적이 별로 없지만, 그러나 다윗이 바르실래를 보고, 이 바르실래 때문에, 김함을 데리고 가서, 결국 다윗이 좋게, 그 사람의 일을 돌봐주었다고 오늘 말씀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관직도 내렸을 것이고, 아마 좋은 상도 주어서 바르실래에게 주고자 했던 그 모든 대우를 김함에게 다 해주었을 거라고, 우리가 충분히 추측해 볼 수가 있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참으로 훈훈한 그런 느낌을 받게 됩니다. 어려울 때 도와주는 친구가 진짜 친구인 것인데, 바르실래는 정말 다윗이 도망가는 그 힘든 상황 가운데서 눈치를 보면서 압살롬의 편에 붙은 것이 아니라, 도망가는 추락한 그 다윗의 편에 서서 다윗의 진짜 친구가 되어 주었다고 하는 점이 정말 훈훈한 것이고요. 그리고 그 다윗은 그 바르실래의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그 바르실래에게 은혜를 갚기 위하여, 바르실래에게 은혜를 보답하듯이 김함에게 대신 은혜를 갚았다고 하는 이 이야기는, 오늘날 배신과 반역이 만무한 이 시대에, 참된 우정과 사랑이 사라져 버린 이 시대에, 이 이야기는 너무나도 감동적이기도 하고 훈훈한 이야기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바르실래가 다윗을 돌봐주었던 것은 어떤 마음에서 바르실래가 다윗을 도와주었을까요? 지금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바르실래는 다윗을 도와주고, 그리고 나중에 이 다윗이 왕궁으로 복권되어서 돌아가게 되었을 때, 바르실래가 요청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다윗 왕이 다 들어주는 그런 관계가 되었는데, 어쩌면 이 바르실래가 처음부터 다윗이 도망 나온다고 하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때야말로 기회구나. 지금 어려움에 처한 이 다윗을 도와준다고 한다면, 이 다윗은 분명히 재기할 것이고, 이 다윗은 분명히 왕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 분명할 텐데, 이때 어려울 때 다윗을 내가 도와준다고 한다면, 나중에 이 다윗이 왕으로 복권되었을 때, 내가 요청하는 거라고 하면, 반드시 거절하지 못하고 다 들어줄 것이니까, 지금이야말로 내가 내 뜻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되었으니까, 그래서 내가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음식들을 다 싸가지고 가서, 다윗을 도와주고, 그렇게 돌아올 날을 그 복권될 날을 기다리면서, 언제 그날이 오나? 막 도와주면서, 그날이 되면 내가 드디어 그 왕 앞에 단독으로 서게 될 것이고, 단독으로 서서, 김함을 좀 데려다가 달라고 이야기하면 다윗이 거절하지 못하고, 이 김함을 반드시 데려다주고 직책도 줄 거라고 하는 그러한 철저한 계산과 계략 가운데 다윗을 도와줬을까요? 아니면 정말 다윗이 너무나도 좋아서 도와줬을까요? 어떤 것이 맞는 것 같습니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마음속은 모른다는 말처럼, 우리는 사람의 속마음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정말 바르실래가 어떤 마음의 동기에서부터 이런 일을 했을는지는 우리가 100% 확신을 가지고 알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아마도 바르실래는 그런 얄팍한 계산과 그리고 일종의 계획 가운데서, 내가 결국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서, 김함이라고 하는 내가 아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을 관직에 집어넣기 위한 그 계획의 일환으로, 다윗에게 접근하고 그래서 대접하고 그래서 다윗의 마음을 사서, 그래서 결국에는 김함을 청탁하는 일에 성공했다고 보는 것보다는, 아마도 이 바르실래의 마음은 정말 순수하게 다윗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공궤 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아마도 맞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욕심이 만일 바르실래에게 있었다고 한다면, 이 정도 부탁을 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아마 바르실래가 정말 욕심이 있어서, 그래서 이 기회를 살리겠다. 다윗이 정말 내가 도와주면, 그가 복권되었을 때 내가 많은 것을 가질 수 있고, 내가 투자한 것에 비해서, 그 결실을 엄청나게 몇 배로 받을 수 있겠다고 하는 그런 계획 가운데 다윗을 도와주었다고 한다면, 아마 바르실래는 더 많은 것을 했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아마 그런 마음에서 했다기보다는 그냥 진실한 마음으로 다윗을 사랑했기 때문에 다윗을 위하는 마음으로 이런 일을 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아마도 맞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이 광경을 옆에서 본 사람들은 이 바르실래가 다윗의 인정을 받고, 그리고 그 바르실래의 말 한마디에 다윗이 움직이는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다윗에게 잘하기만 하면, 나중에 다윗을 통해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고, 다윗에게 청탁하기만 하면, 다 들을 수 있는 그런 아주 특별한 특권을 누릴 수 있겠구나.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다윗에게 잘 하자라고 그런 생각을 할 사람들이 생겨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다가가고, 그래서 다윗에게 잘해주고, 그래서 충성을 하면, 그것은 제대로 된 충성이라고 말할 수가 없을 겁니다.

아마 나타나는 모습은 비슷해 보일 겁니다. 바르실래가 다윗에게 그렇게 은혜를 베풀었던 모습이나, 계획을 짜 가지고 그래서 내가 나중에 다윗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겠다고 하는 그런 계획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이나 다윗에게 베푸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은 아마도 똑같이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그런 계획과 내가 다윗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겠다고 하는 계획 가운데 접근해서 도와주는 것은 진정한 충성이라고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공이 목적이고 이익이 목적이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다윗을 수단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르실래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을 거라고 보는 것이 맞겠는데요. 다윗이 이 바르실래가 다윗에게 이런 사랑을 베푼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하나뿐이죠. 그것은 다윗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래요. 정말 다윗에 대해서 다윗에 대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다윗이 고난당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견딜 수 없었고, 그래서 그에게 너무나도 그를 너무나도 좋아했기 때문에, 다윗을 도와준 것이지, 자기가 어떤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서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다윗을 도와준 것이 아니라고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만유의 주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다윗과 비교하면, 다윗도 왕이었지만 다윗과 비교하면, 비교도 되지 않는 왕이시어요. 다윗은 너무나도 약한 왕이죠. 너무나도 부족한 왕이기 때문에, 아들에 의해서 쫓겨나기도 하고, 도망가야만 했었고, 불완전한 그런 왕이었는데, 그 불완전한 왕임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이렇게 왕의 권한을 가지고서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그런 왕이 됐는데, 하나님은 어떤 왕이신가? 다윗과 비교하면, 비교도 되지 않을, 온 우주의 왕이고 만왕의 왕이시고 온 세상을 다스리는 그런 참된 왕이 우리 하나님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어떠한 일들이 벌어집니까?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자는 복이 있을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마다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는 자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것이고,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내용들로 성경에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주셨지만, 하나님에게서 떠나는 그 순간에 재앙을 당하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들이 성경 여러 곳에 엄청나게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복을 받는 것이고, 하나님을 버리고 도망가면 재앙을 받는다고 하는 이야기들이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하지만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복을 누리기 위한 목적으로, 잘 먹고 잘 살고, 내가 성공하겠다고 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은, 그게 그 말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이 최우선의 목표가 되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그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어 버리기 때문인 것이고,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진정한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내가 복을 얻기 위한 수단일 수밖에 없는 수단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기뻐하시느냐? 내가 잘 먹고 잘 살고 잘 되기 위한 그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는 그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좋아하실 것인가? 아니에요.

어차피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겠지만, 그리고 어쩌면 수많은 강단 위에서 하는 말씀이 “여러분, 복 받으려면,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여러분, 잘 되려면, 정말 신앙생활 잘하세요.”라고 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이게 정상인가 보다.”라고 생각하기가 쉽지만, 근데 어마어마한 차이가 거기에 있어요. 어마어마한 차이가.

하나님이 목적이 되느냐? 아니면 내가 잘 먹고 잘 살고 성공하느냐? 그것이 목적이 되느냐?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데, 그 차이가 어디서 나타납니까? 사울의 모습에서 나타납니다. 사울은 전쟁을 하면서, 전쟁에서 이기고 싶었어요. 블레셋 민족과 싸워서 이기고 싶은데, 사무엘 선지자가 오지 않으니까, 제사를 드리지 못하는 겁니다. 백성들은 흩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 상황 가운데서 사울의 마음은 답답하기 시작했어요. 지금 전쟁에서 이겨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려야 되는데, 제사를 드려야 되는데 제사를 드릴 사무엘은 오지 않고, 답답한 마음에 사울 왕은 제사를 자기가 드려버렸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의 마음 가운데 제사를 드린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것이 너무나도 간절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나도 넘쳐나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사울의 마음 가운데 들어 있는 단 하나의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게 목적이에요. 전쟁에서 승리하는 게 목적인데, 그 승리를 위해서 하나님을 사용해야 되는데, 하나님을 사용할 그 제사장이 안 오니까, 자기가 그냥 드려버린 거죠.

그런 제사를 보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전쟁 앞에서 나한테 예배하고 제사하니까, 너는 참 복된 사람이라고 칭찬하고 그에게 복 주신 것이 아니라, “너는 왕으로서의 자격이 없다.” 말씀하시는 거죠.

이사야서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들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립니다. 속죄제를 드리고 번제를 드리는 그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게 보이려 오나니, 나는 너희들의 제사를 싫어하노라. 누가 제사를 드리라고 했느냐? 다시는 이런 제사를 가져오지 말라고 말씀하셔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민족의 마음 가운데 제사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면, 빨리 하나님 앞에 제사드려버리고, 면죄부를 받고, 내가 제사를 드렸다고 하는 그 확인서를 받아서, 마음껏 이 세상 가운데서 또다시 잘 살기 위한 그런 수단으로 제사를 드리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다시는 이런 제사를 가져오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죠.

하나님이 수단이 되어 버려서 드리는 예배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가장 하나님께서 모욕을 당하시는 거죠. 물질의 우상을 섬기며, 이 세상에 성공의 우상을 섬기는 자들에 의해서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하나님의 모습에 가장 수치를 당하시는 모습이 하나님의 모습인 것이죠.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왜 나를 사랑하셨습니까? 그것은 우리를 잘 살리고 우리를 구원하시면, 그러면 우리에게 어떤 이용 가치가 있어서, 이 사람 이용하면 이득을 볼 수 있겠다고 하는 그런 계획과 목적 가운데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신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셨어요. 마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이, 자식이 아무리 못났어도, 그 자식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나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은 그 부모의 마음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랑해 주신 그 사랑을 저와 여러분들이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얼마 있지 아니하면, 성탄절이 되는데, 저 높고 높은 보좌 위에서 낮고 천한 이 땅에 말구유로 오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를 통해서 무엇인가 이득을 얻고자 하는 그런 계획 때문에가 아니라, 우리가 망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받았다고 한다면, 우리도 주님을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고, 하나님 앞에 진실로 예배하는 자로 나아가는 것이 마땅한 줄로 믿습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 우리가 나아간다고 하면 나아가는 자가 복된 것이고, 은혜를 받는 것이고, 다윗의 마음에 바르실래를 보면서, “내가, 네가 원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다 해주고 싶다.”라고 말하는 그 다윗의 마음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모든 것이 다 열려 있고 우리가 구하는 것보다도 더 큰 것으로 더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종종 사람들은 신앙생활하다가 실망해버리고 교회를 떠나버립니다. “내가 교회를 나가줬는데, 내 삶은 아무런 변화가 없더라. 고통이 떠나지 않더라. 별거 없네.” 하면서 교회를 떠나는 것이죠. “내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려줬는데, 아무런 내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 같더라.” 하면서 믿음을 포기해버리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 앞에 헌금해 드렸는데, 그 투자한 만큼 하나님께서 나에게 해주지 않는다고 실망하면서, 교회를 떠나는 것이죠.

처음부터 잘못된 접근을 한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방 종교를 믿듯이, 미신을 믿듯이, 우리가 얼마짜리 굿을 하면 얼마만큼의 반응이 오고, 우리가 어느 정도의 투자를 해서 신앙생활을 하면 얼마 정도의 반응이 있을 거라고 계산하면서, 그래서 하나님의 그 반응을 구하는 것이 그것이 참된 신앙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신 그 은혜와 사랑이 너무나도 감사해서, 영원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도, 아무 할 말이 없는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지신 그 주님의 은혜가 너무나도 감사해서, 오늘도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자로 서는 것이 그것이 마땅한 줄로 믿습니다.

어쩌면 오늘 이야기의 최대 수혜자는 김함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성이 김 씨고 이름이 함이 아니고 그냥 김함입니다. 이 김함이라고 하는 사람은 별로 한 게 없는데, 다윗으로부터 과분한 대접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21세기의 관점으로 본다고 하면, 부정 청탁이 아닐까 생각이 들 법도 한 장면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김함은 아무런 공로가 있어서도 아니고, 그 무엇을 한 것도 아닌데, 바르실래라고 하는 사람 때문에, 운이 좋게 채용되고, 운이 좋게 다윗의 대접을 받게 되는 럭키 가이(lucky guy)가 된 거죠. 행운아가 된 것이죠. 참 이런 식으로라도 취업을 했으면 참 좋겠어요. 요즘에는 취업하는 것이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몇 수씩 하고 계속 떨어지고 정말 고통스러워들 하는데, 이런 식으로 행운아가 되어서 우리 아저씨가 그런 공로라도 세우고 우리의 친척 가운데 누구라도 그런 공로를 세워서 이렇게 자동으로 채용될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아십니까? 사실은 우리가 김함과 같은 엄청난 혜택을 누렸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로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완벽하게 순종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주신 그 주님의 공로 때문에, 놀랍게도 그 혜택을 저와 여러분들이 받은 줄로 믿습니다. 그러기에 그런 사랑을 받은 정말 아무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은 우리는 늘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세상에 힘든 일들을 만난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찬송하며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너무나도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며,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너그럽고 인자하고 온유하고 긍휼한 마음으로 우리 이웃들을 대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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