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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땅, 가나안 (수 21:44-45)

이제 우리가 성경을 쭉 읽어오는 가운데 신명기까지 읽게 되었고, 이제는 이번 주간에는 여호수아서를 읽게 되었습니다. 한 분씩, 두 분씩 중단하시는 분이 생길 수 있을 것 같아요. 혹시 톡 그룹 중에서 이렇게 중단하신 분이 혹시 계십니까? 있나요? 있을 수 있겠는데, 그러할 때 따뜻하게 사랑으로 같이 더 가자고 이렇게 권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지금 안 읽은 부분 그것까지 다 읽으려고 하면 힘드니까, 뒤에 것은 잊어버리고, 오늘부터 다시 여호수아서부터 읽어나가자. 여호수아서부터 읽어나가자 해서, 여호수아서부터 계시록까지 읽고, 내년 또 창세기부터 읽으면 어차피 일독 되는 겁니다. 어차피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중간에 잠깐 뭐 이런저런 일로 중단하는 경우들이 반드시 생깁니다. 반드시 생기는데, 그것 때문에 아예 포기할 것이 아니라, 그때 다시 시작하면, 그때부터 또 1년 하면 또 성경 일독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니까, 넘어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셔서 성경 말씀을 같이 잘 읽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주에는 우리가 여호수아서의 말씀을 읽게 되겠는데요. 이 여호수아서의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드디어 정착하게 되는 그 과정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다가, 그래서 해방되어서 광야의 고난의 과정을 지금까지 쭉 거쳐왔다고 한다면, 이제 여호수아에서는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을 실제적으로 정복하게 되는 그 과정을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나안 땅에는 무주공산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는 이미 살고 있던 가나안 민족이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그 가나안 민족이 살고 있던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전쟁을 해야만 하는 불가피한 상황이 펼쳐지게 되는 것이죠.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전쟁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여러 가지로 불편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는 구절들이 바로 이 여호수아서의 말씀 가운데 있을 수가 있겠습니다. 저 정말 수많은 사람들을 시민들을 죽여버리고 진멸해야 되는 그 이야기를 읽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여호수아에서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깨닫기를 원하시는지 한번 생각하면서, 이 여호수아에서의 말씀을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해 냈던 모세가 죽었다고 하는 이야기부터 여호수아서는 시작하게 되는 것이죠. 이 모세는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그 땅을 보지 못하고 르보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죽게 됩니다. 마지막을 보내게 되는 것이죠. 제가 지난번에 성지순례에 가게 되었을 때, 모세가 올라가서 죽었다고 하는 그 산에 올라가서 그래서 저 멀리 예루살렘이 어디 있는가를 한번 이렇게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어요. 근데 그 느보산에서 쭉 바라보면, 저 앞에 가나안 땅이 펼쳐 보이는 거예요. 사해바다가 보이고 사해바다 건너편으로 그 유대 땅이 보이는 그 땅이 눈에 보이는데, 그 눈에 보이는 그 땅을 앞에 두고, 모세가 그 산 위에서 죽었을 거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참 여러 가지 감정이 드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모세가 이렇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게 되었는데요. 그 마지막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모세가 사라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도 같이 사라지게 되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사람은 죽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사라지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해주신 그 약속의 그 말씀들은 여전히 유효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그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드리는 모습을 여호수아에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우리가 믿을 수가 없는 것이죠. 철저하게 약속했던 사람들, 철저하게 확신을 주었던 그런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사라지기도 하고, 그리고 마음이 변하기도 하고, 그리고 목숨이 끊어지기도 하는 등 우리가 사람을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사람이 사라진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함께하시기 때문에,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 순간에도 강하고 담대할 수가 있었습니다. 모세 때문에 내가 강하고 담대하게 전진해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강하고 담대하게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세도 사라지고 여호수아도 사라지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 하나님을 보면서 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그 일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소망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다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하는 이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은혜가 되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는 엄청난 경고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순종하는 자에게는 어떠한 축복이 있습니까? 놀라운 축복이 있는 거죠. 여호수아서 1장 7절에서부터 8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내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내 입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말씀해 주신 것이죠. 따라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축복이 있는 것이지만, 정반대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게 된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살아가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과연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에서 이 두 가지 선택 가운데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되었을까요? 순종하는 선택을 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원치 아니하는 불순종의 길로 가게 되었을까요?

먼저 이스라엘 민족들이 이스라엘 땅에서 가나안 땅에서 제일 먼저 맞붙게 된 전쟁은 여리고성 전쟁이었습니다. 이 여리고성 전쟁 속에서 우리가 제일 먼저 주목해 보아야 될 장면이 있다고 한다면, 라합이라고 하는 가나안 사람을 구원한 이야기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 라합이라고 하는 여인은 가나안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 만유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었을 때, 이 라합이라고 하는 여인은 오히려 멸망받을 사람들 가운데서 구원을 얻게 되는 놀라운 축복을 얻게 된 것이죠.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고, 사실은 모든 민족에게 주어지는 복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무엇이냐 하면, 아브라함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고 약속해 주셨기 때문인데요. 따라서 이 라합이 구원받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복종하는 자에게 구원을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은 여리고성을 점령하기 전에 먼저 길가에서 할례를 행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애굽 땅에서 나왔을 때 그 광야 생활을 하느라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할례를 받지 못한 채 여기까지 온 겁니다. 하지만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할례를 할 수밖에 행하도록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는데요. 사실 할례를 행하게 되면, 그 육체의 아픔 때문에 전쟁을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할례를 받을 것을 원하셨어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단순히 그냥 들어가서 땅을 차지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신실하게 맺으면서,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정말 중요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할례를 받으면서 우리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민족이구나!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민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되겠구나! 순종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잘려나가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사실을 생생하게 기억하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그 백성이 되기 위하여서, 할례를 받게 되는 것이죠. 할례라고 하는 것은 표피를 잘라내는 것인데, 마치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그 언약을 어긴 사람들을 잘라내 버리는 것과 같은 그런 경고를 몸에 새기는 것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들이 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서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겠다고 하는 그런 다짐을 하게 만들고, 그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만드는 것이죠.


이 여리고성 전투라고 하는 것은 어떤 전투인가? 그냥 한 나라가 한 나라를 공격해서 무찔러서 이기는 전투가 아니라, 사실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쟁이요. 거룩한 전쟁이라고 하는 그 특징을 우리가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거룩한 전쟁, 하나님의 전쟁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심판의 차원에서 이루어 가시는 전쟁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가나안 땅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그리고 너무나도 타락해 버려서 하나님께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그들의 죄악을 심판하실 정도의 그런 심각한 죄 가운데 빠지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거죠. 마지막 날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우리가 행한 바에 따라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처럼, 당시 이 가난에 살던 여리고성에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엄청난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들어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차원에서, 거룩한 전쟁, 하나님의 전쟁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땅에 당장 인도해 들이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다음에 400여 년을 지나도록 그 기간을 유예기간을 두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들은 애굽 땅에 내려가서 거기서 수가 증가하고, 그리고 광야를 통과하면서 그래서 400여 년이 지난 후에야, 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러 오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하나님의 가나안 땅의 약속이 이렇게 늦어졌습니까? 그 이유에 대해서 창세기 15장 6절 말씀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5장 6절이 아니고 다른 말씀입니다. 잘못 적은 것 같습니다. 창세기 15장 16절 말씀. (대단합니다. 이걸 금방 찾았어요.)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이 창세기 15장 16절은 누구에게 주신 말씀이죠?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인 거예요. 아브라함한테 주시는 말씀이 “아브라함아” 이 땅을 너와 내 후손들에게 주겠다고 약속을 하셨는데, 그 약속을 하시면서 지금 당장 주는 것이 아니라, 4대가 지난 후에 네 후손들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셨어요. 다시 말하자면 400여 년이 지난 후에 이스라엘 민족이 이 땅을 차지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400년 동안의 긴 기간을 유예기간을 두신 이유가 무엇인가? 아모리 민족들이 지금 죄를 엄청 짓고 있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셔야 되기는 하겠는데, 좀 더 기다려보겠다는 거예요. 좀 더 참아보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참고 참고 또 참고 해서 400여 년을 더 참다가,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들어서 그 가나 민족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전쟁이 바로 이 가나안 전쟁이고 여리고성의 전쟁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이 가난 전쟁을 통해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이 여리고성에 있는 전리품을 취할 수가 없었습니다. 원래 구약시대의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전쟁을 해서 전리품을 취하고 승리의 기쁨을 전리품을 나누어 갖는 것으로 즐기고 축하하는 것이 이게 고대 전쟁의 기본적인 방식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거룩한 전쟁을 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너희가 여리고성을 점령한 다음에 전리품을 하나도 취하지 말라고 말씀하셔요. 어떻게 해라? 다 진멸해 버려라. 하나도 살려두지 말고, 다 진멸해 버리고, 박살 내버리고, 파괴해 버리고, 다 죽여버리고 하나도 전리품으로 가져가지 못하게 만드셨습니다. 왜 전리품을 갖지 못하게 만드셨어요? 이스라엘 민족이 이긴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 민족이 전쟁을 잘해서 이긴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기신 전쟁이고, 하나님께서 심판의 행위로 그들을 책망하시기 위해서 만드신 전쟁이기 때문에 전리품을 하나도 가지지 못하게 만드신 거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간이 그것을 어긴 것이죠. 그 아간이 어긴 것은 그냥 보통 죄가 아니라, 이것은 내가 한 전쟁이라고 생각하고 나의 공로를 인정하는 그런 것이 될 텐데, 그 죄를 제거해야만 다른 장인장에서 승리가 가능했다고 하는 것을 여호수아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을 정복하면서 이제 그 가나안 땅을 12지파에게 나누어 주게 되는데요. 12지파에게 나누어 주는 가운데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는 땅을 나누어 주지 않았습니다. 레위 지파 사람들은 땅을 받지 못했는데 왜 땅을 받지 못했을까요? 이들은 성전에서 나오는 예물들을 가지고 살아가게 만든 것이죠. 다른 사람들은 일반인들은 농사짓고 목축업을 하면서 땅을 일구어서 수확을 얻어서 그것으로 먹고 살았지만, 그 사람들이 하나님께 10분의 1을 드려서 바치고, 또한 재물을 바치면 레위인들은 그것을 성전에서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 그 바친 것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이고, 그래서 레위인들의 기업이 무엇이냐? “레위인들의 기업은 하나님이 기업이다.” 그 말입니다. 우리 찬송가 가운데,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이런 찬송이 있는데, 나의 영원하신 기업이 생명보다 귀하다는 게 무슨 얘기예요?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이 되시고, 이 세상의 것이 우리의 기업이 아니라 이 세상의 것이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소유이고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고 그 기업이 되신 하나님이 생명보다 귀하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찬송이에요. 알고는 있었습니까? 처음 들어봅니까? 아무튼 이스라엘 지파는 레위 지파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게 만들어 주신 것이죠.

그래서 이 가나안 땅을 계속 분배해 가는 가운데 그 가난 땅을 분배하는 과정 가운데서 대조되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갈렙이라고 하는 사람이고, 한 사람은 요셉 자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죠. 갈렙은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이 사람의 나이가 80이 넘었어요. 85세죠? 그런데 이 갈렙은 뭐라고 얘기를 하냐면 “내가 아직 젊습니다. 내가 아직 일할 만합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다고 한다면 내가 이 산지를 점령하겠습니다.” 하면서, 믿음으로 그 산을 점령하고, 그 땅을 차지하게 된 것이죠. 하지만 요셉 자손들은 어떻게 했는가? 가나안 땅에 있는 민족들이 철병거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정복하기 어렵다고 말하고, 그래서 정복하는 것을 못하게 되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죠. 요셉 자손들은 누구를 닮았어요? 그 옛날 10명의 정탐꾼을 닮은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의 땅을 차지하지 못하고 실패해 버리는 그런 불순종의 모습을 보여주게 된 것이죠. 이런 두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믿음의 길을 따라가야 될 것인가? 어떤 믿음의 삶을 살아야 될 것인가? 갈렙과 같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뢰하며 믿음으로 나아가는 삶이 될 것을 우리 여호수아사의 말씀 가운데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데 완전히 성공했습니까? 실패했습니까? 실패했어요. 물론 요약하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정복하게 하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졌다고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졌습니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이루어졌어요. 그 옛날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하신 것에 따라서 정말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을 차지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거죠.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 가나안 땅을 정말 완전하게 차지한 것인가요? 아니요. 완벽하게 차지하지 못했어요. 여전히 이 가나안 땅에 살면서 아픔이 있는 겁니다. 여전히 가나안 땅에 살면서 고통이 있는 거예요. 외적의 침입이 있는 거예요. 특별히 유다 족속은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쫓아내고 완전히 다 차지하라고 했는데, 유다 족속은 여보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해요. 에브라임 족속도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합니다. 단 족속은 어떻게 됐습니까? 단 족속은 자신들이 할당받은 그 땅을 차지하지 못하는 그런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죠.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그 가나안 땅을 차지했지만, 여전히 일부 또 이쪽에서는 저쪽에서는 차지하지 못하고 가나안 족속과 같이 살아야 되기도 하고,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리고 할 수 없이 다른 곳에 피난 가서 살아야만 되는, 그런 불완전한 그런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 보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던지게 되는 거죠. 왜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을 완전히 차지하지 못했을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주신다고 했는데, 왜 가나안 땅을 완전히 차지하지 못했던 것일까? 왜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에서 완전한 안식과 쉼을 누리지 못했을까? 애굽 땅에서 살던 그 고통을 물리치고 이제는 해방되어서 가나안 땅에 왔으니까, 이제는 마음 편하게 살아야 되겠다. 이제는 걱정, 근심 없이 살았으면 좋겠다 했는데, 가나안 땅에 사는 삶이 그렇게 근심과 걱정이 없이 사는 삶이 아니라, 여전히 안식이 없고 여전히 쉼이 없는 그런 삶을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 마음 가운데 질문이 하나 생기는 거죠.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인가? 하나님의 약속은 실패한 것인가? 하나님께서 우리 가나안 땅을 저 가나안 복지 귀한 성에나 들어가려고 그 찬양을 하면서, 이렇게 이 가나안 땅에 왔는데, 이곳에 참된 안식이 없고 참된 평화가 없고 여전히 눈물도 있고 슬픔이 있는 그 고난의 과정을 겪는다고 하는데, 도대체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된 것인가?”라고 하는 질문이 떠오르게 되면서, 우리는 이 여호수아서의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는 겁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시고, 우리들의 심령 가운데 사탄이 지배하면서 우리를 힘들게 만들었던 그 영적인 상황 가운데서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셨으나 다시 부활하셔서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고, 그래서 다시 이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새롭게 받게 만드시는 그 주님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저 천성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그 말씀이 여호수아서의 말씀입니다. 한편으로는 이루어졌지만 또 한편으로는 영원한 천국, 영원한 가나안 땅 저 땅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소망을 두게 만드는 책이 여호수아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번 한 주간 동안 여호수아에서의 말씀을 읽어나가는 가운데, 천국의 소망을 발견하는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루시는 그 놀라운 은혜의 축복들을 기억하는 한 주간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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