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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십자가를 지고 (눅 14:25-33)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는 저울이 하나씩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그 마음의 저울에서 무게를 재어보는 것이죠. 어느 것이 훨씬 더 귀한가? 어느 것이 훨씬 더 중요한가를 따져보고, 그래서 더 중요한 것에 우리가 결심을 하고 따르게 됩니다. 어느 것 하나를 결정하더라도, 정말 사소한 것 하나를 결정하더라도,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늘 마음의 저울이 작동하게 되는 것이죠. 물건 하나를 살 때에도 과연 이만한 가치를 지불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어떤 일을 계획할 때에도 이것을 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또한 능력이 있는가? 충분히 할 만한가? 늘 계산해 보고서 우리가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따져보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삶은 정말 힘들 수밖에 없는 것이죠.


우리 교회도 우리 예배당을 건축하려고 할 때 과연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이런 예배당을 지을 수 있을까? 우리 운영위원들이 앉아서 계산을 했습니다. 제 마음 가운데는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멋있는 예배당을 짓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만일 그렇게 진다고 한다고 하면, 너무나도 많은 예산이 들어서, 그래서 짓다가 중단하거나 아니면 완성하지 못하고 중단시킬 수 있기 때문에, 서로 마음을 논의하면서, 어디까지 우리가 할 수 있을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최상의 결과물이 무엇일까? 고민하는 가운데 이 아름다운 예배당을 마련해서 이곳에 오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어느 거 하나 결정할 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계산을 하게 되는 것이고, 그 계산 가운데서 가능하다 생각될 때, 이것이 충분하다 생각할 때, 모든 일을 하게 되는 것이죠.

오늘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비유를 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망대를 세우고자 한다면 자기가 가진 예산으로 충분히 망대를 세울 만한 것인가? 충분히 세울 수 있는가? 먼저 계산해 보고 망대를 짓는 것이지, 계산도 해보지 않고 무턱대고 땅부터 파고, 무턱대고 그 건물을 짓기 시작하다가, 예산이 딸려서 도중에 멈춰버리고 만다면, 온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당하지 않겠는가? 저 사람이 일은 시작했지만 마치지 못했다고 하는 그런 조롱을 당할 것이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전쟁을 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무턱대고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과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병력을 가지고 우리가 가진 물자를 가지고 충분히 전쟁을 할 수 있는가 계산해 보는 것이죠. 계산해 봐서 이길 만한 승산이 있다고 생각이 되면, 전쟁을 해야 되겠지만, 그러나 이길 수 없다고 한다면, 전쟁을 할 것이 아니라 화친을 청해야 되고, 전쟁을 통해서 얻는 유익보다 화친을 통해서 얻는 유익이 훨씬 더 크다고 한다면, 화친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데에도 역시 비용이 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 어려운 일이라고 하는 것이에요. 비용이 드는 것이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을 수 있겠는데, 과연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이런 비용을 지불하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이만큼의 희생을 하고 내가 쏟아붓는 이런 모든 것들이 과연 예수님을 따르는 것과 비교해서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인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이 말씀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지불해야 될 비용이 얼마인가?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다고 하는 것이 놀랍습니다. 이 세상의 장사꾼들은 어떤 한 물건을 팔기 위해서 장점을 이야기하고 단점은 숨겨버립니다. 단점은 아주 조그마한 글씨로 써놓는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장점을 설명하기보다는, 무엇을 더 희생해야 되는가?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얼마나 많은 손해가 있는가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보라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데요.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아주 충격적인 말씀을 해주고 계십니다. 누가복음 14장 26절에서부터 27절의 말씀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누구를 포기해야 된다는 거예요? 가족을 포기해야 된다는 거예요. 한번 옆에 자기 아내 있으면 보십시오. 남편을 보십시오. 우리 자식을 한번 보세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가족을 버려야 된다는 거예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라야 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고 계시는데 이것은 아주 충격적인 말씀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과연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 가족들을 다 버려야 되고 미워해야 된다고 하는 이 말씀이 어떤 의미의 말씀일까요? 그러니까 불교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불교에서는 출가를 말하고 있는데요. 가족들을 버리고 산속에 들어가서, 모든 것, 이 세상과의 모든 인연을 끊어버리고, 그리고 출가를 하라고 하는 가르침을 주고 있는데, 이런 불가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들도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가족들을 다 내 팽개쳐버리고 떠나야만 주님을 따를 수 있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일까요?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속에는 예수님의 이런 말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사랑해야 된다고 하는 말씀도 성경 가운데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8절 말씀에 보면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 가족을 돌보지 않는다고 하면, 가족을 정말 사랑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신자라고 말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안심이 좀 되십니까?

한쪽에서는 이제 가족을 버려야 된다고 하고, 미워해야 된다고 말하고, 모든 것을 다 포기해야 된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데,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게 아니라, 가족들을 정말 돌봐야 되고 사랑해야 된다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고 피차 복종해야 된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데요. 특별히 에베소서 5장 25절의 말씀 가운데서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냐면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남편이 아내 사랑하기를 어떻게 사랑해야 되는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주셨듯이,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아내를 사랑하는 게 그게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가정의 모습인 것이죠, 그냥 사랑하지 않고 버려버리고 그냥 외면해 버리는 것이 그게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너희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를 미워해야 하고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리라고 하는 이 말씀은 도대체 어떤 의미의 말씀이겠습니까? 아내를 미워해라, 부모를 미워해라. 처자를 미워하라고 하는 이 말씀은 도대체 무슨 의미의 말씀일까요? 누가복음의 이 말씀은 마태복음 10장 37절에서부터 38절의 말씀에서도 똑같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약간 다른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가복음에서는 미워해야 된다고 하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똑같은 말을 누가 마태복음에서는 더 사랑하지 말라고 하는 표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워한다고 하는 이 표현은 “더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말로 이해하면 좋겠는데요. 우리도 그렇잖아요? 누구를 더 사랑한다, 덜 사랑한다 하면, 아내가 그러잖아요? “그럼 나 미워하는 거네”라고 하는 그런 말을 하듯이, 여기서 미워한다고 하는 말은 “덜 사랑한다” “더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 사랑해야 된다고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내가 아내를 사랑하는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되고, 우리 자식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되고, 부모를 사랑하는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된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인데요. 이렇게 가족들을 더 사랑하지 말아야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사랑의 강도를 약하게 해야 한다. “너무 많이 사랑하면 안 되고, 조금만 사랑해야 된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제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늘 저를 향해서 무슨 얘기를 했냐면,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내가 주님보다 너를 더 많이 사랑하는 건 아니야. 너는 좀 덜 사랑할 거야.”라고 늘 이야기해 주곤 했는데요. 사실은 우리의 사랑이 우리 자녀나 우리 가족을 향해서 사랑을 좀 절제해야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내용이 아닙니다. 종종 부모님들이 믿음이 있는 부모님들이 자식들한테 이야기하면서, “내가 너를 사랑하지만, 하나님이 제일이고, 너는 두 번째야. 너는 그다음이야”라고 말씀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니라, 사실 우리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부족하면 부족했지 과한 것이 아닌 것이죠. 우리가 늘 기억해야 될 것은 더 사랑해야 돼요. 지금 사랑하는 것보다 아내를 더 사랑해야 되고, 지금 사랑하는 것보다 자녀들을 더 사랑해야 되는 것이고, 지금 사랑하는 것보다 부모님을 더 사랑해야 되는 것이죠.

예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한 교수님이 계셨는데, 그 교수님의 사모님이 병원에 입원해서 아주 생명을 잃을 수 있는 그런 아주 심각한 상황 가운데 있어서, 우리 제자들이 교수님을 병문안을 한 번 간 적이 있었습니다. 병실에 가서 교수님을 위로해 드리고, 위해서 같이 기도해 주고 하고 하는 일이 있었는데요. 그때 그 교수님께서 우리들 앞에서 하는 말이 무슨 얘기를 했냐면, “여러분 저는 죄인입니다.” 그래요. 그래서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했더니, 그 교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제가 제 아내를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피를 흘려주신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지 못한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보면서 참 많은 감동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의 사랑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우리 가족을 향해서 지금보다도 훨씬 더, 더 많이 사랑해야 되고, 우리의 사랑이 부족하면 부족했지 넘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 가족을 주님보다 덜 사랑해야 된다. 더 사랑하면 안 된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우리 자식들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너무나도 큰 나머지, 우리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 너무나도 큰 나머지, 하나님의 뜻을 어기거나 하나님의 뜻에서부터 벗어나는 일들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축구를 좋아할 수 있습니다. 축구를 좋아할 수 있고, 야구를 좋아할 수 있고, 또 우리는 정치를 좋아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무엇이든지 좋아해야만 하는 것이니까요. 무엇이든지 좋아할 수 있는데, 그런데 그것이 너무나도 과한 나머지, 우리 팀이 이기게 만들기 위해서, 몰래 상대편 선수를 다치게 만들거나, 아니면 심판을 매수하거나, 잘못된 방법을 사용해서, 그래서 그 경기에서 이기려고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과도하게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학생이 열심히 공부를 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그래서 좋은 대학을 가겠다, 아니면 좋은 직장을 가겠다고 하는 목표를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은 정당한 일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내가 커닝을 해서, 나쁜 방법을 사용해서, 그래서 좋은 대학에 가려고 하거나 좋은 직장에 가려고 한다고 하면, 그것은 더 하나님보다 이 세상의 성공을 더 사랑하는 일이 되는 것이죠.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이 다 우상이 될 수가 있다고 경고하고 있는데요. 예를 들어서 돈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죠. 돈을 벌기 위해서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는 거 그게 괜찮은 일이에요. 우리가 열심히 땀을 흘리고 수고하면서 돈을 벌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것 그것은 나쁜 일이 아닌 겁니다. 우리가 성공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니죠. 우리가 좋은 명예를 얻기 위해서 수고하는 것 그건 나쁜 일이 아닐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보다 돈을 더 많이 사랑하는 경우가 어떤 경우일 것입니까? 돈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사기를 치거나 다른 사람들의 돈을 빼앗거나 악한 일을 하면서 돈을 많이 거두려고 한다고 하면, 잘못된 방법을 통해서 우리가 부자가 되기를 원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보다 돈을 더 많이 사랑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성공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의 방법을 무시하거나 하나님의 뜻에서부터 떠난 방법을 통해서 우리가 성공하려고 하고 명예를 얻고자 한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보다 이 세상의 것을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하는 그 말은 우리에게 주어진 그 길이 힘들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그 주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많은 제약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성공하게 만들기를 원하고, 이 세상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것을 빼앗고 잘못된 방법을 통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라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복종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기 때문에 우리는 늘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죠. 이 세상 사람들은 악을 행하면서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마음대로 하기 때문에 제약이 없어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처럼 똑같이 미워할 수 없는 거예요. 이 세상처럼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똑같이 악을 행하며 살 수 없는, 이 이 세상 사람들이 하는 방식대로 우리가 똑같이 악을 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길이 힘들고 어렵기 때문에 우리의 삶 가운데 십자가의 길이 있는 것이고, 고난이 있는데 그러한 고난의 길들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경건하게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하는 이 말은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부족하다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달리셔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고 말하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충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 왜 우리의 십자가가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것이 단순히 지적인 동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을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마치 결혼하는 거와 똑같아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을 한다고 한다면 모든 일을 다 같이 하는 거죠. 동고동락을 하는 겁니다. 좋은 일만 아니라 어려운 일도 함께하는 것이고, 희로애락을 같이 나누면서 모든 것을 다 같이 하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그 고난의 순간에도 같이 하는 것이 그게 그 부부로서 살아가는 것인 것과 마찬가지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단순히 내가 지적인 동의,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단순한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우리가 주님과 함께 결합하는 것이고, 주님과 함께 신랑과 신부가 되어서 주님과 함께 주님이 가시는 곳이라고 한다고 하면, 언제든지 따르는 것이 그것이 믿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로마서 6장 3절의 말씀 가운데 이렇게 표현합니다. “무릇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주님께서 가는 길에 우리가 함께 가기 때문에 거기에 고난이 있는 것이고, 십자가가 있는 것인데, 그러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 고난의 기간 동안에, 내게 주신 하나님의 십자가가 무엇인가? 내게 남겨주신 그 고난 그것이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기쁜 일이고 감사할 일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따라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을 향해서 십자가를 질 수 있느냐? 모든 것을 다 버릴 수 있느냐? 물어보시는 우리 주님께서 먼저 우리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버리셨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우리 주님께서도 먼저 주님의 마음 가운데 마음의 저울을 가지고 계산을 하셨어요. 우리들을 살리기 위해서 비용이 얼마나 들 것인가? 죄에 빠진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바로 우리들을 위해서,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희생해야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을까? 계산해 보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주셔야만 한다고 하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 그것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기꺼이 저와 여러분들을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 내어주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먼저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모든 것을 다 버리시고 사랑해 주셨다고 한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그러한 사랑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나아가는 가운데 어떠한 어려움과 아픔과 슬픔이 있다고 할지라도 담대하게 믿음으로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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