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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물의 경계 (잠 17:8) 이국진 목사

뇌물과 선물의 차이가 무엇이죠? 뇌물은 무엇이고, 선물은 무엇입니까? 이런 말이 있더라고요. “그것을 받고도 잠을 잘 못 이루면 뇌물이고, 받고도 잠을 잘 잔다면 선물이다.” 맞는 것 같습니까? 아주 위트가 있는 표현 같습니다.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언론에 발표가 되었을 때 문제가 되면 뇌물이고, 아무 문제가 되지 않으면 선물이다.” 그것도 말이 되죠. 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리를 바꾸면 못 받게 되는 것은 뇌물이고, 그 자리에서 물러나도, 그 자리에서 있지 않아도 받을 수 있는 것은 선물이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뇌물과 선물의 차이를 아마 쉽게 설명한 그러한 위트 있는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제는 뇌물을 받고서도 아무런 양심에 거리낌 없이 잠을 잘 자는 사람들이 요즘에는 너무나도 많다고 하는 것이죠.


성경에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성경에서는 이 뇌물에 대해서, 선물과 뇌물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오늘 잠언서 17장 8절 말씀은 뇌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우리가 함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이 뇌물이라고 하는 그 히브리어 단어를 한번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뇌물이라고 하는 그 히브리어 단어는 밑에 있는 것처럼 “쇼하드”라고 하는 말입니다. “쇼하드.” 이 “쇼하드”라고 하는 말은 그런데 뇌물로만 번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뇌물이 아니라, 선물을 의미하는 것이죠. 선물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몇 가지 더 있습니다. “민하”라고 하는 것도 선물을 말할 수 있겠고, “마탄”이라고 하는 히브리어 단어도 선물을 의미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쇼하드”라고 하는 이 단어가 선물을 의미하기도 하고, 뇌물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 같아요. 왜냐하면 선물이라고 하는 것은 넓은 개념이고, 그 선물 속에 뇌물이라고 하는 좁은 의미의 개념이 들어있기 때문에, 선물이면서 뇌물이 되고, 그래서 선물과 뇌물의 경계가 없이, 어떤 때는 같은 단어라고 할지라도 선물로 해석할 수 있고, 어떤 본문에서는 이 “쇼하드”라고 하는 말을 다른 본문에서는 뇌물로 번역할 수도 있는 그런 것이 되겠습니다. 그 어떤 선물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뇌물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뇌물이 되는 것이죠. 은밀하게, 그리고 판결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 또한 좋은 결정들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뇌물성으로 주는 선물이라고 하면 그게 뇌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선물이라고 하는 것이 어느 지점이 되면, 뇌물로 바뀌게 되는, 그런 지점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먼저 이 뇌물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 전에 선물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는데요. 선물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선물을 우리가 많이 하는 것이 좋은 것이죠. 잠언서 18장 16절 말씀에 보면 “사람의 선물은 그의 길을 넓게 하며 또 존귀한 자 앞으로 그를 인도하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선물이 없는 것보다, 선물을 주고, 무엇인가 제공하고 사랑을 표현한다고 하면, 그것이 우리들의 그 삶을 아주 잘 매끄럽게 돌아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평상시 조그마한 선물이라도 계속해서 준다고 한다면, 선물을 계속해서 이렇게 준다고 한다면,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보면서 좋게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서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줄 수도 있겠고, 여러 가지 일들이 있을 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그런 역할들을 하는 것이 선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창세기에 보면, 야곱이 오랫동안 타지 생활을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때, 자기 형 에서를 만나게 되는 그 순간에, 과연 그 옛날 정말 악한 감정 가운데 헤어졌던 자신의 형과 다시 만나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이 야곱이 생각해 낸 것이 무엇이냐 하면, 어마어마한 선물이었습니다. 먼저 에서를 바로 만나기보다는, 선물을 먼저 보내는 것이죠. 선물을 보내서 이 에서의 마음을 녹이고, 그래서 그 에서를 나중에 만나겠다 생각해서, 결국 먼저 이 자신들의 그 일행을 몇 개로 나누어서, 먼저 선물들을 계속해서 보내고, 야곱이 맨 마지막에 그 에서를 만나게 될 때, 결국 이 에서와 야곱의 만남이 아주 극적인 상봉, 눈물이 있는 그런 상봉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창세기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물이 에서의 마음을 녹인 걸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야곱을 보호해 주신 것일까요? 아무튼 극적인 화해가 이루어진 것을 우리는 창세기의 말씀 가운데서 알 수 있는데요. 선물이 이런 윤활유와 같은 역할을 해주며,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아주 따뜻하게 해주는 기능을 한다고 하는 것, 그래서 선물이 아주 우리가 늘 해야 할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이 언제나 그렇듯이, 아무리 좋은 것도 어느 지점이 되면 나쁜 것으로 변해버릴 수가 있는 것이죠. 모든 좋은 것들이 어떤 지점이 되면 나쁘게 될 수 있는 가능성들이 항상 있는 것인데요. 선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선물도 좋은 뜻에서 할 수 있는 선물인데, 그 선물이 어느 순간에는 뇌물로 바뀌게 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도대체 그 선물과 뇌물의 경계가 무엇일까요? 어느 지점이 이것은 선물이고 이것은 뇌물이 되는 그런 경계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을 가르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액수가 많으면 뇌물이고, 액수가 적으면 선물인가요?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선물도 아무런 사심이 없는 선물도 엄청난 액수의 선물을 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미국에서는 종종, 미국에서는 항상 음식점에 가면 음식값만 내는 것이 아니라, 음식값에 더해서 팁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 팁이 어느 정도를 줘야 되냐면 적게는 15%에서 혹은 20% 많으면 25% 음식값의 몇 퍼센트를 팁으로 주는 문화가 정착돼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음식을 먹으면서, 음식을 잘 먹고, 음식을 먹는 것에 먹는 것을 위해서 웨이터가 와서 접대해 주고 음식을 가져다주고 물도 떠다 주고 하는 그런 서비스를 받았다고 하는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팁을 얼마씩 챙겨서 주는 경우가 있는데요. 대략적으로 15%에서 25% 정도의 팁을 주고 있고, 오늘날에는 더 많이 주는 경향들이 있다고들 하는데요. 그래서 뉴스에 들어보면, 종종 이런 뉴스가 나옵니다. 어떤 웨이터가 어떤 사람에게 음식을 잘 제공해 주고 서비스를 해주었더니, 그 손님이 그 웨이터에게 팁을 얼마를 줬는가? 만 불을 줬다. 만불이면 얼마예요? 약 1200만 원, 5만 불을 줬다. 얼마? 약 한 6천만 원. 또 어떤 사람은 10만 불을 줬다. 얼마 정도? 1억 2천만 원 정도의 팁을 주어서, 그것이 신문 기사에 종종 나곤 합니다. 음식을 미국 사람들은 거의 밖에서 사 먹으니까요. 밖에서 아침마다 늘 가는 식당에서 아침을 늘 먹기 때문에, 마치 자신의 어머니가 자기에게 밥을 해주는 것처럼, 늘 매일매일 밥을 친절하게 맞이해 주면서, 자신에게 그렇게 음식을 잘 접대해 주는 그 사람에게, 때에 따라서 어떤 마음이 좋은 손님들은 10만 불을 선물하기도 하고, 엄청난 차를 하나 사주기도 하고 하는 그런 일들이 가끔씩 있다고 합니다. 그게 뇌물인가요? 액수가 많으니까? 아니죠. 액수가 많고 적음에 따라서 뇌물이 되는 게 아닌 것이죠.


그렇다고 한다면 뇌물이 되는 지점이 어느 지점입니까? 내가 무엇인가를 주었을 때 상대방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게 되는 그런 관계가 형성이 되면 뇌물이 되는 것일까요? 그것도 아닌 것 같아요. 왜냐하면 모든 선물은 사람들의 마음을 열게 만들고, 결국 그 사람이 선물을 받은 사람이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무엇인가를 주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발생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음식 같은 걸 하나 싸가지고, 우리 아파트에 사는 다른 우리 이웃에게 한번 먹어보라고 전달해 주면, 그 집이 가만히 있질 않아요. 자기들도 뭐 과자 같은 거, 혹은 과일 같은 거, 해가지고 또 보내줍니다. 선물이라고 하는 것은 계속 서로서로 마음 주고받으면서, 그래서 마음이 열리게 되고, 서로 무엇인가 내가 대접하면, 또다시 대접을 받게 되는 그런 관계가 형성되고 있기 때문에, 내가 무엇인가를 주었을 때, 상대방이 나에게 또 무엇인가를 준다고 하는 것, 그것이 반드시 뇌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모든 선물은 다 그런 관계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사랑을 베풀고 내가 가능한 한 많은 사랑을 베풀면서 선물도 하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죠. 우리가 사랑을 베풀면, 그 베푼 사랑을 다시 돌려받게 되는 것이 성경적인 법칙이고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인자하게 대하고, 사랑을 베풀고, 너그럽게 대하면, 내가 오히려 그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많은 도움을 받으면서 참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지 않고 내가 인색하고, 사랑을 베풀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정말 우리들의 마음을 닫아버리고, 아무런 사랑을 베풀지 않으면서, 나 혼자만 알고, 그렇게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결국에는 외롭고 쓸쓸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먼저 사랑을 흘려 내보내면, 그 내가 흘려보냈던 그 사랑이 다시 내게로 몇 배로 돌아오는, 그래서 “내가 많은 사랑을 받고 있구나.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 주는구나.”라고 하는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내가 내 마음을 닫아버리고, 사랑을 베풀지 않고 인색하게 굴면서, 그래서 나 혼자 외톨이로 살게 되면, 결국 외로워질 수밖에 없고, 괴로워질 수밖에 없는 그런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죠.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베푼 사랑의 혜택을 내가 많이 받게 되는 것이고,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누군가를 증오하면, 그 사람을 증오하게 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내가 외톨이가 되고 내가 힘들고 내가 고통을 당하게 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어쩌면 우리 인간관계의 기본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선물을 주고 사랑을 베푼다고 하는 것은 결국 내가 더 많은 사랑을 받게 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줄 때 다시 돌려받는다고 하는 것, 그것은 선물이든지 뇌물이든지 다 똑같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무엇이 뇌물일까요? 무엇을 뇌물이라고,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 되는 지점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사랑이 없이 베푸는 선물일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저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래서 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선물이 되겠지만, 그러나 좋아하는 마음이 없어요.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요. 애정하는 마음이 하나도 없으면서, 단순히 내가 이것을 주면 저 사람이 나에게 어떤 반대급부를 줄 거라고 아는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사랑이 없이 주는 선물은 그것은 액수가 크든 작든 뇌물이 될 가능성이 많은 것이죠.

사람들이 판사에게 뇌물을 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어떤 권력자에게 뇌물을 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하고 좋아하기 때문인가요? 그게 아니에요. 미워하면서도 싫어하면서도 억지로 주는 겁니다. 왜 줍니까? 왜냐하면 내가 이 뇌물을 준다고 한다면 지금 무엇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판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그 사람으로부터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하는 기대감 때문에 판사에게 뇌물을 주는 것이죠.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뇌물을 바치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이러한 일들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자주 흔하게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종종 깜짝깜짝 놀라는 것은 판사 출신의 어떤 사람들의 자산이 수십억 수백억이라고 하는 뉴스를 들을 때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돼요. 판사나 이런 사람들도 다 공무원과 같이 월급을 받는 사람들일 텐데, 어떻게 저렇게 많은 재산을 모았을까? 도대체 그 재산이 어디서부터 형성될 것인가 된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은 것이죠. 무엇이 뇌물인가?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좋아하는 마음이 없이 무엇인가를 얻기 위한 그 일종의 수단으로 주는 것이 뇌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오늘 잠언서 17장 8절 말씀을 우리가 읽었는데요. 다시 한번 잠언서 17장 8절 말씀을 보면 “뇌물은 그 임자가 보기에 보석 같은 즉, 그가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하게 하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뇌물을 주면 결국에는 형통하게 되니까, 형통하기를 원한다고 하면 뇌물을 주라는 얘기인가요? 주지 말라고 하는 얘기인가요? 잠언서 17장 8절의 말씀이 어떤 의미인가요? 오늘 17장 8절의 말씀은 “이 뇌물이, 그것이 움직일 때마다, 우리를 형통하게 만든다”라고 표현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뇌물이 형통하게 만드는 것이니까, 우리가 형통함을 원한다고 하면, 뇌물이라도 써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일까요?

먼저 이 말씀을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겠습니다. 첫 번째는 이 뇌물이라고 번역한 이 단어가 사실은 뇌물로 번역하지 않고 선물로 번역할 수 있다고 하는 점을 생각하셔야 됩니다. 제가 맨 처음에 히브리어 이 단어가 선물로 번역할 수도 있고, 뇌물로 번역할 수도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이 잠언서 17장 8절의 말씀은 뇌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선물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선물은 그 임자(주인)가 보기에 보석 같은 즉 그가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하게 하느니라. 어떤 사람 보니까요. 모든 것들이 술술 잘 풀려요. 인간관계가 잘 돼요.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모든 것을 잘해 나가십니까? 그랬더니 평상시에 많이 선물을 했대요. 그냥 껌 하나 있으면 나눠 먹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거 있으면 또 주고, 늘 이렇게, 아파트에서 관리하시는 분이든지 아니면, 주차장에서 주차 관리하시는 분이든지, 자기가 회사에 나가면서 회사에서 일하는 그 청소부든지, 누구든지 만나는 사람들마다, 늘 가진 거 있으면 나눠주고, “안녕하세요? 수고하십니다.” 하면서, 또 나눠주고 또 나눠주고, 자꾸 커피 한 잔 더 쏘고, 우리 교회에도 그런 사람이 있죠? 자꾸 사기도 하고, 막 선물도 주고 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보니까, 누군가 그 사람이 어떤 필요할 때 있어서 이야기를 하면, 다 도와주려고 하고, 다 협력해 주려고 하고, 일이 술술술술 잘 풀리고 있는 그런 모습을 볼 텐데, 만일 이 잠언서 17장 8절의 말씀이 뇌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선물에 대한 이야기라고 한다면, 그러니까 우리가 정말 그러한 것은 본받아야 해야 될까요? 본받지 말아야 될까요? 본받아야 되는 것이죠! 커피도 사고 또 과자라도 하나씩 주고, 꽃이라도 하나씩 주고, 그러면서 평상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흘려보내며 사는 삶,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며 사는 삶,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면서 사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이 결국 형통의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대부분 뇌물로 번역하는 성경이 많습니다. 뇌물로 번역했다고 한다면, 뇌물도 어차피 그러니까 형통하게 만든다고 하니까, 뇌물도 줘도 된다는 말인가요? 주지 말아야 된다는 얘기인가요? 약간 애매하게 되어 있습니다마는 영어 성경인 NIV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뇌물을 주는 자는 뇌물이 아주 매력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전해지는 곳마다 성공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NIV 성경에서는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말씀은 뇌물이 형통하게 만든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NIV 성경의 해석에 의하면, 뇌물을 주는 사람은 어떤 생각으로 뇌물을 주느냐? 내가 뇌물을 주면 이 뇌물이 가는 곳곳마다 형통하게 만들어줄 테니까, “그래서 내가 뇌물을 주게 줘야지.”라고 하는 생각을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로 NIV 성경은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물론 이 NIV 성경의 번역은 직역이 아니라 의역입니다. 성경 히브리어 원문에 그런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말씀을 우리가 좀 더 잘 이해하도록 쉽게 이해하도록, 번역자가 좀 생각을 넣어서 의역을 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NIV 식으로 우리가 이해를 한다면, 이 구절은 뇌물을 주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되는 것이고, 개혁 개정판 성경대로 우리가 번역을 한다고 하면 이것은 뇌물이 가져다주는 “결과”에 대한 구절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아무튼 잠언서 17장 8절은 그러니까 뇌물을 줘야 한다는 얘기입니까? 주지 말아야 된다는 이야기입니까? 아무 얘기가 없어요! 잠언서 17장 8절은 그냥 뇌물을 주면 이런 결과가 생길 수 있다. 이런 결과가 생길 수 있다고 하는 것만을 말, 그냥 기술하고 있는 의 표현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뇌물에 대한 성경적인 교훈은 이 잠언서 17장 8절이 아니라, 성경 다른 곳에 있는 말씀들을 우리가 다 찾아보면서 뇌물에 대한 교훈을 얻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어떤 교훈들이 있습니까? 잠언서 17장 23절 말씀에 보면 “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 그러니까 뇌물을 받는 사람이 의인이라는 얘기입니까? 악인이라는 얘기입니까? 악인이라는 얘기예요! 그러니까 뇌물 받으라는 얘기예요? 받지 말라는 얘기예요? 받지 말라는 얘기예요. 받지 말라는 이야기는 주지도 말라는 이야기죠. 출애굽기 23장 8절 말씀에서는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굳게 하느니라.”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욥기 15장 34절 말씀에서도 “경건하지 못한 무리는 자식을 낳지 못할 것이며, 뇌물을 받는 자의 장막은” 어떻게 될 것이다? “불탈 것이라.” 뇌물을 받으면 부자가 될 수 있고, 뇌물을 받으면 내가 더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받겠지만, “결국은 패망의 길이다”라고 하는 것이 욥기 15장 34절의 말씀입니다. 이 욥기 15장 34절의 말씀은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한 말인데요. 데만 사람 엘리바스는 좋은 사람이에요? 나쁜 사람이에요? 나쁜 사람입니다. 욥기서 내에서 욥을 힘들게 하고 정말 그 욥에게 상처를 주었던 그 사람이지만, 그러나 그가 했던 모든 말들이 다 나쁜 말이 아니라, 그 말속에는 진리가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욥기 15장 34절의 말씀도 우리가 뇌물에 대한 교훈으로 잘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뇌물을 주는 것도 나쁜 것이고, 뇌물을 받는 것도 나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뇌물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고 형통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유혹을 받기 쉽지만, 그렇게 뇌물을 주면서 살 것이 아니라, 경건하게 의롭게 진실하게 살아가는 게,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될 바른 자세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선물 같은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된다고 그랬어요? 많이 줘야 된다 그랬습니다. 사랑을 베푸는 것이 좋은 것이죠. 하지만 뇌물은 그렇게 주거나 받거나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죠.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릴 때 어떤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 하나님께 뇌물을 드리는 마음으로 드리는, 그런 분들이 종종 계십니다. 하나님에게 내가 이만큼 드려서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고 내가 지금 잘못하고 있지만, 뇌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뭔가 은총을 받으려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께 그렇게 뇌물을 드리는 사람들이 있을 수가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하나님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것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축복해 주시겠지. 혹은 내가 이런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시지 않으시겠지.”라고 하는, 그런 뇌물을 드리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드린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소용이 없는 것이죠. 신명기 10장 17절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무엇을 받지 아니하시고,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하나님 앞에 뇌물 받쳐봤자 소용이 있어요? 없어요? 없다 이 말이에요. 왜? 하나님은 뇌물이 필요하지 않은 하나님이고, 뇌물을 받지 않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를 드린다고 한다면, 어떤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까?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너무나도 감격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가 고마워서 예물을 드리든지 헌신하든지, 우리의 어떤 것을 주님 앞에 드리든지, 감사와 찬송이 드리는 동기가 되어야 되지, 그게 아니라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어내기 위한, 그런 뇌물의 개념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게 아니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겁니다. 마치 무엇과 같으냐면, 우리가 부모님을 대하는 것과 같아요. 우리 부모님이 부자예요. 그래서 연로하신 부모님에게 찾아가서 문안도 드리고 또 맛있는 것도 해드리고, 우리 부모님에게 가서 막 하는데, 그 마음이 우리 아버지가 나한테 유산을 물려줘야 될 텐데, 자주 찾아가서 자주 모시면, 나한테 유산을 줄까 하는 그런 마음으로 간다고 하면, 그게 너무나도 아쉬운 것이죠. 우리가 부모님에게 잘해야 된다고 한다면, 왜 잘해야 돼요? 부모님이 우리를 위해서 엄청난 사랑을 베풀어 주셨고, 희생을 해가면서, 나를 정말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해 주신 그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가 너무나도 고마워서, 그래서 부모님이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부모님이 나에게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부모를 영원히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 그게 자녀로서의 마땅한 자세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고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어내기 위한, 내가 이만큼을 바쳐서 이만큼 얻어내겠다고 하는 계산적이고 산술적이고, 그래서 뇌물을 들여서 많은 것을 얻어내겠다고 하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우리를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놀라운 사랑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감사의 마음으로 예배도 드리고, 감사의 마음으로 헌신도 하고, 예물도 드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으로 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사야서 1장 11절에서부터 13절 말씀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고, 안식일을 지키고, 대속죄절을 지키고, 유월절을 지키고, 그렇게 엄청난 헌신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면서, “너무나도 고맙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누가 나한테 재물 가져오라고 했냐? 누가 나한테 예배드리라고 했냐? 누가 나한테 이런 절기를 지키라고 했느냐?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주님께서 거절하시는 말씀이 이 이사야서의 말씀 가운데 있는 것인데요.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간다고 한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이시구나,” 나를 구원해 주신 그 놀라운 은혜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함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상한 심정이고 회개하며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에게 뇌물을 주는 것은 사실 그 사람을 모독하는 행위일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어떤 뇌물을 준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인격적인 존재로 내가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수단으로 폄훼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 사람을 내가 인격체로 사랑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낮추어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뇌물을 준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을 모독하는 것이 되는 것이고, 또한 내가 뇌물을 받는다고 한다면, 내가 인격적으로 그 사람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수단이 되어버리는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고, 내가 돈의 노예가 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사실 내게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 될 수가 있는 것이죠. 따라서 오늘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뇌물로 우리의 어떤 목적을 이루고, 부를 얻고 형통하길 원하는 그런 마음이 아니라, 우리는 진실하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뇌물이 아니라 선물은 어떻게 해야 된다고요? 많이 주고 베풀고 사랑을 베풀면서, 하나님의 그 사랑을 베푸는 가운데 많은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기쁨이 넘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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