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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을 덮는 지혜 (잠 17:9-10)

오늘 읽은 잠언서 17장 9절 말씀에 보면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라고 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허물을 덮는 사람이 사랑을 구하는 자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사랑을 구한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사랑을 구한다? 사랑을 구한다고 하는 것은 사랑할 대상을 찾는다는 말일까요? 어떤 의미일까요? 이 말은 사랑을 추구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이겠습니다. “사랑을 추구한다. 사랑을 도모한다”라고 하는 말일 것이고, 반대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미워하는 사람, 혹은 애정이 없는 사람, 혹은 무심한 사람이 그런 반대말이 되겠습니다. “사랑을 추구하는 자, 추구하는 자다”라고 하는 그런 말인데요. 이 사랑을 구한다고 하는 말이 뒤에 있습니다마는, 앞에 주어처럼 생각하는 것이 훨씬 더 이해하기가 편할 겁니다.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이 누구냐?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은 바로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는 사람이다. 누가 사랑이 있는 사람인가? 누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가?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는 그런 사람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오늘 잠언서 17장 9절의 말씀이겠습니다.


우리가 정말 미워하거나, 아니면 참 매정한 그런 사람이 아니라, 정말 사랑이 많은, 그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선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행해야 되는가? 사람이 무슨 잘못을 할 때, 혹은 허물이 있을 때 실수를 할 때 그것을 덮어줄 수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게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실수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허물이 있습니다. 완벽하지 않은 게 사람인 것이죠. 이 가운데 허물이 아무것도 없이 완벽할 자신 있는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다. 모두가 다 실수하는 것이고, 의도적으로 실수하기도 하고, 또한 의도적이지 않게 실수하기도 하고, 많은 실수와 잘못을 하면서 우리는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누구나 다 하는 그 실수와 잘못들이 있을 경우에,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만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런 잘못을 했을 때, 허물이 있을 때, 그것을 덮어주어야 한다는 게 오늘 잠언서 17장 9절의 말씀입니다.


성경에 이런 가르침이 많이 등장하고 있는데요. 특별히 베드로전서 4장 8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사랑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인가? 허물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들추어내고, 자꾸만 그것을 힘들게 만들면서, 그거 가지고 이슈를 삼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고 한다면, 그런 허물들 잘못들을 덮어주어야 한다고 하는 게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 가운데 만일 어떤 잘못을 하거나, 죄를 저지르거나, 어떤 범죄한 일이 있다고 한다면, 그러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모른 척하는 것이 제일 좋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일까요? 누군가 잘못했다고 한다면 따지지도 말고, 그것을 처리하지도 않고, 사랑은 덮는 거라고 했으니까, 못 본 척하는 것이고, 그냥 덮어두는 것이고, 그냥 아무 문제 삼지 않는 것이 그것이 제일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성경 어느 한 구절만 읽을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죠. 오늘 읽은 잠언서 17장 9절의 말씀에서, 그리고 베드로전서 4장 8절의 말씀 가운데서, 우리가 사랑한다고 한다면, 사랑을 원한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허물이 있을 때 덮어주어야 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지만, 그러나 성경 다른 곳에서는 허물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냥 덮어두기만 할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다고 하는 점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특별히 갈라디아서 6장 1절 말씀에 보면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어떻게 하고?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만일 누군가 잘못이 있다고 한다면, 만일 누군가 실수한다고 한다면, 누가 범죄를 저지른다고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해야 되는가? 덮어두라고 했으니까, 문제 삼지 않고, 그냥 모른 척하고, 그냥 소문내지 않고, 그냥 덮어두기만 하면 그게 제일 좋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고, 갈라디아서 6장 1절 말씀에서는 신령한 너희는, 다시 말하자면 너희가 영적으로 바로 서 있길 원한다고 한다면, 너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고 한다면, 그렇게 죄를 범죄한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냥 덮어두면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로잡아라”라고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잡는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인가요? 바로 잡는다? “바로 잡는다”라고 하는 말은 온전하게 만든다는 이야기입니다. 수선한다는 말이에요. 고친다는 말이에요. 회복시킨다고 하는 말이 바로, 바로 잡는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이 단어가 어디에서도 사용되었었냐면,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이 이제는 더 이상 고기를 잡을 수가 없게 되고 빈털터리였을 때 해변가로 나와서 그물들을 깁는 그 모습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물을 그렇게 깁고 그물을 이렇게 수선하는 그 단어가 바로 “바로잡는다”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물을 던지다 보니까 그물이 찢어졌어요. 그물을 던지다 보니까 뭔가 그물이 망가졌어요. 더 이상 그물의 역할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면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시 잇고 온전하게 잘 만들어주어서, 그래서 다시 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수선해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로 잡는다고 하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사람이 망가졌어요 죄를 지었어요. 잘못을 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그냥 덮어두기만 하고, 잘못을 했어도 그냥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냥 내 팽개쳐두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서 6장 1절의 말씀은 신령한 너희는 그것을 어떻게 하라? “바로잡아라”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라고, 사랑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냥 못 본 척하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녀들이 뭔가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뭐가 잘못이 있다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자녀가 만일 잘못된 길로 간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냥 내버려 두죠? 내버려 두어서 더 나빠져 가지고 완전히 망할 수 있도록, 그냥 가만히 방치해 두겠습니까? 그게 아니잖아요? 우리 아이가 그냥 저렇게 잘못된 길로 계속 간다고 한다면, 결국 망해버릴 텐데, 그렇게 망하는 길로 가지 않아야 되겠다고 하는 그런 간절한 마음에, 그 아이를 바로잡고 싶은 게 우리 부모들의 마음일 겁니다. 그게 바로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일 것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냥 방치해 두고 놔두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란 무엇인가? 치료해 주고 바로잡고 건강하게 만들어서, 그래서 온전하게 회복시켜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죠. 만일 우리가 병이 들었다고 한다면, 치료해서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 당연한 것인 거와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들에게 영적인 질병이 있어서 열적인 잘못이 있어서, 그래서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면, 죄를 범하고 실수를 하고, 허물이 있고, 여러 가지 잘못된 모습들이 드러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을 영적으로 회복시키 회복시키고 바로잡아서 그래서 영적으로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게 사랑인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만일 누군가에게 허물이 있다고 한다면 범죄한 일이 드러난다고 한다면, 어떤 잘못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고 하면,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바로잡아서 그래서 영적으로 건강하게 만들어 주어야 할 그런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입니다.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가 왜 중요한가? 왜 주님께서 우리를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로 불러주셨는가? 공동체는 영적인 가정과 같아요. 그래서 우리 영적인 가족으로서 한 성도가 한 형제자매가 무엇인가 잘못된 길로 나아간다고 한다면, 그냥 방치해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잘 이끌어주어서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도록, 그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을 잘 인도해서 영적으로 바른 길을 가도록, 서로가 도와주어서 건강하게 만들어줄, 영적인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한국교회에서 자주만 발생하고 있는 안타까운 일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우리 한국교회 내에서 여러 가지 참 잘못되는 일들이 있고, 뭔가 문제가 심각한 일들이 있고, 정말 이래서는 안 된다라고 생각되는 그런 범죄의 문제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성도들이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는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해서,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그러니까 그냥 내버려 둬! 그냥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겠지. 하나님이 어떻게 알아서 할 거야. 우리는 그냥 신경 쓰지 말자. 그냥 아무런 말도 하지 말자. 쉬쉬거리면서 그냥 가만히 덮어두었다가, 결국 그 사람이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만들고, 그래서 결국 영원히 지옥불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지옥의 자식이 되도록 방치해 두고 있는 안타까운 현상들이 우리 한국교회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슬픈 일인 것이죠.


상처가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우리 의사 선생님들, 간호사 선생님들, 어떻게 해야 됩니까? 상처가 났다고 한다면 그냥 그것을 거적때기로 덮어둬 버리면, 건들지 말라고 해서 그냥 덮어버리면, 그 부위가 더 심각해지고 썩어버리고, 금방 나을 수 있는 것이 더 심각해져서, 결국에는 팔을 잘라야 되고, 팔을 잘라야 되는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최악의 상태로 가버리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되는가 상처가 있다고 한다면 그렇게 그냥 아무거나 덮어두어서 썩어버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반창고를 잘 붙여서 또 무엇도 붙여야 돼요? 뭐 또 발라줘야 돼요? 마데카솔! 후시딘! 참고로 제가 그 제약회사에서 돈을 받고 말씀하는 건 아닙니다. 아는 게 그거밖에 없어요. 그래서 그걸 발라가지고, 반창고를 붙여야, 그래야 새살이 돋고 그래야 내 몸이 건강해지고 그래서 온전하게 되는 것인데,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다 덮어준다고 하는 얘기는 덮어서 썩어버려서 망가지게 만들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니라, 반창고를 붙이듯이 잘 치료해서, 그래서 온전하게 만들어 주어야 된다고 하는 그 말씀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하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러한 일들을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정말 허물을 덮어준다고 하는 것이 그냥 썩어 문드러지고 완전히 망해져 가도록 방치해 두게 되는 그런 경향이 많이 있는 것이고, 정반대로 썩어가지 않게 만들어야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바로잡아야 되겠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그 사람을 정말 파멸로 이끌게 만들고, 오히려 그 일로 인해서 영적인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더 영적으로 더 이상 회복 불능의 상태로 짓밟아버리게 되는 그런 양극단의 모습을 우리가 항상 보여준다고 하는 게 그게 우리의 참 어리석은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절 말씀에서는 어떻게 우리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6장 1절 말씀 다시 한번 보면요.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어떻게?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신령한 너희는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만 읽으면 안 돼요. 그 앞에 뭐가 들어가 있어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바로잡으라고 했으니까, 바로잡아야 되겠다. “너, 이리 와” 해 가지고 박살 내버리고, 깨뜨려버리고, 회복 불능의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게 아니라, 신령한 너희는 어떠한 심령으로?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아야 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잘못한 사람을 향한 분노가 솟아오르고,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화가 치미로 솟아오른다고 한다면, 그렇다고 한다면 그 타이밍은 우리가 바로 잡으려고 시도해서는 안 되는 타이밍입니다. 우리 부모님이 우리 자녀들이 하는 그 모습을 보고 아이들이 어질러 놓고 말을 듣지 않고 내가 일러주고 또 경고하고 또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도 듣지 않고 그래서 사고를 친 그 아이를 보면서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고 한다면, 그때는 그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는 상태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바로잡으려고 시도할 게 아닌 거죠. 우리가 바로잡기 위해서는 그 전 단계가 무엇인가 온유한 심령을 먼저 확보해야 돼요. 온유한 심령을! 지금 내 마음 가운데 내 분노가 솟아오르고 화가 나 있다고 한다면, 그러면 그 분노 가운데 그 사람을 바로잡으려고 하는 그 모든 노력들이 엉망이 돼버려요. 사람이 분노하는 것이, 사람이 화를 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분노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분노는 무엇입니까? 분노는 사탄이 우리를 장악하는 가장 손쉬운 열쇠이기 때문이고, 우리가 분노하는 순간 우리의 마음의 열쇠를 사탄에게 내어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에베소서 4장 26절에서부터 27절 말씀에 보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분노하면, 분노하면, 마귀가 우리의 마음을 장악하기 위해서 아주 손쉽게 들어올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마귀에게 우리의 마음을 내어주면, 결국 분노로 접근하게 되면, 우리가 그 잘못한 사람을 바로잡을 수 있는가? 바로잡지를 못해요. 온유한 심정만이 사람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지, 분노한 마음으로 어떤 사람을 바로잡을 수가 없는 겁니다.

만일 우리가 분노로 접근하게 된다면, 왜 그 잘못한 사람을 바로잡을 수가 없는가? 첫 번째는 그 사람이 우리가 분노하는 것을 보고, 우리가 분노하는 그것을 피하기 위하여 무엇인가 어떤 조치를 취할 수는 있어도, 그의 마음 가운데 진정한 회개가 생기지는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엄마 아빠가 화를 내면, 화내고 있는 엄마 아빠의 그 폭풍우가 쏟아지는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그 잔머리가 돌아가는 것이지, “정말 내가 잘못했구나, 정말 내가 이러면 안 되겠구나”라고 하는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죠. 화가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바꿀 수 있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정말 우리가 그 사람을 온전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야 하고, 그리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속에서 생겨야 되고, 그래서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애통해하면서,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그런 간절한 열망이 마음속에서부터 나와야만, 그 사람이 변화가 될 수 있는 겁니다.

다윗이 범죄한 이후에 하나님 앞에 엎드린 것과 마찬가지로,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속에서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될 때, 그때서야 바로잡아질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이 아니고 분노하면서 진노하고 그 사람을 향해서 비난을 해대게 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그 순간에 제일 목표가 무엇이냐면, 그 비난받고 화내고 있는 그 사람 앞에서 자신이 숨는 것, 자신이 어쩌면 그 상황을 빨리 모면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급선무이기 때문에, 때로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어떠한 잘못된 다른 방법들을 통해서, 그 위기를 모면하려고 하는 것이지, 결코 온전한 사람으로 바뀔 수 없기 때문에 분노는 결코 어떤 사람을 온전하게 만들 방법이 없는 겁니다.


두 번째로 왜 우리는 분노로서 사람을 바로잡을 수 없겠는가? 그것은 우리가 분노하게 되는 순간 우리도 역시 죄악을 저지르게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우리는 분노하게 되면 특별히 앞에 있는 사람이 잘못했고 내가 옳다고 하는 것이 인정되기 시작하면, 그때서부터는 내가 하는 모든 행동들이 다 정당한 줄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갑질하는 겁니다. 식당에 가서 백화점에 가서 내가 정의롭고 저 사람이 잘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사람 앞에서 갑질을 해대는 거예요. 그런데 그 갑질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지를 못해요. 그 상황에서는 분노한 상통에서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우리 아이들을 때려죽이기까지 하는 겁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폭력도 정당화되는 겁니다. 이것은 악을 징벌하기 위한 것이고, 내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면 도둑질도 정당화되는 것이죠. 저 탐욕적인 사람들에게 내가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훔쳐서 정의를 갚는다 그런 정당화를 하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분노로 접근하는 것은 결코 그 사람을 회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화가 난다면, 그때는 잠시 쉬어야 되는 거예요. 잠시 시간을 가지고, 내 마음이 온유하게 될 때까지 시간을 두었다가, 온유한 심정으로 이 사람을 바로잡을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해야 되는 거죠. 어떤 이야기를 듣고 화가 나서 어떤 상황을 접하고서 화가 났을 때, 그때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100% 잘못된 결과, 100% 죄로 향하는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온유한 심정으로 사람들을 바로잡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빌립보서 2장 1절에서부터 4절 말씀 가운데서도 우리가 어떻게 권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재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형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권고해야 될 대상이 있다고 한다면, 어떤 사람들에게 충고해 줘야 될 일이 있다고 한다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겸손한 마음으로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고, 정말 내가 똑같은 연약한 자라고 하는 사실을 돌아보면서 권면해야 되는 것이죠. 베드로전서 4장 8절 말씀 가운데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만일 누군가 잘못을 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런 똑같은 잘못을 나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 생각을 하면서, 겸손하게 지금 저 사람이 잘못을 했지만, 저 잘못한 사람은 나쁜 사람이고, 저 잘못을 한 사람은 뭔가 수준이 낮은 사람이고, 나는 아직 그 잘못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그 사람을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똑같은 상황이 발생한다고 한다면, 나도 저 사람과 같은 상황에 똑같이 처한다면 나도 똑같이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바로잡아주는 일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 읽은 잠언서 17장 9절 말씀 가운데에서 바로 잡는다고 하는 거, 허물을 덮어준다고 하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다시 한번 잠언서 17장 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계속 이 구절을 띄워줬으면 좋겠는데요.) 사랑하는 사람은 허물을 덮어준다고 했는데,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을 구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는 사람이 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그러면 그냥 무턱대고 덮어놓는 것이 정상이 아니라, 바로잡아야 된다고 했는데, 그러면 잠언서 17장 9절에서 허물을 덮어준다고 하는 말 이 말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허물을 덮어준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허물을 덮어주는 겁니까? 어떻게 하면 그냥 방치해 두지 않는 것이면서, 모른 척하지 않으면서, 허물을 덮어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잠언서를 우리가 살펴보면서 우리가 여러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잠언서의 표현들은 항상 “히브리 평행법”으로 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에 확인해 본다면,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관하는 자니라”라고 하는 두 절이 서로 병행되어 있는 것을 보면, 허물을 덮어준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거듭거듭 말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게 허물을 덮어주는 사람과 허물을 덮어주지 않고 계속해서 또 말하고 또 말하고 또 말하는 사람을 대비시켜주고 있는 것, 이게 히브리 평행법적으로 보면, 지금 이 두 사상이 서로 비슷하거나 혹은 반대되거나 같이 연관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아마 눈치챘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그러니까 여기서 허물을 덮어준다고 하는 이야기는 “모른 척해라” “그냥 잘못을 해도 그냥 신경 쓰지 말고 있어라”가 아니라, 저렇게 자꾸만 말하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을 이간질시키고 허물을 자꾸 들추어내고 하는 그런 반복적으로 막 거듭말하면 안 된다는 그런 의미로 허물을 덮는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치워줘도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사람이 잘못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을 그냥 방치해버리거나 모른 척 해도 괜찮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계속해서 우리가 바로잡아주고, 온전하게 세워지도록 온유한 심령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야 되겠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 잘못에 대해서 자꾸만 떠벌리고 사람들에게 소문을 전하고 말을 하고 또 말을 해서, 그래서 그 사람을 사회적으로 매장시켜 버리거나, 혹은 그 사람이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도록 우리 공동체에서도 완전히 쫓아내기 위한 행동들을 할 게 아니라고 하는 그런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 자꾸만 이야기한다면 그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걸까요? 아니죠.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자꾸만 말을 하는 겁니다. 그 사람을 매장하기 위해서 자꾸만 말을 하는 것이죠. 허물을 덮는다고 하는 말은 잘못을 해도 그냥 내버려 둔다고 하는 의미가 아니고, 바로잡는 것이지만 그 잘못을 바로잡을 때 자꾸만 떠벌려서 그 사람을 매장시킬 게 아니라고 하는 것이죠. 우리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목표는 잘못한 사람들을 우리 공동체로부터 쫓아내는 게 우리의 목표가 아니에요. 그렇게 쫓아낸다고 한다면 아무도 이 공동체 안에 남아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잘못한 사람 쫓아내고 또 잘못한 사람 쫓아내고 자꾸만 선명성 경쟁을 하면서, 의로운 사람만 남아 있고 무엇인가 조금이라도 흠이 있고 약점이 있는 사람들은 다 쫓아내기 시작하면, 결국 이곳에는 아무도 남아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잘못한 사람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을 좋은 사람으로 변화시켜 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사람으로 믿음이 살아있는 사람으로 온전한 사람으로 멀어 변화시키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항상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과연 이 일은 이 사람을 회복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인가? 아니면 이 일은 무너뜨리는 데 도움이 되는 말인가? 우리가 무엇인가 행동하고 무엇인가 말을 한다면, 그 말을 하기 전에 우리의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두어서 우리의 입술에 감리사를 두어서 과연 이 말이 이 사람을 회복시킬 수 있는 말인가? 아니면 이 사람을 완전히 무너뜨리려고 하는 말인가? 질문을 던져보고, 이것이 무너뜨리는 말이 아니라 사랑하는 말 회복시키는 말이라고 하는 것이 확실할 때, 또 한 번 또 점검을 하면서 신중하게 우리의 의도가 선하지만 때로는 결과적으로 잘못된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신중하게 이야기를 하고 행동을 해야 되는 것이죠. 우리가 던져야 될 질문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아는 것은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행동인가?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말인가? 아니면 내가 미워하는 마음 가운데 분노하는 마음 가운데 나오는 행동이고 말인가?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우리가 가져야 될 목표는 성숙한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바로 우리들을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주셨습니다. 사실 우리들이 죄로 인하여 영원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주셨습니다. 우리가 잘못했다고 “이 더러운 놈, 이 나쁜 놈” 하면서 쫓아내 버리시고, 그냥 내 팽개쳐버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드려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 모두가 받았기에, 우리 주변에 있는 범죄한 사람들, 허물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때 그 사람들을 회복시킬 수 있는 일에 우리 모두가 함께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서 17장 10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마디 말로 총명한 자에게 충고하는 것이 매 백대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히느니라.” 맞는 말이죠. 어리석은 사람은 매를 맺고 맞고도 깨닫지 못합니다. 매를 때리고 때리고 또 때려도 어리석은 사람은 그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행동이 바뀌지 않는 것이죠. 여기서 매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기서 매는 물리적으로 회초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당하는 그 모든 어려움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드는 채찍 고통이 바로 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건데요. 안타까운 것은 어리석은 사람은 어떤 것인가? 자꾸만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어려운 일을 잘못된 선택을 통해서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그런 매를 맞아놓고도 어리석은 사람은 똑같은 잘못을 또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렇게 잘못된 선택을 해서 낭패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잘못을 또 하는 것이죠. 이게 어리석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말을 함부로 해서 큰코다친 적이 있는 사람이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말을 계속 잘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말을 배워야 되는데 그렇게 배우지 못해요. 삶을 살면서 허랑방탕하게 살고 절약을 할 줄 모르고 도박을 하기도 하고, 규모 없는 삶을 살면서 그래서 재정적으로 어렵게 되고 유흥가를 돌아다니면서 그래서 우리 가정을 아주 힘들게 만들기도 하고 또한 정말 허랑방탕하게 막 써버려서 그래서 우리 가정이 너무나도 힘든 그런 어려운 일들을 겪기도 했고, 도박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것들을 다 날려버리기도 하고, 늘 빚질 수밖에 없고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그 도박에 목숨을 걸면서 그래서 낭패를 봤다고 한다면 이제는 깨닫고 이제는 그런 일을 더 이상 하지 않아야 되잖아요? 술에 취해서 그래서 어려운 일을 겪었다고 한다면 끊어야죠. 우리가 잘못을 해서 정말 힘든 결과를 가져왔다고 한다면 이제는 배워야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어리석어서 매를 여러 번 맞고 수백 대를 맞아도 깨닫지 못하는 게 우리 인생의 어리석음일 것입니다.


그런 인생 어리석은 사람들이 누구였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들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해 주시는 겁니다. 이사야서 1장 2절에서부터 10절 말씀에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너희의 땅은 황폐하였고 너희의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의 토지는 너희 목전에서 이방인에게 삼켜졌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폐하였고,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 참외밭의 원두막 같이, 에워 싸인 성읍 같이 겨우 남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자꾸 매를 맞고 그것도 깨닫지 못해서 또 죄악을 저지르면서 그렇게 정말 고통스러운 삶을 살지 말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 이사야서의 말씀인데요.

근데 그 이스라엘 민족만 그런 어리석은 게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어리석어요. 우리가 또 잘못하고 또 잘못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매를 맞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이 잠언서 17장 10절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권고하고 있습니까? 그러니까 어떡하란 말이에요? 한마디 말을 할 때, 잘 깨달아 들어라. 그런 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늘 묵상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일독했다고 하는 것이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한 구절을 읽어도 그 말씀이 우리를 향해서 들려주시는 그 말씀을 한 번 말씀할 때 듣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사랑으로 들려주시는 그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이 우리에게 복된 길이라고 하는 지혜로운 한마디 말씀을 듣고 가슴속 깊이 박히는 그런 결론들이 우리들 가운데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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