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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필귀정 (잠 17:12-13)

오늘 잠언서의 두 절 말씀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구절이 잠언서 17장 12절의 말씀인데요.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 그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미련한 일을 행하는 그런 미련한 자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참 재앙에 가까운 일인가?”라고 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 말씀이 아닐까 싶습니다. 새끼를 빼앗겨 거칠게 공격하는 암곰을 만난다고 한다면, 그건 정말 무서운 일이겠죠. 그런 암곰, 새끼를 빼앗겨서 지금 화가 나 있는 거칠게 공격하는 암곰 앞에서 당해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훨씬 더 무서운 일이 무엇인가? 그런 가공할 만한 사건보다도 더 위험하고 더 재앙과 같은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와 만나는 것이 그것이 그만큼 큰 재앙과 같은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겠죠. 미련한 자를 만난다고 해서 정말 그렇게 재앙과 같은 일을 겪게 되는 그런 일이 항상 그럴 것은 아니겠지만, 심각한 경우에는 정말 이 미련한 자와 함께하는 것이 정말 엄청난 재앙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생생하게 극단적으로 자극적으로 표현한 말씀이 오늘 잠언서 17장 12절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되나요? 미련한 자를 안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죠? 어떻게 하면 미련한 자를 안 만날 수 있겠습니까?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않아야 되겠는데, 그런데 그게 가능한 일일까요? 가능할까요? 미련한 자를 만나지 않고 사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가? 질문을 던진다면 그것이 가능하지가 않다고 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가족 가운데 미련한 자가 있거나, 우리 공동체 안에 우리 교회 안에 미련한 자가 있거나, 아니면 내가 다니고 있는 직장에 미련한 자가 있을 경우에, 그런 사람과 안 만나려야 안 만날 방법이 없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는 정말 좋고 정말 만나면 기쁘고 만나면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그런 좋은 사람들과만 어울려 살 수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정말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 정말 지혜로운 사람들과 그런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 수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가운데서 그게 가능하냐 하면, 가능하지가 않아요. 왜냐하면 우리가 속한 그 공동체라고 하는 것이, 내가 속한 그 집단이라고 하는 곳에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별별 사람을 만나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좀 정신이 이상한 사람을 만나게 되기도 하고, 때로는 이기적인 사람을 만나게 되기도 하고, 미련한 사람을 만나게 되기도 하고, 정말 다양한 엄청나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피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것을 미련한 자를 만나게 된다고 한다면, 차라리 암곰을 만나는 게 더 안전할 거라고 하는, 차라리 그게 더 낫다고 하는 이 말씀을 보면서, 미련한 자를 안 만났으면 좋겠는데 “안 만날 재간이 없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 가족 안에 있을 수 있고, 우리 교회 안에, 또 우리가 속한 공동체 안에, 언제든지 그런 사람들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라고 하는 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차피 미련한 자를 만날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그러면 그 어리석은 자의 어리석은 행동을 따라가서는 안 되는 것이죠. 우리는 항상 분별을 해야 되는 겁니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사람들이 말하는 것들을 들으면서, 과연 이것이 지혜로운 말인가? 아니면 어리석은 말인가? 과연 이 말을 따르는 것이 지혜로운 일인가? 좋은 일인가? 미련한 일이고 악한 일인가를 우리가 분별해야 하는 것이고요. 그렇게 분별해서 만일 이것이 지혜로운 일이라고 한다면, 그 지혜로운 것을 따라가고 함께 함으로써 유익을 얻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어떤 사람이 미련한 말을 하고 미련한 일들을 행하도록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면, 그것을 분별해서 거절하고 그러한 미련한 일에 협력하고 동행하지 않는 그런 결단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련한 자를 만나는 것은, 만나는 것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겠지만, 그러나 그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는 그 말을 듣고서 이것이 과연 지혜로운 것인가 미련한 것인가를 따져서, 우리가 지혜로운 것인가 미련한 것을 따져서, 미련한 일이라고 한다면, 그러나 미련한 자의 말에 같이 동조하고 따라 하다가 같이 망하게 되는 그런 어리석음을 피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시편 1편 1절에서 2절 말씀에 보면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누가 복이 있는가? 누가 복 있는가 하면은, 악한 사람 나쁜 사람들을 다 쫓아내 버리고, 우리끼리의 수도원을 만들어서 정말 거룩한 사람들만 모여 사는 그런 게토와 같은 공동체를 만들어서,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이 복되다고 말하지 않고, 우리는 그렇게 할 방법이 없어요. 사실 우리는 우리의 이상으로는 수도원에 들어가고, 아니면 어떤 기도원에 들어가고, 어떠한 우리들만의 신령한 공동체를 만들면, 그 안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 좋은 사람들만 모일 것이라고 그렇게 착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지만, 그렇게 해서 좋은 사람들만 모일 가능성 성 자체가 없는 겁니다. 불가능한 겁니다. 우리는 어차피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에 항상 악한 자를 바로 내 옆에서 만나게 될 것이고, 정말 어리석은 사람을 바로 내 눈앞에서 보게 될 것이고, 수많은 종류의 사람들 우리 앞에 놓여지게 될 텐데,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런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악인의 꾀에, 꾀를 듣게 된다고 한다면 그 꾀를 따라가면서, 그 일에 동참하는 그런 어리석은 일을 행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리에 동참하지 않는 것,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는 것, 악한 자의 길에 따르지 않는 것, 내 발걸음을 금하여 그들과 함께하지 않는 것이 복된 것이고, 그럼 어떻게 우리가 해야 되는가? 악인의 길에 따르지, 서지 않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게 복된 것이라고 성경 말씀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 본문에 아주 생생한 예를 한 명 들자고 한다면, 바로 르호보암 왕을 들 수가 있겠습니다. 르호보암은 솔로몬의 아들로서 솔로몬을 이어서 이스라엘의 네 번째 왕으로 등극한 사람이 르호보암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을 때 백성들이 나와서 그 왕에게 간청하는 겁니다. “왕이시여, 이제 왕으로서 유다 민족을 다스리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가 솔로몬 왕 시절에 겪었던 그런 어려움들을 왕께 아뢰니까, 왕께서는 솔로몬의 그런 정책들을 그대로 따라 하지 마시고, 솔로몬이 우리를 향해서 많은 짐을 부과하고 노역을 시키고 그래서 정말 힘들게 힘들게 백성들을 그렇게 다스렸던 그런 일이 있는데, 왕께서는 우리들에게 그렇게 하지 말고 저희들의 짐을 좀 가볍게 해 달라.” 한마디로 말하면 세금도 좀 줄여주고 의무적으로 봉사해야만 하는 그런 노역도 좀 줄여주시고, 그래서 백성들을 위해서 어떤 목표가 그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성을 만들고 성전을 만들고 어떤 업적을 남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왕의 제일 된 목적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백성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 백성들에게 초점을 맞추며,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펴달라고 백성들이 왕에게 간청하게 된 것이죠.


그때 이 르호보암 왕은 두 종류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한 종류의 사람들은 바로 노인들이었고 아버지 때부터 섬겼던 그런 신하들이 그 솔로몬 왕에게 솔로몬을 섬겼던 그 신하들이 와서 르호보암 왕에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왕이시여, 백성들의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의 무거운 짐을 좀 줄여주시고, 왕께서 백성들을 섬기는 왕이 된다고 한다면, 백성들을 가장 최우선으로 하는 그런 정책을 펴신다고 한다면, 왕이 정말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지혜로운 조언을 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르호보암 왕은 누구의 말을 들었습니까? 어리석은 친구들의 말을 듣게 된 것이죠. 어리석은 그 친구들의 말은 무엇입니까? 지금 이 초장에 백성들을 잡아놓지 않으면, 백성들 다스리기가 힘들 거니까, 처음부터 강하게 나가라. 처음부터 강하게 나가서 백성들을 숨도 못 쉬게 만들어버려야, 꽉 잡아버리고, 억압을 해버려야 그래야 백성들이 왕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으니까 그 백성들을 강압적으로 다스리라고 하는 그런 친구들의 어리석은 조언을 들었던 것이 르호보암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어리석은 그 친구들의 말은 무엇이 되었습니까? 바로 재앙이 되고 망가지죠. 나라가 두 쪽으로 나뉘어지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10 지파가 여로보암을 따르는 그런 반역의 길로 가버리고, 오로지 유다 지파, 오로지 이 베냐민 지파 이 지파들만 겨우 이 르호보암을 따르게 되는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죠.


미련한 자가 말하고 있는 그런 미련한 생각은 놀랍게도 멋있어 보입니다. 미련한 자가 말하는 미련한 생각은 때로는 일리가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때로는 정의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사실은 미련한 생각이 미련해 보이면 좋겠는데 미련해 보이지 않고 멋있어 보인다는 거죠. 지혜로워 보인다는 겁니다. 마치 선악과와 같이, 선악과는 이걸 먹으면 죽는 것인데,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스럽고 탐스럽기도 한, 그 선악과와 마찬가지로, 미련한 자의 미련한 생각들이 미련해 보이면 좋겠는데, 미련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멋있어 보이고, 그 길을 따르면 좋아 보일 것 같고, 좋은 결과가 나타날 것 같고, 정말 멋있어 보이는 때로는 정의롭게도 느껴져서 그 미련한 지혜들을 들을 때에, 미련한 말들을 들을 때 사람들이 그것이 미련한 것인 줄 모르고 따라가다가 망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기도 제목이 무엇이 되어야 되겠습니까? “주님, 저희들에게 지혜를 허락하여 주셔서, 무엇이 지혜로운 길이며, 무엇이 어리석은 길인지, 무엇이 생명을 살리는 길인지, 무엇이 사람들을 죽이는 길인지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어떻게 우리 교회는 좋은 교회가 될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 교회는 정말 아름다운 교회, 행복한 교회, 정말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될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우리가 어리석은 사람의 말과 그렇지 않은 지혜로운 사람의 말을 구분할 수 있는 영적인 분별력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되는 것이죠. 교회 내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말을 합니다. 이런 말도 하고 저런 말도 하고 갖가지 이야기를 하는데, 놀랍게도 그 말들이 전부 지혜로워 보인다는 데 문제가 있어요. 언뜻 들으면 그게 맞는 것 같아요. 언뜻 들으면 그게 정의로운 것 같아요. 언뜻 들으면 그게 더 좋은 것 같아요. 그런데 알고 보면 그대로 행하면 망하게 되는 그런 어리석은 지혜들이 얼마나 많이 교회 내에서 이야기로 의견으로 제출되는지 모릅니다. 그럴 때 참 곤란해요. 저게 멋있어 보이는 말처럼 보이고, 정의로운 말처럼 보이고, 저게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고, 어리석은 말이 분명하고, 만일 저 말대로 했다가는 교회가 망해져 가고, 저렇게 했다가는 교회가 교회다워지지 못하고, 정말 교회가 정말 아름다운 교회, 사랑스러운 교회, 복된 교회로 만들어가는 내 장애가 되는 그런 이야기들인데, 그런데 언뜻 들으면 정말 멋있어 보여요. 언뜻 들으면 그게 정말 좋아 보여요. 언뜻 들으면 그게 바람직해 보여요.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저것이 아닌데, 저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이야기해 줄까? 어떻게 설득시킬 수 있을까? 굉장히 고민될 때가 있습니다.

어디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마치 바둑을 두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바둑이라고 하는 경기는 그런 놀이는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흑돌과 백돌을 서로 번갈아 두어 가면서 상대방의 돌을 따먹으면서, 그래서 결과적으로 맨 마지막에 자신의 영토가 가장 많이 차지하게 되는 사람이 이기는 게 바둑이라고 하는 그런 놀이인 것이죠. 그래서 어떻게 하면 내 집을 많이 만들어낼 수 있죠? 상대방의 돌을 둘러싸서 그 돌을 내가 먹으면, 그 돌을 먹으면 그만큼 내 땅이 넓어진단 말이에요. 내 집이 많아진다. 그러니까 초보들은 어떻게 합니까? 자꾸만 상대방의 돌을 먹으려고 한대요. 상대방의 돌을 먹으려고 그런데 고수는 어떻게 하는가? 고수는 내 돌을 상대방에게 먹히게 내어줍니다. 사석작전을 쓰는 거죠. 그래서 빼앗기는 것 같으나 결국에는 그 대마를 잡게 되는 그런 작전을 써서 결국 이기게 되는 것인데, 놀랍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수가 아니라 초보들이기 때문에 잡아먹어야 된다고 주장하는 주장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게 되고, 많은 사람들의 동조를 얻게 된다는 거죠. 빨리 아다리를 쳐서 그래서 빨리 이 돌을 먹어야 한다고 하는 그 말에 모든 초보자들이 박수 치면서 환영하는 거예요. “빨리 아다리를 쳐서 저걸 먹자.” “빨리 먹고 저 상대방의 돌을 우리가 더 많이 따내자.” “따내자”라고 하는 그 말에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면서 다 우르르 다 좋아하고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바둑판을 보고 있는 고수는 그걸 보면서 안타까워하는 겁니다. 저걸 먹으면 안 되는 것인데, 적을 먹으면 오히려 대마가 잡히는데, 저걸 먹으면 오히려 경기에서 지게 되는데, 그런데 초보들은 그 고수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해요. 지금 빨리 저 한 수를 먹어야 된다고, 빨리 따 먹어야 된다고 하는 그 말에 모든 사람들이 다 동조하게 되는 그런 경우가 우리에게서 얼마나 많이 발생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어리석은 자의 말에 말이 지혜로워 보여서 결국 그 지혜로운 사람의 말인 것처럼 보이는 그 말을 따라가려고 하다가, 결국에는 새 아기를 뺏긴 암곰을 만나는 것과 같은 그것보다 더 심한 재앙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에게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되는 것이고요. 지혜로운 판단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고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여러 가지를 말할 수가 있겠지만, 간단하게 2개만 말씀드리자고 한다면 첫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그것이 지혜로운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싸워서 이기고 승리하는 길을 가르치기보다는, 내어주고 양보하고 오히려 사랑으로 감싸는 그 길을 보여주어서, 마치 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길이 더 현명한 길이고 그 길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욕심에 따라서 행동할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날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늘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방법 두 번째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섣부르게 고정시키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정답을 너무 빨리 내려서는 안 돼요. 결론을 빨리 내려서는 안 되는 거예요. 어리석은 사람은 누군가? 한두 개의 빈약한 정보만을 가지고, 쉽게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사람은 누군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잘못되었을 수 있고, 잘못 판단되었을 수도 있다고 하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내 자신이 유연성을 가지는 자가 지혜로운 자인 것이죠.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는 우리의 머리보다도 더 크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를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오로지 진리의 일부분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부분만을 보고 있는 우리의 알량한 머리로서, 우리가 너무나도 쉽게 결론을 내려버리고 이것이 정답이다. 이것이 바른 길이다. 너무 쉽게 결론을 내려버리고, 그 외에 다른 말들에 대해서는 귀를 닫아버리면, 그건 어리석은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더 크고 더 넓은 세계가 놓여져 있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더 아름답고 더 멋있는 길이 저기에 있을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미리 결론을 내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심지어 우리 자녀들이 하는 말에도 귀를 기울이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고, 이 세상 우리를 비판하고 욕하고 있는 불신자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고, 내가 가지고 있는 입장으로서 이미 결론을 다 내어버린 채, 내 입장을 하나도 바꾸지 않겠다고 하는 옹고집을 부릴 것이 아니라, 내가 잘못 보았을 수도 있고, 내가 조금만 보았을 수도 있고, 내가 일부분만 볼 수도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 항상 진리에 우리의 마음을 열어놓고 그래서 자꾸만 내 자신을 유연하게 바꿀 수 있는 자세가 그게 지혜로운 자세일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 자신이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아야 되도록 노력을 해야 되겠고, 더 나아가서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어리석은 말에 너무나도 쉽게 따라가는 그런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지 않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절인 잠언서 17장 13절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악으로 선을 갚으면 악이 그 집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어떤 사람이 나에게 선을 베풀어 주었는데, 어떤 사람이 내게 은혜를 입혀주었는데, 그 내가 받은 은혜나 선에 대해서 악으로 갚아버리는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한다고 하면, 결국 그 사람에게는 악이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은 늘 그 사람의 집에는 늘 고통스러운 일, 악한 일들이 떠나지 않을 거라고 하는 것이 잠언서 17장 13절의 말씀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다른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선을 행하든 악을 행하든 어떤 식으로 반응을 하는 게 크리스천의 바른 자세죠. 선으로 감는 것이 크리스천의 바른 자세일 겁니다. 누가 나에게 선과 은혜로 대해주었다고 한다면, 그 이상의 선으로 갚아야 될 뿐만 아니라, 누군가 우리에게 악을 행했다고 할지라도, 나를 미워한다고 할지라도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을 향해서 선으로 갚아나가는 게, 그게 우리 성도들의 기본적인 삶의 방식이라고 하겠습니다.


로마서 12장 17절의 말씀을 보니까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가르쳐주고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악을 다른 사람한테 줄 게 아니라, 항상 어떤 무엇을 주어야 된다고요? 선으로! 늘 나에게 좋게 해주는 사람이든 나에게 나쁘게 해주는 사람이든, 늘 선으로 늘 사랑으로 늘 은혜로, 정말 사랑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무슨 어떤 사람이든지 악한 사람에게도 선을 행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들의 바른 자세일 겁니다. 왜 그렇게 해야 되죠? 왜 우리가 선을 선으로 갚아야 됩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선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죠. 우리가 비록 하나님과 원수 된 자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지 않고 악한 길로 갔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향해서 한없는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그 사랑을 받은 우리는 당연히 우리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이든 악을 행하는 사람이든 반드시 선으로 되갚는 것이 우리 성도의 바른 자세일 거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선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에게 선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악으로 갚아버린다고 한다면, 그것은 악한 일이 되는 것이고, 그렇게 악으로 갚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일들이 있을 것인가? 우리의 삶 가운데 늘 악이 떠나지 않을 것이다. 사필귀정이 되는 거죠. 우리가 선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갚는 것은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의 선한 의도를 이용하고 조롱하고 그리고 무시하고 짓밟아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그게 우리에게 손해가 아니라 악으로 갚으면, 우리가 악을 얻을 것이기 때문에 불행한 일이겠지만, 저들은 우리를 미워하나 우리가 선으로 사랑으로 대하는 것은 우리에게 손해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들에게 유익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선을 악으로 갚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나는 정말 선한 의도로 했는데, 오히려 그 선한 것을 악으로 갚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왜 그러겠습니까? 그것은 아마도 그 사람들의 이기적인 생각이기 때문인 것이죠. 또 선으로 행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선을 행해봤자 아무런 보상도 없을 거라고 하는 얄팍한 생각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선을 계속 행해야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미워한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조롱하고 악용한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비난한다고 할지라도 계속해서 선을 행해야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즉각적인 보상이 없다고 할지라도 즉각적인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선한 열매를 맺게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의 말씀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내가 이르매 거두리라.” 우리는 씨를 심으면 실패할 수 있어요. 농사지으면 농사에 실패할 수 있고, 장사하면 장사에 실패할 수 있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실패가 있는 것들이 많아요. 하지만 우리가 선을 행하면 그게 없어지는 게 아니고,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하나님께서 보증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 불확실한 시대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돼요. 어떤 하나님? 공의로운 하나님, 이 세상을 의로 다스리시는 하나님, 선을 행한 자에게는 선으로 갚으시고, 악을 행한 자에게는 악한 것으로 갚으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믿어야 하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시고 망가지고 흐트러지고 완전히 엉망진창인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바로잡으실 거라고 하는 그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선을 행하면서 인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낙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선을 행하면서 우리는 절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악을 행하고 우리의 것을 빼앗아가고 우리의 권리를 빼앗아간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그들에게 선을 베풀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행했던 이 모든 선이 그냥 흐지부지돼 버리고, 아무런 효과도 없이 사라질 거라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선 보고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우리의 믿음으로 우리의 행동으로 우리의 믿음이 드러나는 겁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선으로 갚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믿는 거 아니에요? 하나님 믿는다고 말은 하겠지만 하나님 믿지 못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지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기 때문에 내 손으로 악으로 갚아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거죠. 내가 정의를 실행해야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아니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셔요.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그 수고와 헌신과 사랑과 그 수고를 짓밟아버리지 아니하시고 귀하게 보시며 하나님께서 갚으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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