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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들으셨다 (시 118:5-13)

구약성경 시편의 말씀은 여러 종류의 시들이 있습니다. 같은 시편이라고 하지만 그 주제에 따라서 다양한 종류의 시편이 있겠는데요. 시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시가 있다고 한다면 “탄식의 시편”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울부짖는 시편이죠.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해서 울부짖는 그런 내용으로 된 시편이 시편 가운데서 가장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어쩌면 당연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정말 행복하고 멋진 천국과 같은 곳이라기보다는, 우리는 정말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어떤 곳인가? 비정상적인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죠.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왜 이 세상은 늘 악이 승리하는 것 같고, 왜 이 세상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떵떵거리면서 사는 것 같고, 불법과 그리고 탐욕에 찌든 사람들이 승승장구하는 것 같은 그런 세상인지, 참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것이죠. 우리가 이런 세상 가운데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이 살아갈 때, 고통스러운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고, 시편에 많은 내용들이 그런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울부짖는 겁니다.


하나님 왜 우리를 이런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 내버려 두십니까? 왜 우리를 방치해 두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모든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고, 그리고 정말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 주셔야 할 것 같은데, 의인들이 고통을 당하고 악인들이 떵떵거리면서 살고 있는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하고 어쩌면 최후의 보루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울부짖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탄식의 시편 가운데서는 무엇을 기도합니까?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 이 세상을 좀 보십시오. 하나님 이 세상을 좀 보시고 개입해 달라고 그렇게 간구하는 것이죠. 이렇게 악인이 판치고 있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지 마시고, 의인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모든 것을 바로잡아달라고 그렇게 울부짖는 시편이 바로 탄식의 시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시편 42편의 말씀을 살펴보게 된다고 한다면 3절 말씀 가운데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내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나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그런 세상이 아닙니까? 이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내가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모신다고 하는 그 사실을 드러내놓는 것이 쉽지 않은 이 세상 가운데서, 온 세상이 크리스천들을 향해서 비난하고 조롱하고 있는 그런 상황 가운데 하나님 앞에 울부짖는 것이죠. 하나님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조롱하고 손가락질하고, 하나님이 있으면, 보여줘 봐라. 그렇게 하고 있는 그런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가운데, 탄식의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도 사람들이 조롱하면서 외치는 것이죠.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 상황을 맞이하게 될 때 우리 사람들은 낙망하기가 쉽습니다. 낙심하는 그런 상황 가운데 절망적인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시편 42편 6절 말씀 가운데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헐몬산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낙심하고 있고 절망적이다고 하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런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건져주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마치 우리는 버려진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42편 9절의 말씀 가운데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데,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악재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니까 하리로다.” 어쩌면 수많은 사람들의 고민이 그거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지 않는 것 같아요. 정말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고 애썼는데,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지 않는 것 같은 상황을 만나게 될 때, 우리는 마치 내버려진 듯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듯한 그런 느낌을 받으면서 살아가게 될 때, 우리가 탄식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울부짖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시편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러한 탄식 시들은 탄식의 이야기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마지막 부분에 가서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구원을 요청하는 내용과 심판을 요청하는 내용이 나오면서, 맨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끝나게 되는데요. 이러한 상황 가운데 우리가 배울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도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사정을 그대로 앓으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갈 때,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또 응답해 주시고,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게 되는 그런 체험들이 우리들 가운데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러한 탄식의 시대를 우리가 묵상하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나아가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는 것이죠. 우리가 기도는 어떻게 하는 게 기도입니까? 기도는 정답을 이야기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그 모습, 마음 그대로를 하나님 앞에 아르는 것이 기도이기 때문에, 이러한 기도를 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만져주시고, 그래서 결국에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신 것을 체험하면서, 마지막에 찬송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읽은 시편 40편 1절에서 3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서 하나님을 향해서 찬양하는 그런 시입니다. 탄식의 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탄식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울부짖고 하나님 앞에 아뢰고 하나님 앞에 매어 달렸을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가? 정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개입해 주시는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만져주시고,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서 하나님을 보게 해 주시는 가운데 우리의 문제들이 해결되는 그러한 개인적인 간증들이 생겨나게 될 텐데, 그렇게 하나님의 응답을 바꿔서 부르는 찬송을 가리켜서 “인정 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그런 인정의 시가 되겠고, 더 쉬운 말로 하면 “간증의 시”가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나를 구원해 주시고 건져주셨다. 내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이런 것들을 증거 하면서, 간증하면서, 내는 시가 인정 시 혹은 간증 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시편 40편 1절에서부터 3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고난 때 어려운 가운데 하나님 앞에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체험하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어떻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가를 노래하는 시가 바로 인정 시요. 간증의 시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도 같이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권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찬양 시”가 있는데요. 인정 시와 찬양 시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인정 시는 개인의 독특한 경험을 통해서 간증을 통해서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찬양 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속성들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런 씨가 찬양의 씨가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에 감사하고 찬양한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찬양한다. 은총을 내려주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찬양한다”라고 하는 그런 찬양의 노래가 찬양 시가 되겠는데요.

시편 117편 1절 2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이 찬양 시는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인가에 대해서 일반적인 서술을 하면서, 그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이 시편을 읽으면서, 우리의 고난 가운데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되고, 그래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의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하는 단계까지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는 시편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단계까지 나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시편 가운데 또 하나의 시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저주의 시”가 있습니다. 저주의 시가 있는데, 이 저주의 시는 무엇이냐 하면, 나의 원수들을 향해서 저주하고 하나님 저들을 망하게 해 주세요. 저들을 완전히 없애주시고 저들이 패가망신하게 해달라고 그런 우리들의 적들을 향해서 저주하면서 부르는 시를 가리켜서 저주의 시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예를 들자면 시편 35편 4절에서부터 8절 말씀에 보면 저주의 시를 볼 수가 있겠는데요.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 생명을 찾는 자들이 부끄러워 수치를 당하게 하시며, 나를 상해하는 자들이 물러가 낭패를 당하게 하소서. 그들을 바람 앞에 겨와 같게 하시고, 여호와의 천사가 그들을 몰아내게 하소서. 그들의 길을 어둡고 미끄럽게 하시며, 여호와의 천사가 그들을 뒤쫓게 하소서. 그들이 까닭 없이 나를 잡으려고 그들의 그물을 웅덩이에 숨기며, 까닭 없이 내 생명을 해하려고 함정을 팠사오니, 멸망이 순식간에 그에게 닥치게 하시며, 그가 숨긴 그물에 자기가 잡히게 하시며, 멸망 중에 떨어지게 하소서.” 원수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 원수들을 망하게 해 주세요. 저 나를 지금 괴롭히는 사람들 완전히 박살 내버리세요. 하나님 그들을 완전히 멸망시켜 달라고 하는 이런 저주의 시가 또한 시편 가운데 많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읽다 보면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왜 이렇게 저주하면서 시를 쓴 것일까요? 그것은 이 이야기는 적어도 내가 나를 괴롭히는 그런 사람들을 내 손으로 직접 원수를 갚지 않겠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억울한 일을 만나고 고통스러운 일들을 만나게 될 때 우리 일반적인 사람들의 태도는 무엇인가요? 우리가 찾아가서 원수를 갚아버리려고 하는 게 우리들의 일반적인 생각일 겁니다. 하지만 이 저주의 시를 쓴 사람들은 어떤 마음인가? 하나님 내가 내 손으로 원수를 갚지 않겠습니다. 그 원수 갚는 걸 누구에게 맡겨요? 하나님께 맡기겠습니다. 하나님 나와 저 사람 사이에 공의를 해결해 주세요. 하나님 나와 저 사람 사이의 억울함을 바르게 풀어주세요. 하나님께 억울함을 하소연하면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다스려 달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표현인 것이죠.


그래서 이 저주의 신은 어떻게 보면 미워하고 정말 증오 가운데 나의 분노를 쏟아내는 기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러한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 그러나 내가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내 손으로 원수를 갚을 게 아니고 하나님께 맡깁니다. “나는 이 땅 위에서는 원수를 갚지 않겠나이다”라고 하는 그런 믿음의 고백인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도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기도는 정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솔직한 마음, 나의 솔직한 마음의 상태를 하나님 앞에 아뢰는 것이 기도입니다. 내 마음속에서 어떤 생각이 있어요? 하나님 죽였으면 좋겠어요 하나님 저 사람을 완전히 박살 냈으면 좋겠어요. 그 마음이 100% 좋은 마음은 아닐 겁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는 게 그게 제일 좋은 것이겠죠. 하지만 우리들의 내 마음은 어때요? 화가 나는 거예요. 분노하는 거예요. 근데 그 분노를 그 사람에게 직접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분노를 화를 내면서 내가 원수를 갚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가서 내 분노를 하나님 앞에 쏟아놓고, 하나님 앞에 그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의 그 다스리심에 내가 순종하겠다고 하는 그런 믿음의 고백이 되는 것이죠.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는 다양한 일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기쁘고 좋은 일이 있을 것이고 때로는 탁 막혀버린 그 장벽 앞에서 정말 절망적인 그런 순간을 맞이하게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내가 열심히 노력했지만 아무런 열매가 나오는 것 같지도 않고 그리고 내 앞길에 완전히 다 깜깜한 상황 같은 걸 느꼈을 때, 때로는 내가 엄청난 고난을 당하게 되고,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었을 때, 우리들의 삶의 모든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되는가? 그냥 감정에 따라서 기분 나쁘면 기분 나쁘면 원수를 갚아버리고, 절망적인 상황이 되면 절망해 버리고, 그냥 나락에 떨어져 버리고, 기쁘면 그냥 교만해버리고, 그냥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그렇게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엎드리고,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만져주시기를 바라는 것이 오늘 우리 성도들의 바른 자세일 거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시편을 묵상해 나가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을 만져주시고 또 우리들의 그 상황 가운데서 건져주시는 그런 놀라운 축복이 우리들 가운데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시편 40편 1절에서 3절 말씀에 있는 이 말씀, 오늘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하나님 우리들을 기가 막힌 웅덩이 위에서 건져주옵소서. 힘들 때 나 혼자 좌절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시고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아버지께서 나를 건져주실 것을 바라면서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할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 있더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훈련들을 시편의 말씀을 읽으면서 배워나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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