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는 다니엘서와 호세아서를 읽게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주에는 그리고 그다음 주에는 소선지서를 읽어서, 이번 주 다음 주 그다음 주에 걸쳐서 읽으면, 구약 성경 대단원을 마무리하게 되고 이제는 신약으로 넘어가게 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다니엘서의 메시지, 그리고 소선지서의 메시지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다음 주에는 헌신 예배가 있고 하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로써 구약의 마지막 부분인, 다니엘과 소선지서 부분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하겠는데요.
먼저 다니엘서의 말씀은, 다니엘서를 읽다 보면, 묵시문학적인 내용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보통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성경이 있는가 하면, 어느 구절들은 좀 약간 이해하기 어려운 그런 내용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 성경들도 있는데요. 다니엘서의 예언과 관련된 부분들은, 전부 다 다 묵시문학이라고 하는 그런 글의 종류가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면서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그 성경이 어떤 문학적인 장르에 속해 있는가를 아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항상 대화를 하든, 글을 읽든, 그리고 아무튼 커뮤니케이션을 하든, 뭘 하든지 간에, 이것이 어떤 장르에 속해 있는가를 아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죠. 예를 들어서, 우리 성경에는 어떤 장르의 그런 글들이 있습니까? 역사를 기록한 역사 부분도 있고요. 그다음에 시를 기록한 시도 있고요. 시편 같은 경우 그다음에 편지 글들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각 교회에 보낸 그런 편지들은 편지글 형식에 해당하는 것이겠고요. 그다음에 구약의 예언서 같은 것들은 예언의 글들이라고 할 수가 있겠고, 그다음에 잠언서 같은 경우는 잠언의 글들이죠. 잠언이라고 하는 그런 문학적인 형식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 문학적인 그 형식의 특징들을 알고서 이해를 해야 그래야 오해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대화할 때도 마찬가지잖아요? 대화를 할 때, 우리가 농담을 하는 시간이 있고, 농담이 아니라 아주 계약을 하면서, 진지하게 계약 내용들을 꼼꼼히 따져가면서, 진지하게 계약을 하는 그런 대화가 있고요. 그다음에 어떤 문학의 밤이나, 이런 시낭송회 이런 데서 서로 시를 읊는 그런 경우도 있듯이 그때그때마다 분위기가 다 다른 겁니다. 방송에서도 방송 프로그램도, 뉴스 프로그램이 있고, 드라마가 있고, 그리고 코미디 프로그램이 있는데, 각각의 그 프로그램의 형식에 따라서,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이 각각 달라야 되겠죠.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는 어떤 내용이 방송이 됩니까? 웃자고 하는 얘기들이 방송이 되는 거죠. 웃는 이야기들이 나오는 겁니다. 사실이 아니고, 그냥 웃기 위해서,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대화들이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는 오고 가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는 무슨 얘기를 해도,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코미디 프로그램을 하는데, “야 전쟁이 났다” “전쟁이 났다” 하면서 맹구가 달려오면, 진짜 전쟁이 난 걸로 받아들여야 되나요? 아니에요. 그건 코미디 프로그램이에요.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전쟁이 났다” 어쩌고 하면, “웃기려고 하는 그런 내용이구나” 이해하면서 볼 때, 그 코미디 프로그램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뉴스는 어떻습니까? 뉴스는 사실을 말해야 되는 프로그램이 뉴스인 것이죠. 물론 그 뉴스 안에는, 거짓말도 많이 포함될 수도 있겠고, 그 뉴스를 말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서, 사실을 곡해하거나 왜곡하는 일들도 많이 일어나고는 있습니다마는, 그래서 항상 뉴스를 들을 때, 저게 정말인지, 다시 한번 체크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인데, 그래도 뉴스라고 하는 것은, 코미디 프로와는 달리 사실만을 전달하려고 하는 그런 장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면서 봐야 되는 것이죠. 그래서 뉴스에서 나오면, 내가 주식 투자를 어디에다 해야 되겠구나. 내가 가지고 있는 주식을 팔아야 되겠구나. 그런 것들을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재료들을 뉴스에서 얻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주식 투자하는 것에 대한 정보를 코미디 프로에서 들으면 되겠나요? 아니면 드라마를 통해서 들으면 되겠나요? 아니요. 드라마에서 막 하는데, 우리나라 유전이 나왔다. 막 이렇게 해서, 거기에 속아 넣어서, 주식 투자하면 안 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 장르에 따라서,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즐길 게 있고, 사실로 받아들여야 될 게 있고, 그리고 형식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게 다른 것처럼, 성경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성경도 모든 내용이 다 똑같은 형식으로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역사로 되어 있는 성경은 “역사적인 사실을 기술하고 있구나”라고 이해하면 되지만, 시편 같은 경우는 어때요? 시편은 감정을 표현하고,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과장될 수 있고, 그리고 여러 가지 강조해서 하는 표현들도 있겠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시적인 표현을 읽으면서는, 우리가 바울 서신의 편지글을 읽는다든지, 복음서를 읽는 것과는 좀 약간 다른 방식으로 시를 접근해야 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잠언 같은 경우는 지혜의 글이기 때문에, 우리가 율법서를 읽는 거하고는, 좀 다른 접근법을 해야 되는 것이죠. 율법서는 무엇입니까? “해라 하지 마라 하면 된다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이 있는 반면에 잠언은 어때요? 해라 하지 마라가 있기는 있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 해야 할 때도 있고, 하지 말아야 될 때도 있고, 그것을 우리가 잠언이라고 하는 특징을 이해하고서 잠언서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성경은 대부분 잘 그나마 잘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제일 어려운 것, 보통의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어디냐 하면, “묵시”라고 하는 그런 장르가 이해하기가 제일 어려운 것이죠. 묵시라고 하는 장르가 많이 나오는 성경책은 어디냐면, 다니엘서가 그렇고, 요한계시록이 그렇고, 그다음에 예언서 가운데 몇몇 성경들이 이런 묵시로 되어 있는 성경입니다. 이런 묵시로 되어 있는 성경을 이해할 때는, 이것이 묵시라고 하는 그 문학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이해하면서, 보지 아니하면 잘못된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이 묵시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지금까지 다른 것들은 다 이해가 되잖아요? 시도 이해가 되고, 역사도 이해가 되고, 편지도 이해가 되고, 다 잠언도 이해가 되고 그러는데, 도대체 묵시는 뭡니까? 묵시는 무엇이냐? “상징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법”을 가리켜서 묵시라고 이야기합니다. 상징, 그러니까 어떤 그림과 같은 어떤 이미지, 이런 것들을 통해서. 그런데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초현실적인 상징과 이미지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는 방식을 가리켜서 묵시 문학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묵시문학에 나오는 표현 가운데 이런 것이 있을 수 있겠는데요. 하늘에서 별이 우수수 떨어지고, 달이 핏빛으로 변하고, 햇빛이 태양이 빛을 잃어버리고, 이런 표현들이 묵시 문학에 나옵니다. 그런 표현들이 나오면, “언젠가는 햇볕이 시커메지겠구나. 언젠가는 별들이 떨어지겠구나. 언젠가는 달이 핏빛으로 변하겠구나”라고 생각하시면 될까요? 안 됩니다. 달이 그렇게 별이 그렇게 떨어질 리는 없죠. 옛날 사람들은 별이 그렇게 떨어진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리가 없는 겁니다. 그렇지만 그런 표현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그만큼 천지 개벽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런 표현들을 쓰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아침이면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치고, 해가 밝았다가 밤이 되고, 그리고 식물들이 자라고 편안하게 살아가는 이 세상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언제가 있을 것인가 갑자기 태양이 시커먼 해져 버리고, 별들이 떨어져 버리고, 달이 핏빛으로 변해버리고, 이런 묘사를 통해서 갑작스러운 천재지변, 뭔가 아주 급격한 이상한 일이, 아주 무서운 일이 일어날 거라고 하는 것을 묘사하기 위한 상징적인 표현법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묵시문학에 나와 있는 다니엘서나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우리 그 내용들을 읽을 때 이것이 문자 그대로 그대로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일어날 거라고 기대할 것이 아닙니다. 일기 예보하고는 다른 것이죠. 일기 예보는 무엇입니까? “내일은 햇빛이 많이 온도가 올라서 38도가 되겠으며, 비가 내리겠습니다” 하면서 일기 예보를 하면은, 많이 틀리긴 하지만 그대로 많이 되잖아요. 그런 것과 같이 성경의 묵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럴 정도로 끔찍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가 믿고 신뢰하던 이 세상이 무너질 것이다.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이 세상이 그렇게 완전히 무너져버릴 거라고 하는 그런 상징적인 메시지를 이런 묵시 문학적인 표현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장르의 특성을 모르는 구분하지 못하는 잘못된 어리석은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 해석을 하면서, 그래서 “마지막 때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하면서 겁을 주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는데요. 그런 사람들의 그런 말들에 현혹될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제대로 잘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성경에 있는 이 묵시 문학을 통해서, 다니엘서와 같은 이런 메시지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메시지의 그 내용들은, 주로 어떤 내용들인가? 제가 볼 때는 세 가지의 내용을 전달해 주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첫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끝나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메시지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지금 익숙하게 살고 있는, 이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현시대가 어떻게 될 것이다. 이제는 이 세상이 끝나게 될 때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이 올 것이다”라고 하는 메시지를 이 묵시 문학을 통해서 이야기해 주고 있는 평화로운 시대가 오게 될 것이다. 지금은 악인이 판을 치고 있고, 지금은 억울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고 있고, 지금은 여러 가지 힘든 일들이 일어나고 있겠지만, 그러나 이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버리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평화의 세상,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뛰놀고 독사해굴에 손을 집어넣어도 다치지 않고 이런 세상 실제로 그렇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상징적인 표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세상이 올 텐데, 그때는 해함도 상함도 없는 그런 너무나도 편안한 세상이, 좋은 세상이 올 거라고 하는 그런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는 것이 묵시문학에서 전하고 있는 첫 번째 메시지라고 할 것입니다.
두 번째 메시지가 무엇이냐 하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엄청난 영적인 공격이 있을 것이다. 사탄이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하고, 사탄이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참된 성도들이 고통을 당하는 그런 일들이, 이 현시대 가운데서 있을 것이고, 그런 세상 가운데서 우리가 살아나가는 것이 “고통 가운데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하는 그런 메시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번째 메시지는 무엇이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절망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보호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방관하시고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셔서, 결국 끝까지 구원해 주실 거라고 하는, 이런 메시지들을 전하는 것이, 묵시 문학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성경의 내용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다니엘서 7장 1절에서부터 8절 말씀에 보면 기괴한 짐승들이 등장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서 7장에 보면 이상한 짐승이 4마리가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독수리의 날개를 가진 사자가 등장하는 거죠. 사자에게 독수리의 날개가 있다. 이게 실제일 것 같습니까? 어떤 메시지를 전한다고 생각이 드십니까? 이런 독수리의 날개를 가진 사자가 실제로 있다는 게 아니에요. 이런 모습을 한 사자가 언젠가는 나타날 거라고 하는 걸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이 메시지를 이 이미지를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뭐예요? 사자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짐승입니까? 그 사자 앞에 우리가 잡아먹힐 수가 있는 정말 무서운 짐승이 사자인데 사자의 단점이 뭐예요? 못 날아다니는 게 단점이잖아요. 그런데 그 사자가 독수리 날개를 가지고 막 날아다니면서 잡아먹어. 훨씬 더 무섭잖아요? 그만큼 엄청나게 너무나도 무서운, 우리를 아주 공격해 버리면 우리가 꼼짝 못 하고 당할 수밖에 없는 너무나도 무시무시한 짐승을 그려주고 있는 겁니다. 또 하나의 짐승이 나오는데 곰이 등장해요. 그 곰은 이 사이에 갈빗대를 다 물어뜯고 있는 그런 곰의 모습이 등장하는 너무나도 무섭죠. 또 표범이 세 번째 등장하는데 그 표범도 뭐가 있어요? 날개가 있어요? 역시 마찬가지죠. 그리고 네 번째 짐승은 무서운 짐승인데 어떤 짐승인지는 말하고 있지 않지만, 강철 이빨을 가지고 있어서 무엇이든지 다 잡아먹고 발로 밟고 10개의 뿌리 가지고 있으니까 이 짐승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짐승들입니까? 이걸 실제로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면 정말 무서워 보이는 그런 짐승들일 겁니다.
이런 다니엘서 7장에 짐승들의 환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러니까 이 다니엘서 7장에서 말하고 있는 내 짐승의 환상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걸까요? 언젠가 때가 되면 이런 짐승들이 나타날 것이다라고 하는 그런 메시지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 메시지를 보면서 늘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것들은 도대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누구? 히틀러를 가리키는 것일까? 아니면 로마 황제를 가리키는 것일까? 아니면 김일성을 가리키는 것일까? 이 세상에 나쁜 사람은 나쁜 다 거기다 더 적용시켜 가면서, “혹시 그 사람들이 아닐까?”라고 질문을 던져본 것이고, 또 하나의 질문은 무엇이냐면, 도대체 언제 이런 짐승들이 나타나게 될 것인가? 언제 나타날까? 그래서 성경을 막 연구해 가지고, 이 짐승이 나타나는 때가 2천 몇 년 몇 월 며칠일 것이다. 아니면 몇 년 몇 월 며칠일 것이다 하면서, 자꾸만 이 누가 “누구를 지칭하는가” “언제 나타날 것인가”에 대한 연구들을 많이 했는데, 그건 다 쓸데없는 노력들이에요. 왜냐하면 이 묵시 문학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이냐 하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 가운데서, 우리가 만나고 있는 영적인 도전이 이와 같다고 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어떤 세상입니까? 쉬운 세상인가요? 어려운 세상인가요? 어려운 세상이에요. 내가 믿음을 지키고 소신을 지키고 의롭게 정의롭게 정말 살아간다고 하면 살 수 있어요? 아니요. 압력이 들어오는 겁니다. 너 진실을 말해버리면 죽여버릴 거야. 너 이거 그냥 없는 걸로 덮어버려. 덮어버리지 않으면 네 온 가족들을 다 몰살시켜 버릴 거야. 그런 압력들이 오는 세상 가운데서, 내가 의를 지키면서 산다고 하는 것이 어려운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죠. 그런 이 세상의 압력들이 너무나도 가공할 만한 그런 무서움 가운데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예요. 돈의 권세에 우리가 굴복하지 않으면,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면, 그러면 우리의 목숨줄이 끊어질 것만 같은, 그런 위험한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게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짐승들이 나타나는 것은 먼 훗날 언젠가 나타난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그런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인 거죠. 그래서 “지금 우리가 정말 힘들고 어려운 영적인 싸움을 하고 있구나”라고 하는 것을 보게 만드는, 그런 그림 이미지가 바로 이런 이미지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호시탐탐 노리는 거죠. 우리의 약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어디에 넘어지는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서, 그래서 우리를 완전히 짓밟아버리기 위해서, 사자가 날갯짓을 하면서 우리가 어디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막 쫓아와서, 우리를 막 잡아먹으려고 하는 것처럼, 정말 우리의 힘이 너무나도 나약하고 언제든지 쓰러질 수밖에 없는 그런 상태에 있다고 하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묵시의 내용인 것이죠.
하지만 우리가 겁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힘들고 어려운 환란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겁먹을 필요가 없는 것은, 우리를 주님께서 우리를 내버려 두시고 방치하고 외면해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를 그러한 악한 권세 가운데 우리와 함께하셔서 지키시고 보호해 주시겠다고 하는 메시지가 동시에 이 묵시 문학 가운데 드러나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이런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얼마나 위험 가운데 있는가라고 하는 것을 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무런 방어가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주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셔서, 전혀 우리를 다치지 않게 하나님께서 도우신다고 하는 사실을 동시에 바라보아야 하는 거죠 왜냐하면 모든 이 사자의 발에 무엇이 채워져 있어요? 차꼬가 채워져 있어서, 아무리 으르렁거리고 소리를 지르지만, 그것은 소리만 지를 뿐 우리에게 다가와서 우리를 완전히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보호하에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두 번째, 다니엘서에 나와 있는 환상이 있다고 한다면 다니엘서 7장 9절에서부터 28절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보좌에 대한 환상입니다. 다니엘이 환상을 보는데 아까 그 짐승들만 본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무엇을 봐요? 하늘 보좌를 바라본 거예요 저 천성을 바라보게 된 것이죠. 그런데 그 보좌에 누가 앉아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앉아 계시는 거죠. 하나님께서 앉아 계시는데 옷은 눈같이 하얗고 머리털은 양털같이 하얗고 보좌에는 불꽃같고 마차 바퀴가 같은 것이 있어서 타는 불이 나는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앉아 계신 그 모습을 이 다니엘의 환상 가운데 보게 된 겁니다. 그래서 이러한 환상은 무엇을?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죠?
이 세상이 사실은 바벨론이 다스리고 있고, 그리고 느브갓네살 왕이 통치하고 있고, 바벨론 왕이 이 세상을 통치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사실은 이 세상을 바벨론 왕이 통치하는 게 아니라 누가 통치해요?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고 있구나”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환상인 것이죠. 이스라엘 민족이 지금 어디에 가 있습니까? 바벨론으로 가 있는 거죠. 이스라엘 민족이 살던 그 이스라엘 땅 유다 땅에서 망해버렸어요. 누구 나라에 의해서 바벨론 나라에 의해서 유다 민족이 망해버렸어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져버렸어요. 포로로 끌려가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지금은 바벨론 왕의 왕이 이 이스라엘 민족, 유대민족을 강압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그 통치 가운데서 살아가는데 너무나도 힘들게 살아가고 우리 민족에게 아무런 소망이 없는가 생각될 때, 다니엘에게서 어떤 환상의 환상을 보여주냐면, 하늘의 하나님에 대한 환상을 보여준 거예요 이 세상을 누가 다스리는가? 바벨론 왕이 다스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고 있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그런 환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소망을 갖게 되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바라봐야 될 환상이 뭐예요? 바로 이런 환상이죠.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가 늘 느끼는 게 뭡니까? 이 세상은 무엇이 다스려요? 돈이 다스리는 것 같아요. 이 세상은 무엇이 다스리고 있어요? 속임수를 쓰면서 이 세상 파워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떵떵거리면서 사는 이 세상을 보면서 그 권세 아래 굴복해야만 사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사람들도 하나님의 그 통치 아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그 환상이 이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아 계신다고 하는 그 환상을 보여주신 것이죠.
그러면서 또 하나 본 게 무엇이냐 하면 놀라운 환상인데 갑자기 어떤 한 사람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 내용이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이에요. 다니엘서 7장 13절 14절 말씀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여기서 인자 같은 이라고 하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인자가 뭐죠? 인자의 뜻이 뭐죠? 인자의 뜻 물어봤더니 어떤 분이 그래요? 인자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그런 분 아닌가요? 그게 아니고요. 성경에서 말하는 인자가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는 말이에요. 사람의 아들처럼 생긴 분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인도되었다고 하는 것인데, 이 누구누구의 아들이라고 하는 표현은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표현으로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면 그냥 그냥 사람이란 말이에요. 사람의 아들이 뭐죠?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뭐라고 표현해야 제일 편해요? 우리들이 이해하기에는 사람이라고 표현해야 제일 편해요.
“사람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인도되어 갔다”라고 표현해야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제일 편한 표현이에요. 그런데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언어 습관 중에 “아들”이라고 하는 표현이 있어요.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는 표현이 있어요. 그 아들이라고 하는 표현을 써서 우리들이 많이 헷갈리는데, 그 아들이라고 하는 표현이 들어가도 그냥 “사람”이라고 이해하시면 돼요. 그러니까 지금 이 다니엘서 7장 13절에서 하고 있는 얘기가 뭐냐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인도됐다”라고 이해하시면 좋습니다. 유대인들이 쓰는 아들이라고 하는 표현 중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표현이 있어요. 그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말의 뜻이 뭐예요? 하나님이라는 뜻이에요. 하나님 왜 사람의 아들은 개예요? 사람이에요. 사람이잖아요?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이에요?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에요. 그러니까 그냥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으로 보고 사람의 아들은 사람으로 보면 돼요. 또 이스라엘 사람들이 쓰는 표현 중에 들어간 표현 중에 하나가 뭐냐면 이스라엘의 아들들아 그래요. 그건 뭐예요? 이스라엘 사람들이란 표현이에요. 그러니까 이 유대인들이 쓰는 이 “아들”이라고 하는 표현에 혼란스럽게 생각하지 마시고, 이 다니엘이 본 환상이 뭐냐 하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인도되어 가는 그런 환상을 보게 된 겁니다.
그런데 그 아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 아들이 하나님 앞으로 인도되어 가는데 뭘 타고 와서 하나님 앞으로 인도되어 가요? 구름을 타고서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갔다고 그러는 거예요. 하늘 구름은 누가 타요? 하나님이 타는 거예요. 묵시문학에서 묵시문학에서 구름을 타는 분은 하나님이에요. 근데 사람인데 그 사람이 하나님이 타는 그 교통수단인 하늘 구름을 타고서 나타나서, 하나님 옛적부터 계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장면을 보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무엇이 주어져요? 권세가 주어지고 영광이 주어지고, 나라가 주어지면서, 그래서 그 사람이 모든 백성 모 모든 언어, 모든 나라를 다 다스리고 다 섬기게 만들고 그래서 그 사람이 가진 그 권세가 영원히 소멸되지 아니하는 그런 환상을 보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이 온 세상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그 하나님의 권세를 받아서 온 세상을 다스리는 그 환상을 보게 된 거예요.
그 환상이 어디에서 성취됩니까? 바로 예수님에게서 성취되는 거죠. 예수님께서 오셔서 자기 자신을 인자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렀는데요.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는 얘기는 바로 다니엘서에 나오는 바로 이 사람의 아들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 옛날 다니엘의 환상 가운데 사람이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다 가지고 와서 온 세상을 다스리는 그때를 이 다니엘이 환상을 통해서 보았는데 바로 그 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죠.
이 환상은 그러니까 지금 고통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린다고 하는 점을 우리가 볼 수 있게 만드는 환상인 동시에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구원하셔서, 결국 우리를 구원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줄 거라고 하는 그 예언의 메시지가 들어있는 것이 바로 다니엘서의 메시지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 다니엘의 본 환상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보시면서 성경 말씀을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소선지서는 간단하게 말씀드릴 텐데요. 소선지서는 12권의 성경을 가리켜서 소선지서라고 합니다. 대선지서는 왜 대선지서고 소선지서는 왜 소선지서죠? 네 그것은 선지자들이 더 훌륭한 선지자 좀 못한 선지자이기 때문에 대소로 나눈 게 아니고, 그들이 남겨놓은 성경책의 부피가 많고 적고에 따라서 우리가 대선지서 소선지서라고 구별하는 것인데요. 호세아 아모스 요나 미가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전에 북이스라엘을 향해서 말씀을 전하던 선지자들이었고요. 나훔 하박국 스바냐 선지자는 남쪽 유다 나라가 멸망하기 전에 유다 나라를 향해서 예언해 주었던 메시지이고요. 학개 스가랴 말라기는 포로에서부터 돌아온 다음에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에게 전해준 메시지가 하게 스가랴 말라기라고 하겠습니다. 요엘과 오바댜서는 포로 귀환 후에 500년경에 기록되어 있는 기록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이 메시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특별히 호세아 같은 경우는 하나님께서 호세야에게 창녀와 결혼하라고 그래요. 그래서 결혼하고 또 집을 나가면 돈을 지불하고 또 사 오고 또 지불하고 싸워가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했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죠. 옛날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은 구약시대뿐만 아니라 신약시대에도 선지자들이 예언을 할 때, 그냥 말로만 예언을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예언의 내용들을 실제로 그 퍼포먼스를 통해서 보여주었는데,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신 것이, 마치 하나님을 버리고 간 창녀들을 사랑한 것과 같은 사랑으로 사랑하셨다고 하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이렇게 창녀와 결혼하게 하는 그런 일이 있었고요.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정말 모든 사람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받을 수 없을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들조차도 사랑해 주시는 긍휼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그런 메시지라고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학개 스가랴 말라기서는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들이 너무나도 현실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그리고 방황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사랑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구원해 주신다고 하는 그런 메시지를 전해주는 책이 소선지서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다니엘서부터 소선지서의 말씀을 읽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발견하고 여전히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고 하는 점들을 잘 기억하면서 많은 은혜를 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