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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당하신 왕 (눅 9:22)

우리가 성경 일독을 잘 진행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잘 읽고 계십니까? 처음 시작할 때보다 목소리가 많이 약해졌어요. 잘 읽고 계십니까? 예, 잘 읽으십시오. 얼마 안 남았습니다. 얼마 안 남았으니까, 잘 읽으시면 감사하겠고, 지난 시간에 우리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읽었고, 이제 이번 주에는 누가복음을 읽게 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는 요한복음을 읽게 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서의 말씀, 어쩌면 우리 성경 말씀 가운데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복음서의 부분이 아닐까 싶은데요. 이 복음서의 말씀을 우리가 계속해서 읽게 된 것 너무나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예수님의 사역,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어떤 분으로 오셨는가? 예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 이러한 것들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구약의 예언의 성취로 오셨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구약시대 때 예언해 주었던 그 예언의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게 된 것이고요.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들이 실패했던 그것을, 예수님께서 순종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이야기들에 대해서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복음서를 보게 되면, 예수님의 사역도 많이 나오지만, 예수님 이 복음서에 초점이 어디에 맞춰져 있냐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한 일주일 정도에 일어난 사건인데요. 이 일주일 마지막, 일주일에 대한 이 이야기가 복음서의 아주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죠? 별로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의 사역을 하시면서 병자들을 고친 이야기들도 많이 나오긴 하지만, 그것은 3년이라고 하는 기간 혹은 4년이라고 하는 기간 동안에 일어난 일들을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는 반면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한 일주일 정도밖에 안 되는 그 시간이지만, 복음서에 거의 3분의 1, 3분의 1을 반절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그렇게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서의 핵심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렇게 말해도 될 것인데요.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은 예루살렘에 예수님께서 입성하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요.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 걸어 들어가지 않고, 나귀를 구해서 그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들어가는 그 길에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또한 깔기도 하고, 그러면서 환호하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면서, 맞이하는, 그 장면 속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입성하게 되신 것이죠. 예수님께서 이렇게 예루살렘의 나귀를 타고 들어가는 것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이 드십니까? 어떤 장면과 비슷하다고 생각이 드십니까? 이것은 왕이 등극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예전에 아주 오래된 옛날 나라에서 대관식을 하게 된다고 한다면, 새로운 왕이 즉위하게 된다고 하면, 그러면 어떤 모습이 연상이 됩니까? 영화를 보셨다고 한다면, 혹은 만화 영화를 보셨다고 한다면, 왕이 즉위할 때 그 광경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나팔을 불고, 온 국민이 참 둘러서 있는 가운데, 그리고 군인들이 행진을 하면서, 그리고 그 왕이 멋진 그 말을 타고 혹은 마차를 타고, 그리고 장엄한 행렬을 이끌고, 그 성 안으로 들어가 왕좌에 앉는 그런 장면을 생각해 보실 겁니다.

그러니까 이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이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시는 그 장면은 어떤 장면인가? 왕이 왕으로서 등극해서, 그 한 나라의 왕으로 올라가는 대관식의 장면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바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호산나 호산나라고 찬양을 하는 거죠. 그러면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다윗의 후손, 다윗의 왕좌를 이을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셨다고 하는 것을 선포하면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이 예수님의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왕으로 등극하시는 그런 장면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그런데 특이한 게 있습니다. 그게 뭐죠? 초라하다는 것이며, 애들 소꿉장난같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겁니다. 말을 타는데 정말 말만 봐도 입이 쫙 벌어질 정도로, 그렇게 멋있고 휘황찬란한 말과 마차와 대신들을 데리고 입장한 것이 아니라 조그마한 나귀를 탔어요. 나귀라고 하는 게 뭡니까? 왕이 타는 짐승이 아니에요. 나귀는 뭐예요? 가난한 농부가 그저 짐이나 싣고 갈 수 있는 그런 그냥 짐을 운반하는 데 필요한 그런 조그마한 가정용 짐승이지, 왕이 타는 그런 짐승이 아니라 이 말이죠. 예수님께서 왕으로 들어가시는데 어떻게 들어가셨는가? 나귀를 타고 모양 빠지게 들어가신 겁니다. 초라하게 들어가신 거죠. 그리고 사람들이 나팔을 불면서, 그리고 사람들이 꽃가루를 날리며, 그리고 양탄자를 깔고 멋있게 화려하게 들어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는 그 길에 기껏 해서 펼친다고 하는 것이 나뭇가지 꺾어서 그 앞에 놓고, 기껏 해서 해놓은 것이 자신들의 옷을 벗어서 그 앞에 펼치고, 나귀 위에 안장을 지운다고 하는 것이 자신들의 옷을 벗어서 그 안에 해놓은 것처럼, 정말 조잡하고 정말 모양 빠지고 왕 같지도 않은 그러한 모습으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안으로 들어가게 되신 것이죠.


이렇게 예수님께서 들어가신 모습은 왜 이렇게 하셨는가? 그것은 구약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는 한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스가랴서 9장 9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구약시대 때 새로운 왕이 나타날 것에 대해서 예언해 주었는데, 구약시대 때의 그 예언이 무엇이냐면, 그 새로운 왕은 어떤 모습을 하고 올 것인가? 이 세상의 왕처럼 화려한 모습을 가지고 창칼을 가지고, 그리고 어마어마한 그런 권세를 가지고 위엄을 가지고 임하는 그런 왕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구약 성경에서 예언한 그 예언이 무엇이냐면, 겸손한 왕이 등장할 거라는 거예요. 사람들을 군림하고 포악하게 자신의 권세를 막 발휘하는 그런 왕이 아니라, 정말 겸손한 모습의 왕이 오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 약속을 해주셨는데, 그 약속대로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고 오시게 된 것이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어떤 왕이십니까? 나중에 빌라도가 예수님을 향해서 질문을 던지는 거죠. 너는 유대인들의 왕이냐라고 질문을 던졌을 때, 예수님께서 네가 말하였도다. 내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대답해 주시는데, 그 왕이 어떤 왕이냐 하면, 이 세상의 왕과 똑같은 왕이 아니에요. 이 세상의 왕은 무엇입니까?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죽여버리는 거죠.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사용해 버리는 것이죠. 공의와 정의와 상식은 없어져버리고 그냥 이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면서, 포악한 왕이 이 세상의 왕들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은 어떤 왕인가? 겸손한 왕일뿐만 아니라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섬기는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신 거예요.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으시고, 그리고 그들에게 발을 씻기시며, 예수님은 왕이긴 왕인데 어떤 왕인가? 제자들의 더러움을 씻어주는 왕이에요. 예수님은 어떤 왕인가? 우리들의 아픔을 짊어지신 왕이에요. 예수님은 어떤 왕인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왕이고, 어떤 권세를 부리는 왕이 아니라, 정말 겸손하게,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섬기는 왕으로서,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온전히 이끄는, 잘못된 사람들, 완전히 망해져 가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회복시켜서, 이제는 참된 행복을 누리게 만드는, 진정한 왕의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그 새로운 왕으로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 보여준 것이 바로 예루살렘 입성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모양으로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진짜로 겸손하신 그 모습처럼 자기 자신을 내어주셔서 우리들에게 양식으로 주신 것이죠. 배고픈 이들에게, 그래서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자신의 몸을 희생시켜서 우리를 배부르게 하시고, 영생을 얻게 만드시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시는 겸손한 왕, 섬기는 왕으로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신 다음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다음에, 그 성전 안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들어간 그 성전을 바라보게 될 때 너무나도 안타까운 것이죠.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전은 장사하는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가 아니라 그야말로 자신들의 이익 이득을 얻기 위한 장소로 완전히 변화되어 버린 타락의 현장을 예수님께서는 보신 거예요. 그런데 바로 그게 이 세상에서 언제나 반복되고 있는 그런 상황이에요. 하나님의 성전이 어떤 성전인가? 하나님의 성전은 무엇이 하나님의 성전입니까? 죄를 지었던 사람들이 그 성전에 와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성전인 것이고, 죄를 지었던 사람들이 그 성전에 와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 성전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그래서 거기서 회복이 이루어지는 이제는 온전함을 회복해서 돌아가게 되는 그런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성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성전은 언제나 타락해 버렸고 왜곡되어 버렸고 인간의 이기심이 집중되는 곳으로 변모되어 버린 것이죠. 그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종교 권력자들이 자신의 이득을 최대한 대로 얻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탈바꿈되어 있는 거예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사두개인들이 그곳에서 진을 치고 있는데 성전의 관리들이 있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제사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독하면 안 되고 하나님을 거룩하게 섬겨야 되고, 만일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이 있으면 정말 하나님을 위해서 화를 내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을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진정한 성도인 것처럼 그렇게 행동을 했지만, 사실 그들의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었어요. 그들의 하나님은 무엇이었습니까? 돈이 하나님이 돈이 그들의 하나님이었던 것이죠.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제사를 드리는 걸 통해서 돈을 벌고, 그 종교 시스템을 통해서 자신의 배를 배불리게 만들고, 그런데 그것은 종교 지도자들뿐만이 아니라, 그곳에 오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도 역시 마찬가지, 그곳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했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하러 온 게 아닙니다. 예배하러 온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은 그냥 종교적인 의무를 다해버리고, 그래서 또다시 밖에 나가서 또 죄를 짓고, 마음껏 악을 행하면서도 나는 죄 용서함 받았다고 하는 면죄부만을 원했던 것이지,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성전 안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고, 종교 지도자들이나 권력자들이나 일반 서민이나, 다 자신들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는 그런 안타까운 모습들을 보여주고 만 것이죠.

이게 언제나 반복되는 겁니다. 구약시대 때도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외친 것이고, 예수님 당시에도 종교 지도자들이 타락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이고,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중세 천주교회가 똑같은 짓을 했던 것이고 오늘날도 마찬가지예요. 오늘도 순 엉터리들이 판을 치고 있는 거예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악을 행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을 들먹이는 겁니다. 하나님의 하나님을 신성 모독하지 말라고 말을 하지만, 사실은 자신들의 탐욕과 이득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해 먹는 제3계명을 가장 악랄하게 어기고 있는 사람들이 종교 지도자들이라 이 말이에요. 계속해서 이런 일들이 반복하는 겁니다. 너무나도 그런 유혹의 종교 지도자들이 있는 거죠. 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하면, 사람들이 그렇게 믿으니까, 그런 말들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지위를 차지해 버리는 거죠. 그 옛날 교황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 이슬람교도들과 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이야기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십자군 전쟁으로 내몰아버린 거죠, 성전을 성질을 탈환하겠다고 하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그들을 그곳을 통해서 얻는 이익과 탐욕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사용해 버리는 그런 악한 일들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는 것이죠.


근데 예수님 당시도 그랬어. 그럴 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해 주셨는가? 누가복음 19장 45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셨다 그랬습니다. 악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 때 사용하면서 자신의 이득을 채우는 사람들,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일을 위해서 사용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그런 악한 자들을 내어 쫓으신 것이죠. 그리고 또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2장 19절 말씀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사실 예루살렘 성전은 진짜 성전이 아닌 겁니다. 있으나 마나 한 성전이고 우상숭배의 자리인 뿐인 것이고, 돈을 위한 그러한 잘못된 곳이었기 때문에 그 성전을 허물어 버려라. 이런 종교는 필요 없다 말씀해 주고 계시고, 예수님께서 새로운 하나님에게로 가는 길을 마련해 주시겠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정말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대로 자신의 몸을 희생양으로 들여서 하나님께로 직접 나아갈 수 있는 이제는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착취당하지 아니하면서 누구나 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있게끔 우리 모두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죄를 씻으셔서 우리가 주님에게 나갈 수 있는 그 길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구약시대 때는 양과 소를 잡아서 속죄죄를 드렸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으로 속죄죄를 드렸고 그래서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보열 피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직접 나가게 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념하고 늘 다시 한번 하나님의 은혜,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성찬예식이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다시 부활하셔서 그래서 우리의 삶이 소망이 있고 주 안에서 소망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시면서 복음서가 마무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복음서를 보면서 다시 한 번한번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는데 지금까지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던 사람들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아들이면 이제는 해방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사실을 선포하셨고, 요한복음에서는 그 하나님 나라를 영생이라고 하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요.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소망이 이 세상에 그 어떤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참된 구원 자이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복음서를 읽으면서 다시 한번 발견하고 우리의 소망을 이 세상에 헛된 것에 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온전히 소망을 두면서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요한복음의 말씀을 읽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총이 풍성하게 넘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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