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다 믿더라 (행 13:48)

우리가 사도행전의 말씀을 지난주에 읽었고, 이제 이번 주에도 또 계속해서 나머지를 읽게 되겠는데요. 사도행전의 말씀을 보면 복음이 단순히 예루살렘과 유대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로 뻗쳐 나가는, 그 과정을 그려준 책이 바로 사도행전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복음이 널리 전 세계로 퍼지게 될 때, 하나님께서 들어서 사용하신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이라고 하는 사람이죠. 이 사도 바울이라고 하는 사람은 원래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었고, 그리고 율법을 철저하게 신봉하던, 그런 철저한 그 신앙의 관점, 보수적인 신앙의 관점으로 본다고 한다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 나사렛 파들은 완전히 이단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죠. 유일신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는 것인데, 유일신 하나님 말고, 여호와 하나님 말고, 또 다른 신, 사람인 예수님을 또 다른 신으로, 또 다른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이 나사렛 파야말로, 이단 중에 이단이라고 생각을 해서, 사도 바울은 회심하기 전에 교회를 핍박하는 데 앞장섰던 것입니다. 스테반을 죽이는 데 앞장섰던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었고요. 그리고 다메섹에 있는 성도들을 핍박하기 위해서, 그 대제사장들로부터 그 권위를 인정받아, 핍박하러 가던 사람이 사도 바울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 사람이 놀랍게 변하게 된 겁니다. 회심하게 된 것이죠. 그냥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나타나서, 그 사람의 관점을 완전히 변화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는 위대한 사도 바울로 변하게 되었던 것이죠.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신 그 사건을 보면서, 마음속에 확신이 생긴 겁니다. 예수는 누군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신명기의 말씀이 나무 위에 달린 자마다, 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고 하는, 신명기의 말씀이 있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돌에 맞아 죽은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그 모습을 보면서, 예수는 누군가? 사기꾼이다. 이 말이에요. 예수는 누군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그런 마음속의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며 다니게 된 것이죠.


하지만 자신이 그렇게 확신하고, 그렇게 성도들을 핍박하는 일에 앞장섰던, 이 사도 바울의 생각을 완전히 뒤바뀐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겁니다.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이죠. 순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목격하게 되었고, 그 주님을 만나게 되는 그 순간에, 지금까지 자신이 믿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 “다 잘못된 것이구나”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의 관점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것입니다. 전에는 예수님께서 나무 위에 못 박혀 죽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그래서 “순 사기꾼이다”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그 순간에, 그 관점이 변해서, 예수님께서 나무 위에 못 박혀 죽게 된 그것은, 그분이 죄가 있어서 나무 위에 달리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 모두의 죄를 짊어지고, 주님께서 우리가 받을 저주를 대신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죠.


그리고 이 예수님이 단순히 유대인들만의 구세주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구세주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전 세계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앞장을 서게 된 그런 위대한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처음에 복음을 전하게 되었을 때 유대인들은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옛날 사도 바울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과 똑같은 이유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겁니다. 하지만 전부가 다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일부는 유대인들 가운데 일부는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아무튼 이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유대인들이 잘 받아들이지 않게 되자 결국 바울 사도는 그 지경을 넓혀서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데, 그 이방인들이 놀랍게도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 받아들이게 된 겁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보면, 이방인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그 과정을 하나하나 기록해 놓고 있는 것이죠.


지난 시간에 설명드렸던 것처럼 사마리아 성에 있던 사람들도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디오피아의 내시도 이방인이었지만, 그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그런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 것이고요. 고넬료라고 하는 사람도,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는 그런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게 된 것이죠. 지금 이렇게 에티오피아의 내시라든가, 백부장 고넬료와 같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냐면, 이방인이지만 유대교에 끌려서, 유대교적 신앙을 많이 받아들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유대교는 선교에는 관심이 없던 종교가 유대교였습니다. 유대교는 선교를 할 필요를 느꼈을까요? 느끼지 않았을까요? 느끼지 않았어요. 왜?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고, 이방인들은 선택된 백성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선택되지 않은 백성들에게 복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냥 유대인들끼리 신앙생활 잘하고, 유대인끼리 지금까지 믿음을 지키면서 살아왔는데, 그래서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받아들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리라고, 그렇게 전도하거나 선교를 한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떤 일들이 벌어졌냐면, 그 당시에 있던 수많은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을 보면서 유대교의 신앙을 갖게 됐습니다.

그 당시에 세계적인 교류가 많이 이루어져서,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이 사는 지역에 와서 같이 살게 되었고, 유대인들도 전 세계에 흩어져서, 거기서 살게 되어 있는데, 이렇게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서로 어울려 사는 과정 가운데서,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엄청난 정신적인 충격을 받게 된 거죠. 영적인 충격을 받게 됐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이방인들은 어떤 종교를 섬겼는가? 다신교를 섬겼습니다. 그래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보면 거기에 엄청나게 많은 신들이 나옵니다. 수많은 신들이 다양한 신들이 나오는 거죠. 미의 여신, 바다의 신, 포도주의 신, 태양신 힘의 신 등등 여러 종류의 신들이 나오는 겁니다. 바다의 신은 누구죠? 포세이돈! 힘의 신은 누구죠? 헤라큘레스! 미의 신은 비너스! 등등 신들이 많아요. 이방종교에서는 그런데 그 신들이 어떤 신들이냐면 사람보다 조금 능력이 더 많은 거죠. 힘이 더 많거나 이쁘기를 더 이쁘거나 포도주를 더 잘 먹거나 바다에서 뭔가를 하든가 아무튼 신들이 다양한 종류의 신들이 있는데, 이 신들의 그 단점이 뭐냐 하면은, 자기의 전문 분야는 있는데, 전문 분야가 아닌 것은 힘이 없어요. 그래서 신들끼리 서로 싸우고 다투고, 신들의 세계도 마치 인간들 세계와 별다를 게 없이, 그렇게 추잡하고 더럽고 시기와 질투와, 그리고 여러 가지 다툼이 많은 그런 신들이 서로 싸우고 다투는 그런 지저분한 신들을 그들이 섬기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런 이방 사람들이 다신교를 믿으면서 생활을 하다가 유대인들을 보니까, 유대인들이 믿는 신은 정말 고상한 신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거죠. 이방종교의 신은 눈에 보이는 신이고, 자기들이 만든 신이고, 자기들의 손으로 만든 우상들이었던 것에 반해서, 유대인들이 믿는 신은 보이질 않아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신이에요. 한 분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신들을 비교해 볼 때, 이 유대교의 신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고차원적인 정말 높은 단계의 신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아서, 이방인들이 우리가 믿던 신들은 다 순 엉터리이고, 진짜 참되신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참되신 하나님이구나 하면서,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많이 귀의하게 된 것이죠.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을 바라보니까, 생활이 아주 거룩했어요. 도덕적인 삶을 살고 있었어요. 이방 종교는 어땠습니까? 이방종교는 아주 더러운 종교였던 것입니다. 다투고 싸우고 또 음란하고, 이방 신전에서 제사를 드린다고 하는 것이 창기와 놀아나는 그런 게 제사가 되기도 하고, 온갖 추잡한 일들이 이방 종교에서는 많이 벌어지고 있는 것에 반해서, 유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보니까, 이 사람들은 늘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 겁니다. 더러움에서부터 자신을 지키고, 한 사람 정말 자신의 거룩한 도덕성을 유지하고 있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수많은 이방인들이 유대교의 매력을 느꼈고 그래서 유대 종교를 배우기 시작한 겁니다.

율법을 배우고 성경을 배우고, 그러면서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수많은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참여를 하게 되는, 그런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는데, 그 사람들을 가리켜서, 무엇이라고 불렀냐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고넬료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그랬는데, 바로 그런 유대인이었다는 얘기죠. 그래서 그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유대교로 많이 이렇게 마음이 끌리고 유대교에 많이 참여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관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100% 유대 종교로 개종하려고 하면 할례를 받아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할례를 받는 것은 이방 사람들이 아주 수치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다른 것은 다 유대교를 받아들이지만, 할례 받으라고 하는 그런 요구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다 해서,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100% 개종이 아니라, 중간짜리 개종이고 반쪽짜리 개종이 되어버린 이방인들이 그 사이에 많이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에티오피아의 내시도 그런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이었고, 고넬료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었는데, 그들이 유대교에 반절 정도 발을 담그고 있었지만, 참된 복음을 모르고 있다가, 이렇게 복음을 받게 되었을 때, 이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특별히 바울 사도가 할례 없는,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 “예수님을 믿으면 된다”라고 하는 것 때문에, 그래서 많은 이방인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죠. 하지만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유대인들의 반발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 유대인들이 어떻게 반발했는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게 아니고, “먼저 할례를 받아야 한다”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겁니다. 한번 도표를 보면 좋겠는데요.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어서 그냥 영접하기만 하면 바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손을 이렇게 해야 되는군요.) 이방인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할례를 받아서, 그래서 유대인으로 바뀌고 난 다음에, 왜냐 유대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기 때문에, 할례를 먼저 받아서 유대인이 돼야, 그러고 나서 예수님을 영접해야, 구원을 받는 것이지,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하는 유대인들이 주장을 하게 된 겁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놓고서 예루살렘 회의를 통해서 이야기를 한 거예요. 과연 유대인들이 할례를 받게 의무를, 할례를 받으라고 의무를 주어야 할 것인가? 할례를 받지 않아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칠 것인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모여서 수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논의하기 시작하다가, 어떤 결론을 내리게 됐습니까? 다음 도표를 보게 되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례를 받은 사람이나,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나,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구원을 얻게 된다.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결론을 예루살렘 회의에서 결정을 내린 것이죠. 그래서 그때부터 이제는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그 복음으로 수많은 이방인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 예수님을 영접하고 오늘 본문에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믿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라고 하는 그런 결론을 가져오게 된 것이죠.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의 결론은 정말 놀라운 결론입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 서로 논의를 하면서, 정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책은 신구약 성경을 다 가지고 있었을까요? 구약 성경만 가지고 있었을까요? 구약만 갖고 있어요. 그런데 그 구약만 가지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결론을 내릴 때 뭐라고 결론을 내리면, “할례를 안 받아도 된다”라고 결정을 내린 거예요. 이게 아주 놀라운 거예요. 구약 성경을 읽으면 “할례를 안 받아도 된다”라고 하는 결론을 내리기가 쉽습니까? 어려워요! 왜냐하면 구약 성경을 보면 “할례를 받아야 된다”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구약 성경만 보면, 할례를 반드시 받아야만 하는 것이고,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공동체에서부터 쫓겨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공동체로부터 내어 쫓기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그 말씀이 구약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 이 구약 성경을 가지고 서로 이야기하면, 어떤 결론을 나오는 게, 어떤 결론이 나와야 당연한 결론처럼 보입니까? “이방인들 구원받으려면 할례 받아야 된다”라고 하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은, 구약 성경을 가지고 있던 이 성도들이 성경의 내용과는 정반대의 결론을 내린 것처럼 보입니다. 할례를 안 받아도 된다. 어떻게 이런 결론이 가능했습니까? 그것은 조금 전에 일어났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놀라운 역사를 일으킨 그 사건을 묵상해 볼 때, 구약 성경을 읽을 때, 구약 성경만 읽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주셔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그 구원의 사건을 렌즈로 해서, 그 예수님의 사건을 통해서 구약 성경의 말씀을 보게 될 때, 아,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 구약의 모든 율법의 요구들을 다 이루셨고, 구약의 모든 그 요구들을 다 폐지하셨고, 이제는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이런 놀라운 구원을 베풀어주셨다고 하는 것을, 그 예수님의 사건을 통해서 구약 성경을 읽게 될 때 놀라운 결론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이게 어마어마한 결론인 것이죠.

오늘 우리도 성경을 읽을 때 어떻게 성경을 읽어야 됩니까? 종종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처럼 성경을 읽을 때가 있어요. 늘 성경에서 우리를 향해서 들려주시고 있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린아이들처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책망하고 계시는 말씀들이 있는데,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성경을 대할 때가 많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뭐라고 이야기를 하죠? 엄마가 이거 해라. 그러면 “엄마가 그렇게 하라고 했잖아” 하면서 해요. 그건 하지 말아야 될 상황인데, “엄마가 말했잖아” “엄마가 하라고 했잖아.” 하지 말아야 되는 상황인지, 그걸 하지 말아야 되는 상황인지 구분하지 않고, 엄마가 말했으니까, “무조건 해야 된다”라고 이야기하는, 그런 바보 같은 어린아이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아요.

우리는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되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그 구원 사역의 렌즈를 통해서, 성경 말씀을 읽게 될 때,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제는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라고 결론을 내린 것과 같이, 우리가 복음의 눈으로 성경을 바라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근데 안타깝게도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옛날 모세가 얼굴에 수건을 가린 것처럼, 오늘날에도 성경을 읽을 때, 그 수건이 가려져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그냥 문자의 틀에 갇혀져 버려서, 그것이 진짜 믿음인 줄 알고, 그것이 정말 제대로 된 믿음인 줄 알고, 그렇게 반응하는 성도들이 종종 있을 수가 있겠는데요. 그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이고 예수님께서 무엇을 이루셨는가를 잘 깨달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분별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복음을 증거 하다가 엄청난 고난을 당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 사도의 그 이야기는 자꾸만 문제가 꼬여가는 내용이 사도행전 그 후반부에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으로 갔어요. 예루살렘에 가서 그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하고 이야기를 하니까,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바울 사도에게 말을 합니다. 사람들이 너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다. 너는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말하고 다닌다고 오해하고 있고, “유대인들에게 자기 자식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라고 그렇게 가르치고 다닌다”라고 그렇게 오해하고 있다. 바울 사도가 유대인들이 할례 받는 것에 대해서 반대한 건 아니거든요.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안 해도 된다”라고 얘기한 것이지, 유대인들에게 할례 하지 말라고 이야기한 건 아닌데, 사람들이 너를 생각하기를, 너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습 다 내버리고, 할례도 우리 유대인들이, 할례도 시키지 말라고 하고 그렇게 다닌다고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으니,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바울 사도에게 권면하는 겁니다. 여기 왔을 때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하는 것을 한번 예루살렘 유대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고 권면을 합니다. 그러니까 바울 사도가 생각해 보니까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괜히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오해받을 필요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겠노라고 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그래서 율법을 제대로 잘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게 된 거죠.


하지만 그게 일이 꼬여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온 바울 사도를 보면서 이방인을 예루살렘 성전 안으로 데리고 들어온 것이라고 오해하게 돼버렸어요. 왜냐하면 바울 사도가 이방인과 함께 시장에서 걸어 다니고 있는 모습을 봤거든요. 그러니까 그 사람을 예루살렘 성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간 것이라고 오해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가면 그 예루살렘 성전에 여러 가지 구획들이 있는데, 제사장이 들어갈 수 있는 지역, 그리고 유대인 남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지역, 유대인 여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지역, 그리고 이방인들도 올 수 있는 지역으로 이렇게 구분이 되어 있는데, 이방인들이 유대인 남자와 여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지역으로 들어갈 수 없게 돼 있습니다. 거기에 뭐라고 쓰여져 있냐면, 이방인들이 예루살렘 성전 이 문을 지나서 들어오면, 죽여버릴 거라고 하는 경고문이 딱 붙어 있어요. 그 성전에 그러니까 이방인들이 들어가면 안 되는 거죠. 할례 받지 않은 사람이 들어가면 죽는 겁니다. 근데 그 이방인들을 그 안에 데리고 들어간 걸로 사람들이 오해하게 된 거예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제안했을 때는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제안한 것이 아니라, 그 오해를 풀기 위해서 그런 일을 하라고 했는데 오히려 더 큰 오해를 받게 된 것이죠. 그래서 결국 재판을 받게 됐습니다.

재판을 받는 과정 가운데서 바울의 조카가 소문을 들었는데 유대인들이 암살 시도를 하고 있다고 하는 소문을 듣게 됐습니다. 그래서 만일 바울 사도를 이송하는 계획이 성사가 된다고 하면 매복하고 있다가 덮쳐서, 바울 사도를 죽이겠다고 하는 그 정보를 들어서 그것을 이야기해 줍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바울 사도가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나는 그렇게 이동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이곳에서 재판받는 것을 원하지 않고, 나는 로마 황제 가이사 앞에서 재판을 받고 싶다고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고위 관료들이 와가지고, 이 바울 사도의 이야기를 쭉 들어보니까 바울 사도가 죄가 없어요. 바울 사도가 잘못한 게 없어요. 죽일 만한 죄가 없어요. 그래서 이 사람들의 의견이 뭐냐면, 이 사람은 죄가 없으니 “풀어줘도 된다”라고 하는 게 그곳에 모였던 많은 관리들, 아무튼 재판관들의 의견이에요. “바울을 풀어줘도 된다”라고 하는 게 의견이에요. 하지만 풀어주지 못했어요. 왜 왜 못 풀어줬어요? 가이사에게 항소했기 때문에 무조건 가야 되는 거예요. 바울 사도가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암살 시도를 피하기 위해서 가이사에게 항소했지만, 사실은 그 항소한 것 때문에 그냥 쉽게 풀려날 수 있는 것을 못 풀려나게 된 것이고, 그래서 저 로마에까지 압송되어 가게 되는 일이 자꾸만 꼬이는 거죠.


오해가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또 죽임을 피하기 위해서 했던 일들이 오히려 더 일이 더 꼬이게 만들어서, 무죄 방면될 수 있는 것을 방면되지 않고 더 재판을 받게 되는 길게 받게 되는 자꾸만 꼬여가는 일들이 나오게 된 것이죠. 그러니까 정말 재수 없는 인생이었던 건가요? 그게 아니었던 거예요. 그 모든 것들이 사람들이 보기에는 꼬인 인생이고 재수가 없는 인생이고 뭔가 더 악화되고, 더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 과정 하나하나를 통해서, 바울 사도는 수많은 임금들에게 수많은 그 권력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그리고 배를 타고 가면서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또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고, 로마로 가서 거기서도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되었던 것이죠.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마태복음 10장 16절에서부터 18절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인간적인 측면으로 보면 재수가 없어요. 인간적인 측면으로 보면 정말 오해의 오해를 거치면서 어려움을 당했어요. 그런데 사실은 그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게끔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는 그 기회로 삼게 된 것이고, 그걸 통해서 결국 수많은 복음들이 전파되게 된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구원을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역사는 때로는 실수처럼 보일 때가 있어요. 때로는 망가진 것처럼 보일 때가 있어요. 그러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그 하나님께서 그 실패마저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히려 감사하고 오히려 담대하게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Loading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