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잠언서 18장 1절의 말씀을 살펴보게 되었는데요. 잠언서 18장 1절 말씀은 무리에게서 갈라지는 사람, 무리에게서부터 떨어져 나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무리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그런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 “자기의 욕심을 따르는 사람”이다. 자기의 욕심을 따르기 때문에, 그렇게 무리에서부터 갈려져 나가는 것이라고, 그렇게 진단하고 있는 것이고요. 그렇게, 그 사람은 어떠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 그 어떤 지혜의 말이 들려도, 그 모든 지혜들을 다 거부해 버리는, 그런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는 게, 오늘 잠언서 18장 1절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결론은 무엇입니까? 갈라지는 것이 좋겠습니까? 하나가 되는 것이 좋겠습니까? 하나가 되면 좋겠죠? 믿습니까? 끝났습니다. 오늘 설교. 좀 더 해드릴까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가 되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하나가 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을 다 가진 채,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내가 가지고 있는 주장, 이런 것들을 포기해야만 다른 사람들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도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고, 나름대로의 주장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주장과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과 내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생각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가 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대표적인 예가 어딥니까? 국회를 보시면 아시잖아요? 여당과 야당이 하나가 돼요? 안 돼요? 안 돼요! 죽어도 안 돼요. 죽었다 깨나도 안 돼요. 왜 서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입장을 끝까지 주장하기 때문에, 자신의 주장을 양보하면서, “그래, 우리 하나씩 양보해 보자.” “우리의 주장이 이거고, 너의 주장이 이만큼인데, 그 주장 가운데서 조금씩 조금씩 양보해서, 그래서 중간 정도에서 우리 맞춰보자.” 서로가 자신의 것을 조금씩 조금씩 내려놓을 때,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인데, 안타깝게도 자신의 것은 하나도 포기하지 아니하면서, 내 밑에 굴복해라. 내 밑에 엎드리라고 강요하고는, 그 상황 가운데서는 하나가 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가 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부부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가정을 이루게 되는 것인데요. 남편과 아내가 만나게 된다고 한다면, 이제는 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몸으로, 부부를 만들어 주셨으니까 남편과 아내가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끝까지 밀어붙이게 된다고 한다면, 그 가정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깨지는 거예요. 성격 차이로 끝나는 겁니다. 가정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남편이 가지고 있던 생각을 내려놔야 돼요. 가정이 하나 되기 위해서는, 아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내려놔야 되는 것이죠.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밀어붙이게 되면, 결코 그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밀어붙이게 되면, 그 주장에 억지로 억지로 끌려가는 한 사람의 희생 때문에, 그 가정이 겨우겨우 유지는 될 수 있겠지만, 가정을 유지는 할 수 있겠지만, 정말 그 가정이 행복한 가정 천국과 같은 가정이 될 수는 없는 것이죠. 남편과 아내가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남편도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아야 하고, 아내도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아서 서로 맞추고 서로의 생각을 조금씩 조금씩 조율해 가면서 내 것을 포기해야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정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부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행복한 가정은 어떻게 만들어 갈 수가 있겠습니까? 행복한 가정은 내 생각을 내려놓고, 배우자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배우자의 생각과 배우자의 복지와 배우자의 그 모든 좋은 것을 위해서, 내 것을 희생하고 양보하면서, 그래서 맞추어 나갈 때, 그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 될 수가 있는 것이죠. 내 욕심을 내려놓고 배우자를 위해서 최선의 봉사를 하게 될 때, 그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쉬울까요? 쉽지 않은 거예요. 제가 결혼해서 보니까, 저랑 제 아내랑 맞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생각이 다 틀리고, 모든 것이 다 틀려요. 어쩜 이렇게 100% 안 맞을 수가 있을까 할 정도로 아무것도 맞는 게 없어요. 그런데 그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왔던 모든 생각들을 하나도 포기하지 아니하고, 내 생각에 맞추라고 서로 강요하다 보니까, 그러니까 너무나도 힘들고 괴로운 것이죠. 너무나도 참 부부로서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 그 가정이 행복해질 수 있는가? 내 것을 버리기 시작했을 때, 이걸 버리면 죽는 줄 알았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내가 해오던 방식 이런 것들을 버리면, 나는 끝장 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것을 버리고, 아내의 기쁨을 위해서 내 생각을 내려놓기 시작하는 그 순간에, 오히려 기쁨이 생기고, 행복이 생기고, 이렇게 정말 우리의 살아가는 인생이 얼마 되지 않는데, 우리가 함께 맞추어 나가기를 처음부터 그렇게 했더라고 한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좋은 시절에, 그 젊은 시절에 “생각을 다 맞추었다”라고 한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때 잃어버린 시간이 너무나도 안타깝게 느껴지게 되는 것이죠.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는 내 생각을 내려놓고, 배우자의 생각에 맞추어 주고, 복종하되, 피차 복종하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너희가 서로 피차 복종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피차 복종하라고 하신, 그 주님의 말씀에 따라서, 서로가 내 주장이 아니라, 서로 피차 복종해 나갈 때,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갈 수가 있는 것이고 하나가 될 수가 있는 것이죠.
하지만 그렇게 하나가 되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왜 쉽지가 않을까요?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다 죄성으로 가득한 죄인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이기적이고 나 중심적인 생각이 너무나도 강해서, 내가 나의 것을 내려놓기보다는, 내 것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움켜주고자 하는, 그런 죄악된 마음이 우리의 마음을 깊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하나 되기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 되지 못하고 갈라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르고, 뛰쳐나가는 결정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천국과 같은 가정이 될 수가 있는데, 그렇잖아요?
이 세상에서 살다가 힘들고 어려워도, 참 고통스러워도, 집 안에 들어가서 아내의 얼굴을 보기만 하면, 사랑하는 자녀들을 보기만 하면, 모든 괴로움과 슬픔들이 눈 녹듯이 녹아버리고, 다시 한 번 힘과 용기를 얻게 되는, 그런 천국과 같은 가정을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것을 내려놓지 않기 때문에, 그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아니라, 지옥으로 변해버린 가정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는 것이죠.
공동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공동체는 어떻게 하나가 될 수가 있겠는가? 공동체가 하나가 되는 비결은 간단합니다. 내 것을 주장하지 않고, 내려놓을 때, 그때 공동체는 하나가 될 수가 있는 것이죠.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자기 자신의 주장과 생각을 내려놓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계속해서 밀어붙이게 된다고 한다면, 그 공동체는 하나가 되지 못하고 박살 나게 되어 버리겠습니다. 행복한 교회 공동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공동체는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이 그렇게 몸살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지 못하고 서로 싸우고 있는 교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몰라요. 우리 주변을 눈을 들어서 살펴보면, 그렇게 서로 서로 싸우고 있는 교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게 되는 것이죠. 교회 안에서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고, 마음이 맞지 않아서 뛰쳐나가기도 하고, 그래서 갈라서고 외톨이가 되고, 그 공동체에 머물지 못하고 뛰쳐나가는 그런 안타까운 결정을 할 때가 너무나도 많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그냥 이런 개 교회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교단적인 차원에서도 분열이 일어날 때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요즘에는 교단이 그렇게 갈라지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마는 예전에는 교단의 분열이 너무나도 자주 일어난 적이 있었습니다. 장로교회가 원래 하나였었는데, 기장 측과 갈라졌고, 합동과 통합이 갈라졌고, 그리고 또한 개혁쪽으로 갈라지고, 이렇게 갈라지고 저렇게 갈라지면서, 교단들이 얼마나 많이 갈라졌는지 몰라요. 그런데 그렇게 갈라질 때 명분은 무엇인가? 그럴듯한 명분을 세웠어요. 신앙을 수호하겠다고, 정말 바른 믿음을 수호하겠다고 하는 명분을 내놓았는데, 역사를 공부해 보면 그것은 명분뿐이지, 그게 진짜 이유가 아닌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아요. 사실은 명분을 그렇게 내세웠지만, 그 뒤에 있는 욕심과 잘못된 생각들이 그 교단을 갈라놓고, 그렇게 서로 싸우고 분 분열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어 왔는지 모릅니다. 탐욕과 욕심 때문에 나뉘게 되는 것이죠. 오늘 잠언서 18장 1절에서 그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리에게서 스스로 갈라지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욕심 때문에 갈라지는 것이지, 복음을 위해서 선을 위해서 갈라진다고 하는 그런 명분을 세우지만, 사실은 그것은 명분일 뿐이고, 그 내면의 깊은 곳에 사람들에게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 마음속에 있는 욕심, 탐욕 여러 가지 죄성 때문에, 교회가 갈라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나 되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갈라지기보다는, 싸우고 분열하기보다는, 서로 다름이 있어도 단점이 있고 약점이 있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고, 여러 가지 나쁜 것들이 없지가 않아요. 우리가 완벽하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야 될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우리가 다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다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마다 다 잘못된 것이 있고, 단점들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구제불능인 우리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야만 했고, 저와 여러분들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주셔야만 했던 것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러 가지 단점이 있고 잘못된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나 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비난하고 정죄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리새인들이 되러 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우리 한국 교회가 정말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서는 크리스천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위선적인 바리새인들만 많이 양산해 버려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죄에 대해서는 다 눈 감아버리고, 자신은 뒤로 해서 온갖 잘못들을 저지르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는 잘못들을 비난하고 정죄하면서, 너는 우리와 같이 갈 수 없는 세리요, 너는 우리와 같이 갈 수 없는 창기요, 너는 우리와 도무지 같이 갈 수 없는 이방인이라고 수많은 사람들을 배제시키면서, 하나가 되지 못하는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포장할 때가 너무나도 많지만,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오늘 잠언서 18장 1절에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무리에게서 스스로 갈라지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라고 말씀해 주신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 마음 가운데 나뉘고자 하는 그런 욕망들이 꿈틀거리거들랑, 내 마음속에 있는 여러 가지 욕심, 탐욕의 죄가 있지는 않은지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한 기도의 제목들이 요한복음 17장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데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존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성부 하나님과 예수님의 마음이 완전히 일치하듯이, 우리 제자들 하나하나가 모두가 다 마음이 하나가 되어서, 그래서 거룩한 교회를 만들어 나가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말 거룩한 백성을 만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마지막 기도의 제목이 우리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서,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했던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당연한 것이죠. 그것은 내 욕심을 내려놓고 나의 탐심을 내려놓고 그래서 우리가 서로 맞추어 나가며 하나가 되려고 할 때, 우리는 하나가 될 수가 있는 것이고, 그런 교회를 그런 가정, 그런 공동체는 행복한 공동체가 될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안타깝게도 욕심으로 가득 가득하게 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요. 내 마음 가운데 욕심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욕심을 가지고 있게 된다고 한다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무리에게서 갈려 나가서 하나 되지 못하는 결정들을 많이 하게 되는 것이죠.
욕심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 가운데 욕심이 있다고 한다면 그 욕심은 무엇일까요? 그 욕심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골로새서 3장 5절 말씀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내가 탐욕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우상을 섬기는 것과 똑같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죠. 내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내 마음 가운데 욕심이 있다고 한다면, 탐심이 있다고 한다면, 사실은 그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상을 섬기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까? 우상을 섬기게 되면 선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나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죠. 잘못된 결과만 나타나는 것이죠. 그래서 내가 욕심이 있게 되면,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갈라서게 되고, 외톨이가 되게 되고, 무리 가운데서 뛰쳐나가는 결정을 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나의 자존심을 내려 내려놔야 되는 거에요.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주장할 그 권리를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죠.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내 중심에 이기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를 인정하지 않고 나에게 박수 쳐주지 않고 나에게 고개 숙이지 않는, 그런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그 무리 속에서 뛰쳐나가게 되는 거에요. 내가 왕이에요. 나의 욕심 앞에 모든 사람들이 굴복하기를 원하는 탐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리 가운데서 뛰쳐나가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뛰쳐나가면, 그것이 괜찮은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아주 위험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망각한 채 뛰쳐나가는 것이죠.
무리에게서 나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얼마나 영적으로 취약한 상태로 자기 자신을 집어넣는 것이냐 하면, 마치 얼룩말이 그 무리 가운데서 뛰쳐나가서 맹수에게 밥이 되어 버리는 경우와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나약한 초식 동물인 얼룩말이 어떻게 해서 그 밀림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얼룩말의 무리 가운데 함께 들어 있을 때 사자들이 와서 공격을 한다고 할지라도, 하이에나가 와서 공격한다고 할지라도 얼룩말들이 함께 모여 있다고 한다면, 서로가 서로를 보호하면서, 그런 맹수들의 공격을 무사히 피해 나갈 수가 있는 것이죠. 하지만 그 무리에서 떨어져 나간 한 얼룩말은 이내 사자의 밥이 되고 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욕심으로 인해서, 나의 이기적인 탐욕 때문에 공동체에서부터 뛰쳐나가고 하나가 되지 못한다고 한다면, 우리가 1 플러스 1이 2가 아니라 10이 되기도 하고 100이 되기도 하고 공동체의 파워가 어마어마하게 된 것인데, 그 공동체의 파워 가운데서 우리 자신을 내 욕심 때문에 떨어져 나가게 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결국 사탄의 밥이 되고야 말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다른 사람들의 지혜로운 말을 전혀 듣지 않는 것이죠. 잠언서 18장 1절 말씀 오늘 말씀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 무리에게서 나누는 사람은 사람들이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정말 바른 말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한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들을 다 배척하면서 떨어져 나가게 될 때, 결국 그 사람의 말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영적으로 사탄의 노예가 되어 버리고, 사탄의 밥이 되어버리는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우리의 기도 제목이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주님, 저의 욕심을 내려놓게 하시고, 저의 탐욕스러운 마음들을 내려놓게 하셔서, 공동체가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저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혹시라도 제 욕심 때문에, 제 사악한 마음 때문에 공동체에서 뛰쳐나가고자 하는 그런 욕망이 생기지 아니하도록, 저를 지켜 보호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이죠. 나는 지금 탐심 가운데 있는가? 나는 지금 욕심 가운데 있는가? 나는 내 것을 내려놓고 있는가? 포기하고 있는가? 하나 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우리가 하나 되기 위해서, 내려놓아야 될 나의 선입견은 무엇인가?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이것은 흔들릴 수 없는 옳음이라고 생각했던, 그것 내려놓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기도해야 하는 것이죠.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확신 가운데 있어요. 우리 크리스천들 우리 한국 크리스천들의 약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쉽게 확신하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경험했던 그 경험들의 근거한 여러 가지 생각들이 그 형성되어 왔던, 그 모든 생각들을 하나의 교리처럼 교조처럼 그렇게 받아들여서,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그런 내 생각으로 굳어져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래서 그 생각이 너무나도 많이 굳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겁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생각 그것이 너무나도 강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이죠.
예전에 제가 시무하던 교회에 어떤 한 분이 그랬어요. 그분이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신 분인데, 그분이 신앙생활을 해왔던 경험들을 가지고 있어 가지고, 이거 이런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된다고 하는 규칙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래서 교회 안에서 무슨 일인가 하려고 하면 금세 그분이 발언을 하세요. 그건 법이 아닙니다. 세상에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건 안 됩니다. 저건 안 됩니다. 그래서 결국 교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요. 시대는 지금 엄청나게 변해서 AI 시대로 가고 있고 시대는 변해서, 정말 우리가 핸드폰으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그런 시대에 엄청나게 모든 것들이 다 변해버렸는데 그 사람의 생각이 어디에 굳어져 있는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그때는 자동차도 없어서 걸어 다녀야만 했었던 그 시대에 만들어진 그 조직, 그 시대는 휴대폰도 없었고 아무런 통신 SNS 도구도 없던 시대에 만들었던 그 제도, 그때에는 정말 이런 방법 저런 방법도 아무것도 알 수 없었던 그 시대에 만들어졌던 그런 모든 제도들이 그게 내 마음을 꽉 붙잡고 있어서 지금 이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핸드폰이 그렇게 어마어마한 일을 해내고 있는 그런 시대 아닙니까? AI가 얼마나 많이 발달된 세대입니까? 제가 요즘 AI를 가지고 뭐 하나 만들고 있는데 놀라워요. 어마어마한 일들을 만들어내고 있어요. 그런 일들이 막 벌어지고 있는데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자동차도 없던 호롱불 켜고 있던 그 시대의 생각에 사로잡혀서 절대로 이런 거 안 됩니다. 저것은 안 됩니다. 내 생각을 전혀 변개시키지 못하면서, 내려놓지 못하면서 교회가 발전하지도 못하고 하나 되지도 못하게 만드는 그런 어리석은 일들을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 성도들이 너무나도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믿음의 방식에 대한 확고함이 너무나도 강할 때가 많아요. 그런데 개혁주의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신앙, 우리 교회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칼빈주의 개혁주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항상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려왔던 전통이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전통일까? 또 성경으로 돌아가는 거, 또 성경으로 돌아가는 거, 또 성경으로 들어가 지금까지 우리가 익숙해져 있던 그 모든 것들이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일까? 다시 한 번 내 생각을 내려놓고, 내 욕심을 내려놓고 또 성경으로 돌아가야 되는 거.
예전에 태국에 갔더니, 태국에서 시장에서 생선을 파는데, 생선을 어떻게 파냐면, 생선 머리가 꺾여져서 팔아요. 혹시 태국 가서 그거 보신 적 있습니까? 이번 주에 태국 가시는 분들 한번 가서 보세요. 생선을 파는데 어떻게 파는가? 생선이 이렇게 돼 있는데 그냥 이렇게 팔지 않고 생선 머리를 꺾어놨어요. 마치 인사하는 것처럼 다 그렇게 그래서 하도 신기해가지고 제가 물었어요. 왜 생선 머리를 이렇게 다 꺾어놨느냐 그랬더니, 그 태국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도 몰라요. 왜 꺾었지? 꺾어서 팔고 있는데 왜 꺾었는지 모르는 거예요. 자기들도 모르고 그냥 옛날부터 꺾어서 팔았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꺾어서 무조건 판다는 거에요. 왜 꺾어서 팔았을까요? 제가 추측하는 추측이 무엇이냐 하면, 옛날에 바구니를 만들었는데 바구니가 조그마한 걸 한 겁니다. 생선이 다 안 들어가요. 그러니까 그 바구니 크기에 맞춰서 생선을 꺾어 가지고, 그 바구니 크기에 맞춰서 판이라고 생선을 그렇게 꺾어서 바구니 속에 넣어서 판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바구니가 얼마나 많아요? 플라스틱 바구니가 사이즈가 얼마나 많아요? 그런데도 다 꺾어놨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져야 되는 거죠. 과연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경 말씀에 근거한 것인가? 개혁주의는 무엇인가? 총신(대학교)에 개혁주의란 무엇인가라고 쫙 적어놨는데, 마음에 안 들어요. 잘못 적어놨어요. 개혁주의란 무엇인가? 우리의 생각을 항상 성경 말씀에 비추어서 다시 한 번 우리를 고치는 거예요. 우리의 생각으로 우리의 아이디어로 모든 것들을 다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내 자신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서, 내가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혹시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내가 이게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시대가 바뀌어서 정답이 아닌 것은 아닐까? 늘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봐서 또 비추어 보고 또 비추어 보아서, 전통으로 굳어졌지만, 그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벗어난 것은 없는지, 다시 한 번 또 비추어 보고 또 비추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이죠. 하나가 되기 위해서 내려놓아야 될 내 생각은 무엇인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 내려놓아야 될 내 주장은 무엇인가? 내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 생각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한, 우리는 하나가 되지도 못하고,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고, 결국 그 인생은 사탄의 밥이 되기 쉽고 결국 그 공동체는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다시 한 번 서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 우리가 다시 한 번 서야 하는 것이죠.
놀랍게도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생각을 맞추었습니다. 아버지요. 할 만하시거든. 이자를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기도했지만, 그러나 그 결론은 나의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내 생각을 내려놓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맞추었을 때, 하나님과 우리 예수님 사이에 완벽한 하나 됨을 이루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늘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좁은 길로 들어가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이야기는 우리가 분리주의로 가는 게 괜찮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좁은 길로 가라. 좁은 문으로 가라고 하신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멸망의 길로 악을 행하며 간다고 했을 때, 그 길을 따라갈 것이 아니라 참된 믿음의 길을 가야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그런 말씀을 해 주신 것이지, 우리가 외톨이가 되고 무리에서 뛰쳐나가고 내 생각을 꺾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과 같이 할 수 없다. 나는 이 사람과는 도무지 같이 갈 수 없다. 이 공동체와는 같이 갈 수 없다. 그렇게 해서 내가 외톨이가 되어 뒤쳐나가는 것이 그게 신앙적인 것이라고 하시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은 쉬운 게 아니에요. 엉터리 멸망하는 가짜 믿음은 너무나도 신앙이 쉬워요. 왜? 그냥 자기가 알고 있는 몇 가지만 붙들고 신앙생활하기 때문에, 그게 자기를 멸망의 길로 이끌고 가는지 아닌지 묻지도 않고, 그냥 무조건 맹목적으로 따라가다가 망하는 거예요. 하지만 참된 믿음은 무엇인가 언제나 질문을 던져봐야 되는 것이죠. 과연 내가 가는 길이 맞는 길일까? 과연 내가 걸어가는 이 방법이 맞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일까? 내 주장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내어놓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길에 나 자신을 맞추어 가고, 그래서 온 교회가 하나가 되는 그런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는 어떤 한 사람의 그런 생각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담임 목사의 생각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의 생각을 끊임없이 맞추어 나가는,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무엇인가를 결론을 늘 질문을 던져야 하기 때문에, 그 신앙생활이 쉬운 길이 아니라, 늘 질문하면서 나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날마다 기도할 때, 막 외쳐버리고 기도하고 끝날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가운데 멈추어 서서, 과연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진지하게 묵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고, 하나님의 뜻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가운데 우리의 생각들을 맞추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