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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물과 같은 말 (잠 18:4)

오늘 잠언서 18장 4절의 말씀을 우리가 함께 살펴보게 됐는데요. 성경책을 가만히 보시면, “명철한 사람의 말은 사람의 입에 마른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솟구쳐 흐르는 뇌와 같으니라” 이렇게 잠언서 18장 4절에 기록돼 있는데, 가만히 성경책을 보시면 “명철한”이라고 하는 글자가 작은 글씨로 인쇄돼 있는 성경책이 있을 겁니다. 혹시 본인의 성경책에 작은, “명철한”이라고 하는 게 작은 글씨로 인쇄된 성경책이 있으신가요? 네, 있으시군요. 왜 작은 글씨로 써놨을까요? 그것은 성경 원문에 없는 내용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 원문에는 어떻게 되어 있냐면, “사람의 입에 마른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솟구쳐 흐르는 내와 같으니라”라고 히브리어 원어에 그렇게 돼 있는 것이죠. 그런데 성경을 번역하는 번역자가 아무 사람의 말이 깊은 물과 같은 것이 아니라, “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이 깊은 물과 같은 것이 아닐까? 나름대로 해석을 해서, 해석해서, 의역해서 번역했기 때문에, 이 “명철한”이라고 하는 이 단어가 똑같은 사이즈의 글씨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글씨로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 이 “명찰한”이라고 하는 말이 들어간 것은, 번역자의 주관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런데 제가 볼 때는 굳이 “명철한”이라고 하는 해석을 거기에다 붙여줄 이유가 없어요. 그냥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다” 그렇게 해도, 충분히 이해가 되는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사람의 입의 말, 사람이 하는 그 말이 깊은 물과 같다고 하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깊은 물이 무엇이죠? 깊은 물을, 깊은 물이라고 하는 비유를 사용하고 있는데, 무엇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람의 말이 깊은 물과 같다고 그렇게 표현을 했을까요? 잠언서의 말씀은 이 깊은 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그 의미를 상상해 볼 수밖에 없겠는데요. 어떻게 상상해 볼 수 있을까요? 깊은 물은 무엇인가?


만약에 물이 있고, 시내가 있고 그러면, 그 주변에 있는 나무들이 아주 잘 자라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그래서 이 깊은 물이 무엇인가? 만일 우리가, 명철한 사람의 말을 하게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깊은 물과 같아서, 그 물 옆에 있는 그 식물들이 아주 잘 자라게 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고,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그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선한 사람이 하는 말, 의로운 사람이 하는 말, 지혜로운 말, 이런 말들이 무엇과 같은가? 마치 깊은 물과 같아서, 그 물이 공급되는 것으로 인해서, 식물들이 아주 잘 자라게 되는 것처럼,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그 말과 같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시편 1편 3절 말씀에 보면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하는 말씀이 있는데요.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비실비실 말라서 안 자랍니까? 아주 잘 자라게 되어 있습니까? 잘 자라게 되는 것이죠. 물을 잘 공급받기 때문에, 그 나무는 잘 자라게 되는 것이고, 잎사귀가 무성하게 열리게 될 것이고, 또한 열매들도 잘 맺히게 되는, 그런 풍성한 그 영양분을 공급해 주는, 물을 공급해 주는 그 시냇가 옆에 있다고 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의미인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입의 말이, 그런데 아무 사람의 입의 말이 그런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의 말이 그런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요? 명철한 사람의 말이 그런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고, 선한 사람의 말이 그런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번역자가 여기에다가 “명철한”이라고 하는 그런 해석을 담아서 번역을 해 놓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열왕기상 17장 5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는데요. 엘리야가 아합과 이세벨을 피해서 도망간 것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엘리야 선지자는 아흐왕을 피해서 도망갈 때 어디로 도망갔습니까? 광야로 도망가면 잘 살 수 있을까요? 거기서 잘 살 수가 없는 것이죠. 광야에는 물이 없고, 그래서 식물도 없고 동물들도 없고 거기서 지내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로 하여금 어디로 가라고 이야기를 했냐면, 너는 저 요단 그릿 시냇가로 가서, 거기서 있으라고 이야기해 준 것이죠. 그래서 이 엘리야가 어디로 도망갔는가? 바로 이 시냇가로 도망가서, 거기서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떡과 고기를 먹으며 신을 수가 있었던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사람의 입의 말이 “깊은 물과 같다”라고 하는 그 말은 우리가 하는 그 말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선한 영향을 끼친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사람의 입에 말이 마치 깊은 물과 같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의 말은 어떨까요? 악한 사람이 하는 말은 어떨까요? 그것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파멸시켜버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일어서지 못하게 만들고, 쓰러져서 도무지 일어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리는, 그런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말이 악한 사람의 말이라고 할 수가 있겠고, 어리석은 사람이 하는 말이 그런 효과를 가져온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어리석은 사람의 말은 무엇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역시 “깊은 물과 같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여기서 깊은 물은 어떤 물일까요? 빠지면 죽는 물이죠. 그래서 이 지혜로운 사람, 명철한 사람, 의로운 사람의 말은 깊은 물과 같아서, 그래서 그 주변에 있는 나무들이 잘 자라고, 열매를 맺고,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깊은 물과 같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이 하는 말, 악한 사람이 하는 말도, 역시 깊은 물과 같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 물은 어떤 물이에요? 사람이 잘못 들어가서 빠져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물, 사람들을 파멸시키는 그런 물과 같이 이 될 것이다라고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다.


여러분은 물이 무섭습니까? 안 무섭습니까? 저는 물이 굉장히 무섭습니다. 왜 무서운가?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요. 교회에서 하는 수련회를 따라갔습니다. 수련회를 따라갔는데, 저 경기도 가평 계곡에 가서, 그 시내가 있는 곳에 갔는데, 거기서 강물이 세게 흐르고 있는데, 그 강물 방죽을 따라서 걷다가, 물이 너무나도 많이 흐르는 그 모습을 보고, 이쪽으로 계속해서 갈 수는 없으니까, 빙 돌아가야 되겠다 하면서, 빙 돌아가다가 거기 이렇게 둑이 시멘트로 이렇게 딱 돼 있었는데, 발 밑에 이렇게 있는데, 툭 꺼지는 곳이 그래 가지고,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그 강 속에서 잘못 들였다가, 그 속에 쑥 빠져가지고 그때 죽을 뻔했어요. 그랬더라면 여러분들하고 만날 수도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6학년 때 그 물속에 콕 빠지는데, 제가 수영을 할 줄 모르는 그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살 수 있을까? 큰일 났다. 이제 난 꼼짝없이 죽었구나, 생각할 때, 생각하기를, 숨을 멈추고, 내가 가만히 있으면, 내 몸이 둥둥 뜨지 않을까? 하면서, 숨을 멈추고 코를 딱 잡고, 몸을 웅크리고 있으니까, 몸이 툭 뜨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누가 밖에서, 저 멀리서 제가 물에 빠진 것을 보고서, 막 달려와서 저를 구해주는 바람에 그래서 살았어요. 그래서 저는 물이 너무나도 무섭습니다. 지금도 수영을 못합니다. 우리 세 식구들 중에 아내도 수영을 잘하고 딸들도 수영을 잘하는데, 가장인 저만 수영을 못해서 늘 밖에서 있는데요. 그런데 물이 그렇게 아주 위험한 것이죠.

악한 사람의 말, 어리석은 사람의 말은 무엇과 같은가? 사람을 빠뜨려 죽일 수도 있는, 그런 깊은 물과 같아서,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파멸로 이끌 수 있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그래서 오늘 잠언서 18장 4절의 말씀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은 깊은 물과 같다” 그렇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죠.


말이라고 하는 것은 이중적인 기능이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이죠.
말은 강력한 파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한 말, 지혜로운 말, 의인의 말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소망을 갖게 만들어주고, 일할 수 있는 그런 힘을 주는 그런 말이 되겠지만, 그러나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의 말은, 사람으로 하여금 일어서지 못하게 만들고, 도무지 움직일 수 없게, 발을 묶어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파멸시키기도 하는, 그런 어리석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고, 악한 사람의 말, 나쁜 사람의 말들은, 그렇게 사람들을 죽여버리는 그런 강력한 파워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깊은 물과 같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똑같은 칼이라고 할지라도 그 칼을 주부가 사용하게 된다고 한다면, 아주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그런 선한 도구가 될 수가 있겠지만, 그러나 그 똑같은 칼을 강도가 손에 들고 있다고 한다면, 사람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그런 나쁜 도구가 되는 것처럼, 말이라고 하는 것이 선한 도구로도, 또는 악한 도구로도 사용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우리가 정말 지혜로운 말, 명철한 말, 의로운 말, 선한 말을 사모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서 18장 4절 그 뒷부분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혜의 샘은 솟구쳐 흐르는 내와 같으니라.” 이 뒷부분에서 지혜의 샘이 솟구쳐 흐르는 내와 같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평행적으로 생각한다고 한다면, 앞부분의 말에다가 “명철한”이라고 하는 표현을 집어넣는 것이 잘못된 번역이 아니라, 더 그럴듯한 번역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혜의 말을 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매 순간 우리가 한마디 말을 하더라도, 과연 이 말이 사람을 살리고, 사람으로 하여금 행복하고 즐겁게 일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그런 말인가? 아니면 내가 하는 이 말이 사람들로 하여금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 좌절하게 만들어 버리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사람들을 옭아매는 말이 될 것인가? 내가 지금 어느 종류의 말을 하고 있는가? 늘 기억하면서, 원하기는 우리 교회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 우리의 입술에 주님의 파수꾼이 세워져서, 정말 깊은 물과 같은 말인데, 이 물이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열매 맺게 만드는 선한 도구의 말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지혜로운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지혜의 말을 배울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여러 가지 원리들을 생각해 보면 좋겠는데요. 첫 번째는 우리 자신이 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매일매일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묵상해야 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해서 가지고 계신 그 선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늘 묵상하는 삶을 살아야, 우리는 지혜의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쌓은 것에서부터, 우리의 말의 내용이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가복음 6장 45절의 말씀에 보면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그러니까 우리 입으로 나오는 게 입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마음에서 나오는 겁니까? 마음에서 나오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입에서 의로운 말, 지혜로운 말, 슬기로운 말이 나오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에 무엇을 쌓아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을 쌓아야 되는 거예요.

우리의 마음 가운데 시기와 질투가 있다고 한다면 나쁜 말이 나오게 돼 있어요. 우리의 마음에 탐욕이 쌓이게 되면 나쁜 말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증오가 쌓이게 되면 악한 말이 나오게 되어 있고, 비난하는 말이 나오게 되어 있는 거에요. 하지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무엇을 쌓아야 돼요? 하나님의 뜻을 쌓아야 되는 거죠. 우리가 매일매일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 그 주님의 그 말씀에 따라서, 우리의 심령을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계속해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 선한 것들을 쌓아 넣어야 우리 입에서 지혜로운 말이 나오는 겁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악한 것을 쌓으면, 악한 말이 나오게 되고, 우리의 마음 가운데 욕심이 쌓이면 악한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늘 묵상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마음을 닮아갈 수 있는 그런 부단한 노력을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어떻게 지혜의 말씀을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말을 하되 성급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급하지 않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과연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일까? 과연 이게 선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말일까? 과연 이게 사람들을 세울 수 있는 말일까? 과연 이게 사람들로 하여금 무너뜨리는 말일까? 사람들을 세우는 말일까? 깊이 고민하면서, 또 고민하고 또 고민하면서 우리가 말을 한마디 말을 하더라도 성급하게 말을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죠. 야고보서 1장 19절에서 20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어떻게 하고? “속히 하고, 말하기는” 어떻게 하며? “더디 하며, 성내기도” 어떻게 하라?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지혜의 말은, 어떻게 하는 게 지혜의 말인가? 성급하지 않게 말하는 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들의 마음에 분노가 차 있을 때, 우리의 마음 가운데 화가 가득 차 있을 때 그때는 말하는 게 좋을까요? 말을 하지 않는 게 좋을까요? 크게 얘기해 보세요. 않는 게 좋은 거예요. 막 화가 났어요. 막 이럴 수가 없다. 화가 엄청나게 났어요. 그러면 말해야 돼요? 말하지 말아야 돼요? 말하지 말아야 되는 거예요. 그 순간에는. 아니, 우리 며느리가 세상에 이럴 수가 있어? 화가 났어요. 말해야 돼요? 안 해야 돼요? 안 해야 돼요!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분노가 차 있다고 한다면 그때는 말할 때가 아닙니다. 언제 말해야 되는가? 내 마음에 분노가 사그라들어서, 마음의 평정심이 들게 되었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상황을 제대로 분석할 수 있고, 무엇이 문제였으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제대로 분석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화가 나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마음 가운데 분노가 들어 있다고 한다면, 정상적인 판단이 안 되는 거예요. 왜곡된 정보만을 가지고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화가 나 있을 때에는, 잘못된 정보들로 인해서 우리는 선한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늘 제가 강조하듯이 분노는 사탄이 우리의 마음을 장악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열쇠와 같아요. 그래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 분노가 생겼다고 한다면, 우리의 마음의 열쇠를 사탄에게 넘겨준 거나 마찬가지, 사탄이 내 마음을 마음대로 움직이세요. 사탄 님 내 마음을 움직이는 운전사가 돼 주세요 하고, 열쇠를 사탄에게 맡겨버린 것과 같아요. 그래서 그 분노 가운데 있을 때는 하나님의 선하신 말이 나올 수가 없어요. 지혜로운 말이 나올 수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분노가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우리의 분노를 가라앉혀야 하는 것이죠. 어떻게 가라앉혀요? 잠깐 조용한 나의 시간을 가지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또 성경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가운데, 내 마음 가운데 분노가 막 들끓어 올랐다가, 그 분노가 점점점점 잦아들어서, 내 마음의 냉정함을 유지하게 되었을 때, 그때 모든 것을 판단하고, 그리고 차분해졌을 때, 그때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고요. 성급하게 말을 한다면, 화가 나 있을 때 말을 한다면, 그것은 결국 우리가 어리석은 말 사람들을 파멸로 이끄는 말만 하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화가 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 아이들이 잘못하는 모습을 보고 화가 났어요. 그런데 정말 우리 아이들이 왜 그런 일을 했을까? 이 아이가 왜 이런 짓을 했을까? 엄마를 화가 나게 만드는 이런 일을 왜 했을까 하고, 자초지종을 다 들어보면 화낼 일이 아니에요. 엄마를 사랑해서 그랬어요. 아빠를 사랑하기 때문에 한 일이에요. 정말 선한 의도로 한 일들을 우리 아이들이 하고 있는데, 그냥 겉으로 나타나는 것만을 보고서, 우리가 화난 상태에서 이야기를 한다면, 결국 우리는 어리석은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세 번째로 우리는 어떻게 지혜의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사랑의 말을 할 때입니다. 저주하거나 비난하는 말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는 말이 그게 지혜로운 말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 말씀에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라고 말씀해 주신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사랑의 마음으로 이야기할 때 우리는 지혜의 있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8절에서부터 10절 말씀에서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3장입니다. 3장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않은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사람을 저주하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말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저주하는 말이 아니라, 비난하는 말이 아니라, 사랑의 말, 비난하는 그런 표현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세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그런 사랑의 말이 그게 지혜로운 말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로 어떻게 말해야 지혜의 말입니까? 겸손하게 말해야 지혜의 말입니다. 빌립보서 2장 1절에서부터 4절 말씀에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어떤 마음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다른 사람이 실수하는 그 실수가, 나는 실수를 안 할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안 한 것이 아니고, 나도 똑같은 잘못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인간은 다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똑같은 잘못을 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마치 나는 아무런 죄가 없는 것인 양, 교만한 마음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자기 자신을 낮추면서 말을 하는 게, 그게 지혜의 말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들이 하는 그 말로 인해서 우리 주변에 있는 우리 가족들이 우리 성도님들이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풍성한 과실을 맺는 것처럼 우리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그런 일에 우리 모두가 다 사용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교만한 모습을 가지고 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연약한 자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었던 것을 기억하면서, 겸손하게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우리의 말로 인해서 수많은 선한 결과들이 나타날 수 있도록, 우리들의 입술을 사용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기억하십시다. 우리의 말은 파워가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깊은 물과 같아요. 그래서 생명을 주고 살릴 수도 있는 반면에 사람을 빠뜨려 죽일 수도 있는 그 두 가지 방향으로 틀 수가 있겠는데, 원하기는 우리 모두의 말들이 지혜의 말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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