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비유 가운데 “달란트 비유”가 있습니다. 어떤 주인이 종들에게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기고 여행을 떠난 후에, 오랜 기간 후에 다시 돌아와서 그 종들이 그 달란트들로 무엇을 했는지, 그들이 주인이 없는 동안에 어떻게 살았는지 결산하게 된다고 하는 이야기가 달란트 비유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영적인 교훈이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특별히 그 가운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한 사람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아니한, 사명이 없는, 사명을 받지 않은 사람이 전혀 없고, 그 사람의 사명이 무엇이든지 간에, 크든 작든, 많든 적든, 사람들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사명들이 있다고 하는 것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겠고요.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 사명을 가지고 어떻게 살았는가? 이것을 주님께서 마지막 날에 결산할 때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교훈을 그 비유를 통해서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의 말씀을 해주신 이유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아무렇게나 아무런 목적도 없이, 아무런 삶의 방향도 없이, 그냥 허무한 인생을 살아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 사명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신실하게 살아갈 것을 권고하기 위해서, 그 비유의 말씀을 해 주셨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들이 던질 수 있는 질문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어떤 질문을 던질 수가 있겠습니까? 가장 먼저 던질 수 있는 질문이 있다고 한다면, 그럼 과연 주님께서 내게 어떠한 사명을 주셨을까?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실 때, 무엇을 하라고 이 세상에 보내셨을까? 그러한 질문을 우리가 던져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치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자신의 사명을 망각해 버리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땅속에 처박아 두는, 그런 무책임한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 사명을 가지고서, 그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되겠는데, 도대체 내가 받은 사명이 무엇일까? 사람들마다 똑같은 사명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각 다른 사명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내게 주어진 그 사명이 무엇일까를 항상 질문할 필요가 있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해야 되는 것이죠.
가장 간단한, 내게 주어진 사명을 발견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내가 처한 상황, 내가 만나는 사람,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지금 이 순간에 나로 하여금 있게 하신 바로 그 자리가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사명의 자리라고 하는 사실을 먼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누구를 만나게 하신다고 한다면, 우연히 만나게 한 것이 아니라, 사명을 주고서 만나게 하신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자녀들을 주셨다고 한다면, 그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바로 나에게 주신 사명이에요. 이 세상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가 적임자이기 때문에, 바로 나를 향해서 그런 자녀들을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이죠.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우리 만나는 그 상황들, 우리가 경험하는 그 경험들, 우리가 가진 그 모든 것들, 우리가 처한 그 모든 상황들이, 사실은 우리가 그냥 흘려버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사명으로 주신 사람들이고, 사명으로 주신 재물들이고, 사명으로 주신 시간이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이 있다고 한다면, 내가 과연 어떻게 이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잘 감당해 나갈 수 있을까?”라고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겁니다. 특별히 우리가 2025년을 시작하면서 벌써 1월이 거의 다 갔는데요. 금년 한 해를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나님께서 이렇게 새로운 1년이라고 하는 시간을 우리들에게 주셨는데, 이 1년을 우리가 어떻게 신실하게 살아갈 것인가? 그런 질문을 던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갈 수 있을까?”라고 하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성경에 여러 가지로 기록되어 있는데요. 특별히 오늘은 고린도전서 4장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우리가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사명들을 잘 감당해 나갈 수 있을까?”라고 하는 이 문제를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고린도전서 4장의 말씀은, 사실은 말씀의 사역자들에 대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특별히 말씀을 전하는, 말씀의 사역자들에 대해서 해주신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바울 사도와 같은 사람들, 아볼로와 같은 사람들, 이런 말씀의 사역자들에 대해서 하고 있는 말씀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것이 단순히 말씀의 사역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 다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다 적용이 되는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다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들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첫 번째로 고린도전서 4장 1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우리를 어떻게 여겨야 되는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해야 되는가? 우리가 누군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생각해야 된다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누군가? 나는 누군가?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이라.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사람의 일꾼이 아니라는 의미죠. 우리가 다른 그 어떤 것의 종이 아니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누군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꾼이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일꾼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해야 될,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그런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의 명령을 들어야 됩니까? 그리스도의 일꾼, 하나님께서 세우신 일꾼이라고 한다면, 누구의 말을 들어야 돼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되는 거예요.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되고, 주님의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과연 나는 누군가? “나는 누구의 일꾼인가?”라고 하는 것을 늘 질문해야 되는데요. 왜냐하면 우리가 늘 주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일 우리들의 주인이 돈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돈에 따라 움직이게 되는 것이죠. 돈이 시키는 일을 할 것이고, 그래서 그 돈이 주인일 경우에, 우리는 여러 가지 악한 일을 하기도 하고, 잘못된 일들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늘 이런 일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돈에 따라서, 이익에 따라서 말을 바꾸고, 거짓말을 하고, 거짓 증언을 하고, 자신의 이득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너무나도 많이 있는 것이죠.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그 말씀에 따라, 거룩하고 진실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고 정말 바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 그런 이익에 따라서, 나의, 내 목숨을 쥐고 있는 사람들의 명령에 따라서, 우리가 거짓말을 하고, 잘못된 일들을 하는 경우들을 우리가 얼마나 많이 목격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나의 주인이 누군가? “나는 누가 세우신 일꾼인가?”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누굽니까?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양심에 들려주는 그 음성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살기를 원하시는가에, 민감하게 귀를 기울이며, 나는 하나님의 일꾼이다. “나는 주님의 일꾼이다”라고 하는 그 자아의식을 가지고 신실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어떻게 사명을 감당해 나가야 합니까? 그것은 신실하게 감당해 나가야 하는 것이죠. 고린도전서 4장 2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일꾼인데,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그런 맡은 자들인데, 청지기들인데, 우리 청지기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일꾼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가? 충성이 요구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개인적으로는 이 충성이라고 하는 단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 번역입니다. 저는 충성이라고 하는 말 대신에, “신실함”이라고 하는 단어로 번역하는 것이 훨씬 더 성경의 원문의 의미에 더 가깝다고 생각이 드는데요. 그리스도의 일꾼은 무엇이 요구되는가? 하나님의 사람들은 무엇이 요구되는가? 신실함이 요구된다는 것이죠.
신실함, 신실함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정말 최선을 다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을 살려서, 정말 신실하게 감당해 나가는 것이 바로 신실함인 것이죠. 신실함을 우리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저는 그게 엄마의 마음, 아빠의 마음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엄마의 마음은 무엇이죠? 아빠의 마음이 무엇이죠? 자녀들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가장 좋은 걸 해주고 싶어요. 그래요? 안 그래요? 오래간만에, 명절이 돼서 만나는 우리 자녀들에게, 그 짧은 시간에 가장 큰 사랑을 보여주고 싶어요. “그냥 빨리 왔다가, 그냥 빨리 가버려라.” 혹시 그렇게 말을 하시는 분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그 마음이 무엇이냐면, 이 짧은 시간에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을, 가장 큰 행복을, 우리 자녀들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 그게 엄마의 마음이고, 아빠의 마음인 것이죠. 누가 시켜서가 아니고, 누가 강요해서가 아니고, 정말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내가 최선의 것을, 가장 좋은 것을 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을 늘 생각하고, 그래서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은 그런 부모님의 마음처럼 일하는 것이 바로 신실함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일해야 하는가? 무엇이 요구되는가? 신실함이 요구되는 것인데, 그 신실함의 반대가 무엇입니까? 저는 그게 “알바의 마음”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알바는 무엇입니까? 대충 하는 거죠. 그렇지 않은 알바가 있습니다. 알바몬에 문의해 보세요. 그런 알바가 있다고 하니까. 그런데 많은 경우에 알바의 마음은 무엇인가? 내가 열심히 일하든, 열심히 일하지 않든, 똑같은 대우를 받기 때문에, 별로 그렇게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거예요.
지난번에 우리 노회에서 신년 하례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식당을 하나 마련해 놓고, 그 식당에 모여서, 노회 목사님들 장로님들 이렇게 함께 모여서, 신년 하례회를 하게 되었는데요. 임원들이 그 신년 하례의 장소를 물색하면서, 어느 식당을 정해놓고, 과연 이 식당의 음식이 맛있는지, 여기서 신년 하례회라고 하는 큰 행사를 해도 좋은지, 확인하기 위해서, 미리 그 식당에 가서 음식을 맛보기로 해서, 그래서 그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었답니다. 정말 맛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매니저하고 홀에 대한 계약도 할 겸 해서, 가서 먹는데, 종업원이 와서 짜증을 내면서 이야기를 하더래요. “여기 오지 마세요.” “그렇게 많은 사람이 오면은 저희들 힘들어서 곤란해요.” 자꾸 옆에서 짜증을 내면서, 안 왔으면 좋겠다고, 그런 행사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우리 목사님들이, 이곳에서 하지 말아야 되나? 굉장히 혼란스러웠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게 어쩌면 알바의 마음인 거죠. 예전에 어떤 뉴스에서는 알바가 주인 몰래 주문 들어온 거 다 취소시켜 버렸다고 하는 그런 내용이 있는데,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우리들은 무엇이 요구되는가? 신실함이 요구된다는, 신실함이 무엇인가? 엄마의 마음, 아빠의 마음으로 일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말 사랑의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 사명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어느 곳에 있든지 최선을 다하는 게 우리 성도들의 마음이라고 믿습니다.
그게 어느 분야에서 (그런 마음이) 있어야 되는가? 군대에 가는 우리 자녀들을 향해서, 저는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대가 군대에 가게 된다고 한다면, 그냥 중간에 서서, 그냥 하지 않기 위해서, 시간 때우다가, 그렇게 군대에서 나올 것이 아니라, 그 군대에서 가장 신실한 군인으로, 동료 병사들의 어려운 것들이 있으면, 다 도와주고,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내가 하겠다고 자원하고, 가장 성실한 모습을, 그 군대에서 보여주길 원한다고 저는 권면하고 싶어요. 만일 우리가 어느 직장에 가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 직장에서, 그 일이 이 세상의 일이 아니라, 세속적인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그곳에 넣어주셨기 때문에, 거기서 신실하게 눈가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최선을 다해서 내가 죽게 하듯 해야 하는 그 모습을 보여주라고 권면하고 싶어요.
우리 가족 안에서도, 남편이 아내를 사랑할 때,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주셨듯이, 그렇게 아내를 사랑해야 할 것이고, 아내가 남편을 사랑한다면, 대충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듯이 그렇게 최선을 다해야 될 것이고, 부모가 자녀들을 사랑한다면,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한다고 한다면, 최선을 다해서 정말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넣어주신 그곳이 어떤 곳인가?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 그곳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직장에 있든 어디에 있든지 간에, 신실하게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에베소서 6장 5절에서부터 7절 말씀에 이렇게 권면합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오늘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지금까지 그렇게 살지 못했다고 한다면, 저도 늘 그러지 못해서 늘 넘어지고 늘 쓰러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생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 가운데 기억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매일 아침마다, “주님, 오늘 하루 살아가는데, 신실함을 가지고 살게 하여 주옵소서.” 결단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사람들의 판단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3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이렇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가?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는 거예요. 그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하는 말,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평가하는 말, 사람들이 나를 박수 치거나, 사람들이 나를 멸시하고 무시하거나,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 것, 거기에 따라서 우리가 마음이 흔들릴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평가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그건 신경 쓰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보고 계신, 어떻게 보시는가가 중요한 것이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는 데 있어서, 늘 장애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다가, 우리가 늘 실망하고 늘 넘어지는 때가 있다고 한다면 언제입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인정하지 않을 때, 우리는 종종 넘어지곤 합니다. 내가 정말 최선을 다해서, 정말 나는 정말 수고를 많이 했는데, 그런데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을 때, 사람들이 나를 오히려 비난하고, 손가락질해 나갈 때, 그때 우리는 모든 동력을 잃어버릴 때가 많이 있는 것이죠.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그런 사람들의 말에 넘어지지 말고, 사람들의 말에 쓰러지지 말고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말라. 사람들이 내게 하는 말에 대해서 전혀 신경 쓰지 말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늘 주의 일을 하다 보면, 주께서 주신 그 사명을 감당하다 보면,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사람들의 판단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어떻게 해야 돼요? 무시하고 지나가야 돼요. 그냥 신경 쓰지 말고 지나가야 되죠. 어렵지만 그렇게 해야 됩니다.
재미있는 비유를 하나 봤는데요. 어느 날 뱀이 창고를 지나가다가 창고에 놓여져 있는 톱을, 톱 옆을 지나가게 된 거예요. 그래서 그 톱 옆을 지나가는데, 뱀이 그 톱에 찔려가지고, 뱀에 상처가 난 겁니다. 그러니까 뱀이 화가 났어요. 딱 보니까, 톱이 놓여져 있는 거예요. 저 톱이 나를 공격했다 생각해 가지고, 톱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입을 벌 열려가지고, 그 톱을 깨물었어요. 그랬더니 입이 찢어졌어요. 더 피가 나는 이 뱀이 화가 더 나기 시작해서, 이 톱을 내가 죽여버려야 되겠다 해가지고, 몸으로 빙빙 감아가지고, 그 톱을 압사시켜 죽이려고 하다가 결국 누가 죽었어요? 뱀이 죽었다. 그런 비유를 봤습니다. 사람들의 말에 우리가 흔들리고, 사람들의 말에 우리가 넘어질 게 아니라, 나는 누군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요. 청지기요,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사람들의 판단을 무서워하거나,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고, 그 사람들의 판단을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할 때, 그것은 우리들에게 칼이 되고 독이 되는 겁니다.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면, 그것이 너무나도 커 보이는 것이죠. 그것은 그 사람들의 말이 크기 때문에 큰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의 말을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게 되면, 그 말들이 더 커지는 거예요. 자꾸만 커져요. 그래서 우리를 압사시키는, 그런 어마어마한 무기가 되어서 우리들에게 다가오게 되는 것이죠. 그런 사람들의 말을 중요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자꾸만 내려놓고, 내려놓아서, 그 사람들의 말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정말 의미가 없는 것으로 내려놓는, 그러한 지혜로움이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할 줄로 믿습니다.
맥스 루카이도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기독교 작가가 쓴 그림 동화가 있는데요. “너는 특별하단다”라고 하는 그런 동화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읽히면, 너무나도 좋은 그림 동화책이고, 그리고 어른들이 읽어도 아주 좋은 그림 동화책입니다. 너는 특별하단다라고 하는 이 이야기는, 나무 사람들 마을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합니다. 엘리라고 하는 목수가 피노키오 같은 그런 나무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 놓은 마을에, 그 나무 인형들이, 나무 사람들이 서로 살아가는 그 과정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우리 교역자들이 예전에 서울에 올라가서 이 “너는 특별하단다”라고 하는 이 동화책을 가지고 뮤지컬을 만든 것을 가서 본 적이 있었는데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그런데 이 마을에, 펀치넬로라고 하는 그런 주인공, 아까 그 그림에 나오는 그 주인공이 있는 거죠. 근데 그 마을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서로가 서로에게 서로의 몸에다가 별을 붙여주는 거예요.
별을 붙여요. 뮤지컬에서는 뭐라고 해놨냐면, 금별을 붙여주는 경우도 있고, 똥별을 붙여주는 경우도 있는데, 언제 붙여주는가? 서로가 서로를 판단하면서 붙여주는 거예요. 오늘 예쁘게 하고 나왔네. 그러면 넌 참 예쁘다 하면서, 금별을 붙여주는 겁니다. 근데 오늘 못 생기게 별로 치장을 안 하고 나면, 너 왜 이렇게 못생겼어? 하면서 똥별을 붙여주는 거예요. 그러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계속 별들을 붙여주는 겁니다. 노래를 잘하면 금별을 붙여주는데, 음치면은 똥별을 붙여주는 거예요. 공부를 잘하면 금별을 붙여주는데, 공부를 못하면 똥별을 붙여주는 거예요. 운동을 잘하면 금별을 붙여주는데, 못하면 똥별을 붙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막 별들을 똥별이냐 금별이냐를 막 붙여주면서 지내는 그 마을이 있는데, 그러니까 사람들은 똥별을 받지 않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되나요? 그게 아니라 사람들이 자꾸만 똥별들을 막 붙여주는 거예요.
그런데 이 펀치넬로라고 하는 이 주인공은, 나무 사람은, 친구들로부터 아무런 금별을 받지 못한 겁니다. 전부 똥별만 붙어 있어요. 몸에 자기 몸에 붙어 있는 그 똥별을 보면서 너무나도 창피하고, 나는 왜 이럴까? 늘 고통스러워하면서 정말 괴로워하는 거예요. 다른 어떤 사람들은 막 금별을 많이 붙이고 다니는데, 내 몸에는 온갖 똥별들이 다 붙어 있는 거예요. 너무나도 괴로워하고 있는데,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루시아라고 하는 여자 나무 사람을 만난 거예요. 그런데 그 루시아라고 하는 여자에게는 아무런 별도 붙어 있지 않는 겁니다. 깜짝 놀랐어요. 어떻게 내 몸에는 아무런 별도 붙어 있지 않니? 어떻게 된 거야? 그랬더니 루시아라고 하는 말이 “사실은 나에게도 많은 별이 붙어 있었어.” “그런데 우리를 만든 저 엘리에게 가고 난 다음에, 내 몸에 있던 모든 별들이 다 떨어졌단다.” “너도 한번 가봐.”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이 펀치넬로가 가고 싶은 거예요. 머뭇거리다가 나중에 갔는데, 그 엘리가 하나님을 의미하는 거죠. 그 나무 사람 펀치넬로에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너는 특별하단다.” “너는 내가 만든 내 작품이야.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사람들이 너를 아무리 손가락질해도, 너는 내가 사랑하는 내 작품이란다. 내 아들과 같은 사람이란다.” 그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때, 그것이 너무나도 좋아서, 엘리, 자기를 만든 그 주인이 나를 인정하고 너는 특별하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될 때, 자기 몸에 있던 그 모든 똥별들을 다 떨어져 버린, 지금까지 살면서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그것을 중요하게 여길 때, 그 중요하게 여긴 잘못된 평가들이 내 몸에 들러붙어서, 도무지 떼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는 거예요. 내가 다른 사람들의 말을 중하게 여기면 여길수록, 사람들이 내게 해댔던 그런 모든 악한 것들이 내 몸에 다 붙어 있어서, 내 몸이 너무나도 더러워서, 어디에도 나갈 수 없는 그런 상태가 되었지만, 그러나 사람들의 말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이제는 그 엘리, 나를 만드신 분이 “너는 나의 소중한 자녀란다” 이야기해 줄 때, 그 몸에서 모든 것들이 다 떨어진다고 하는 그런 동화입니다.
어쩌면 참 이 시대에 정말 필요한 동화 같아요.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우리가 그런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우리들을 보면서 온갖 우리들의 단점만을 볼 겁니다. 우리의 무능함만을 볼 겁니다. 우리의 더러운 면들만 볼 겁니다. 그리고 조롱하고 비난하는 말들을 많이 할 겁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꾼으로,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일을 하다 보면, 때로는 실수도 하고,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어설프기도 한, 그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조롱하고 비웃고 욕하는 그런 소리들 때문에,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그냥 그 사람들의 평가 속에 갇혀 있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셨어요.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사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이 땅에 내어주셨어요. 그리고 그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켜 주시고, 하나님의 가장 소중한 자녀로, 저와 여러분들을 불러주셔서, 사명을 주시고 계시다고 하는 그 이 놀라운 이야기를 오늘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깊이 새길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을 인정해 주지 않을 수 있겠지만, 그래서 그것을 우리가 너무나도 크게 생각하기가 쉽겠지만, 그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고 사람들의 판단은 내게 중요한 게 아니다. “사람들의 판단이 내게는 작은 것이다”라고 고백했던, 이 바울 사도의 말처럼, 사람들의 판단은 다 내려놓고, 오로지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인정해 주실 것이며, 마지막 날에 어떻게 하실 것인가 고린도전서 4장 5절 말씀에 보니까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사람들은 몰라줬던 것,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았던, 우리들의 헌신과 사랑과 신실함을 주님께서 보시고,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인정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감추인 것이 드러날 것을 기억하면서, 하늘의 상을 바라보면서, 금년 한 해도 믿음으로 신실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