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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에 끌려가기까지 (마 1:6하-11)

성탄절 주간을 맞이해서 마태복음 1장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족보를 살펴보고 있는 가운데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아브라함의 아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족보를 우리가 살펴보았는데요.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으로 다윗으로부터 시작되어서,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으로 끌려가기까지의 족보를 우리가 함께 본문으로 읽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볼 인물이 누구냐면 바로 다윗인데요. 다윗은 누구인가요?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마음속에 생각하는 영웅,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가운데서 가장 부각되어지는 사람 두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누구를 꼽을까요? 한 사람은 모세이고, 또 한 사람은 다윗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율법을 준 사람이고, 그리고 다윗은 어쩌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찬란한 시대를 살아냈던 그런 정말 막강한 왕국을 이끌었던 왕이었던 것을 알 수가 있겠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나라의 국기를 보면 별이 하나 그려져 있는데, 그 별을 가리켜서 다윗의 별이라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다윗의 나라, 다윗을 아주 높게 생각하고, 다윗을 우러러보는 것이 이스라엘 민족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었을 때에는 이스라엘의 국력이 아주 막강했습니다. 최강대국이 되어서, 주변의 국가들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조공을 받쳐야만 했었고, 그리고 평화로운 시대였습니다. 먹을 것이 풍부했고, 모든 것들이 다 풍족했을 뿐만 아니라, 전혀 외세의 침입도 받지 않고, 오히려 외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으면서 지내는, 그야말로 정말 참 좋았던 시기, 그때야말로 정말 좋았다고 생각될 만큼, 이 다윗의 시대는 태평성대의 시대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유교에서는 어떤 시대를 그리워하죠? 유교, 공자, 맹자, 이런 사람들은 이야기를 할 때, 꼭 무슨 시대를 얘기하냐면, 요순시대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옛날 요순시대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요순시대와 같이 살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한다 하면서, 요순시대에 있었던 군주의 모습, 그걸 늘 그리면서 유교에서는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사실 그 유교에서 말하고 있는 그 요순시대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시기라기보다는, 공자나 맹자라고 하는 그런 선생님들이 마치 이상향을 말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하나의 허구적인 시대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튼 늘 중국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요순시대의 태평성대를 누렸던 그것을 꿈꾸면서, 그때를 그리워하면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요순시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요순시대와 같은 그런 시대를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을까? 그 시대에는 백성에게 가서 임금님이 변장을 하고 백성들에게 가서 물었더니, “우리나라의 임금님의 이름을 아느냐?”라고 물었더니, 백성이 말하기를 등 따습고 배부른데 임금님의 이름을 알 필요가,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고, 나는 아무런 걱정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그렇게 평화로운 시대가 요순시대에 였다고 한다면, 그렇게 중국 사람들에게 유교에서 요순시대처럼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다윗의 시대라고 하는 것은 정말 이상향이었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때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자부심이 있었고, 그때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풍족했었고, 모든 것들이 부족함이 없는, 아무것도 아쉬울 게 없는, 그런 시대를 그 다윗과 함께 누리면서 살았던 시기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다윗에게 약속을 해 주셨는데요. 지난 시간에 우리가 살펴보기를 하나님께서 약속을 해 주실 때, 무슨 약속을 했냐면, 다윗이 낳은 아들 그 아들을 통해서 성전을 짓게 만들어주겠다고 하는 그런 약속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마는, 그런 성전을 짓게 해 주겠다고 약속 말고도, 또 하나의 약속을 하나님께서 해주셨습니다. 그 약속이 무엇이냐 하면, 사무엘하 7장 12절 13절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해주셨던 그 약속은 다윗의 아들이 성전을 지을 거라고 하는 것만을 약속해 주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아들이 성전을 짓게 될 것이고, 그렇게 성전을 지은 그 아들에게, 그 나라의 왕권이 전혀 흔들리지 않고 영원히 계속되도록 다윗의 왕조가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하는 그런 약속을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해 주셨던 겁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지만, 그 성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그런 장소가 되어 버렸고, 거기에 종교의 행위는 있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을 수 있지 못한 장소가 되어 버렸고, 그리고 그 성전은 영원히 계속된 것이 아니라, 결국 무너져 버리고 훼파되어 버리고, 정말 보잘것이 없어져버린, 그런 결과를 가져왔다고 하는 것을 살펴보았는데요. 역시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해 주셨던 또 하나의 약속이 무엇이냐 하면, 이 다윗의 왕조를 영원히 계속하게 해 주겠다. “흔들리지 않게 해 주겠다”라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해 주신 내용이, 이 사무엘하 7장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겁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족보를 살펴보면, 다윗이 낳은 아들이 솔로몬이고 솔로몬이 낳은 아들이 르호보암이고, 또 그 아들이 또 낳고 낳고 해서 다윗의 왕조가 이어지는 것 같기는 하지만, 11절에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듣습니까? 다윗의 왕주가 영원한 것이 아니라,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가게 되는 파국을 맞이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시기를, 다윗에게 약속하시기를, 네 나라가 영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셨는데, 그 약속과는 달리, 이스라엘의 실제 역사는 무엇이냐 하면, 이스라엘 나라는 완전히 망해버린 나라가 돼버렸어요. 바벨론으로 끌려가 버렸어요. 도대체 하나님의 약속과 이 현실 사이에 이 괴리, 이 차이는 어디에서부터 온 것일까요?

물론 이스라엘 민족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가기는 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그 바벨론에 있던 사람들을 불러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그런 엄청난 기적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사막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물을 내어서, 저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민족들이 마치 그 옛날 애굽 땅에서 홍해 바다를 건너고, 광야의 길을 걸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갔던 것 이상으로, 바벨론에 유수되어 있던, 그 유배되어 있던 그 이스라엘 민족들이 광야를, 마치 강물을 따라 걸어갈 수 있듯이, 그렇게 사막의 길이 난 것처럼, 그런 엄청난 기적을 체험하면서 이스라엘 민족들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되는 그런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윗 왕조가 완전하게 회복되었느냐 하면, 회복된 게 아닙니다. 성전을 지었지만 그 성전은, 두 번째 지은 성전, 첫 번째 성전은 솔로몬이 지은 성전이고, 그것이 완전히 파괴되어서 두 번째 성전을 지었는데, 그 두 번째 성전은 너무나도 초라해 버려서, 너무나도 보잘것이 이 없어서, 그 옛날 그 솔로몬이 지었던 성전을 기억하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 두 번째 성전을 보면서, 너무나도 마음이 아파요. 정말 보잘것없는 그 성전을 보면서 너무나도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그 돌아온 다음에 다시 다윗의 왕조를 이끌어냈느냐면, 이끌어낸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그 이후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우리가 연구해 보면, 계속해서 외세의 침입 가운데서 시달린, 시달림의 역사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꿈꾸는 거죠. 이사야서 같은 데 보면 무슨 꿈이 있냐면, 그날에 시온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불러주시고, 시온산이 우뚝 설, 서게 될 것인데, 거기에 이스라엘 민족들이 아브라함과 함께 잔치를 벌이게 될 것이고, 그리고 세계 열방의 섬으로부터 수많은 이방인들이 조공을 가지고 올라오는 그런 꿈을 꾸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시온산에 세우시고, 다시 회복시켜주셔서, 이제는 그 옛날 다윗의 시대 때 수많은 이방 민족들이 조공을 바쳤던 것처럼, 시온산으로 수많은 이방 민족들이 조공을 가지고 오는 그런 꿈들이 이사야서에 보면 그런 꿈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꿈들이 이루어졌냐 하면,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계속해서 이스라엘 민족은 외세의 지배 가운데 있게 된 겁니다. 잘 알다시피 바벨론의 침략을 받은 이후에 이스라엘 민족들이 해방되어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지만, 그들이 어떤 왕조를 이룬 것이 아니라, 왕국을 이룬 것이 아니라, 얼마 가지 아니해서, 헬라 나라가 전 세계를 정복하는 가운데, 헬라 나라의 지배를 받습니다. 20대의 젊은 알렉산더 대왕이 전 세계를 제패하면서,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자기의 속국으로 삼아버려서, 그 헬라 왕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그 헬라어를 배우면서 헬라 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었어요.

헬라 나라가 망했을 때는, 이제는 헬라 알렉산더 대왕의 네 자녀들이 서로 분열 왕국을 이루어서 서로 싸우는 가운데, 프톨레미 왕조와 그리고 셀루키드 왕조가 서로 전쟁을 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은 그 가운데서 이리 치고 저리 치고 셀루키드 왕조가 쳐 내려오면, 그 왕조 밑에서 고난을 당하고, 프톨레미 왕조가 애굽에서부터 올라와서 치면, 또 그 밑에서 고통을 당하는 그런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시간을 계속 보내오다가, 그다음에 그들이 사라진 이후에는 로마가 이 이스라엘을 점령해서,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 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는, 그런 정말 고통스러운 인생만을 살아가게 된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겁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으신 그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해 주셨던 바로 그 하나님의 약속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말씀해 주시기를, 네 나라가 영원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는데, 그 약속과는 달리 “왜 이스라엘 민족은 이렇게 완전히 짓밟혀 버리고, 무너져 버렸고, 더 이상 소생하기가 어려운 그런 힘든 상황 가운데 있었는가?”라고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될 텐데요. 왜 그런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습니까? 답은 딱 하나뿐이죠.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결국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축복의 길인데,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부터 멀리 떠나, 그리고 자신들을 행복하게 해 줄 거라고 생각했던 우상들을 향해서 나아가게 될 때, 우상들에게는 우리들에게 화려한 것들을 약속하지만, 우리에게 그 화려한 약속들을 주지 않고 오히려 멸망하게 만드는, 그런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인데, 이스라엘 민족들이 이런 곤란을 겪게 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고 우상을 섬기는 길로 가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시기를 원하나 그들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결국 완전히 다 망가져버린 그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족보를 통해서 말씀해주고 있는 이야기는 뭐냐 하면, 그런데 바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다고 하는 사실을 이 족보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겁니다. 솔로몬이 다윗의 아들이 아니라, 물론 다윗의 아들에게 아들이지만, 하나님의 그 약속을 이룰 수 있는 제대로 된 아들이 아니라, 사실은 다윗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전을 세우게 될 것이고, 다윗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그 나라의 왕권을 영원한 왕권으로 만드시겠다고 하는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해 주셨던 약속은, 그래서 예수님에게서 성취되는 것이고, 바로 그 약속이 성취된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에서는 다윗의 자손으로 예수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오해가 싹 틀 수가 있겠는데요. 다윗의 나라가 영원할 것이라고 하는 이 말을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냐면, 그러니까 이 세상 권력 정치권력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오해하곤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늘 기대했던 것이 무엇이냐면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이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늘 예수님에게 묻기를, 무엇을 물었냐면, “주님,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때가 이때니까?”라고 자꾸 묻는 거예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는데, 언제 우리나라가 독립이 됩니까? 언제 우리나라가 헤롯 왕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까? 언제 우리나라가 로마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 다시 다윗의 왕권을 가지고 전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그런 강대국이 되는 것이 언제입니까? 예수님 언제 그렇게 우리나라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런 질문들을 많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죠.

로마의 압제 밑에서 수탈당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주셔서 그래서 로마 나라를 완전히 물리쳐주고, 세리들을 박살 내버리고,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편안히 먹고 잘 살 수 있도록, 아무런 근심과 걱정 없이 먹을 거 잘 먹고 돈 벌면 그 돈 번 거 다 쓸 수 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이방인들을 완전히 짓밟아버리고, 이스라엘 나라가 독립된 그 나라를 꿈꾸면서, “예수님, 언제 우리나라를 회복시켜 주실 겁니까? 언제 우리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까?”라고, 자꾸만 예수님을 그런 메시아로서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오병이어의 사건 때 그런 모습이 보였는데요.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천 명을 먹이셨을 때, 이스라엘 민족들은 갑자기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자신들은 헤롯 대왕의 압제 속에서 먹을 것을 수탈당하면서 살고 있고, 돈을 수탈당하면서 고통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빵을 나누어주고, 물고기를 나누어주는 그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실 수만 있다고 한다면, 해롯 대왕을 물리치게 될 것이고, 로마 나라를 완전히 물리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우리나라가 독립되어 이제는 세계 제1의 강대국이 될 수도 있겠다고 하는 소망 가운데서, 예수님에게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우리가 함께 같이 혁명을 하고 싶습니다. 이 나라를 독립을 위해서 우리가 싸우고 싶습니다. 말씀만 하시옵소서. 우리가 무장을 하겠습니다. 말씀만 하시면, 우리가 예수님의 군사가 되어서 헤롯 대왕과 싸우겠습니다. 로마 병정과 싸우겠습니다.”라고, 그렇게 준비되어 있을 때,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들의 호응에 응해 주신 것이 아니라, 한적한 곳으로 숨으시고 피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사람들이 나를 찾는 이유는, 하나님의 표적을 본 것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실 우리들의 문제는 어디에 있냐면, 악한 정권이 우리를 다스리고 있다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가 아닌 건 아니고, 문제긴 문제예요. 우리가 만일 독재 치하의 가운데 있다고 한다면, 사악한 정권 밑에 있다고 한다면 너무나도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의 문제는, 그러니까 지금 우리를 압제하고 있는 나쁜 정권들을 갈아치워 버리고, 민주정권을 세우게 된다고 한다면, 공산정권을 무찔러 버리고, 그리고 완전히 자유주의 정권을 우리 앞에 세울 수만 있다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는 잘 먹고 잘 살게 될 것이고 우리는 걱정 없이 살게 될 것이고, 이제는 아무런 근심이 없이 살 수 있는, 그런 행복한 날을 살 수가 있겠는가?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해요. 심지어 목사님들도 그렇게 생각을 해요. 그래서 빨리 이 정권을 없애야 된다고 생각하고, 정치적으로 악한 정권과 싸워야 그것이 믿음이고, 악한 정권을 끌어내려야 그게 우리의 소망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그게 문제긴 문제지만, 그렇게 해서 정권을 바꾸면,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느냐 하면, 해결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는 거예요. 많이 속아봤잖아요? 엄청나게 속아 봤잖아요? 소망을 가지고 이번에는 이 정권에다 표를 주고, 소망을 가지고 이제는 저 정권에다가 표를 줘봤지만, 그러나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게 정권을 잡기 전에는 모든 것을 다 빼어줄 것처럼 하던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 나면, 언제 우리들에게 그런 약속을 했느냐 하듯이 다 잊어버리고, 그 했던 모든 공약들, “더 이상 할 능력이 안 된다. 생각해 보니 잘못 판단했다.” 하면서 공약을 뒤집어 버리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그런 정권들을 맞이한 게 그게 한두 번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사실 우리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악한 정권이 우리를 다스리고 있다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 우리들의 근본 문제는 무엇이냐면, 우리가 사탄의 지배 가운데 있다고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죠. 마치 우리가 애굽 왕 바로 왕 밑에서 종살이하는 것처럼, 마치 우리가 바벨론 나라에 끌려가 거기서 포로 된 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영적으로 사탄의 지배하에 눌려서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이 문제예요.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지배를 받으면서 사탄의 종으로 지배를 받고 있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것이죠.

정치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돈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우리가 사탄의 지배를 받고 사탄의 노예가 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사탄의 지배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교묘해서, 마치 우리가 사탄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인 양, 착각하면서 살도록 그렇게 만들어 놓아서, 자신이 사탄의 지배를 받는지도 모르고, 사탄의 영향력 아래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근본적인 문제가 정치적인 데 있는 것도 아니고, 돈의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죄의 문제 사탄의 지배 가운데서 우리가 죄악을 행하고 있다고 하는 그것이 문제이기 때문에, 결국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를 원하셨고, 우리를 그 사탄의 결박으로부터 해결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수많은 이야기들이 사실은 그런 영적인 죄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사탄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그 사탄의 문제, 죄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사용하는 용어가 무엇이냐면, 물질적인 용어를 써서 말씀해 주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 물질적인 용어를 보면서, 영적인 문제를 바라보지 못하고, 물질적인 게 전부 문제인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문제를 말하기 위해서 물을 가지고 이야기하셨어요.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에게 다가가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주는 물은 배 속에서 샘이 솟아 흘러나와서, 다시는 목마르지 아니할 생수를 줄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는데, 그 말씀은 정말로 그런 생수가 있다고 하는 그런 말씀이 아니에요. 물의 비유를 사용해서, 우리 주님이 참된 기쁨의 근원이며 사탄의 그 지배에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한다면, 기쁨이 넘치게 될 것이고 생명이 넘치게 될 거라고 하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물의 비유로 말씀해주고 있는데, 그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은 “그런 물이 있으면, 나 좀 주세요.”라고 이야기를 해요. 물만 바라보는 거예요. 물만.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준 것은 정말 이 양식을 먹어야 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참된 양식이며, 예수님이 우리의 참된 양식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한 것인데, 예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떡만 찾는 거죠. 출애굽의 이야기나 다윗 왕권의 이야기는 그러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영원한 최대 강대국을 만들게 해 주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약속은, 그러니까 다윗이라고 하는 사람 그리고 그 다윗의 왕조가 영원한 왕권을 누리면서, 이스라엘이 최강대국으로서, 이런 육적인 이스라엘이 전 세계를 지배할 최대 강국으로 계속 남을 거라고 하는 것을 의미해 주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비유일 뿐이고, 예수님께서는 그 이야기를 통해서 해 주시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나라가 올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영원히 왕 노릇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제는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해 주시기 위한 비유의 이야기인데, 사람들이 그 비유를 가지고 영적인 진리를 말하면, 그 비유를 가리키는 그 손가락을 보고, 달을 봐야 되는데, 달을 안 보고 뭐만 봐요? 손가락만 본다고. 불교에서 나온 용어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성경 속에 있는 이 물질의 이야기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영적인 이야기를 해주시면, 영적인 이야기를 바라봐야 되는데, 영적인 이야기는 안 바라보고, 물질만을 바라보고, 물질을 열광하고, 권력을 열광하고, 지금 우리 기독교계 내에서 잘못된 운동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면, Back to Jerusalem, 백투 예루살렘 무브먼트가 있어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자. 돌아가서 뭐 하려고요? 이스라엘의 나라를 재건하자 시온산을 재건하자? 그게 아니에요.

선지서에서 약속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약속한 이스라엘 민족의 재건과 예루살렘의 재건과 이스라엘 민족이 돌아온다고 하는 그 모든 이야기는 육적인 이스라엘 민족이 세워진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정말 엉터리 잘못된 성도들, 특히 미국의 잘못된 크리스천들이 악한 이스라엘 정부를 지지하고, 이스라엘이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그 이스라엘과 동 동조하면서, 그들의 편이 되어 주려고 하는 그런 잘못된 신앙 정책을 세우고 있는데, 순 엉터리 잘못된 신앙 체계라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선교 기관 가운데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된다”라고 말하고, 잘못된 주님께서 사용하신 이 비유의 이야기를 마치 진짜 그건 줄 알고, 이스라엘 민족이 세워져야 독립이 되고, 이스라엘 나라가 강해져야 재림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등등 그런 오해를 하고 있는데, 그게 아니라, 주님께서 해주시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부터 사탄의 지배로부터 건져내어, 하나님의 나라에 우리를 들려 보내주시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성탄절 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해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믿음을 주님 앞에 가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소망은 이 세상에 그 어느 것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정치에, 이 세상에 돈에, 이 세상의 그 어느 것에 우리의 소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영원한 죄악 가운데서부터 구원해주시고, 해방시켜주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우리를 포함시켜주시는, 바로 그 주님만이 우리의 소망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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