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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 (마 1:12-17)

2020년 12월 25일 성탄절 예배 설교

우리가 성탄 시즌을 맞이해서, 지난 주일부터 연속해서 예수님의 족보를 살펴보고 있는 가운데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에서부터 17절의 말씀까지,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어떤 계보를 따라서 탄생하게 되어 있는지, 이렇게 쭉 기록해 주고 있는데요. 이러한 족보를 살펴보는 가운데, 오늘은 그 세 번째 시간을 맞이하게 됐습니다.

이 세 번째 부분은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이후에, 누가 태어나게 되었는지, 이름들을 기록하고 있는데요. 우리가 좀 생소한 이름들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그런 생소한 이름들이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는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지 아니한, 그런 이름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세 번째 부분을 살펴보게 되면, 지금 바벨론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끌려가서, 거기서 종살이를 시작하게 된 그 상황 가운데서, 예수님의 그 조상들의 족보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는데요.

이렇게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으로 끌려갔을 때, 그 이스라엘 민족들이 느꼈던 그 감정, 이스라엘 민족들이 느꼈던 그 당혹스러움, 그 절망감에 대해서,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실 수가 있겠습니까? 나라는 패망해버렸고,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져 버렸고,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이방 나라에서, 다른 나라 언어를 쓰는 사람들에게 끌려가, 거기서 노예로 살아가야 했던 이스라엘 민족들의 그 절망을, 그 참담함을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이스라엘 민족들은 정말 참담했을 겁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그 모든 소망들을 다 잃어버리게 되었을 겁니다. 예전에는 힘든 일이 있으면 하나님을 찾아갔고, 특별히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거기서 하나님께 제사하면서, 또한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그러한 의식들을 통해서, 거기서 다시 한번 새 힘과 용기를 얻고, 그리고 늘 소망을 얻었었는데, 이제 바벨론 땅, 지금으로 말하면 이라크 지역에 끌려온 이스라엘 민족들은 더 이상 그럴 수가 없는 겁니다. 자신들의 눈앞에서 성전이 무너져 내리는 그 참담한 모습을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이 이방 땅에서 더 이상 성전이 없는, 바로 그곳에서, 그리고 우상들만 가득한 그 땅에서, 정말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들의 마음 가운데는 의심이 들었을 겁니다. 과연 하나님은 살아계신 것이 맞는가?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지금도 살아계시는가?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는가? 지금도 우리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시는 가에 대한 의심이 이스라엘 민족의 마음 가운데 스며들기 시작했을 겁니다. 바벨론의 군사에 의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처절하게 무너져 내릴 때, 하나님께서는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끌려가고 있는 그 이스라엘 민족이 울부짖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낯선 곳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들은 과연 이 순간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고 하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지, 하나님께서는 과연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지 의심스러운 상황 가운데서, 살아가야만 했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포악한 바벨론 사람들이 무력으로 자신들을 정복하고, 그리고 노예로서 힘겹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 너무나도 괴로웠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이러한 이스라엘 민족의 형편에 근거해서, 그러한 배경을 가지고 만든 유명한 오페라가 하나 있습니다. 아마 잘 아실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아주 유명한 작가 베르디라고 하는 작가가 쓴 <나부코>라고 하는 오페라가 있습니다. 한번 보신 적 있으십니까? 아십니까? 그런 오페라가 있는데, 그 오페라에 보면 제3막에 가면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있습니다. 그 히브리인들이, 히브리 노예들이, 바벨론 강가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면서, 애타게 노래를 부르는 거죠.

“오 내 조국 빼앗긴” 제가 옛날에 노래를 좀 했었는데, 이제는 좀 힘들어졌는데, “오, 내 조국, 빼앗긴 내 조국, 언제 우리가 다시 그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절망 가운데 하나님께 울부짖는 가사로 되어 있는, 이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정말 심금을 울리는, 그런 멋진 노래일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더 이상 울리지 않는 그 악기를 바라보면서, 슬픔 가운데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본 마태복음 1장 12절 말씀부터 우리가 살펴봤는데요. 1장 12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으로 사로 잡혀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았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가 참 놀라운 것을 발견할 수가 있겠는데요.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일상은 멈추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죠. 그 옛날 우리나라가 외정에게,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을 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이상화 시인이 노래했던 것처럼, 정말 모든 것들이 다 절망적인 상황이고, 모든 것들이 다 완전히 망가져 버리고, 아무런 소망을 둘 수 없는 그 상황 가운데서, 모든 것들이 다 끝난 줄 알았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일상이 계속되는 것이죠. 역시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겨울이 가면, 다시 봄이 오게 되는 것이고, 그리고 이 여고니아라고 하는 사람은 그 빼앗긴 그 신분 가운데서 저 이방 땅에서 아기를 낳게 되었는데, 스알디엘이라고 하는 아들을 낳게 된 것이고, 또 그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게 된 것이고, 스룹바벨은 아비웃을 낳고, 아비웃은 또 엘리야김을 낳고, 계속해서 역사가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를 오늘 본문에서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 일상이 무엇인가?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상이 아니라, 사실은 그 가계를 통해서, 그 족보를 통해서 결국에는 우리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가 오게 되는, 그 실낱 같은 역사가 여고이나를 통해서, 스룹바벨을 통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완전히 끊어진 것이 아니라, 중단된 것이 아니라, 진행되고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을 이 족보에서 바라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다윗의 왕조를 영원토록 세우시겠다고 했던 그 약속은 이스라엘 민족의 타락과 범죄로 말미암아 중단된 것 같았고, 이제는 그 이스라엘 왕조가 완전히 끝장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성전은 무너졌고, 다윗 왕조는 이제 몰락했고,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제는 다 끝났구나. “이제는 아무런 소망이 없구나.” 하는 그런 바로 그 절망적인 상황에, 그런데 놀랍게도 여고니아의 가정 가운데는 스룹바벨이라고 하는 아기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모든 것들이 완전히 절망스러워 보이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시고, 하나님께서 결국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하여서 그 후손들을 통하여서 예수님을 보내주시겠다고 했던 바로 그 약속, 메시아를 보내주시겠다고 했던 그 약속은 중단되어 버린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그 모습을 우리가 살펴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포로기 가운데 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이사야서 43장 18절 20절 말씀에 보면, 포로기 가운데 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들,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이니라.”

어쩌면 우리가 송구영신 예배 때면 늘 사용하는 성경 구절이 바로 이 이사야 43장의 말씀인데요.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라고 하는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지나간 과거는 다 잊어버려라. 옛날에 고통스러웠던 것, 이제는 다 생각하지 말고, 다 이제는 잊어버리라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무슨 말씀이냐면, 이스라엘 민족들이 가지고 있었던 마음속의 흥분으로 가지고 있었던 한 사건이 있었는데요. 바로 그 사건을 이제는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사건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출애굽의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내셔서 10가지 재앙으로 애굽 사람들을 몰락시켰고, 그리고 그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서 홍해 바다를 건너게 했을 뿐만 아니라, 광야를 통과하면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게 하시고,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서 그리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는 엄청난 그 기적의 역사가 이스라엘 민족의 마음 가운데 가장 큰 그 감격으로 그들의 마음 가운데 남아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가장 감격스러운 사건이 옛날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해방이 감격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까? 어떤 것이 감격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까? 저는 2002년 월드컵이 가장 감격스러웠던 것 같아요. 대한민국 하면서 우리나라 선수들이 그 월드컵이라고 하는 그 경기 가운데서 엄청난 기적을 이루어냈던 것이 엄청난 감격으로 남아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제일 큰 감격스러운 사건이 무엇이냐 하면, 출애굽의 사건이, 힘들 때면 언제나 생각하기를, 옛날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만들어 주셨지. 홍해 바다를 건넜고, 광야를 지나갔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이런 엄청난 기적을 체험한 것을 생각하면서, 옛날 그 사건들을 마음속에 새기고 그것을 늘 기억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하나님이 해 주시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너희들은 이제 옛적 일을 기억하지 말라.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왜요? 하나님께서 이제 이루실 놀라운 새 일이 있는데, 그것은 그 옛날 있었던 그 사건보다도 더 감격적이고, 더 능력이 있는 엄청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경험하게 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너희들은 그 옛날 일 가지고 말하지 말라.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죠. 다시 말하자면 오늘 이 본문에 이사야 4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제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노예로 끌려가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어떻게 가나안 땅으로 돌려보내실 것인가? 사막의 도로를 낼 것이고, 사막에 강을 낼 것이고, 기적이 일어나게 하셔서, 그래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민족들이 그 바벨론 땅에서부터 이제는 기쁨과 감격을 가지고 정말 꿈꾸는 것과 같이 정말 정말 감동과 감격 가운데 이스라엘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 소망의 메시지를 하나님께서 해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우리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아니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어쩌면 우리들은 우리들이 처한 이 현실을 바라보면서, 때로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이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우리들이 원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돌아갑니다. 물질이 좀 많았으면 좋겠는데, 오히려 더 힘들어지는 일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고요. 이거 문제 하나 해결하고, 이제는 모든 걱정과 근심을 이제는 내려놓았으면 좋겠는데, 더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경험들을 많이 하게 되면서, 우리들은 고통스러운 생각을 할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묵상하면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약속을 잊으신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약속을 성취하는 일에 중단한 적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가면, 이제는 완전 망했구나. 이제는 이스라엘의 소망이 없구나. 깊은 암흑 가운데 있다고 생각되는 바로 그 시점인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여고니아의 가정 가운데, 스룹바벨이라고 하는 한 생명을 안겨주시고, 또 그 생명을 통해서 또 다른 생명을 낳게 해 주시고, 결국은 그 가게를 통해서 메시아 온 인류를 구원하실 예수님이 이 상에 오도록 주님께서 만들어주셨다고 하는 그 사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간직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부모님과 같아요. 우리 부모님은 자녀들을 사랑하기를 단 1분 1초도 중단할 수가 없어요. 부모는 그 자녀를 바라보면서 너무나도 사랑스럽기에, 우리 자녀들은 부모를 보면서 불만을 표시하고 공평하지 않다고 말하고, 부모를 향해서 여러 가지 불만과 불만족을 쏟아내고 있지만, 놀라운 것은 우리 부모님은 자녀들을 향한 그 사랑을 단 한순간도 멈출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않고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을 오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발견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쩌면 2020년의 성탄절은 가장 참담한 그런 모습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 같습니다.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죠. 코로나로 인해서 더 이상의 현장 예배가 힘들어진 이 상황 가운데서, 같이 모여서 함께 즐기고 같이 웃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같이 앉아서 밥을 먹는 것이 힘들어졌고, 서로 안고 악수하며 즐거워할 수 있는 그런 상황들이 다 박탈당하고, 이러다가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채로 망해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 같고, 1월 3일 이후에는 이제는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1월 3일 이후에는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2.5단계가 아니라 3단계로 갈 수도 있고, 아니 없는 4단계를 만들어서 더 심각한 곳으로 갈 수도 있는 그런 상황 가운데 벌어진다고 할지라도,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끊이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실 뿐만 아니라, 그 뜻을 차곡차곡 인도해 나가고 계시는 것이죠. 오늘 그 말씀을 이 본문에서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이루어 나가시는 것을 이루시다가, 계속해서 인도해 나가시다가, 오늘 1장 16절의 말씀을 보면 이제는 예수님이 마리아에게서 태어난다고 하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장 16절의 표현은 앞에서 나왔던 표현과는 좀 다르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족보를 계속 살펴보았는데, 그 족보를 보면 여성의 이름이 등장할 경우에는 어떤 여성에게서 누구를 낳았다는 식으로 표현을 합니다. 예를 들어서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다고 표현하고 있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았다고 표현하고 있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표현하고 있으니까, 지금 예수님의 탄생의 표현을 할 때도 그와 같이 표현한다고 하면, “요셉은 마리아에게서 예수님을 낳았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하지만 1장 16절의 말씀은 그런 지금까지 해왔던 표현이 아니라 다른 표현을 하고 있는데요.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가 나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보통 생육법으로, 보통 생육법이라고 하는 것은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가 만나서, 그래서 생명이 만들어지는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방법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성령으로 잉태되어서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는 사실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마태복음 1장 18절 이후에 보면 마리아가 아직 남자를 알기도 전에, 처녀의 상태 가운데서, 성령에 의해서 잉태되었고, 그래서 예수님을 낳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동정녀였던 처녀였던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았던 것은 이미 700년 전 이사야에게 주셨던 약속, 이사야 7장에 예언을 성취하는 것인데요. “처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고 한다고 하는 그 이름을 가진 아이가 올 것이라고 하는 700년 전의 약속에 따라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것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신비한 탄생을 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상식적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서 죄가 없으신 자로 우리와 인간과는 완전하게 똑같지만, 그러나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오셨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고 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에서는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메시아를 이 세상에 오게 만드시는 그 과정 가운데서, 마리아라고 하는 연약한 한 소녀를 사용하셨다고 하는 것이 아주 주목해볼 만한 일인데요. 왜냐하면 이 마리아라고 하는 사람은 뭔가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그냥 아주 평범한 한 어린 소녀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리아가 몇 살 정도에 예수님을 낳았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한 스물몇 살 정도 됐을 거라고 생각하기가 쉬운데요. 1세기 예수님 당시에 보통 처녀들이 시집을 가서 그리고 아이를 낳는 것은 보통 13살에서 15살 사이에 처녀들이 결혼을 하고, 그리고 아기를 낳았던 것을 생각해 본다고 한다면, 어쩌면 정말 어린아이 나이에 이 마리아라고 하는 이 여성이 예수님을 낳았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정말 나약한 인간이죠. 그냥 어떤 달고 다른 그런 아줌마가 아니라,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세상 물정도 모르는, 그런 나약한 여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를 보내주시고 있다고 하는 점에 우리가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가 오시는 것은 다윗과 같은 어떤 대단한 인물이 아니라, 어떤 엄청난 파워를 가진 한 인물이 있어야만, 그것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정말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한 어린 소녀를 통해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고 하는 이야기는 정말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서는 정말 그 모든 것이 다 완전히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가능하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절망적으로 보인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 세상을 바라보면 늘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뿐입니다. 정의가 이루어지는가 하면,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판을 치고 있고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이 완전 모순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과연 이런 이 악한 세력이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을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어 버리실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수 있겠는가? 이렇게 철저하고 정말 강한 악의 세력을 어떻게 우리가 무찌를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절망감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들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는 아무것도 그 불가능한 것이 없는 것이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런 마리아와 같은 연약한 여인을 통해서도 메시아를 보내주실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무에서부터 유를 창조하고 계시고,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길을 내시는 분이시고, 강을 내시는 분이시고,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라면, 정말 아무것도 없어도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실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믿음으로 주 앞에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마태복음 1장 17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의 탄생을 족보를 설명하면서,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 잡혀갈 때까지 14대요. 바벨론으로 사로 잡혀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14대더라.”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족보에서 이 족보를 요약하면서 14대 14대 14대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한국 사람들이 이 성경 말씀을 읽을 때에는 이게 그냥 그런가 보다고 생각하기가 쉽겠지만, 이 마태복음을 받아들였던 유대인들은 이 표현을 보면서 엄청난 전율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이 열넷이라고 하는 숫자는 바로 다윗을 의미하는 숫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히브리어에 보면은요 알파벳에 숫자가 다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알파벳이 기억 니은 디귿 리을 하면서, 순서대로 1 2 3 4라고 하는 숫자를 매길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죠. 우리는 그렇게 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히브리 사람들은 어떻게 했냐면, 히브리어 알파벳에 숫자를 부여해 주었습니다. 다윗을 의미하는 새 자음 “달렛 바브 달렛”이라고 하는 이 새 자음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가면서 읽게 되는데요. 그래서 이 세 자음에 몸을 붙여서 읽으면 다비드가 되는 것이죠. 다비드 다윗이 되는 것인데, 그 다비드라고 하는 이 세 자음에 음가 숫자가 달렛은 알파벳에서 네 번째 나오는 알파벳이기 때문에 알렢, 베트, 달렛이라고 하는 네 번째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숫자 4가 부여가 되어 있고, 그리고 바브는 그다음에 헤 바브 해서 여섯 번째 나오는 알파벳이기 때문에 6이라고 하는 숫자가 부여되어 있는데, 그러니까 다윗의 이름을 4,5,4 그것을 다 더하면 열넷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으로서는 좀 이해가 되지 않지만, 1세기 사람들이 열넷이라고 하는 숫자를 보면 다윗을 상징하는 수라고 생각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어떻게 이 세상에 오셨는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고,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끌려갈 때까지 14대고, 또 끌려간 이후부터 예수님까지 14대라고 하는 이 표현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로 오셨는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다고 하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이런 표현을 하는 것이죠.

지난 시간에 설명해 드린 것처럼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다윗에게 주셨던 그 약속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 옛날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르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고 골리앗에게 나아가서 결국 그를 무찌르고,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주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실 우리의 구주 예수님으로 오셨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기억하고 이 성탄의 계절에, 우리 주변의 것들만을 바보면 절망스러울 겁니다.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면 절망스러울 겁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오신 주님의 그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면서, 주님께서 우리들의 삶을 지켜주실 것을 소망하고 나아가는 가운데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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