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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할 일 (눅 16:1-9)

2020년 12월 27일 주일예배 설교

오늘 우리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라고 하는 비유를 함께 읽었습니다. 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우리가 읽다 보면 참 혼란스러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어떤 청지기가 있는데, 어떤 일꾼이 있는데, 그 일꾼이 해고당하기 직전에, 해고 통보를 받게 되었을 때, 아직 그 남아 있는 바로 그 짤막한 시간을 이용하여서, 채무자들을 은밀하게 불렀고, 그 채무자들에게 특혜를 베풀어서, 이 일꾼이 나중에 해고된 후에도, 이 사람들이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줄 것을 기대하면서, 그 채무자들에게 좋지 않은,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특혜를 베풀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리베이트를 기대하면서, 이 일꾼이 일을 했는데요. 어쩌면 이러한 일꾼의 행위는 아주 나쁜 일에 해당할 것입니다. 업무상 배임에 해당하는 것이 될 것이고, 업무상 횡령을 한 죄에 해당하는 일을 한 것일 겁니다.

만일 우리 교회의 재정을 맡으신 회계 집사님이 계신데, 회계를 담당하시는 분이 있는데, 교회 재정을 사용하면서 이런 식으로 사용을 하고,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리베이트를 기대한다고 하면, 그것은 정말 나쁜 일이 될 것이고, 그러한 일들은 적발해서 책임을 물어야 할 아주 중대한 범죄가 될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가 혼란스럽게 되는 이유는, 그 청지기가, 그 일꾼이 한 이야기를 알게 된 주인이 그 일꾼에 대해서 칭찬했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그 주인이 그 사실을 자초지종을 알게 된 다음에, 그 일꾼에 대해서 칭찬했다고 하는 말을 읽게 될 때, 우리는 당혹스럽게 되는 것이고요, 혼란스럽게 되는 것이고요. 더 나아가서 그 주인만 칭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이 일꾼의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너희도 좀 본받아라.” 우리 제자들이 이 청지기를 본받아야 한다고, 하나의 샘플로, 하나의 샘플로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고 하는 점이 정말 여간 혼란스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일꾼을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고 하면, 그러면 우리들도 남의 돈을 가지고 이런 식으로 선심 쓰듯이, 저 사람 이 사람 저 사람들에게 선심을 쓰고, 그리고 그 사람들이 주는 리베이트를 기대하는 것이 정당한 것이며, 그렇게 리베이트를 통해서 자신의 이익을 얻는 것을 추구해도 되는 것인가라고 하는 그런 질문을 던지게 될 것입니다.

먼저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종종 공금을 쓰시는 분들이, 공금을 운영하시는 분들이 마치 그 공금을 운영하는 것이 자신이 선심 쓰는 것인 양,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으스대면서, 마치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는데요. 그것은 아주 잘못된 태도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교회의 재정을 사용하면서, 마치 자기가 어떤 선심을 쓰는 것인 양, 자신이 어떤 혜택을 베푸는 것인 양,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고, 그리고 그걸 통해서 자신이 칭찬을 받으려고 생각했다고 하면, 그것은 잘못된 태도일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내 것을 가지고, 내가 쓰더라도,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이라고 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그것이 성경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1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 무궁하도록 있느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색을 내는 것은 그건 옳지 않은 방법인 것이죠. 우리가 공금을 가지고 사용하는 것도, 우리가 생색을 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내 것을 가지고, 내가 선한 일을 하고, 내가 내 것을 가지고 긍휼을 베풀고, 자비를 베푼다고 할지라도, 내가 높아지고 내가 박수받고 하는 식의 사역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오로지 모든 영광을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리는 것이, 그것이 바로 우리 성도들의 바른 자세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율을 해석하면서, 이것을 이해하면서,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통해서 너희가 이 청지기를 본받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이 청지기가 했던 것처럼 공금을 사용해서, 혹은 다른 사람의 재물을 사용해서, 우리가 리베이트를 받거나, 우리가 어떠한 이득을 추구하는 것이 괜찮다고 하는 그런 결론을 내리시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조심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성경의 어느 한 구절 한 표현을 의지해서 쉽게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 있는 어느 한 표현 한 구절 거기에 의존해서,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으니까, 나도 그렇게 한다고 하면서 쉽게 결론을 내리시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사용된 그 구절이 어떤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는지 문맥에 따라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비추어서 어느 한 구절 말씀을 해석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연구와 고민 가운데, 어느 한 구절을 해석해야 한다고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만을 보면서, 누가복음 16장의 말씀만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불의한 청지기를 예로 들면서,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했고, 그래서 이 청지기를 칭찬했으니까, 우리도 남의 공금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들의 돈을 이용해서 내가 선심 쓰듯이 해서 사람들을 사귀고, 내가 선심 쓰듯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리베이트를 받으려고 하는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행위가 정당한 것이라고 쉽게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보면 그것과는 정반대의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남의 것을 도둑질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들도 있고. 조금 전에 읽어드렸던 베드로전서 4장 11절의 말씀들도 있고, 이런 전체적인 말씀들을 우리가 생각하면서, 우리가 이 말씀을 연구해본다고 하면, 그러니까 이 청지기처럼 그대로 따라 해도 무방하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해 주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우리가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8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하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청지기 이 일꾼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이 청지기는 이 일꾼은 정말 좋은 사람이다. 우리가 본받아야 될 사람이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라고 하나의 모범적인 샘플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옳지 않은” 샘플로 이야기하고 있다고 하는 점을 먼저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 나쁜 사람의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끄집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하시면서 종종 나쁜 사람의 예를 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교훈을 받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요. 이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등장하는 이 비유에 나오는 이 청지기는 우리에게 좋은 샘플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나쁜 샘플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정직한, 옳지 않은, 정말 정직하지 못한 이 청지기가 행한 것을 한번 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어떻게 행했는가? 그가 행한 것은 굉장히 지혜로운 일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8절 뒤에 보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다시 말하자면 이 불의한 청지기가 옳지 않은 청지기가 행한 일 가운데는 지혜가 담겨 있다고 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행한 일이 옳다 그르다를 떠나서, 선과 악의 판단을 떠나서, “이 사람이 행한 행동 자체가 지혜로운 일이었다.”라고 오늘 말씀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지혜롭다고 하는 말은 열 처녀 비유에 나올 때에, 나오는 그 비유 가운데서 다섯 처녀들을 향해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이라고 그렇게 설명할 때 사용된 단어가 바로 이 일을 지혜롭게 했다고 하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아주 일을 지혜롭게 슬기롭게 영악스럽게 일을 했다고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이 불의한 청지기가 행한 일은 나쁜 일이었지만, 그 나쁜 일을 하에 있어서 이 사람이 행한 방법은 굉장히 기발한 아이디어를 사용했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기발한 아이디어는 착한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악한 사람에게서도 나오는 것인데요. 이 불의한 청지기는 자신의 악한 목적을 위해서, 악한 일을 하기 위해서 기발한 아이디어를 짜냈다고 하는 것인데, 바로 그 기발한 아이디어를 보면서 그 모습을 본 주인이 감탄하고 있는 겁니다.

칭찬한다고 하는 것은 감탄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데, 주인이 자신의 재산이 손해가 됐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이 짜낸 그 아이디어가 너무나도 감탄스러운, 정말 깜짝 놀랄 만한 정말 비상한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 주인이 깜짝 놀라고 탄복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악한 사람들이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이 하는 그 기발한 아이디어에 혀를 차거나, 깜짝 놀라고 탄복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텔레비전 뉴스에 보면 석유를 빼돌린 사람들의 이야기, 텔레비전에 보면 사기를 친 사람들의 이야기, 여러 가지 악을 행한 사람들의 뉴스들이 나오게 되는데, 그 뉴스를 보면서 “저런 방법을 써서 사기를 치는구나.” 하면서 정말 깜짝 놀랄 만한 그런 방법을 보여주는 것처럼,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하는 것처럼, 정말 악을 행하기 위해서 정말 기발한 아이디어를 쓰는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감탄할 때가 있는 것인데, 바로 이 주인이 칭찬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바로 그런 의미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문제가 되는 것 중에 하나가 보이스피싱이라고 하는 겁니다. 정말 어떤 진짜 같은 상황을 만들어서, 다급하게 만들고 긴장하게 만들어서 그래서 사람들 내 돈을 빼앗아가는 보이스피싱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중에 혹시 보이스피싱에 당하신 분 계십니까? 그런 보이스피싱에 당하지 않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데요. 그런데 그 보이스피싱에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진짜 같아서 속아 넘어가지 아니하려야 속아 넘어가지 아니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감쪽같게 속였다고 하는 그 점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범죄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면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악을 행하기 위해서도 저런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는데, 선을 행하는 사람들은 제발 좀 지혜롭게 행동 좀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안타까운 것은 선을 행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비둘기같이 순결할 수는 있겠지만, 뱀같이 지혜롭지는 못해서 늘 당하고 있는 거예요. 뱀같이 지혜롭지 못해서 늘 실패하는 것이죠. 열정은 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있고, 무엇인가 정말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은데, 지혜롭지 못해서 모든 일을 망쳐버리는 그런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하시는 말씀이 너희는 뱀같이 지혜로울 것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인데요. 바로 그런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8절 하반절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다시 말하자면 악한 사람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즉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즉 성도들보다 더 영악하고 지혜롭다. 더 기발한 아이들을 쓰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가서 좀 배워라. 악당들에게 가서 배우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언젠가 제 전화기로 문자가 하나 왔습니다. 문자가 왔는데 그 문자 내용이 이렇습니다. “아빠, 나 지금 핸드폰 고장 나서 인터넷 가상번호로 문자하고 있어. 통화는 안 되니까, 이 번호로 카카오톡 추가하고 말을 좀 남겨줘. 급하게 부탁할 게 있어.”라고 하는 문자가 저에게 왔습니다. 우리 딸이 보낸 걸까요? 누가 보낸 걸까요? 우리 딸이 보낼 리가 없죠. 우리 딸은 이만큼 한국말을 잘하지 못하니까요.

보이스피싱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제게 문자를 보낸 겁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내셨던 그 똑같은 문자를 저에게 보냈기 때문에, 저는 이것이 제 딸이 보낸 것이 아니라, 보이스피싱을 시도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저에게 보냈다고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좀 나를 속이려면 연구 좀 해서 속이지, 이게 뭘까? 왜 이렇게 허접하게 나에게 보낼까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런 보이스피싱을 하는 사람들에게 배울 점도 있더라고요. 그게 뭐냐면 이 사람들은 상대방이 속을지 안 속을지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시도를 하고, 안 하고가 아니라, 무조건 다 보내는 거예요.

이 사람이 속을까 속지 않을까 생각해서 속을 것 같은 사람에게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속든 안 속든 무조건 다 보내서, 그 가운데 수천만 명 중에 몇 명 걸리면 되는 거예요. 이 사람 저는 그걸 생각하면서 이 사람들한테 배울 게 있구나. 배울 게 있구나.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합니까? 복음을 증거 하면서, 정말 생명이 있는 복음이요, 하나님의 말씀인 이 말씀을 전하면서, 우리들은 상대방을 보고서, 전할까 전하지 않을까를 먼저 결정합니다. 저 사람은 예수 안 믿을 것 같아. 아무리 말해도 내 말에 전혀 반응하지 않을 것 같아. 미리 포기해 버리고, 미리 기대를 접어버리고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은 채, 복음을 전하지 않고 그냥 포기해버리고 마는데, 이 보이스피싱하는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들이 받든 받지 않든, 그걸 상관하지 아니하고, 무조건 다 보내서 누구든지 걸려라. 실패하든 실패하지 않든, 무조건 다 보내는 그 모습을 보면서, 아 저 악당에게도 배울 게 있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그런 말씀입니다. 가서 저 불의한 청지기에게 가서 좀 배워라. 무엇을 배워야 한다는 말입니까? 이 불의한 청지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고 한다면, 남의 돈을 착취하고 자신의 이익을 가져가는 것을 배우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는 이 사실, 이제 해고 통보를 받았기 때문에 내가 더 이상 이 직장에서 이 일을 계속해서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았고, 그리고 그 얼마 남지 않은 이 기간 안에 해고 이후를 대비해야, 그래야 내가 먹고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짧은 시간을 허비하지 아니하고, 그 짧은 시간에 자신의 해고 이후를 대비하면서, 그래서 사람들을 한 명씩 한 명씩 만나 가지고 결국 그 해고 이후를 대비할 수 있는 지혜가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4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이 불의한 청지기는 자신이 청지기로서의 일을 할 수 있는 그 아주 짤막한 시간에, 그 해고 이후를 대비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알았고, 그리고 그것을 시도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한 명씩 한 명씩 사람들을 불렀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불의한 청지기로부터 배울 수 있는 지혜가 있다고 한다면, 현실 인식과 미래에 대해서 지금 준비하는 태도일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우리들의 종말이 오지 않을 것처럼, 우리는 마치 천년만년 살 수 있을 것처럼, 끝이 없는 것처럼 태평스럽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무런 죽음 이후에 대해서 준비하지 않은 채, 안일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해주시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바로 구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는 이 말씀은, 그러니까 우리가 이 청지기처럼 악한 짓을 해도 괜찮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이 청지기처럼 종말을 대비하는 삶을 살아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종말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아직 우리에게 기회가 있을 때, 지금 이 순간에 마지막 날을 위해서 준비하지 아니하면, 그 기회가 지나가버리면, 더 이상 기회가 없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지금 불의의 제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고, 9절 하반절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이 말씀은 그러니까 우리가 돈을 얼마만큼 투자했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그것이 우리를 살린다고 하는 의미가 아니라, 결국 마지막을 준비한 만큼 그 죽음 이후에 우리의 마지막 이후에 우리가 준비한 것에 따라서, 우리의 삶이 달라질 거라고 하는 말씀을 주님께서 해주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이 어떤 날인가? 2022년의, 20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2020년 시작한다고 했던 때가 불과 엊그제 같고, 코로나라고 하는 이상한 바이러스가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말한 것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마지막 한 주간이 됐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인생도 마지막이 곧 다가올 것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게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마지막이 있을 것이고, 해고 통보를 받은 청지기처럼 우리들도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가서 결산해야 되는 것이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루의 시작이 있으면 하루의 마지막이 있고, 일주일에 시작이 있으면 일주일에 끝이 있고, 한 달에 시작이 있으면 한 달의 마지막이 있고, 일 년의 시작이 있으면 일 년의 마지막 날이 있듯이, 우리가 태어난 이후에 우리의 마지막도 있을 거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고, 그리고 그 마지막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아직 남아있을 때 우리의 마지막을 준비하며 살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의 말씀에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오.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살아있는 이 시간 동안에 안일하게 살아서는 안 되고, 이제 얼마 있지 아니하면, 우리도 우리의 인생을 정리할 때가 다가올 거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지금 아직 우리에게 목숨이 남아 있을 때 대비하고 준비해야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종말론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종말이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인데요. 종말론적인 삶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 고린도전서 7장 29절에서부터 31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것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에 외형은 지나감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요? 아내 있는 자들은 아내 없는 자 같이 살라고 하는 이 말씀의 의미가 무슨 의미겠습니까? 이것은 그다음에 나오는 말씀에 비추어 보면서 이해가 가능한데요.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처럼 살라고 하는 말씀에 비추어서 이해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슬프고 어려운 일을 당했다고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완전히 절망할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 당장 힘들고 지금 당장 괴로운 일이 내게 닥친다고 해도, 우리가 절망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지막이 곧 다가오기 때문에 그런 거죠. 이 세상은 끝나게 되어 있고 나는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가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실 거라고 하는 것을 생각한다고 하면, 지금 슬퍼도 완전히 절망하지 아니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는 자 같이 하라고 하는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아무리 좋은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좋은 일 그 자체 때문에 기뻐하고 그것에 매달려서 그것에 우리의 행복이 달려 있는 것처럼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것도 언젠가 끝이 날 때가 있는 것이고, 그렇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 지니고 있던 모든 것들이 다 허망 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기쁨이 이 세상의 것들에 따라서 일희일비하면서 살아갈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을 때 그럴 때 우리가 절망할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원수가 있을 때 그 원수를 갚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을 돌려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세상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날이 있을 것이고, 그것에 따라서 우리의 모든 것들이 결정될 거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한다고 하면, 저와 여러분들이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당장 하나님의 심판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죄악을 저지르며 살아가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연말을 맞이하면서 이제 우리의 삶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하고, 그 짧지 않은 인생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이번 연말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주에 우리 이양임 권사님께서 소천하셨는데요. 소천하시기 전에 아마 한 달 정도 전이었을 겁니다. 병원에서는 이제 더 이상 치료할 수 없다고 하시면서, 집에 가시면 좋겠다고 집에서 여행을 마치면 좋겠다고 해서 퇴원을 했습니다. 자녀들이 영국에서 그리고 미국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한번 심방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심방을 했습니다. 그리고 온 가족들이 다 모여 있는 그 자리에서, 아직 정신이 말짱하고 자녀들을 알아볼 수 있고 모든 가족들을 다 볼 수 있는 그 상황 가운데서, 임종 예배 같은, 임종 예배 아닌 임종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 무슨 말씀을 전해야 될까 고민하다가, 전했던 말씀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그 기간 그게 얼마나 길지 모르겠지만, 그 기간이 얼마가 되든지 간에, 우리가 염려한다고 해서 우리의 생명이 더 길어지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우리 모두를 다 불러가 주실 텐데, 그 얼마 남지 않는 이 시간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괴로워하고 절망하면서 사는 것이 바른 자세가 아니라, 그 시간을 주신 것을 기억하면서 감사하며, 오히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 은혜를 기뻐하며 살아가고, 그 1분 1초를 버리지 아니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하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권면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언젠가는 불려 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먼저 갈 수 있는 사람도 있고 나중에 갈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보니까, 꼭 먼저 갈 것 같은 사람이 먼저 가는 것이 아니라, 늘 새치기하는 사람들이 늘 생기더라고요. 제가 어느 한 미국의 필라델피아에 부임하게 되었을 때 거기에 환자들이 있었습니다. 저분은 얼마 있지 않아서 곧 돌아가실 것 같다. 생각했는데 제가 나올 때까지 살아계셨어요. 다 살아 계셨어요. 괜찮을 것 같다는 사람들이 먼저 가시더라고요.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언제 누가 먼저 갈지는 아무도 모르죠.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의 인생은 정해져 있는 것이고, 그 정해진 그날에 우리가 가기 전에, 우리에게 남아있는 짧은 시간이 놓여 있는데, 지금 이 시간에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 원망하며 불평하며 계속 살던 그 삶의 방식으로 계속 살아갈 게 아니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야 되는 지금 이 순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감사하고 기뻐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한다고 하면, 매 순간순간마다 감사함으로 기뻐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2020년을 이제 거의 마무리하면서, 또 2021년을 새로 시작하게 될 텐데, 우리가 살아 숨 쉬는 그 순간이 그냥 영원히 계속될 것이냐? 아무런 의미 없이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한 시간 1분 1초 늘 기뻐하고 감사하며 하나님의 뜻 가운데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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