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나님의 말씀 같이 묵상하면서 은혜를 누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읽은 잠언서 18장 22절의 말씀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 아내를 얻는 게 복을 얻는 것이고 아내를 얻는 것이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맞는 말씀입니까? 대답을 좀 해 주세요. 맞는 말씀입니까? 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한 번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그러면 남편을 얻는 자는 어떻게 되나요? “화로다, 여호와께 저주를 받은 자로다.” 그렇습니까? 우리 교회는 너무나도 은혜가 넘칩니다. 성경에서는 아내를 얻는 자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이렇게 아내를 얻는 자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성경 말씀이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에 남성 중심의 사회 가운데서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 겁니다.
남성의 관점에서,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그 남성이 누가 복된 사람인가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누가 복된 사람인가? 아내를 얻는 자가 복된 자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인데요. 그 말은 그러니까 남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고 사실은 여성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씀일 거라고 믿습니다. 여성도 남편을 얻는 자는 화가 아니고 복이 되는 것이고요, 여성도 남편을 얻는 자가 여호와께 은총을 받은 자라고 하는 사실을 이 말씀을 보면서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별로 동의를 안 하시는 것 같아요. 왜 그럴까요? 왜 아내를 얻는 것이 복이며 왜 아내를 얻는 것이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배우자를 얻는 것, 인생의 반려자·동반자를 얻는 것이 우리에게 복이 되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것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냐하면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장 18절 말씀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아담 혼자 있는 것을 보시고 좋지 않게 보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을 위해 또 다른 한 사람을 창조하셔서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가정을 이루게 하신 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것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렇게 배우자를 얻는 것, 반려자를 얻는 것이 복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여호와께 은총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배우자가 완벽한 짝이기 때문은 결코 아닙니다. 완벽한 짝은 없어요. 이 세상 남의 짝은 완벽해 보일지 몰라도 내 짝은 언제나 불완전해 보이잖아요. 하지만 어느 가정도 완벽한 짝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의 미신은 ‘완벽한 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주가 맞고 팔자가 맞아 모든 게 다 맞으면, 정말 잘 맞는 짝을 만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하죠. 마치 우리의 운명이 완벽한 짝을 찾느냐에 달려 있는 것처럼요. 하지만 성경적 관점은 다릅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짝은 없고, 모두가 불완전합니다. 남편도 불완전, 아내도 불완전, 미성숙하고 다 갖추어지지 않은 불완전한 둘이지만,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돌보며, 북돋아 주고 품고 안아 주면서 함께 성장해 가도록 주신 선물, 그 불완전한 짝이 바로 복이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강조하는 것은 약간 조심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가운데는 혼자 사시는 분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하지 않으신 분도 계실 뿐 아니라, 사별 등 여러 이유로 혼자 살아가는 분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혼자 사는 것은 나쁜 것일까요? 아내가 없고 남편이 없으면 저주받은 것이고 복이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만 보면 그럴 것 같지만, 제가 누누이 강조했듯이 성경은 어느 한 부분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으로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뜻을 살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 혼자 사는가 함께 사는가의 문제에 있어 창세기 2장 18절이나 오늘 잠언 18장에서는 가정을 이루는 것이 복이라 말하지만,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혼자 사는 것도 거룩하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7장 7–8절에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를 향해 들려준 말씀인데요.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놀랍지 않습니까? 한쪽에서는 독처가 좋지 않다 하며 아내를 만들어 주셨다고 하고(창 2:18), 잠언 18장에서는 아내를 얻는 자가 복 있다고 하는데, 고린도전서에서는 반대로 “혼자 살 수 있으면 혼자 살아라. 나도 혼자 산다. 모두가 나 같았으면 좋겠다”라고 권합니다. 독신도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정결히 드리며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는 서원을 하고 사는 것도 가능한 길이라고 말합니다. 그 유익은 무엇인가요? 고린도전서 7장 32–3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고, 장가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해 마음이 갈라진다고요.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거룩을 힘쓰지만, 시집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남편을 기쁘게 하려 한다고요.
성경은 양쪽을 말합니다. 결혼하는 게 좋습니까, 안 하는 게 좋습니까? 각각 유익과 위험이 있습니다. 아내를 얻으면 그 나름의 유익이 있고, 남편을 얻으면 그 나름의 유익이 있으며, 혼자 산다면 그 나름의 영적 유익과 동시에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부르셨는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게다가 우리들 대부분은 결국 생의 어느 지점에서 혼자 지낼 때가 올 수 있습니다. 배우자가 먼저 소천하여 홀로 남겨질 수도 있겠지요. 그때 “나는 저주받은 인생인가?”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을 올리고 감사하며 살 것인가를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오늘 잠언의 말씀은 특히 아내를 얻는 자의 복됨, 곧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얻거나, 아내가 남편을 얻는 것이 왜 복이고 은총일까요? 잠언 본문 자체는 구체적 이유를 직접 말하진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성경 전체와 경험을 통해, 서로의 동반자가 되어주는 유익을 압니다. 슬픔은 나누면 줄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며, 어려운 길도 함께 가면 가벼워집니다. 함께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등을 긁을 수도, 서로를 일으킬 수도 있죠. 실제로 그 유익을 생생히 느끼신 분도 있습니다. 박병덕 장로님의 경우, 새벽에 주무시다 침대에서 떨어지셨는데, 권사님이 계셔서 그 아픈 몸으로 장로님을 부축해 병원에 가고, 한 병원이 안 된다 하니 다른 병원으로 옮기는 등 신속히 입원 조치해 살려 내셨습니다. 함께 있음의 유익, 하나님의 은총이지요. 속히 건강 회복하셔서 함께 예배하길 소원합니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에 계신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은 이런 유익을 전혀 누릴 수 없을까요? 잠언 18장 24절은 말합니다.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 어떤 친구는 가족보다 더 낫게 우리를 붙들어 줍니다. 함께 있어 행복하고, 대화하며 기운을 얻고, 슬픔에서 다시 일어설 힘을 주는 친구들—사랑의 공동체가 바로 그런 복입니다. 교회 공동체 속에서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며 믿음의 길을 같이 걷는다면, 그것이 곧 사람을 얻는 복,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핍박 속에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4–47절처럼, “다 함께 있어 통용하고, 필요를 따라 나누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모이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함으로 먹고, 하나님을 찬미”했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성도에게 가족이 되어 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보라 네 어머니라”(요한복음 19:26–27) 하시며 제자에게 어머니를 맡기신 것도, 서로 가족처럼 돌보는 공동체를 부탁하신 말씀입니다. 그대로 초대교회는 함께 떡을 떼고 찬양하며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얻는 것이 복이고, 하나님 은총입니다. 우리 예수비전교회도 그렇게 믿음의 길을 함께 걸어가야 할 줄 믿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얻는 데는 위험도 있습니다. 잠언 18장 24절 앞부분,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아내·남편을 얻는 것도, 공동체를 이루는 것도 장점과 유익이 크지만, 경우에 따라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잘못된 영향력으로 함께 망하기도 하고, 잘못된 지도 아래 공동체가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교회는 사기성 투자로 공동체가 크게 상처 입은 사례도 있죠. 또 악의적 의도는 아니어도, 우리가 신중치 못한 말과 태도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이것이 이 세상 친구·동반자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참된 친구가 계십니다. 예수님이십니다. 신분이 전혀 다른 분이지만, 우리와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요한복음 15:15).
그렇다면 어떻게 해가 아니라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유익한 짝, 복된 짝이 될 수 있을까요? 잠언 18장 23절이 힌트를 줍니다. “가난한 자는 간절한 말로 구하여도 부자는 엄한 말로 대답하느니라.” 뜬금없는 말 같지만, 요지는 이겁니다. 말 한마디의 태도가 관계를 살리기도 죽이기도 합니다. 부자가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간절한 자에게는 차갑고 잔인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상대의 입장에서 배려하며 따뜻한 말과 손길을 내밀라는 교훈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있다고, 친구가 많다고 자동으로 복이 되지 않습니다. 그 관계를 선한 관계, 복된 관계로 만들어 가려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내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옆 사람의 마음을 허물 수 있다”는 걸 기억하며, “어떻게 하면 내가 더 따뜻한 이웃·동반자가 될까”를 스스로 점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가정과 공동체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총이 흐르게 될 줄 믿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도 그걸 잘 못합니다. 말하고 나면 “아차, 또 실수했구나” 하고 후회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던진 한마디도 종종 실수가 됩니다. 오늘 아침 라디오 사연처럼, 자녀의 슬픈 감정을 알아주지 못하고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 주지 못해 후회하듯 말입니다. 우리는 연약해서 자주 넘습니다. 그럴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회개하며 “주여, 용서해 주옵소서. 우리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 주옵소서” 기도합시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의 삶이 하나하나 주님을 닮아 가고, 주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빚어져 가기를 소망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