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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 바다 앞에서 (출 14:10-14)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아주 난처한 상황을 경험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진퇴양난의 어려운 상황들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두 번쯤은 경험하게 될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외통수에 걸려서 이제는 꼼짝없이 죽었다 싶을 때가 많지는 않지만, 우리의 인생 가운데 찾아올 때가 종종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출애굽기 14장의 말씀을 함께 읽었는데요. 이스라엘 민족이 바로 그런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애굽 땅을 출발해서 가난으로 가는 길 앞에 홍해 바다가 가로막고 있는 겁니다. 그 바다를 건너서 갈 수 없는 그런 난처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 뒤에서는 뒤늦게 바로의 군대가 룩 애굽 군대가 군대를 이끌고 추격하고 있다고 하는 그런 끔찍한 소식이 들려지게 된 겁니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돌아갈 수도 없고 완전히 모든 것이 막혀버린 이런 상황 가운데 만일 우리가 그런 상황 가운데 있었다고 한다면 우리들은 어떤 생각이 들까요? 어떤 마음이 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순간에 우리는 어떤 반응을 할 수가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상황 가운데서 가장 먼저 보여주었던 반응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두려움이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도 죽을 수밖에 없고, 가만히 있어도 죽을 수밖에 없는 “이제는 꼼짝없이 죽었구나”라고 생각되는 그 순간에, 이스라엘 민족의 마음 가운데 두려움이 엄습하게 된 것이죠. 이런 상황 가운데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실 이렇게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거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무서운 상황 가운데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그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연스러운 사람들의 감정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좋은 것일까요? 나쁜 것일까요? 두려움이 나쁜 것입니까? 아니면 그냥 괜찮은 것입니까? 사실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고, 인간이라고 한다면 이런 상황에서는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그런 자연스러운 감정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면, 오히려 더 그게 이상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혹시 힘들고 어려운 상황, 그리고 진퇴양난의 그런 어려운 상황 가운데 처하게 되었을 때, 마음 가운데 두려운 마음이 든다고 해서 자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믿음이 연약한가? 내 마음은 왜 이렇게 두려움이 많은가? 그렇게 괴로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연스러운 감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이 완전히 나쁜 것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제대로 된 두려움이라고 한다면, 방향이 제대로 설정된 두려움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해로운 것이 아니라 유익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은 우리들로 하여금 두려워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하는데 무엇을 두려워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죠. 너희는 하나님을 두려워해라. 너희는 하나님이 무서운 줄 알라. 너희는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그게 바로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죠.


우리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안전하게 행동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주변에 수많은 위험한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그런 위험한 것들이 너무나도 많죠. 무엇이 무섭습니까? 물이 무서워요. 물속에 잘못 들어갔다가는 빠져 죽습니다. 불이 무섭습니다. 불을 잘못 건들면 모든 것을 다 태워버려서 그동안의 모든 수고가 다 헛수고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이 무섭습니까? 독이 무서운 겁니다. 잘못 먹었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무서운 것들, 위험한 것들을 보면서 아무런 감정이 생기지 않아서 두려운 마음이 전혀 없어서 그냥 물속에도 들어가고 불 속에도 막 들어가고 아무거나 다 먹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건강한 태도가 아니라 그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 같아요.


성경에 보면 귀신 들린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 귀신 들린 사람의 그 위험이 무엇입니까? 그 귀신 들린 사람이 잘못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귀신 들린 사람은 물속에도 들어가고 불 속에도 막 들어가면서 결국 그래서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는데도 그냥 그것이 무서운 줄 모르고 그냥 들어가는 그런 사람이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 두려움이 없는 것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험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고, 그래서 이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실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연스러운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인생을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준 하나님의 선물이오 유익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어려운 상황 가운데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민족의 마음 가운데 두려운 마음이 제일 먼저 들었다고 하는 것은 사실 그것 그 자체로는 그 자체로는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생산적이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긍정적인 선택으로, 그리고 그 앞이 무서움을 이용해서, 무서움으로 인해서 우리가 좋은 결과들을 만들어내는 그런 선택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한다면 유익한 것이지만, 그 두려움 때문에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리고 정말 우리들의 삶이 절망 가운데 빠져버리고 만다고 한다면 그 두려움은 잘못된 결과를 빚는 두려움이라고 하겠습니다. 물이 무서운 거를 알기 때문에 불이 무섭다고 하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물을 대할 때 아주 조심스럽게 대하고, 불을 대할 때 아주 조심스럽게 불을 잘 사용해서, 그래서 그것을 유익하게 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두려움은 생산적이고 문제를 해결하게 하는 좋은 그런 두려움이 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 두려움이 우리로 하여금 절망적인 마음을 갖게 만들 때가 있고요. 또한 우리로 하여금 분노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공동체를 깨뜨려버리는 그런 잘못된 모습으로 분출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그것은 그 두려움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두려움을 어떻게 이용하는가 그 두려움에 대한 그 반응을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 나가야 되는가에 있어서 잘못된 선택을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는 그 두려움의 감정을 믿음의 반응으로 순화시켜서 긍정적인 행동으로 만들어 나가야 하는데, 그러한 두려움이 들었을 때 긍정적인 반응이 아니라, 건전하고 생산적인 반응이 아니라, 불신앙으로 표출해 버리기 시작한다면, 그 두려움은 잘못된 두려움이라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어떻게 했는가? 두려운 마음이 들었을 때, 그 두려움을 생산적이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표출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방식으로 표출했다고 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제일 먼저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모세를 향해서 원망하기 시작한 거죠. 출애굽기 14장 11절 12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의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지금 이 두려운 상황 가운데 있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어떻게 잘못된 반응을 했느냐 하면, 자신들의 지도자인 모세를 향해서 원망하면서 “우리가 괜히 나왔다” 괜히 우리가 여기에 나와서 이렇게 여기서 죽게 되었다고 하면서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차라리 우리가 애굽에 그냥 있는 것이 더 나았다.” 애굽에서 애굽 왕을 섬기면서 그래도 목숨이라도 붙이고 있는 것이 그게 더 나은 선택이었다고 그렇게 비난하기 시작한 것이죠. 어쩌면 그러한 비난이 맞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죽어버리면 무슨 소용입니까? 해방된 것처럼 보였지만 이곳에서 몰살되어 버린다고 한다면 의미가 없기 때문에 어쩌면 이런 이스라엘 민족의 말이 일면 맞는 것처럼 느껴지게 될 겁니다.


하지만 이 이스라엘 민족의 이러한 불평 비난은 정당한 것이었는가 했을 때, 정당하지가 않았어요.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나오고 싶지 않아서 나오고 싶지 않았는데 억지로 모세가 끌고 나온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스라엘 민족이 그 애굽 땅에서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까? 애굽 왕의 지하에서 그 폭군 밑에서 고통을 당하며 정말 자신의 자식 자식들을 나일강에 던져서 죽게 만들면서 억지로 일을 해야 되는 그 고통 가운데 죽지 못해서 살아가고 있는 그런 고통스러운 인생을 그 애굽 땅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의 마음 가운데 어서 빨리 이리 힘들고 고통스러운 이것을 빨리 끝장 냈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간절한 소망이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있었던 것이고, 이스라엘 민족은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던 것이죠.

출애굽기 2장 23절에서 25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도의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그들의 고통 소리 울부짖는 그 울음소리를 듣고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주셨다고 하는 이야기가 출애굽기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 와서 옛날이 더 좋았다. 과거의 고통은 현재의 고통보다는 너무나도 작을 수밖에 없어요. 고통이 언제의 고통이 제일 어떤 고통이 제일 큽니까? 지금 고통이 제일 커요. 지금 고통 옛날에 그 아무리 큰 고통이라고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버리면 다 잊어버리고, 그 옛날의 고통이 정말 물리적으로 계산해 보면 그 옛날의 고통이 훨씬 더 크지만 지금 만나는 작은 고통도 옛날의 고통은 너무나도 작아 보이게 많은 것이 우리들의 모습인 것이죠. 하지만 그 이스라엘 민족의 불평은 정당한 것이었는가 했을 때, “그것은 정당하지 않은 불평이었다”라고 하는 것이고요.


두 번째로 그러한 불평은 유익한 것이었는가 했을 때 절대로 유익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를 비난하면 문제가 해결됩니까? 모세를 향해서 원망하면 홍해 바다와 그 애굽 군대로 인해서 진퇴양난의 상황 가운데 있을 때 모세를 비난한다고 해서 그 문제가 해결이 됩니까? 아무런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는 그야말로 백해무익한 것이 지도자를 향해서 원망하고 비난하는 것이었죠. 오히려 그 비난으로 인해서 모세라고 하는 지도자가 낙마할 수도 있고 절망할 수도 있고 아예 포기할 수도 있는 마음이 다 나뉘어져 버리는 아무런 유익이 없는 그 일을 이스라엘 민족이 했었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이 순간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바람직한 선택이 있다고 하면 무엇이겠습니까?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격려해 주고 위로해 주고, 함께 손잡고 나아가자. 이 문제를 우리가 함께 해결해 보자고 낙망하지 마십시오.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위로해 주고 권면해 주는 선택을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어쩌면 가정에서 제일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있을 때가 언제일까요? 우리가 가정생활을 하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닥칠 때가 종종 있는데 때로는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을 때 가정의 위기가 생깁니다. 때로는 자녀들의 문제 때문에 자녀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가정 가운데 불화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런 어려운 위기의 상황을 우리가 만나게 된다고 하면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옳을까요? 그때 남편과 아내가 서로 손잡고 걱정하지 말라고 내가 도와주겠다고 우리 같이 힘내보자고 여보 걱정하지 마. 여보 힘들어하지 마. 내가 할게. 남편과 아내가 서로서로를 향해서 서로 격려하고 위로해서 그래서 그 위기를 넘겨야 하는 거예요. 넘겨야 해요.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수많은 가정이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서로를 향해서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남편을 향해서 원망하고 아내를 향해서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우리 자녀들의 문제가 생기면 남편을 비난하고 아내를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힘들 때 서로 도와주라고 남편과 아내가 있는 건데, 고통스러울 때 손 잡아주라고 남편과 아내가 있는 것인데, 어쩌면 이스라엘 민족처럼 지도자를 향해서 원망하고 그래서 마음을 더 무너뜨리는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할 때가 우리들에게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몰라요.

그래서 오늘 우리들은 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다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 저희들의 어리석은 마음을 용서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씻어주셔서 정말 더러운 죄인을 비난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주신 그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받았는데, 그 주님의 사랑처럼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돌보며 정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옵소서 주님 앞에 기도하면서 가정이 회복되고 사랑이 회복되고, 진퇴양난의 어려운 순간 가운데 함께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는 그런 복된 가정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상황 가운데 모세도 실망하고 절망하고 무너질 수 있었는데 놀랍게도 모세는 이 순간에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안 두려웠을까요? 두려웠을 것 같아요. 저도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를 이끌고 무엇인가를 해 나갈 때 뭔가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며 마음속에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처럼 아마도 이 순간에 모세의 마음 가운데 두려운 마음이 들었을 것 같아요. 그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니까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놀랍게도 모세는 그 두려운 상황 가운데서 그 두려움이 절망하고 자포자기하고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고 비난하는 참모들을 비난하는 그런 방향으로 표출된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들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이끄는 그런 영적인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게 된 것이죠.


출애굽기 14장 13절 14절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오늘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모세가 이 말을 언제 했는가를 봤어요. 모세가 이 말을 어떻게 이 말을 하게 되었을까를 살펴봤어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 말을 해준 다음에 모세가 이 말을 했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전에 모세가 이 말을 백성들에게 한 겁니까? 성경을 한번 잘 보세요. 언제 했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어떠한 말씀을 해 주시기 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 말한 게 아니고 그 말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도 전에 이 말을 모세가 백성들에게 해요. 그리고 나서 하나님 앞에 모세가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울부짖는 거예요. 그 후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셔요. 너희는 이렇게 있지 말고, 모세야 네가 가지고 있는 지팡이를 내밀어라. 그 후에 말씀하셔요. 이것이 아주 놀라운 이번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가 주목해 보았던 부분인데요. 어떻게 모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희를 홍해 바다를 갈라서 건너가게 해 주시겠다고 하는 그런 약속을 듣기도 전에 모세는 어떻게 백성들을 향해서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모세는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미리 알았을 것입니까?

아마도 성경에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가 추측하자고 한다면 모세는 지금까지 자신들에게 베풀어준 하나님의 그 기적을 기억했기 때문일 거예요. 하나님이 지금까지 우리에게 어떻게 하셨는가 어떻게 하셨죠? 10가지 재앙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내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한 거예요. 그 옛날 일을 기억하고 있는 것을. 그런데 그 10가지 재앙을 할 때마다 늘 진퇴양난의 어려움이 있었어요. 기적을 베풀었는데 애굽 왕이 거절했어요. 보내지 않았어요. 또 기적을 베풀었는데 재앙을 내렸는데 또 애굽 왕이 또 거절했어요. 또 거절했어요. 그런 상황 앞에서 야 아무리 해도 안 되나 아무리 해도 이런 기적으로도 저런 재앙을 얻어 바로의 마음을 결코 움직일 수 없는가라고 하는 그런 절망적인 상황을 10번씩이나 경험한 거예요. 10번씩이나 10번씩이나 경험해서 답답했지만 그래서 망했는가 망한 게 아니라 결국은 바로 왕이 두 손 두 발 다 들고, “나가라” 나가라고 싹싹 빌면서, 그러면서 가축도 금은보화도 다 가지고 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준 그 엄청난 기적의 이야기를 경험했었는데 그 경험을 까마득하게 잊은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봉해 바다 앞에서 바로 왕이 뒤쫓아오는 그 상황 가운데서 그 옛날 일을 기억할 수가 있었던 것이죠.


우리는 우리의 마음속에 도우의 돌 에벤에셀을 두고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옛날 사무엘 선지자가 도움의 돌 에벤에셀을 세워놓고 잊으려고 하면, 그 돌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여기까지 도우셨구나. 그걸 바라보고 다시 한번 힘과 용기를 얻었었던 것처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하셨는가를 늘 기억해야 돼요. 늘 기억 그래야 모세와 같은 반응이 나올 수 있는 겁니다.


두 번째로 모세는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는가? 추측해 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한 거죠.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한 것이죠.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너는 이스 라엘 민족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명령해 주셨잖아요? 그 명령에 따라서 자기가 지금 움직이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 약속하신 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그 약속대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내겠다고 약속해 주신 그 약속에 따라서 지금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왔는데 그 하나님께서 힘이 없어서 이스라엘 민족을 여기서 죽이시겠는가 하나님이 저 바로 왕보다 힘이 약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여기서 죽이시겠는가? 하나님이 저 홍해 바다 앞에서, 꼼짝 못 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 앞에서 죽이겠는가? 논리적으로 생각해 볼 때 아니라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도 모세처럼 해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께서 그 옛날 선지자들에게 나타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 꿈에서 나타나시고 혹은 신비한 음성으로 말씀해 주시고 하는 일들은 이제는 아마 경험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직접 들리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동안 어떻게 해오셨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지금까지 역사해 주셨는가를 보면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 결론을 내려야 되는 거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어요. 울부짖었어요. 그럴 때 하나님의 응답이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14장 15절에서 16절의 말씀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땅으로 행하리라.” 과연 그 말씀대로 하자 동해 바다가 갈라졌고, 마른땅을 보게 되어 그 위로 이스라엘 민족이 걸어갔으며, 마른땅이 안 되면 질적거려서 빠져버리겠죠?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안전하게 건넌 후에는 애굽 군대를 그 아 바다에서 몰살시키는 엄청난 대역전의 기적을 체험하게 된 것이죠.


홍해가 무엇이었는가? 홍해는 무서운 것처럼 보였지만 무서운 게 아니라 예방 주사와 같았던 거예요. 그 예방주사의 바늘을 보면 너무나도 무서운데 사실은 그게 나를 죽이기 위해서 예방주사가 있는 게 아니고, 우리를 바이러스로부터 균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예방 접종을 하게 되는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을 죽이기 위해 계획된 것이 홍해가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부터 완전히 이기게 만들기 위한 애굽 군대를 치기 위한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의 손길이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이러한 일들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두려운 마음이 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때 우리의 두려운 감정이 나타나는 것까지는 자연스럽겠지만 그 두려운 감정이 불신앙의 길로 인도하는 게 아니라 정말 믿음의 반응으로 우리의 모습을 바꾸어 나아가야 합니다. 절망할 게 아닌 것이죠. 두려운 마음이 절망으로 바뀌면 안 된 겁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어떤 길로 인도해 주실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길로 인도하실지 기대해야 하는 겁니다.

이런 상황을 만나게 될 때는 우리 동료를 향해서 비난할 게 아닙니다. 서로 이때를 위해서 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결단을 해야 할 겁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돕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만난다고 한다면 왜 조심성 없이 행동하다가 강도 만났냐고 비난할 게 아니고 그 강도 만난 자를 향해서 다가가 상처를 싸매어주고 온전하게 해 주어서 회복시켜 줄 사명이 우리에게 있는 것처럼 이런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 비난이 정답이 아니고 원망하는 게 정답이 아니고 오히려 사랑하고 아끼고 돌보아 주어야 하는 것이고, 이러한 상황 가운데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는 것은 아무런 것도 하지 말아야 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주가 하시는 것을 바라보라고 하는 말씀은,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만 하고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하는 말이 아니라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말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 말이에요.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말은 아무것도 전혀 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두려워하고 벌벌 떨면서 절망하지 말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물론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철저하게 믿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전혀 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그렇게 강조하는 표현들이 많이 있습니다. 홍해 바다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그 홍해 바다를 갈라주신 것도 그것이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게 할 때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무너지게 만든 것 기드온의 300 용사처럼 숫자를 줄이고 줄이고 줄여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은 일을 했어도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 주신 것을 보여주신 것은 정말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하신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방편으로 한 것인데, 그러면 그 말은 우리가 정말 아무것도 하고 안 해도 된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지만 그러나 두려워할 게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일이 있을 때에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과거에 역사하셨던 하나님, 더 나아가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우리 위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하나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신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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