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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의 힘 (삿 16:28-31)

사람의 머리카락이 얼마나 자랄 수 있을까요? 챗GPT에게 물어보니까 사람의 머리카락은 한 달에 1센티미터에서 1.3cm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삼손은 어려서부터 성년이 될 때까지 머리를 한 번도 깎지 않았다고 하니까 삼손의 머리카락 길이가 얼마나 되었을까요? 한 스무 살 정도라고 한다면 어 정말 많이 길렀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1년이면 한 12에서 16cm 정도까지 자란다고 하니까 20년이면 어마어마하게 자랐을 거라고 생각이 되지만, 사람의 머리카락은 끝까지 자라는 것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빠지는 것이기 때문에, 빠지고 다시 자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껏해야 허리에서부터 엉덩이 사이까지 머리가 자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삼손의 머리카락이 그 정도 길게 자랐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그런 삼손을 하나님께서 들어 쓰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셨다고 하는 이야기가 사사기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범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 민족을 그냥 방치해 두신 것이 아니라 이방 민족을 들어서 징계하셨습니다. 이방 민족들의 압제를 받게 만들고 고통을 당하게 하셨는데요. 그런데 그것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끝나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셨기 때문이죠.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죄를 지으면 그 죄에 대해서 심판해 버리고 끝내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빚으시고 훈련시키시고 더 주님 앞에 돌아올 수 있도록 바꾸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심판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회복이 목적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죄로 인한 고통이든 아니면 우리를 연단시키고 훈련시키기 위한 고통이든, 그 모든 것들이 우리를 그냥 심판해 버리고 징계해 버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회복시키시고 또한 성장시키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항상 기억할 필요가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예레미야서 29장 11절 말씀을 기억하면 좋겠는데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이 예레미야의 말씀은 언제 주어졌는가? 이스라엘 민족이 죄악을 범해서 저 바벨론으로 끌려갈 때, 나라를 잃어버리고 이제는 아무 소망도 없다 생각되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인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는 게 내 뜻이 아니라 너희에게 평안을 주려고 하는 게 나의 뜻이라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인데요.

오늘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하는 것이죠. 지금 당장 좋은 일이 벌어지든지, 아니면 정말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터널을 지나가든지,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을 기억해야 할 거라고 믿습니다. 구약 성경 사사기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범죄할 때마다 이방 민족을 들어서 징계하셨지만 또한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회개할 때마다 사사를 보내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사사라고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죠? 사사, 영어로 보면 이해하기가 쉬울 텐데 사사기의 영어 이름이 Judges입니다. 그러니까 ‘재판관들’이라는 말이죠. 사사라고 하는 말의 의미가 재판관, 판사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될 텐데요. 물론 오늘날의 판사와 같은 사람들은 아닙니다. 사사가 누구였는가? 오늘날 판사와 같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족장들, 추장들 정도로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이스라엘 각 지파와 마을들 사이에서 재판하기도 하고 다스리기도 하고, 작은 왕과 같은, 추장과 같은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바로 사사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이런 사사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건져 내 주시고 또 건져 내 주신 이야기가 사사기의 말씀 가운데 기록돼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볼 사사가 누구냐 하면 삼손이라고 하는 사사입니다. 머리카락이 아주 긴 것으로 특징이 되는 그 삼손인데요. 이 삼손이라고 하는 사사는 아주 특이한 사람이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서 미리 예언하셔서 태어난 아이였던 것이죠. 삼손의 부모님들에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예언하시기를, 너희 가정에 아기가 태어날 텐데 이 아이를 어떻게 길러라, 나실인으로 길러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실인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어떤 특정한 기간 동안 내가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독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겠다고 서원한 사람을 말합니다. 단 며칠 기간만을 나실인으로 지내는 것이 아니라 평생토록 나실인으로 살라, 그렇게 기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사람이 바로 삼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삼손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겠다고 예언하셔서, 머리도 깎지 말고 술도 마시지 말고 거룩한 삶을 살라고 하신 사람이 바로 삼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삼손이 정말 그렇게 나실인으로 거룩하게 삶을 살았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물론 머리는 깎지 않았지만, 그의 삶을 본다면 정말 방탕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삼손과 관련해서 여성 편력의 이야기가 나오는 거죠.

이방 여인과 결혼을 하고, 또 이 여자와도 얽히고 하면서 삼손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 아주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민족은 이방 민족과 결혼할 수 없었는데, 이 삼손이라고 하는 사람이 그렇게 방탕한 삶을 살면서 아주 질이 좋지 않은 여인들과 어울려 살았을 것이고, 뿐만 아니라 나실인이면 시체를 만지면 안 되는데, 사자를 죽이고 그 죽은 사자의 몸에 있는 꿀을 따먹는 등 시체도 그냥 막 만져 버렸습니다. 그냥 나실인처럼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일반인처럼, 아니 일반인보다 더 더러운 삶을 살았던 사람이 바로 삼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은 거룩의 사명이었고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낼 사명이었는데, 그런데 삼손은 어떤 삶을 살았는가? 방탕한 삶을 살았다고 하는 것이죠.

포도주도 마시지 말라고 되어 있지만, 기록을 보면 이 삼손이 포도밭 안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또한 결혼식에서 술자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니, 아마 이것도 잘 지키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망나니와 같은 삼손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내셨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블레셋 여인과의 결혼을 통해서—정말 이스라엘 백성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이었을 텐데—그 결혼 사건을 계기로 블레셋 사람들을 무찌르는 결과가 나옵니다. 그 이야기가 사사기 14장에서 15장에 기록돼 있습니다.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블레셋 여인과 결혼한 이야기가 있는데요. 혼인 잔치가 벌어지고 흥이 솟아오를 때, 삼손과 그곳 손님들 사이에 내기가 벌어졌습니다. 남자들은 내기라면 사족을 못 쓰잖아요.

그래서 흥에 취해서—아마 술기운에—이 삼손과 블레셋 사람들 사이에 내기가 이루어졌습니다. 알아맞히기 게임을 하는데, 삼손이 문제를 하나 냈습니다. “내가 수수께끼를 낼 테니 맞춰 봐라. 너희가 맞히면 내가 옷 30벌(속옷과 겉옷)을 줄 것이고, 맞히지 못하면 너희가 나에게 내라.” 삼손이 낸 문제는 자기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사자를 죽였는데, 그 죽은 사자의 시체에 꿀이 있는 것을 보고, 그 개인적 경험을 가져와 질문한 것이죠.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는데, 이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었습니다. 개인적 경험을 물어보니 블레셋 사람들이 알 수가 있습니까? 모르는 거죠. 도대체 무슨 뜻일까?

우리가 넌센스 퀴즈 하듯이 “다리 중에서 제일 나쁜 다리는? 왔다리 갔다리” 이런 식의 질문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사실 이건 맞출 수 없는 문제가 아니라, 히브리 평행법을 알면 금방 답이 나오는 수수께끼입니다. 질문 속에 답이 들어있는 것이죠. 첫 번째 행과 두 번째 행이 같은 뜻을 반복하니, ‘먹는 자’ 중 ‘강한 자’는 누구겠습니까? 당연히 사자일 것이죠. ‘먹을 것’ 중 ‘단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입니다. 그러니 답은 이미 들어있는 겁니다. ‘사자에게서 꿀이 나왔다’가 정답이죠. 다만 운율에 맞추어 답해야 했습니다. “무엇이 꿀보다 달겠느냐,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 이런 식으로요.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이 알아맞히지 못하자, 그들은 삼손의 아내—신부—를 윽박지르고 회유하여 답을 알아내었고, 신부가 알려 주어 맞히게 되었습니다. 화가 난 삼손은 “너희가 내 신부에게서 들었구나” 하며 분노하여 블레셋 사람 30명을 죽이고 그 옷을 빼앗아 내기에 준, 참으로 좌충우돌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 뒤 화가 난 삼손이 돌아가 버리자, 장인어른이 그 신부를 다른 사람에게 주어 버립니다.

나중에 삼손이 돌아와 “내 아내를 내라” 하니 이미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고 하자, 화가 난 삼손이 여우들의 꼬리에 불을 달아 블레셋 사람들의 밭을 태워 버립니다. 이에 분노한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내놓아라” 하니, 삼손이 끌려가는 척하다가 나귀의 턱뼈를 들고 천 명의 블레셋 사람을 죽이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성경, 재미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 결국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구원해 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하지만 삼손의 이야기는 계속 좋게만 흘러간 것이 아니라, 결국 삼손의 머리가 깎이고 맙니다.

삼손이 새로 사귀게 된 여인 들릴라를 블레셋 사람들이 위협하고 협박하고 회유하여, 삼손의 힘의 근원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캐묻습니다. 삼손이 “깎지 않은 이 머리털에서 나온다”고 말하자, 결국 그 머리를 깎아 버립니다. 더 이상 나실인이 아닌 삼손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블레셋 사람들에게 끌려가 두 눈이 뽑히고 결박당해 조롱을 당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 삼손이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저는 이 삼손의 모습을 보면서—블레셋 사람들에게 끌려가 조롱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고, 두 눈이 뽑혀 머리가 밀린—그 삼손의 모습을 보며, 어쩌면 이게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 마치 이 삼손의 모습과 같지 않은가?

교회의 모습이 어떠한가? 이 삼손의 모습과 같지 않은가? 성도의 모습이 어떠한가? 바로 이 삼손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룩을 향해 살아야 할 삼손이 거룩하기는커녕 방탕한 삶을 살다가 머리가 다 깎이고, 끌려가 조롱과 모욕을 당한 그 모습처럼, 오늘날 교회의 모습, 성도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교회가, 성도가 거룩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탐욕을 추구하며 권력을 추구하다가 세상으로부터 조롱당하는 모습—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는 세상의 권력에 야합하고 뇌물을 주며 악을 행하다가 끌려가 조롱당하는 모습—이 바로 이 삼손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있는데, 그 사명대로 살지 못하고 그저 세속적인 명예만을 추구하다가 결국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는 모습이,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과 똑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우리가 누구인가라고 할 때, 어쩌면 우리가 이 삼손처럼—나실인의 소명을 가지고 태어난 이 삼손처럼—거룩하게 살아야 할 소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누굽니까? 베드로전서 2장 9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귀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는데, 우리를 무엇을 위해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는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라고, 왕 같은 제사장처럼 살라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거룩의 빛을 나타내라고 우리를 불러 주신 것이죠.

삼손처럼—그 옛날 삼손이 태어날 때 “이 아이를 하나님께서 선택하셨으니 거룩하게 키워라. 세상 사람들처럼 살지 말고, 세상 사람과 구별되었다는 의미로 머리를 자르지 말고, 독주를 대지 말고, 포도주를 마시지 말고, 구별된 삶을 살아라”—라고 하셨지만, 이 삼손은 거룩한 삶이 아니라 방탕한 삶을 살며 마치 부랑자처럼, 망나니처럼, 악을 행하는 패륜아처럼 인생을 살았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 우리 성도의 모습이 어떠한가? 늘 세속적 야망과 권력에 대한 탐욕, 시기와 질투로 인해 세상 사람들로부터 눈이 뽑히고 손발이 묶인 듯 아무런 능력도 발휘하지 못한 채 조롱당하는 모습—예수 믿는다는 것 자체가 조롱당하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일지 모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절망적입니다. 교회의 모습을 보면 소망보다는 절망을 느끼기 쉽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소망이 있을까요? 과연 이 시기에 예수님을 믿고 산다고 하는 것,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우리의 모습에 소망이 있을까요? 절망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오늘 사사기의 말씀은 우리가 완전히 절망스러운 것이 아니라 소망이 있다고 들려줍니다. 끌려간 삼손의 모습—그런데 사사기 16장 22절 말씀을 보니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하루에 머리카락이 얼마나 자랄까요? 0.3밀리미터. 자라는 게 보여요? 안 보여요. 안 보입니다. 그런데 0.3mm가 자라고, 그다음 날 또 0.3mm가 자라고, 사흘이 지나면 1mm가 자랍니다.

삼손의 머리카락이 잘려 버렸지만, 시간이 지나며 머리카락이 다시 자랐습니다. 사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예라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이제는 모든 것이 끝장 난 것 같아도, 하나님의 은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 비추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어미 새가 알을 품고 있으면 아무 변화가 없는 것 같아도 계속 품다 새끼가 태어나듯, 씨앗을 뿌리면 반응이 없는 것 같아도 때가 되면 싹이 나고 뿌리가 내리고 열매를 맺듯, 하나님의 은혜는 없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 단 한 번도 중단되지 않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삼손은 그때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습니다. 이런 삼손 같은 사람이 하나님께 울부짖을 자격조차 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그 순간에도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삼손은 울부짖습니다. 사사기 16장 28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엎드릴 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다시 삼손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머리카락이 길어서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결국 삼손이 죽이면서 무찔렀던 블레셋 사람이, 살았을 때 무찔렀던 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삼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소망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면 다 실패자 같아요. 성공하지 못하고 또 넘어지고 또 쓰러지고—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고—세상으로부터 조롱당하는 모습이, 어쩌면 두 눈이 뽑힌 삼손의 모습과 같을 수 있어요. 하지만 소망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에게 있는 게 아니라, 한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버리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언제 찾아가도 반갑게 맞아 주시는 아버지, 어머니 같으신 분. 그래서 명절이면 우리가 부모님을 찾아가듯, 하나님은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하나님이시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이 다시 믿음으로 일어설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삼손의 이야기를 기억하면서, 매 순간 ‘나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 생각될 때마다 주님 앞에 기도하고 엎드리며 “다시 힘을 주옵소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옵소서”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사명—지금까지 놓치고 살았다면—다시 그 사명을 회복하고, 거룩한 백성, 하나님의 나라 왕 같은 제사장의 사명,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 나가는 귀한 믿음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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