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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의 하나님 (삼상 3:7-12)

어느 날 하나님께서 어린 사무엘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불러 주신 그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이죠.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무엘을 부르셨을 때 사무엘의 나이가 몇 살 정도였을까요? 혹시 아십니까? 저도 모릅니다. 어머니 한나가 이 사무엘을 젖을 떼자마자 성전에 맡기기 시작했으니까 아주 어린아이 시절부터 성전에서 지내고 자라고 그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어린 나이일 수도 있겠고 좀 더 성장한 나이일 가능성도 있는데요. 사무엘상 3장 1절 말씀에 보면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그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니까, 아이 사무엘 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보면 좋겠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아이’는 몇 살 정도를 아이라고 할까요? 우리 한국식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아이라고 번역한 이 히브리어 단어 ‘나아르’라고 하는 단어가 있는데요. 한번 보여주시겠어요? ‘나아르’라고 하는 이 히브리어 단어는 사실 모세와 같이 어린 아기, 갓난아기부터 요셉처럼 17살 되는 그런 소년까지, 아니 그리고 그보다 더 나이가 많은 20대 청년들까지 지칭할 수 있는 단어가 히브리어 ‘나아르’이기 때문에, 아이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이니까 이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의 나이가 몇 살인지는 정확하게 특정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기로는 유치원생 정도의 혹은 아주 어린 나이에 들었을 거라고 생각이 들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제 추측으로는 아마 12살 전후에 혹은 10대 후반 정도에 들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는데요. 하나님께서 왜 사무엘을 부르셨을까요? 심심해서 깜짝 놀라라고? 그게 아니라 엘리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들려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엘리 제사장의 가정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못하고 악한 일들을 많이 행했었는데요. 그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하여 그 성전에서 일하고 있던 아이 사무엘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무엘은 그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누구에게 뛰어갔냐면 엘리 제사장에게로 뛰어갔습니다. 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는데 엘리 제사장에게로 뛰어갔을까요? 하나님이 자기를 불렀다고 하는 것을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당연히 엘리 제사장이 나를 불렀을 것이라 생각하고 엘리 제사장에게 뛰어갔는데, 엘리 제사장은 자기가 부르지 아니하였다고 하면서 사무엘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이건 필시 하나님께서 너를 부르셨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너를 불렀을 수 있으니 다음 번에 부른다고 한다면 그러면 ‘주여, 제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말씀하옵소서.’라고 대답하라.”고 알려주었고, 정말 하나님께서 불러 주셨을 때 사무엘은 놀라운 하나님의 예언의 메시지를 듣게 되었습니다.

너무 충격적인 메시지인 것이죠. 엘리 가정을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겠다고 하는, 심판하시겠다고 하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그 이야기대로 엘리 가정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사무엘서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후로 사무엘이 이제는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리는 선지자로, 이스라엘 민족을 지도하는 영적인 지도자로 세워지게 된 이야기가 사무엘서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를 우리가 살펴보면서 우리가 주목해 보고 싶은 점이 하나 있는데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누구에게 나타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에 하나님은 누구에게 나타나실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제사장에게 나타나야 당연할 거라고 생각이 드는 것이죠. 만일 우리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면 누구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실 것 같아요? “나에게는 아니야. 우리 담임목사님에게 나타나실까?” 그렇게 생각하시기가 쉽잖아요. 하지만 놀라운 것은 무엇입니까? 이 사무엘서에서 보여주는 놀라운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엘리 제사장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나타나셨어요? 아이 사무엘에게 나타나신 거예요. 아이 사무엘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는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나타나실 수 있다는 거예요. 우리에게도 나타나셔서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것이죠.

어떤 특권층, 어떤 영적인 높은 지위에 올라가 있는 사람, 어떤 성직자, 우리와는 뭔가 다른 특별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 같은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사람은 그 누구에게도 은혜를 베푸실 수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죄가 많은 세리 삭개오를 예수님께서 만나 주신 거예요. 그래서 죄가 많았던 여인이 예수님 앞에 나와 기름을 부을 수가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낚던 베드로도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던 거죠. 그래서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유대인뿐만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이방인들도, 부자들만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도, 공부를 많이 한 사람뿐만이 아니라 공부를 하지 못한 사람들도, 건강한 사람만이 아니라 이제는 아무런 힘이 없고 아무런 것도 내놓을 수 없는 상황에 빠져 있는 나에게도 하나님께서는 동일하게 은혜를 베푸실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먼저 우리가 주목할 수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종종 목회자들이, 종종 성직자들이 빠지기 쉬운 잘못된 유혹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은 일반 성도들과는 다른 사람이고, 나는 일반 성도들과는 더 하나님과 가까운 위치에 있다”고 말하고 싶은 유혹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과 더 가까이 있으면 그러면 성도들이 더 말을 잘 들을 것 같거든요. 내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이야기를 하면 그러면 성도님들이 더 말을 잘 들을 것 같아서, 성직자들에게, 목회자들에게 유혹이 있다고 한다면 ‘내가 하나님과 훨씬 더 가깝다’고 하는 것을 드러내고 싶은 그런 유혹들이 언제나 있게 마련입니다. 사실 그러한 일들이 늘 역사상 반복되어 왔었는데요.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중세 시대 때 기독교가 그랬습니다. 당시 신부들은 자신들이 영적인 어떤 특권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나님과 일반 사람들 사이에 중재자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르친 것이죠. 소위 영적인 브로커 역할을 자처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는가? 일반 사람들이 그냥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부에게 와서 죄를 고백하고, 신부에게 와서 무엇인가를 부탁하면 신부가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말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해 주는 그런 중간 브로커의 역할, 영적인 브로커의 역할을 자처했던 것이 중세 시대 때의 신부들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어떤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브로커가 되면 대단한 위세를 떨치는 것이죠. 그래서 내가 대통령과 혹은 영부인과 특정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이용해서 무한 권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브로커의 그런 힘이라고 할 수 있어요. 얼마 전에 우리나라에서도 대통령, 영부인과 무척 가까웠던 사람이 국회의원을 향해서 막말을 해 대고 욕을 해 대는 그런 음성 파일이 공개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지게 만들었는데,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통령과 가깝기만 해도 그렇게 안하무인이 되고 최고의 권력을 누릴 수가 있는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브로커 역할을 한다고 하면 얼마나 더 큰 권세를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큰 권세를 가지게 되면 결국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처럼 종교는 타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래서 중세 시대의 교회들이 타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타락을 이겨내고 성경의 가르침을 가지고 “그렇지 않다. 신부가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가 아니라, 우리는 모두가 다 하나님의 제사장들이며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있고, 신부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껏 받아 누릴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성경 말씀을 통해서 가르쳐 준 사람들이 누굽니까? 마틴 루터와 존 칼빈과 같은 인물들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면서 “그게 아니다. 성직자가 일반인과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혀 있던 죄의 담을 다 없애 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고, 중재자가 필요 없고 브로커가 필요 없고, 우리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받을 수 있다”는 그런 종교개혁이 지금으로부터 508년 전에 시작된 것이고, 10월 마지막 주일은 그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종교개혁기념주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점을 잘 기억해야 되는데요. 왜냐하면 이러한 일이 과거에 있었던 일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그대로 과거의 잘못들이 다시 반복될 위험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개신교 목회자들 중에서 잘못된 목회자가, 자신은 하나님과 더 가깝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로부터 직접적인 어떤 지시를 받는다고 자신을 거짓으로 포장하면서 성도들을 속이고, 그래서 자신이 어떤 영적인 브로커인 것처럼 떠벌리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영적으로 착취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조심해야 될 목회자가 있다고 한다면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다’고 주장하는 목회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직접적으로 내가 듣고 있으며 하나님과 내가 직접 교통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그런 목회자가 있다고 한다면 그 목회자는 잘못된 목회자인 것이고, 영적인 착취를 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빨리 그 교회에서 떠나는 것이 유익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동료들 가운데 그런 잘못된 교회에 다니고 있다고 한다면, 잘못된 목회자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들을 권면해서 그런 잘못된 교회에 다니지 말고 정말 성경적으로 바로 가르치고 있는 교회를 다니라고 말하는 것이 그게 오늘날의 종교개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사람과 친밀하게 그 사람과 교통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누구와도 교통하시는 하나님. 오늘 우리 성경 말씀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하나님은 제사장과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이 사무엘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말씀해 주셨던 것처럼, 오늘날의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시고 우리들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던 죄악의 장애물을 제거해 버림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누구든지 하나님에게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불가능했었습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가 많은 우리가 함부로 나아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죄악을 용서해 주셨고, 이제는 우리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말끔히 씻겼기 때문에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특권을 누리게 된 것이죠. 그래서 그것을 생생하게 보여 준 사건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실 때 성전 안에 있던 휘장이 찢어진 사건입니다. 전에는 그 휘장이 가로막고 있어서 그 휘장 안, 성소에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어요. 누가 들어갑니까? 오로지 대제사장만—시은소, 하나님의 은총이 내린다고 하는 그 자리로—오직 대제사장만 겨우 들어갔습니다. 그냥 들어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씻고 또 씻고 하면서, 그래서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지만 이제는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그 은혜의 자리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누구든지 나아갈 수 있다고 하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고, 이것이 바로 복음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에서부터 22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심에,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이때는 좀 아멘 하세요. 이러한 하나님 앞에 누구든지 나아갈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든지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신약에서 완벽하게 이루셨지만 이미 구약 성경 가운데서도 이 원리가 하나씩 하나씩 나타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나타나셨는가? 어린 사무엘에게 나타나신 거예요. 그 원리 때문에 하나님께서 누구를 사용하셨어요? 왼손잡이 에훗을 사용하신 거예요. 당시로서는 “뭐가 문제가 있는 사람 아니야?” 생각되었던 왼손잡이도 하나님께서 들어 쓰신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드보라—여성도—들어 쓰신 거예요. 어떤 특권층에게만, 어떤 특정한 부류에게만, 어떠한 권력층에게만 하나님의 사랑이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우리와 같이 연약한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을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사모해야 될까요? 이 어린 사무엘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는 이 구약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러면 오늘날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소망하고 갈망하는 것이 좋을까요? 사실은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약 시대 때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시고 사무엘에게 말씀하시고 또한 다윗에게 말씀하시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말씀해 주셨는데, 오늘날에는 하나님께서 그 옛날 직접적으로 말씀하셨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으신다는 점을 먼저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는 그렇게 구약 시대처럼 직접 말씀하지 않으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성경 66권 가운데 다 기록되어 있어서, 성경 말씀으로 충분히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어야 되는 것이고요. 이 성경 말씀에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구현되어 있어서 이 성경 말씀으로 우리가 충분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추가적인 메시지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직접 말씀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2장 18절, 19절의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는데요.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하게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는데 이 말씀 외에 또 다른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것이다”라고 주장하면 그것은 괜찮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잘못된 주장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간증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고 그렇게 표현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셨고, 꿈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는데 정말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져서 감사하다고 하는 그런 간증을 우리가 많이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기를 “네 병이 낫게 해 줄 것이다.” 말씀해 주셨는데 정말 그 말씀대로 내 병이 낫게 되었다고 간증하는 사람도 있고요. “너는 이제 내 직업을 그만두고 신학교에 가서 목회자가 되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대로 따라서 하다가 내가 목회자가 되었다고 고백하는 사람도 있고, 내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누구를 만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고, 정말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누구를 만났더니 문제가 해결이 되고 “내가 이렇게 성공하게 되었다.”고 하는 그런 간증들을 들은 경우가 많이 있을 겁니다. 들어보셨죠?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들의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아,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구나.” 성경 속에서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역사하시는구나 하면서 우리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우리들의 믿음이 더 강화되는 효과를 가져올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간증들에 너무 빠져들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신다는 것이,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모든 것들이 성경 말씀에 기록되어 있고 거기에 추가할 것이 없다고 말씀해 주셨기 때문인데요. 우리가 그러한 간증들을 들으면서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셨구나.”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이해하고 받아들였고, 그분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구나.”라고 결론을 내리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러니까 그 옛날 구약 성경과는 달리 오늘날에는 침묵하시는 하나님인가? 그렇지 않아요.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향해서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세요. 끊임없이, 끊임없이 말씀해 주시는데 누구처럼 말씀하셔요? 엄마처럼 자꾸 말씀하시는—엄마처럼 말씀하시는데, 아니 그 이상으로 말씀하셔요. 매 순간순간 말씀하시는데 누구를 통해서 말씀하시는가?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만들기도 하고, 우리가 설교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도 하고, 때로는 원수들의 책망하는 말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도 하고, 또는 어린아이의 입술을 통해서, 또는 친구들의 말을 통해서, 때로는 사건과 사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가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간증하시는 분들이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말하는 것을 무시하거나 비난하려고 하고 싶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직접 그렇게 들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검증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과연 정말 하나님의 뜻일까라고 질문을 던져야 됩니다. 어떻게 검증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서—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고 우리를 위한 신앙의 최고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성경 말씀에 비추어 보아서 내가 들었다고 생각하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인가 맞지 않는 것인가를 신중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만일 구분하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내 욕심과 내 탐욕이 마치 하나님의 뜻인 양 착각하고 잘못 행하게 되는 잘못된 경우가 많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내 정치적인 생각이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고, 나의 야망, 나의 성공에 대한 욕심들이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되게 되는 것이어서, 그래서 정말 하나님의 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잘못 말하게 되기도 하고, 하나님의 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모든 것을 다 때려치우고 목회자가 돼야겠다고 하는 길로 가는 경우도 생기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내가 깨달은 그 ‘하나님의 뜻’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 날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정말 하나님의 뜻인가, 아니면 나의 욕심인가, 나의 탐욕인가, 아니면 나의 잘못된 판단을 하나님의 뜻으로 내가 잘못 포장하고 있지는 않은가”를 날마다 날마다 검증해야 될 필요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들어야 해요.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늘 말씀해 주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악한 일을 하려고 하면 성령님께서는 탄식하는 소리로 우리를 향해 말씀하시는 것이 “네가 분노하지 말고 참고 인내하며 용서하라.”고 하는 성령님의 음성을 우리가 들어야 되는 거예요.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욕심이 과해지면 성령님께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죠. “네가 욕심을 부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게 주어진 것을 가지고 선한 일을 힘쓰고, 주를 위하여 힘쓰고, 네 이웃을 돌보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가 들어야 되는 것이죠. 그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고 사탄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이냐 그렇게 착각하거나, 내 욕심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해 버리는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아니하도록 우리 모두가 조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조금 전에 제가 광고 말씀드린 것이 기도 카드를 적어서 넣어 달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이렇게 부탁드리는 것은 제가 여러분들보다 더 기도의 능력이 세고 하나님과 더 가까운 위치에 있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하셔도 충분히 기도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기도를 신음 소리 듣듯이—아기의 신음 소리 듣듯이—귀 기울이고 계시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기도의 제목을 달라고 하는 이유는 우리가 함께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마태복음 18장 19절, 20절 말씀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 혼자 기도하는 것보다 함께 기도하는 것이 더 유익하기 때문인 것이고,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일들이 있을 때 함께 모여서 기도했어요. 함께 기도한 것이죠.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함께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들을 체험하게 된 것이고요. 뿐만 아니라 바울 사도도 자신의 기도 제목이 있을 때 그 기도 제목을 교인들과 함께 공유하면서 “여러분들이 나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이야기했어요. 바울 사도가 누굽니까? 바울 사도가 기도할 때 병자가 낫기도 하고, 바울 사도가 기도했을 때 죽은 자가 살아나기도 하고, 엄청난 능력을 보여 주었던 그 바울 사도가 “괜찮아, 나는 하나님과 더 가까우니까 내가 내 문제 알아서 기도하고 끝낼게.”라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바울 사도는 성도들에게 기도의 부탁을 하면서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로마서 15장 30절 말씀에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달라.”고 권면하고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 줄 것을 간절하게 권면해 주고 있는 것이죠.

왜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시고, 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귀찮아하는 그런 나쁜 제사장과 같은 하나님, 재판관과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세요. 우리의 신음 소리를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귀 기울이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시는 그 하나님, 또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시는 그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의 자세가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도의 제목을 하나님 앞에 아뢰며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실 것을 기도하며 나아가는 영적인 교제가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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