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가운데 알라딘의 마술 램프라고 하는 동화가 있습니다. 알라딘이라고 하는 사람이 마술 램프를 가지고 있다가 필요할 때면 문질러서 거인이 나타나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그런 동화인 것이죠. 다 알고 계십니까? 네,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이고 또 우리 자녀들에게, 우리 손주들에게 재미있게 읽어주었던 동화가 바로 그런 동화인데요. 우리는 늘 생각하면서 하나님도 우리가 이렇게 알라딘의 마술 램프처럼 써먹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그런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알라딘이 마술 램프를 막 문질러서 거인이 나타나게 하는 것처럼 내가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내가 하나님을 불러서 바로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나를 도와준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될 때가 많이 있는 것이죠. 하지만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우리가 마음대로 써먹기 좋은 우리의 종과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엎드려야 하는—주객이 전도되면 안 되는 것이지—성경의 관점은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대로 이용해 먹을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는 게 사실은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는 아주 중요한 관점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무엘상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게 되었는데요. 이스라엘 민족이 블레셋 민족과 전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블레셋과 전투하는 가운데 블레셋의 힘이 너무 센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그 전쟁에서 패하게 됐습니다. 얼마나 많은 큰 손실을 보게 되었는가. 이스라엘 군인 4천 명이 죽는, 4천 명의 전사자가 생기는 그러한 큰 피해를 입게 된 것이죠.
이 상황 가운데서 이스라엘 민족은 어떻게 생각했냐면 언약궤를 좀 가지고 와야 되겠다라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눈 것이죠. 우리가 전쟁을 해서 이기고 싶은데 블레셋의 힘이 너무 강하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럴 때 이스라엘 장로들이 서로 논의하면서 언약궤를 가져오자, 언약궤를 가져오자고 하는 그런 결론을 내리게 됐습니다. 왜 언약궤를 생각해 냈을까요? 그것은 지금까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가운데 이 언약궤와 함께하면서 어마어마한 기적을 체험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언약궤를 가지고 요단강을 건너갈 때 요단강의 강물이 멈추는 그런 기적을 체험했던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리고 성을 점령할 때, 여리고 성을 점령하기 위해서 그 여리고 성을 돌 때 언약궤를 들고서 제사장이 그 성을 돌고 난 다음에 소리를 지르게 될 때 여리고 성이 무너져서 승리하게 되는 그런 엄청난 경험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생각해 낸 겁니다.
지금 이 전쟁 가운데 언약궤를 가지고 온다고 하면 우리가 이길 수 있지 않겠는가, 마치 알라딘의 마술 램프처럼 생각한 겁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 거인이 나타나서 문제를 해결해 주었듯이 지금 이 순간에 우리가 언약궤를 가지고 온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기게 해 주시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 하지만 이것이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늘 생각을 했어요. 이 전쟁 가운데 어떻게 우리가 이길 것인가. 언약궤를 가지고 오면 좋겠다 해서 결국 그렇게 결정을 해서 언약궤를 전쟁으로 가지고 왔다고 하는 소문이 들리자 이스라엘 민족은 너무나도 기뻐서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야, 이제 우리가 이겼겠다. 이제 이 전쟁에서 우리가 승리할 수 있겠다고 하면서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블레셋 사람들에게까지 크게 들렸고, 마치 땅이 울리는 것처럼 그런 어마어마한 소리를 지르게 되었을 때 블레셋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두려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큰일 났다. 저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했다. 저들의 하나님이 그 옛날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내셨고, 저들의 하나님이 그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 주었고, 그렇게 승리하게 만들었던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했으니 이제 큰일 났다. 정신 차리자, 잘 싸우자 하면서 블레셋과 이스라엘 민족이 전투를 하게 되었는데요. 결과는 이스라엘 민족이 이겼습니까? 졌습니까? 지고 말았습니다. 3만 명이라고 하는 전사자들이 생기게 되었고, 언약궤는 빼앗겨 버렸고,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그 전투 가운데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죠. 언약궤를 전투 현장에 가지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언약궤에 아무런 힘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옛날 그 언약궤를 가지고 요단강을 건넜을 때 요단강이 멈춘 이유는 언약궤가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 것이죠. 언약궤를 들고 갔지만 그 요단강물을 멈추게 하신 분이 누구예요? 하나님께서 멈추게 하신 것이지, 언약궤가 대단한 능력이 있어서 멈추게 한 것이 아니란 말이죠. 언약궤를 들고 여리고 성을 돌았을 때 그 여리고 성이 무너졌는데, 그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것은 언약궤가 아니라 누구예요? 하나님께서 무너지게 만드신 것이죠.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들은 착각한 겁니다. 그 언약궤를 가지고 다닐 때마다 승리했던 기억을 가지고 이 언약궤만 가지고 가면 블레셋 민족과 싸워서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언약궤가 아무런 힘도 없었다고 하는 사실만 보여 준 것이 바로 이 블레셋과의 전투였을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이 블레셋과의 전투 가운데서 패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언약궤를 가져와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좋은 선택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만 했었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그것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하는 것이죠. 왜 우리가 지게 됐을까? 하나님께서 이 가나안 땅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셨는데 왜 우리 민족이 저 블레셋 민족에게 지게 됐을까,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며 “하나님, 저희들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저희들의 죄가 무엇입니까?” 자신을 돌아보면서 회개하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마땅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그저 언약궤만 가져오면 이길 수 있지 않을까—마치 알라딘의 마술 램프를 가져오듯이—언약궤만 가져오면 우리가 이길 수 있지 아니할까 생각했던 것이 잘못된 생각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여호수아 때의 일을 기억하십니까?
여호수아 때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난 다음에 이제 아이 성이라고 하는 조그마한 성과 전투를 하려고 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비교해 본다고 하면 아이 성은 정말 조그마한 성이었어요. 여리고 성은 그에 비하면 어마어마하게 큰 성이었고, 도무지 이기기 힘들 만큼 그렇게 아주 큰 성이 여리고 성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무찌르게 하셨기 때문에 아이 성 정도야 쉽게 이길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우리들이 가서 이기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여호수아가 소수의 전투 인원들만 보내서 아이 성을 점령하려고 했는데 결과는 이겼습니까? 졌습니까? 졌어요. 36명이 죽임을 당했어요. 이길 줄 알았는데 지게 되는 그 상황 가운데서 여호수아는 무엇을 했을까요?
여호수아는 그 순간에 ‘맞아, 우리가 여리고 성을 무찌를 때는 언약궤를 가지고 돌았는데 그때 7바퀴를 돌면서 소리를 질렀는데, 아이 성을 칠 때는 우리가 언약궤를 안 가지고 갔구나. 언약궤를 가지고 가야지’ 하면서 언약궤를 가지고 갔나요? 아니에요. 그 순간에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하나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왜 우리가 전쟁에서 패하게 되었습니까? 어디에 우리의 문제가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울부짖기 시작했는데 하나님께서 그 여호수아에게 말씀해 주신 것이죠. 너희가 패한 이유가 무엇인가. 너희 가운데 죄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사람을 살펴보니까 아간이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여리고 성에서 전리품을 취하여다가 감추어 두는 죄를 범한 것을 발견하게 되고, 그 아간을 처단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죄를 제거한 다음에 그다음에 아이 성과 싸우게 될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싸우게 됨으로 말미암아 아이 성에서 승리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아이 성 전투에서 지게 되었을 때 왜 언약궤를 가지고 갈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이 여호수아는 분명하게 깨달은 겁니다. 언약궤가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힘이 있는 것이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지 언약궤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에, 여호수아는 아이 성 전투에서 맨 처음에 지게 되었을 때 언약궤를 가지고 가야 되겠다고 하는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회개하는 가운데 승리를 얻게 된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항상 조심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실까?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우리가 정확하게 이해해야 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잠시 사용하였던 것들이 마치 어떤 대단한 능력이 있는 것인 양, 마치 알라딘의 마술 램프와 같은 그런 효력이 있는 것인 양 착각하시면 안 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방법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주셨는데, 그것들을 우리가 살펴본다고 한다면 예배가 그것이 되겠고요.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겠고, 여러 가지 찬송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릴 수 있겠고,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성경에서는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구약시대 때 있었던 방법이 무엇이냐 하면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제사의 방법을 다 일일이 규정해 놓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가를 규정해 놓은 것이지,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하는가—속죄제를 드리는 겁니다. 양을 잡고 소를 잡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다시 만나 주시는—그 은혜의 방편을 하나님께서 주셔서 그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이 제사라고 하는 그런 방편이었는데, 그런데 사실 이 제사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사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게 무엇일까요?
상하고 회개하는 마음이 훨씬 더 중요해요. 내가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구나 회개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그 신실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이지, 제사라고 하는 그 재물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날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 일천 번제를 드렸습니다. 일천 번제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양 천 마리를 잡아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린 것인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한 규모라고 할 수가 있을 것 같아요. 일반적으로는 그저 양 한 마리만 잡아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것인데, 솔로몬은 1천 마리의 양을 잡아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 앞에 이렇게 1천 마리의 제사를 드리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솔로몬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너무나도 감사한 거예요. 하나님이 너무나도 좋은 거예요. 왜 좋습니까? 알고 보면 이 솔로몬이라고 하는 사람은 왕이 될 수가 없었던 사람이에요.
솔로몬이 누구의 아들이죠? 밧세바의 아들이란 말이에요. 정실의 아들이 아니라 후실의 아들로 태어난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 수많은 다른 왕자들이 다 버티고 있어요. 그 왕자들 가운데 내가 왕이 되겠다고 한다면 솔로몬은 명함도 내밀지 못하고 그저 반역자처럼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그런 위태한 상황 가운데 있었던 사람이 바로 솔로몬이었다고 하는 것이죠. 하지만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많은 아들들 가운데 누구를 선택했습니까? 솔로몬을 선택한 거예요. 가장 연약한 자, 가장 미천한 솔로몬을 선택하셔서 그 솔로몬으로 하여금 다윗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 주신 것을 생각할 때, 솔로몬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너무나도 감사한 거예요. 하나님이 너무나도 좋은 거예요. 그러니까 그 감사한 마음을 하나님 앞에 담아서 1천 마리의 양을 잡습니다.
한 마리의 양만 드려도 되는데 그 마음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면서 1천 마리의 양을 잡아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렸는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 솔로몬의 마음을 보셨어요. 그리고 솔로몬 앞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날 밤 솔로몬에게 물으셨습니다. 솔로몬아, 솔로몬아, 내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네가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때 솔로몬이 뭐라고 대답을 했습니까? 하나님, 저에게 지혜를 주옵소서. 지혜를 달라고 했어요. 지혜를 달라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겸손한 기도의 제목인 것이죠. 하나님, 제가 왕이 되었어요.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너무나도 많고 왕으로서 그들을 잘 다스리고 그들을 잘 재판해서 평안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 줘야 될 책임이 그런 왕에게 있는데 하나님, 저는 이것을 감당할 만한 능력이 안 돼요. 왕으로서의 그런 자격이 없어요.
그러니 하나님, 제게 지혜를 주셔서 우리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백성들이 참된 왕의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제게 지혜를 주셔서 우리 백성들을 향한 그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한 거예요. 그럴 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네게 지혜만이 아니라 부귀와 영화까지 주겠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종종 오해하곤 합니다. 솔로몬이 어떻게 위대한 왕이 되었으며 지혜의 왕이 되었고, 성공하고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이런 좋은 결과를 얻게 되었는가?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렸다며? 그러니까 우리도 일천 번제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해 주시겠지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무엇을 구했을까? 솔로몬이 지혜를 구했다고? 그러면 우리도 지혜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부귀영화를 주시—
우리의 기도 제목도 “하나님, 지혜 주세요” 하면 하나님께서 부귀와 영화까지 함께해 주지 않을까 하면서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은 핀트를 잘 맞춘 것일까요? 아닐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보시고 축복하셨던 것은 1천 마리의 양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거지예요? 양이 없어서 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아니잖아요.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보신 것은 그 1천 마리의 번제를 드리는 가운데 있는 그 솔로몬의 마음을 보신 거예요. 이 솔로몬이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나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구나. 그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기를 원했고, 지혜를 구하는 그 솔로몬의 마음 가운데 ‘이 솔로몬이 정말 겸손하게 백성들을 위해서 사명을 잘 수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구나’ 하는 것을 그걸 보시고 하나님께서 부귀와 영화까지 다 내려주신 것이죠. 그런데 잘못된 생각을 우리가 할 때가 많은 겁니다. 우리가 성경을 잘못 읽게 되는 것인데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가 생각하기를 ‘나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1천 마리의 많은 헌금을 드리면, 많은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축복해 주시겠지. 우리가 기도할 때 다른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영광과 부요까지 주시겠지’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죠. 그게 아닌 것이죠. 사실 그렇게 우리가 잘못 오해할 수도 있고 그렇게 잘못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중세의 가톨릭 교회에서 그렇게 잘못 가르친 것이죠.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이 솔로몬의 마음이 중요한 것인데, 마음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당신도 천 번의 제사를 드려라. 천 마리의 양을 드려라.
더 많이 드리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더 많이 베푸실 것이고, 더 크게 헌신하면 더 큰 축복을 주실 것”이라고 하는 그런 잘못된 가르침을 줌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을 착취하는 그런 타락의 길로 걸어갔던 것이 그 옛날 중세시대 때 있었던 일이고, 놀랍게도 지금도 여전히 종교개혁의 후예라고 하는 우리 개신교회 내에서도 그런 잘못된 가르침을 줄 때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정말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그런 물질, 겉으로 드러난 헌신, 겉으로 드러난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마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라고 하는 사실을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사울은 제사에 대해서 잘못 생각한 것이죠. 그 옛날 솔로몬이 이런 식으로 은혜를 받는 것들을, 제사 제도를 보면서 “하나님 앞에 제사만 드리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베푸실까”라고 생각하면서 제사를 드려 버리는 겁니다. 전쟁을 해야 되는데 사무엘이 나타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지 못한 상황 가운데서 백성들은 하나씩 둘씩 뿔뿔이 흩어지고, 그래서 전쟁에서 질 수밖에 없는 그런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을 때 사울은 사무엘이 오지 않았어도 재물을 가지고 오라고 하면서 재단을 쌓고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렸습니다. 사울이 그렇게 번제를 드린 이유가 무엇이죠?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번제를 드린 건가요? 하나님께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싶어서 번제를 드린 건가요? 그게 아니에요. 번제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그래서 백성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고 전쟁에서 이기고 싶다고 하는 그 제사의 유익만을 생각하면서 번제를 드리게 된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나님이 그 양을 받기를 원하시는가, 제사 받는 것을 원하시는가? 그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걸 정확하게 깨달은 사람이 누굽니까? 바로 다윗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범죄한 다음에 시편 51편의 말씀 가운데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편 51편 16절의 말씀에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관계 속에서 간음하는 죄를 저질렀고, 그의 남편을 교사하여 죽이는 살인죄를 저지른 그런 포악한 사람이었는데, 다윗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난 다음에 하나님 앞에 엎드린 거예요. 이 죄를 가지고 있는 상황 가운데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 수많은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 내 죄를 용서해 주세요” 그렇게 나간 것이 아니라, 다윗은 정확하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 “하나님, 잘못했어요. 하나님, 회개합니다. 제가 나빴습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제사를 보고 사울을 인정해 주신 것이 아니라, (다윗이) 제사를 드렸는지 안 드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울며 회개하는 다윗의 기도를 받으시고 용서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사울은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사울을 향해서 선언하시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네 위를 폐하시겠다고 하시고 사울을 대신하여 다윗을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어떻게 생각해야 되는가. 하나님이 누구를 찾으시는가? 신실한 마음으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사람을 찾으신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4장 23절, 24절 말씀에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무엇으로 예배할지라?—“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1천 번제로 예배할지나? 아니오. 언약궤를 가지고 와서 예배할지나? 아니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찾으시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도대체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고 하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 우리가 좀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인데요. 이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고 하는 표현은 두 개의 단어를 이용하여서 하나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그런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된 표현법이거든요. 전문 용어로 ‘헨디아디스’라고 하는 표현법인데, ‘영과 진리로’라고 하는 말은 ‘진실된 영으로’, ‘진실된 마음으로’ 예배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찾으시는가?
참된 마음으로, 신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를 찾으시고 받아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무엘 시대 때 엘리 제사장과 그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을 모욕했습니다. 하나님의 제사를 더럽혔습니다. 하나님의 성전 가운데서 악한 일을 행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전혀 살지 아니하면서 악한 일은 계속해서 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전쟁에서 승리하기 원해서 언약궤를 전쟁터로 끌고 가면 하나님이 그 언약궤에 질질 끌려가서 마치 알라딘의 마술 램프에서 튀어나온 거인처럼, 알라딘의 마술 램프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에게 무조건 봉사만 해야 되는 알라딘의 마술 램프 속의 거인처럼, 하나님도 우리가 그냥 제사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무조건 와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으시지 않으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사무엘 시대 때 엘리 제사장과 두 아들은 악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려고 했지만, 결국 그 언약궤는 아무런 힘도, 아무런 능력도 없는 헛된 것에 불과했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우리가 잘 살펴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마음대로 편리하게 이용하고 싶어 합니다. 성경책을 끼고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처럼, 종교적인 힘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의 힘을 어떻게 사용하고 싶은 그런 모습들을 보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참되고 겸손한 마음으로 신실하게 하나님 앞에 서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를 그렇게 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저 몇 가지 필요한 것 몇 가지 던져 주고 “됐지? 이거 줬으니까 됐지?” 하고 하나님께서 끝내 버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마음으로 사랑하셨어요.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어느 것도 아깝지 아니하시고,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해 주신 그 하나님, 우리를 전적으로 사랑해 주신 그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찾으시는 그 모습 가운데, 오늘도 주님 앞에 겸손하게 믿음으로 서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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