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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종, 종의 왕 (왕상 12:1-20)

이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가? 100% 하나님의 뜻과 계획 가운데서 돌아가는 것이다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대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 세상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동시에 100% 우리 인생의 계획과 결정과 선택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100% 온전한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동시에 100% 우리의 선택과 우리의 결정과 우리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겠는데요. 이것이 신비한 것이고 우리의 머리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100% 더하기 100%는 200%가 아니라, 하나님도 100%, 인간도 100%인데 다 합쳐서 100%가 되는 그런 신비한 그 이치를 우리의 머리로서 이해하기는 좀처럼 어렵기는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그러한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주관하신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사람들의 인생의 일거수일투족을,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 하나까지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동시에, 우리가 결정하는 것에 따라서 우리의 선택에 따라서 모든 것들이 또 결정되고 일어난다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도무지 조화시키기는 어렵지만 성경에서는 분명하게 이 두 가지를, 모순되어 보이는 것 같은 이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이야기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먼저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살펴보았냐면,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에게 이스라엘의 열 지파를 떼어 주실 거라고 하는 하나님의 예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히야 선지자를 통해서 여로보암을 만나게 하시고, 그래서 아히야 선지자는 자신이 입고 있던 새 옷을 찢어서 10조각을 나누어 주면서 “네가 이스라엘 민족의 열 지파를 다스리는 왕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을 미리 여로보암에게 알려주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드디어 솔로몬이 죽고 이제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는데요. 그런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열 지파가 여로보암에게로 돌아서게 되었는가? 르호보암은 나머지 지파만, 겨우 자기 지파만 다스리는 왕으로 쪼그라들고, 나머지 열 지파가 전부 배신해서, 배반해 버려서 여로보암을 왕으로 섬기게 되는 그 과정의 이야기를 오늘 보여주고 있는데, 바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실제적으로 이 땅에서 어떻게 발생하고 있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본문이 오늘 본문의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솔로몬이 죽으니까 이 르호보암이 당연히 왕으로 등극하게 되는 것이죠. 옛날에는 투표 제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백성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왕이 죽으면 그 왕의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이 왕으로 올라가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그래서 르호보암이 솔로몬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이제 몇 번째 왕이 되는 겁니까? 네 번째 왕으로, 사울, 다윗, 솔로몬, 그리고 르호보암이라고 하는 네 번째 왕으로 등극하게 되었던 그 순간에 백성들이 이 르호보암에게 나아가서 말을 했습니다. 우리 열왕기상 12장 4절 말씀에 보니까 이렇게 기록합니다. “왕의 아버지가…” 왕의 아버지가 누구죠?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이 왕은 누구죠? 르호보암 왕입니다. “르호보암 왕은 이제 왕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라고 간청하게 된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로 왕으로 등극하게 되는 르호보암을 찾아가서 간청하는 겁니다. 솔로몬 시대 때 우리는 너무나도 힘들었습니다. 너무나도 많은 고역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노동을 해야만 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너무나도 우리에게 큰 짐이 되었으니 제발 저희들의 노역을 가볍게 해주세요. 세금 줄여달라는 말입니다. 세금으로 걷어가는 그런 노역을 줄여달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인류 수천 년의 역사 가운데서 백성들이 세금을 좀 줄여달라고 하는 요구는 지금까지 계속 반복되는 요구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어쩌면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솔로몬, 르호보암에게 요구하는 당연한 요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어떻게 통치했는가? 백성들을 많이 차출해서 노역에 동원시켜서, 그래서 어마어마한 건축물들을 많이 짓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일에 솔로몬이 엄청나게 많은 일들을 한 것이죠. 예전에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솔로몬은 정말 어마어마한 제국을 이루었는데, 그 제국을 이루어 놓은 것이 솔로몬이 혼자 이룬 것인가? 알고 보면 백성들이 다 한 것이다 이 말입니다. 오늘 그 솔로몬이 이루었던 그 영화의 뒷모습을 우리가 듣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솔로몬이 과연 평화의 왕이었을까? 솔로몬이 과연 좋은 왕이었을까라고 하는 점에 의구심을 갖게 만드는 말이 바로 이 백성들의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종종 우리가 잘못 생각하는 것이 하나가 있는데요. 왕들이 갖고 있는 잘못된 생각일 수도 있겠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겠다고 하는 생각이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겠다, 나라를 정말 강력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하면, 그래서 강력한 나라를 만들면 좋은 것일까요? 어떤 것일까요?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것이니까 좋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거기에 어떤 것들이 들어가나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헌신들을 갈아 넣어야 나라가 부강해지는 거죠. 그렇게 해서 부강한 나라를 만들면 그러면 좋은 나라일까? 과연 우리가 기대하는 나라는 어떤 나라가 좋은 나라일까?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 세계에서 가장 든든한 나라가 가장 좋은 나라일까라고 질문을 던진다고 한다면 사실 그렇지가 않아요.

백성들이 노예로 차출이 되면서, 그래서 그 고역이 너무나도 심하고, 가정의 삶이 너무나도 피폐해지고, 그래서 고통 가운데 살았다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와서 솔로몬의 왕국을 칭찬하고 그 화려함을 보고 정말 좋다고 솔로몬을 칭찬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과연 그 솔로몬의 나라에서 사는 민족, 백성들이 과연 행복한 사람들이었을까 질문을 던질 때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이 있는 겁니다. 어느 나라가 좋은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행복한 나라가 좋은 나라예요. 부강한 나라가 좋은 게 아니라, OECD에 진입해서 세계의 막강한 권력, 그 힘을 가지고 있는 나라로 들어가는 것도 필요하긴 한데, 거기에 들어가기만 하면 좋은 나라일까? GDP가 많이 올라가면 좋은 나라일까?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아무리 많은 GDP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부의 불균형이 이루어져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엄청나게 많이 가지고 있는 반면에, 그러나 정작 대다수의 백성들은, 국민들은 정말 고통 가운데, 정말 비참한 상황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바른 나라일까, 정말 좋은 나라일까 우리가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사실 솔로몬이 이룬 나라가 그렇게 좋은 나라였을까라고 질문을 던지면 그렇게 좋은 나라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고요. 그래서 오늘 백성들은 르호보암에게 나가서 간청하는 겁니다. 우리의 노동을 착취해 가는 것을 좀 줄여 주어서, 우리가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도록,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요구는 당연한 것인가? 당연한 겁니다. 르호보암은 이러한 백성들의 요구를 민감하게 청취해야 되고, 그리고 백성들을 위해서 좋은 선정을 베풀어야 할 책임이 왕에게 있는 것이지, 왕의 임무가 무엇입니까?

왕의 임무는 자기가 멋진 궁궐을 만들고 그래서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지고 많은 신하들을 다스리면서 떵떵거리면서 가장 멋있어 보이는 왕이 되는 게 그게 목적이 아니에요. 왕의 목적이 뭐예요? 왕이 그 자리에 올라간 이유가 뭐예요? 왕이 그 자리에 올라간 이유는 백성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고, 백성들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 주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그래서 모든 백성들이 골고루 잘 살 수 있도록, 그래서 그 나라를 정말 따뜻한 나라로 만들어 가는 책임이, 그게 바로 왕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다윗은 그렇게 했습니다. 다윗은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왕이 되었던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던 것이죠. 왜적의 침입이 있으면 목숨을 걸고 나아가서 왜적을 물리치고 건져내준 그런 일들을 했고, 도둑들이 판치고 있을 때 도둑들을 막으면서, 그래서 안전하게 경제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들을 하면서, 그래서 다윗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다 몰려들기 시작한 겁니다. 억울한 사정이 있는 사람들마다 다윗에게로 가서 거기서 다 해결함을 받고, 다 문제들이 해결되는 거예요. 그때 다윗은 자신의 문제가 해결이 됐나요? 아니요. 다윗은 그때 도망자의 신세에 있었고, 자기 코도 석자예요. 자기도 힘들고, 자기도 사울 왕의 그 낯을 피하여 도망가야 되는 그 상황 가운데서,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몰려드니까 그 사람들을 이용해서 자기가 권력을 쟁취하고, 자기가 잘 먹고 자기가 잘 살고 그래서 혼자만 잘 사는 그런 다윗이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같이 숙식을 하면서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그들을 돌보아 주는 참된 목자와 같은 그런 모습이 다윗에게 있었던 것이죠.

사무엘상 22장 1절 2절에서 다윗이 어떻게 지냈는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400명가량이었더라.” 정말 원통한 사람들이 다 다윗에게 가서 문제를 해결받고, 다윗도 지금 힘든 상황이지만 다윗의 역할이 무엇인가? 진짜 왕으로서의 역할들을 하는 거죠. 하지만 사울 왕은 어떤 모습을 보였는가? 사울은 왕이었지만 블레셋이 쳐들어온다고 하는데 그 블레셋의 공격에 대응을 하지 못하는 거예요. 사울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다윗을 죽이는 데 관심이 있는 거,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관심이 있는 거. 그래서 튼튼하게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면 그게 왕입니까?

아니에요. 그게 왕이 아니라, 백성들을 돌보기 위해서 군인들을 이용해서 왜적들을 막아내는 그런 역할들을 해야 되는데, 안타깝게도 수많은 권력자들이 그 권력으로 자신을 배불리하고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일에는 빠른 반면에, 정말 자신들의 사명을 잃어버릴 때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르호보암이 이제 왕위로 등극하는 그 상황 가운데서 백성들은 르호보암에게 참된 왕이 되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러한 백성의 요구는 무슨 메시지인가?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메시지라고 들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어떻게 들려지는가? 하나님의 뜻은 성경 말씀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성경 말씀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들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친구들이 하는 그 말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들을 수도 있고, 또는 나의 원수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을 수도 있고, 우리를 비아냥거리고 욕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을 수도 있고, 우리가 만나는 사건과 사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해줄 수도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호보암에게 와서 하는 이 이야기가 그냥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께서 르호보암에게 들려주시는 그런 소리였기 때문에, 르호보암이 이 백성들의 소리를 잘 들어야 했던 것이지요.

안타깝게도 그 솔로몬은 그러한 신하들의 말을 잘 듣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의 말을 잘 듣지 않았습니다. 노인들은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 아버지와 함께 일하던 신하들은 어떤 이야기를 했는가? 열왕기상 12장 6절에서부터 7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르호보암이 그의 아버지 솔로몬의 생전에 그 앞에 모셨던 노인들과 의논하여 이르되, ‘너희는 어떻게 충고하여 이 백성에게 대답하게 하겠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 만일 오늘 이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어 그들을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그들이 영원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 아버지와 함께했던 신하들이 그렇게 대답을 하는 거죠. 이 대답이 누구의 음성이에요? 하나님의 음성이에요. 그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거죠.

하지만 또 다른 소리가 들립니다. 또 다른 소리가 들리는데 어떻게 들리는가? 친구들의 대답입니다. 열왕기상 12장 10절에서 11절 말씀에 “함께 자라난 소년들이 왕께 아뢰어 이르되, ‘이 백성이 왕께 아뢰기를,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우리를 위하여 가볍게 하라 하였은즉, 왕은 대답하기를, 내 새끼손가락이 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으니(뻥이죠)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리라 하소서.’” 친구들의 이야기가 들리는데 이건 누구의 목소리예요? 사탄의 목소리인가?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항상 두 가지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성령의 음성이 들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사탄의 음성이 들리는 거죠. 우리 안에 늘 양쪽의 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그런 소리가 들릴 때 우리는 어떤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되는가? 성령의 소리에,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무엇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답일까 고민해야 되죠.

어떤 사람이 나를 힘들게 만든다면, 우리 마음 가운데서 두 가지 소리가 들릴 겁니다. 하나의 소리는 어떤 소리입니까? 원수를 갚아버리고 본때를 보여주고 박살을 내버려야 다시는 너한테 얼쩡거리지 않을 거라고 하면서 원수를 갚으라고 하는 소리가 들릴 것이고, 또 하나의 소리가 들립니다. 원수를 원수로 갚지 말고,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갚아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라고 하는 성령의 음성도 들릴 겁니다. 그럴 때 우리가 어떤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한 그 이야기를 들어야 되는 것이죠. 친구들의 말이 일리가 없는 게 아니라 일리가 있어요. 지금 왕이 되는 이 시점에 백성들한테 밀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앞으로 더 밀릴 수 있으니까 왕으로서 통치가 어려워질 수 있다고 하는 것, 어쩌면 일리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러나 내가 왜 왕이 되었는가를 생각해 봐야 되죠. 하나님께서는 나를 왜 여기에 세워 놓으셨는가? 그것을 생각한다면, 내가 저 사람들을 밟아버리고 짓눌러버리고 독재자가 되기 위해서 왕으로 세워주신 것이 아니라, 내가 이곳에 서게 된 이유는 저들의 눈물을 닦아 주고, 저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하는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답을 선택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타깝게도 르호보암은 엉뚱한 선택을 했어요. 잘못된 선택을 했죠. 그 결과 어떻게 됐습니까? 열왕기상 12장 16절의 말씀에 “온 이스라엘이 왕이 자기들의 말을 듣지 아니함을 보고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너희 장막으로 돌아가라. 다윗이여, 이제 너는 네 집이나 돌아보라’ 하고 이스라엘이 그 장막으로 돌아가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하나님의 심판이 들려졌었는데요.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서, 아히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 나라를 쪼개서 열 지파를 여로보암에게 줄 것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그 뜻대로 바로 이루어지는 결과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순간에 르호보암이 노인들의 말을 들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하나님의 계획이니까 그래도 쪼개져서 나눠줄까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역사는 가정을 하는 게 아니라고 하는데, 그러나 우리가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가 상상해 본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언제라도 뜻을 돌이키셔서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에요. 한 번 계획 세워놨으니까 ‘못 먹어도 고’ 하는 독재자가 아니란 말이에요.

울며 회개하며 나오는 심령들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부짖는 사람들마다, 내리기로 하셨던 심판을 다시 돌이키시고, 다시 거두시고 은혜 내리시는 하나님, 아무리 심판을 계획한다고 하셨을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와 엎드리면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용서해 주시고 은혜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어디에 그 메시지가 나와요? 요나서에 나오는 거예요, 요나서에.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들을 이제 심판하시겠다고 하셨지만, 니느웨 백성들이 왕부터 미물에 이르기까지 다 회개하는 거예요. 다 엎드리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살려달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기로 한 심판을 내리지 아니하셨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르호보암도 이 순간에 하나님 앞에 내가 서고, 하나님 앞에 진실한 내 사람이 되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어차피 하나님이 나를 죽이려고 했다. 하나님의 계획에서 난 어쩔 수 없었다” 핑계 할 수 없는 것이고, 가룟 유다도, 그 누구도 주님 앞에 돌아오기만 한다면, 옛 같던 마음들을 내버렸다고 한다면, 주님 앞에서 은혜를 누릴 수가 있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르호보암은 이 세상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 세상의 길, 사탄의 길, 악한 사람들의 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가 왕이 되는 선택입니다. 내가 왕이 되고 사람들을 제압하는 것은 멋있어 보입니다. 내가 왕이 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내가 왕이 되려고 하면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 망해버리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누가 복된 사람인가? 섬기는 자가 복된 사람입니다. 왕위에 올라간 사람이 복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그 고통을 품고 해결해 주는 봉사자가 행복하고, 내 것을 챙기는 자가 복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나누어 주는 자가 복된 거예요.

다른 사람들을 종으로 부려먹는 자가 복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해 주는 자가 복된 사람이에요. 이게 성경적인 원리라고 하는 것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22장 25절에서부터 27절의 말씀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직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행복하지 못한 것은, 내가 고통스러운 이유는 내가 왕이 되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왕이 되고 군림하려고 하면, 오늘 이스라엘의 열 지파들이 다 떠나가 버린 것처럼 나 혼자 남게 될 겁니다. “나는 왜 친구가 없나, 나는 왜 외로운가, 나는 왜 고통스러운가?” 그것은 섬기는 자가 아니고, 르호보암처럼 왕이 되려고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섬기고, 내 것을 내어주고 사랑하는 자는 놀라운 사랑을 입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원리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르호보암과 같은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우리들의 왕처럼 다가와서 우리들을 다 속이고 빼앗아 가는 사람들이죠. 그걸 가리켜서 우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런 우상들은 우리들에게 약속한 것을 주지 않고 우리 것을 빼앗아 버리고 사라져 버립니다. 돈을 우리가 우상으로 섬기면, 그 돈이 우리에게 약속한 풍요를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건강을 빼앗아 가 버리고, 가족들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게 만들고, 그리고 우리를 고통 속에 몰아넣는 결과를 주는 거죠. 정치가 우상이 되면 그 정치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정치가 우리의 돈들을 다 빼앗아 가 버리고 우리로 하여금 힘들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만들어 버리고 마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에게 놀라운 평화의 왕이 있습니다. 그 왕은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섬기는 왕으로 오셨습니다. 겸손히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던 우리 주님께서는 엎드려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하여 자신의 피를 뿌리시고 흘리시고 자신의 살을 내어주셨습니다. 이 세상의 헛된 우상들을 왕으로 섬길 게 아니라, 우리 주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이 세상의 소리에 반응하는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그 참된 복된 메시지들 앞에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그런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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