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가 만사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뽑느냐에 따라서 그 단체가 또 사람이 흥할 수도 있고 망할 수도 있고, 그래서 사람을 세우는 것처럼 중요한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여러 사람들을 세워야 할 필요들이 있는데요. 새로운 목사님을 세워야 하는 경우도 있고, 새로운 직분자들을 세워야 되는 경우도 있는데, 어떤 경우에는 좋은 분들을 잘 뽑아서 정말 교회가 평안하고 행복하고 참 좋은 길로 가게 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어떤 경우에는 좋은 분인 줄 알고 선출했는데, 뽑았는데 알고 보면 정말 힘들고 어려운 그런 모습을 보일 때가 있어서 정말 힘들게 되는 그런 경우도 많이 경험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도 목회를 하면서 부교역자들을 선발해서 써야 하는 그런 경우가 있었는데요. 그동안에 보면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서 너무나도 감사하기도 하지만, 간혹 가다가 정말 힘들었던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차라리 없는 게 더 낫겠다 싶을 정도로 그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사람을 뽑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참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을까요?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 다윗을 선택하셔서 기름 부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을 세우실 때 누구를 선택했는가, 어떤 사람을 선택했는가? 다윗을 선택했는데요. 하나님께서는 이 두 번째 왕을 세울 때 엘리압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이 볼 때 그 엘리압이라고 하는 이새의 첫 번째 아들은 너무나도 좋아 보였습니다. 키도 크고 아마 잘생겼을 것 같아요. 아마 참 믿음이 가는 그런 인상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이새의 집에 가서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서 기름을 부으라고 했을 때, 사무엘이 제일 먼저 만난 그 엘리압이라고 하는 이새의 아들을 바라보게 되었고, 사무엘의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 “이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사람인가?” 그렇게 생각이 들 정도로 멋있어 보였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대답은 놀라웠습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무엇을 보느니라?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하나님께서는 이미 멋있어 보이고 괜찮아 보이는 그 엘리압을 이미 버렸다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가 무엇인가?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실 때 불합격이다 말씀해 주신 것이죠. 하는 수 없이 이새의 다른 아들이 등장했습니다.
아비나답이 나왔을 때 사무엘이 말합니다. “이 사람도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이 아니다.” 이제는 삼마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다시 이야기합니다. “삼마도 하나님께서 선택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몇 명을 선을 보았는가? 일곱 명의 아들들을 다 보았는데, 마음에 하나님께서 “이 사람이 바로 그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이다”라고 하는 말씀을 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이새에게 물었습니다. “아들들이 이게 전부입니까? 전부 다입니까? 또 없습니까?” 그럴 때 이새가 대답한 말이 사무엘상 16장 11절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이새 가 다윗에 대해서 했던 이 말의 뉘앙스가 무엇이겠습니까? “다윗도 한번 보세요. 다윗을 한번 보시면 어떨까요?” 하는 그런 의미에서 이야기를 한 것 같아요? “볼 필요도 없어요. 걔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애요.” 그런 의미로 이야기를 한 것일까요? 우리는 잘 모릅니다. 문자로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새 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추측해 보자면 이새의 마음 가운데 사무엘에게 하는 말이 “다윗은 왕이 될 자격이 아닙니다. 왕을 세우려면 엘리압을 세워야지, 다윗은 아닙니다.” 그런 마음이 아마 이새에게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그 이새의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잖아요.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이다? 양 치고 있어요. 양 치는 사람이에요.”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릴 왕감이 아니라 양이나 칠 그런 사람이지, 다윗은 왕의 자격이 없다고 아마도 이새가 판단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나중에 엘리압이 하는 말 속에서도 엿볼 수가 있습니다.
나중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다윗은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느라 전쟁터로 가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엘리압이 했던 말이 사무엘상 17장 28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큰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이르되, 내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이 엘리압의 대답이 무엇이냐 하면 “잘 왔다. 우리가 힘들어 죽겠는데 잘 왔다. 잘 왔으니까 제발 우리를 도와줘라” 그렇게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다윗을 보면서 화를 낸 거예요. “네가 여기가 어디라고 왔어? 전쟁이 놀이터인 줄 알아? 전쟁이 그렇게 만만한 줄 알아? 네가 왜 여기까지 왔어? 너는 전쟁터에 올 아이가 아니고, 너는 저기 양이나 쳐. 네가 해야 할 일은 양을 돌보는 일이지, 이곳에 올 자격이 없다”라고 엘리압이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선택하셨는가? 사람들이 보기에 좋아 보이는 사람, 사람들이 보기에 “저 사람이면 괜찮다”고 생각되는 그런 사람 엘리압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이의 다른 아들들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사람들이 별로 인정하지 못했고, 사람들이 별로 높여주지 못했던, 어쩌면 키도 작았을 수도 있겠고, 어쩌면 이런저런 문제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었던 너무나도 미약한 한 사람 다윗을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셨다고 하는 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다윗을 선택하셨는가? 중심을 보셨기 때문이죠. 사람들은 외모를 볼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선택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중심이 어땠기 때문에 그랬을까요? 우리는 사무엘서를 읽어보면서 다윗이 어떤 중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는지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먼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골리앗이 싸움을 걸어올 때, 전쟁할 때 두려워 벌벌 떤 것이 아니라 다윗은 칼을 의지한 게 아니라, 무기를 의지한 게 아니라, 힘을 의지한 게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골리앗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는, “하나님이 나의 목자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이 다윗에게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이었죠. 다윗은 자신이 할 수 있다고 그냥 막 행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먼저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이 전쟁해야 됩니까? 하나님, 이 전쟁하러 나갈까요 말까요?” 다윗이 언제나 구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상제를 보면서 “아, 저 정도는 우습네. 저 정도는 내가 할 수 있어” 하면서 교만하게 무조건 달려 나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전쟁을 이겨놓은 그 다윗이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거예요.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 물어봤어요. 그것은 겸손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죠. 다윗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고 겸손한 마음 가운데 살아갔던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고요. 그뿐만 아니라 다윗은 어떤 중심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것이죠. 자신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주신 사명이 있다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고 그 사명에 충실했던 사람입니다. 양을 칠 때는 “내가 왜 양을 치고 있나, 나는 왜 여기서 이렇게 내 인생을 썩고 있나” 하면서 한탄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양을 칠 때는 양을 최선을 다해서 친 것이에요. 양을 치면서 사자를 찢고, 양을 치면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면서 최선을 다해서 아버지의 양을 칠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사울의 종이 되었을 때는 “내가 왜 남의 종이 되어서 이렇게 살고 있나” 원망하며 불평한 게 아니라, 사울의 종이 되어서 거기서 충성을 다했습니다.
사울 왕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자신이 모든 것을 바쳐서 사울을 위해서 충성하는,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셨다고 하는 그 믿음으로 사역을 했던 것이죠. 그뿐만 아니라 도망 다니면서 억울한 사람들이 몰려오고, 정말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몰려왔을 때, 귀찮아 하면서 멀리 도망가 버린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고, 억울한 사정을 풀어주고, 그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사람이었고, 왕이 되어서는 왕의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할 수 있었던 사람, 그 중심이 다윗에게 있었던 것이고요. 뿐만 아니라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나중에 실수하고 죄를 지었을 때 자신의 자리를 복권시키기 위해서 거기에 안달이 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윗은 하나님 앞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기를 위해서 울부짖으며 하나님 앞에 엎드렸어요. “주여, 주의 성령을 제게서 거두어 가지 마옵소서.”
죄를 지은 그 다윗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게 해 주옵소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제일 중요시할 수 있었던 그 중심이 어쩌면 다윗의 마음 가운데 있었던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다윗을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하며 하나님께서 선택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사실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우리 안에 있는 중심이, 우리 안에 있는 마음에 있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이죠. 안타깝게도 우리는 중심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우리는 중심을 보지 못하고 외모만을 보고, 그저 이력서에 나타난 아주 멋있는 그 글자들만을 보고, 사람들의 말하는, 사람들의 겉모습만 보고 우리가 늘 판단하기 때문에 늘 실수하기도 하고, 오히려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사람을 뽑을 때든, 아니면 직장에서 사람을 뽑을 때든, 어떤 상황에 있든지 간에 사울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다윗과 같은 사람을 뽑아야 될 텐데, 우리와 같이 이렇게 사람의 중심을 볼 수 없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사람의 중심을 볼 수가 있을까요? 외모를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의 진짜 모습, 그 사람의 진짜 됨됨이를 어떻게 하면 알 수가 있을까요? 방법이 없어요. 하나님처럼 우리는 사람의 중심을 볼 능력이 없다는 게 우리들의 문제인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하여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의 됨됨이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첫인상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이력서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서 어떠한 모습을 보여주었는가를 통해서 그 사람의 됨됨이가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 45절의 말씀에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선을 쌓고 있는 사람은 결국 시간이 흘러가면서 선이 드러나오게 되어 있고, 악을 쌓은 사람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악이 흘러 나오게 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우리가 중심을 직접 볼 수 없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 무엇이냐 하면 시간입니다. 시간. 시간을 두고 수많은 경험들 속에서 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 사람의 반응이 어떻게 나오는가를 잘 지켜봐야, 시간의 검증이 있어야 그 사람의 중심을 판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주 조금이라도 생기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시간의 검증들을 무시해 버리고, 갑자기 등장하는 일약 스타들, 갑자기 등장하는 사람들에게 속아 넘어갔다가 결국에는 배신당하는, 피해를 입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있다고 한다면 물어보는 거예요. 그 사람의 과거가 어땠는지,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물어보는 것이죠. 그래서 저도 사람을 쓸 때마다 그분이 이전에 있던 교회에서 어떻게 사역했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물어보는데, 제대로 안 알려줘요. 특히 내보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더 칭찬을 해줘요.
미국에서는 이렇게 물어보면 아주 솔직하게 얘기를 해 줍니다. 그래서 항상 추천서, 항상 그 사람이 살아온 이력들을 일일이 다 확인하고 모든 걸 결정하는 시스템이 그렇게 갖추어져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게 잘 작동이 안 되는 거예요. 아무튼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문제가 발생하고, 언제나 어려움을 겪고, 결혼도 “이 남자가 제일 좋은 줄 알고 했다가” 상처받고, 그런 상황들을 우리가 많이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하나님은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외모로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이신 거죠. 예수님도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도 우리를 외모로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 15절의 말씀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이 번역은, 잠깐 그대로 좀 보자면, 이 번역은 약간 애매하게 번역이 됐는데 이렇게 번역할 것이 아니라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너희들처럼 육체를 따라 판단하지 않는다. 아무도 육체를 따라 판단하지 않는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도 어떻게 우리를 판단하는가? 우리의 육체를 보고,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보고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속마음을 바라보시는 그런 능력의 하나님, 그 하나님을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고, 그 하나님 앞에 서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만일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좋습니까, 나쁩니까? 좋을 수도 있고 무서울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좋을까요?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고, 사람들이 나의 겉모습만 보고 무시해 버리는 우리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사람들은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서 가진 게 없다고 무시해 버리고, 이제는 나이 많다고 무시해 버리고, 우리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무시해 버리고, 내가 아이라고 무시해 버리고, 여자라고 무시해 버리고, 동양인이라고 무시해 버리고, 여러 가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 우리의 단점들을 다 겉모습만을 들어보면서 무시해 버리는 게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우리의 속마음을 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이,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그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되고 은혜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하나님께서 중심을 보신다고 하는 사실은 아주 무서운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거룩한 척 위장해도 하나님 앞에 다 뽀롱이 나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옷을 입고 거룩한 척해도 하나님은 그 중심을 꿰뚫어 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 앞에서 속일 수가 없는 거예요. 사람들은 얼마나 속이기 좋은지 몰라요.
사기꾼이면서도 자신이 거룩한 교인인 것처럼 행세를 하는 겁니다. 믿음이 없으면서도 믿음이 있는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서 성경책을 들고 다니는 겁니다. 교회에 앉아서 앉아 있는 겁니다. 기도하는 척하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 것처럼 행세하고, 그러면 사람들이 환호하고 그런 사람을 위해서 박수 쳐주고 우리와 같은 편이라고 속아주는 겁니다. 왜 그렇게 겉으로 속여서 얻을 것들이 많기 때문에 속이는 것이죠. 사기꾼들이 어떻게 행동합니까? 마치 건전한 기업처럼 행동하는 겁니다. 캄보디아에 있는 그런 피싱 범죄 조직들이 은행을 차려놓고, 회사를 차려놓고, 건전한 기업인 것처럼 해서 사람들을 속이는 겁니다. 자선 사업가로 속이는 겁니다. 착한 일을 한다고 속이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사기쳐 먹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고요. 민주 투사로, 정의를 위해서 투쟁하는 유튜버로 자기 자신을 포장하면서, 그래서 사람들의 돈을 끌어먹는 그런 악한 일들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 사람들이 다 속아 넘어가는 겁니다. 왜? 사람들은 다 외모만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아무리 거룩한 척하더라도, 아무리 민주 투사처럼 활동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오늘 우리가 행하고 있던 악한 일들, 우리의 마음 가운데 미움과 시기와 질투가 있다면, 우리의 삶 가운데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삶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면 “괜찮구나, 사람들이 나를 괜찮게 봐주는구나, 사람들이 나에게 박수 쳐주는구나, 사람들이 나를 칭찬하는구나” 거기에 속아 넘어갈 것이 아니라, 거기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불꽃 같은 눈으로 바라보시는 그 주님 앞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회개하며 엎드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낙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겉모습만을 보고 무시할 겁니다.
하지만 주님은 어디를 보는가? 우리의 겉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을 살피시는 거예요. 우리의 심령.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을 보시면서 나다나엘을 칭찬하셨어요. 요한복음 1장 47절의 말씀에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아마 사람들은 무시했을 거예요. “저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얘기했을 거예요. 하지만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서 있는 그 모습을 하나님께서 보신다. 성도 여러분, 그러니까 절망할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슬퍼할 게 아니에요. 저는 이번 수능을 보는 우리 학생들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어요. 수능 성적을 내놓았을 때 사람들은 어쩌면 내 수능 성적을 가지고, 내가 가는 대학을 가지고 우리를 평가할지 몰라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걸로 우리를 평가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기를 바라요.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 얼마나 큰 것을 누리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어냈는가, 규모와 화려함에, 그리고 멋진 것에 다 속아 넘어갈 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무엇을 보시는가? 그러한 것에 속아 넘어가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중심으로 보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주님 앞에 엎드려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가꾸어야 할 부분이 있다고 한다면 겉모습이 아니라 속마음일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3절에서 4절 말씀에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외모를 전혀 안 꾸미고 다녀도 괜찮다고 말씀드리는 거 아닙니다. 꾸밀 수 있으면 꾸며야 할 겁니다. 하지만 외모가 전부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명품으로 치장을 하고 우리의 얼굴을 뜯어고친다고 해서 괜찮은 거 아니에요. 아무리 많은 명품을 갖다 처발라도 그 중심이 사악하면 아무 소용없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 우리가 바로 서 있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건 잘못된 인생, 망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한 가지 고민이 있어요. 그 고민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다윗 같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는 거예요. 우리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중심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뭐라 하실까? 우리가 다윗처럼 거룩하고 겸손하고 신실한 사람으로 설 수 있는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습을 보면 허점투성이가 너무나도 많아요. 아니, 우리는 엘리압도 안 되는 것 같아요. 우리의 외모도 안 되고, 우리의 중심도 안 되고, 우리의 모습이 무엇과 같은가? 마치 베드로와 같아요.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저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 고기를 낚으라 했을 때, 베드로가 고기가 많이 잡히는 것을 보고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바닷속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시는 그 주님께서, 그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바라보실 때, 그 주님이 내 심령 깊은 곳을 바라본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베드로는 엎드렸어요. “주여, 나를 떠나소서.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어쩌면 그게 우리 모두의 고백입니다. 앞에 서 있어도 좋은 것으로 치장하고 있어도,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되는 그 순간, 우리의 더러움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들의 모습이고, 우리의 중심을 내놓을 수 없는 게 우리들의 모습일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너는 아무 쓸데없는 사람이다” 하면서 내팽개쳐 버리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그 베드로를 주님의 제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위하여, 그 연약한 자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씻으시고 회복시켜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줄로 믿습니다. 거기에 바로 우리의 소망이 있어요. 우리가 주님 앞에 나갈 소망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또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자신의 중심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도록 매 순간순간 우리 자신을 깨끗게 하고, 외모만의 단장이 아니라 내면의 단장을 해가면서 주님 앞에 바로 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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