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 선택하시고 기름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고만 있어도 다윗이 왕이 될 수 있었을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예정하시고 기름 부으셨지만, 다윗으로서는 최선을 다해서 왕이 되기 위한 모든 노력을 해야 했었다고 하는 것을 지난 시간에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골리앗과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위협하고 있을 때, 위기를 기회로 삼아 일약 다윗은 이스라엘 민족의 스타로 떠오르게 되었죠. 이 다윗이 이스라엘을 이끌어갈 훌륭한 지도자라고 하는 사실을 그때 보여주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혼자 노력하는 것으로 다 되었을까요? 그게 아닙니다. 다윗이 혼자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다윗이 왕이 되기까지 다윗을 도와주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의 조력이 없었다고 한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도와주지 않았다고 한다면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거라고 충분히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서 특별히 요나단이라고 하는 다윗의 친구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다윗이 일약 스타로 떠오르게 되었을 때, 모든 백성이 환영하고 모든 백성들이 다 기뻐했지만, 오직 한 사람만은 그 사실이 불편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게 누구겠습니까? 사울 왕이었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의 모습을 보면서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 예정되었다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기 때문이죠.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것을 알았고 모든 사람들이 다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울 왕은 마음이 불편해서, 사울은 시기와 질투 가운데 다윗을 어떻게 하면 없애버릴까, 어떻게 하면 이 다윗을 죽여버릴까 고민했던 것을 알 수가 있는데요.
하지만 사울 왕의 아들이었던 요나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의 그 질투 가운데서도,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을 때 오히려 다윗을 보호해 준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요나단입니다. 도망갈 수 있게 도와준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요나단인 것이죠. 바로 그 요나단이 있었기 때문에 다윗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요나단이라고 하는 좋은 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다윗은 왕이 되는 길에 많은 장애물들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요나단은 왜 다윗을 친구로 생각했을까요? 왜 요나단은 다윗을 보면서 그 마음이 열려서 사랑하게 되었고, 왜 요나단은 그 다윗을 보면서 아끼고 친구로 여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저도 모릅니다.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이 요나단의 마음 가운데, 아버지와는 달리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죽이려고 했던 아버지와는 달리, 요나단은 다윗을 보면서 사랑하는 마음을 느꼈고 다윗을 아끼려고 했고, 다윗을 도와주려고 했고, 다윗의 친구가 되려고 했다고 하는 것이 아주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왜 친구가 되려고 했는지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친구가 됨으로 말미암아 요나단이 얻은 유익은 우리가 충분히 잘 알 수 있을 겁니다. 요나단은 어떤 유익을 누렸나요? 다윗이라고 하는 좋은 친구를 얻은 것이죠. 그래서 다윗은 요나단을 역시 사랑했고 요나단을 아꼈고, 그래서 요나단을 위해서 다윗은 모든 일을 했을 뿐만 아니라, 요나단이 죽었을 때는 슬픔 가운데 애통하기도 했고, 뿐만 아니라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을 왕궁으로 데려다가 마치 자기 아들인 것처럼, 마치 자기의 왕자인 것처럼 그렇게 극진히 대접하고 보호해 주는 그런 결과를 얻게 된 것이죠.
요나단은 다윗을 보면서 이 다윗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두 번째 왕이라고 하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알았을 겁니다. 요나단만 그렇게 알았을까요? 아니요. 모든 이스라엘 민족이 다 알았어요. 누구도 알았어요? 사울도 알았어요. 그래서 사울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다윗을 죽일까에 몰두했지만, 놀랍게도 요나단은 그 순간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한 게 아니라 다윗을 선택했구나.’ 어쩌면 그것이 마음이 불편할 수 있어요. 다윗이 왕이 된다고 하는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입니까? 내가 왕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이고, 다윗이 왕좌에 올라갈 때 나는 그 자리에 올라갈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요나단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사실은 이게 믿음인 것이죠.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내게 좋은 일이 있고 내게 유익할 때만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일이 있으면 받아들이지만, 내게 조금 불리하거나 내가 조금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내가 여러 가지로 고통스러운 것을 당하게 되면 그 순간에 믿음이 바닥이 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왜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가? 왜 나에게 이렇게 억울한 일을 나에게 주는가? 내가 원하는 것을 왜 하나님께서는 들어주지 않는가?’ 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이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긴 것이 아니라, 사실은 무엇을 우상으로 섬겼던 결과입니까? 자기의 성공을 우상으로 섬겼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타나는 거예요. 자신의 행복을 우상으로 섬겼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죠. 재물을 우상으로 섬길 때 그런 결과가 나타나는 겁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의 성공이 우상이 아니에요. 이 세상에서의 행복이 우상이 아니에요. 재물이 우상이 아니에요. 무엇이 하나님입니까? 그들의 마음 가운데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거예요. 내가 잘못된다고 할지라도, 내가 망한다고 할지라도 괜찮아요. 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놀랍게도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들이 있는데, 그 수많은 인물들의 모습들을 보면,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 정말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향해서 명령하십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아들, 네 독자 이삭을 내게 바쳐라.” 이게 얼마나 끔찍한 명령입니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그 아들을 죽여서 바치라고 하는 그 하나님의 명령에 많은 사람들이 아마 ‘그런 하나님이라면 나 못 믿겠다’ 하고 도망갔을 겁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은 그 순간에 순종했어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욥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빼앗겼습니다.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 등이 다 없어져 버렸고, 자녀들이 모두 다 죽어버리고 알거지가 됐어요. 완전히 패가망신해 버렸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에 욥의 고백이 무엇이냐 하면,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가져가신 분도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이름이 영원히 찬양을 받으실지로다.” 그 앞에서 하나님 앞에 찬양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죠. 그뿐만 아니라 마리아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마리아에게 들려진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무엇입니까? 아직 결혼도 하지 못한 이 처녀의 몸에 아기를 밸 거라고 하는 충격적인 뉴스였습니다. 그 당시 그 시절에 마리아는 어쩌면 사회에서 매장당하고 돌을 던져서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그런 끔찍한 상황 가운데 몰렸을 때, 놀랍게도 마리아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예수님도 같은 길을 가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우리의 심령 가운데 누가 우리의 주인인가? 물질이 주인이 아니라, 성공이 주인이 아니라, 우리의 행복이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게 바로 믿음인 것이고, 요나단은 지금 이 순간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깨달았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엎드린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사무엘상 18장 4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다윗이 오는 그 상황 가운데서 요나단은 자신의 군복을 벗어서 다윗에게 입혀주었습니다. 그냥 옷을, 좋은 옷이니까 상으로 준다고 하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어쩌면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있을까요? ‘이제 다음의 왕은 너다.’ 이 말이야. ‘내가 왕위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네가 왕위로 올라가야 된다.’
사울 왕을 뒤이어서 왕위로 올라갈 사람은 너다 하면서 자신의 군복을 벗어서 다윗에게 주는 것이죠. 사무엘상 23장 17절의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오.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느니라.” 다음이 된다고 하는 얘기는 (왕이) 못 된다는 얘기예요. 네가 왕이 된다고 하는 것을 모두가 다 아는데, 그때 놀랍게도 사울 왕은 그렇기 때문에 다윗을 미워하고 다윗을 죽이려고 한 반면에,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다윗을 친구로 삼았다고 하는 것이 놀라운 일이라 할 수가 있겠습니다. 결국 다윗은 요나단이라고 하는 좋은 친구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다윗은 이 요나단이라고 하는 좋은 친구 때문에 피하며 도망다닐 수 있는 그런 도움을 얻게 되었던 것이죠.
만일 다윗의 삶 가운데서 요나단이라고 하는 친구가 없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왕이 될 수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그 정답은 몰라요.
한편으로는 **’예스’, 한편으론 ‘노’**라고 얘기할 수 있겠는데요.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은 혼자 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는 점에서는 ‘예스’라고 할 수가 있겠지만, 그러나 다윗을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우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요나단의 도움이 없어도 왕이 되는 거예요.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선택하셨잖아요. 하나님께서 왕으로 삼으시겠다고 하셨으니까, 다윗이 요나단의 도움이 없다면 어떻게 왕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 도움이 다른 곳을 통해서 주어졌을 겁니다. 우리가 선을 행해야 될 이유가 있다고 하면 무엇일까요? 우리가 사랑을 베풀어야 될 이유가 있다고 하면 무엇일까요? 우리가 따뜻한 손길을 내어주고 친구가 되어줄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망가져 버리고, 내가 나서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내가 나서지 아니하면 모든 것들이 망가지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도움이 없어도 하나님의 뜻은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헌신이 없어도, 우리의 사랑이 없어도, 우리의 희생이 없어도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그 과정 가운데서의 축복은 사라져 버리고 마는 거예요. 내가 헌신하고 내가 사랑하고 내가 도움의 손을 내밀어서 얻을 수 있는 그 어마어마한 유익들, 그 어마어마한 축복들이 다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에스더서 4장 14절에서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향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의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모르드개는 에스더 왕비를 향해서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왕비로 삼아주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바로 이때를 위해서 너로 하여금 왕비로 세우시고 너로 하여금 말을 하게 하신 것인데, 네가 만일 잠잠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럼 우리 유다 민족 망하는가?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에스더가 없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망가지는 것 아니라는 거예요. 반드시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지 구원을 얻게 하실 텐데, 너와 네 집은 망하리라. 우리가 선을 행해야 될 이유, 우리가 친구가 되어 줘야 될 이유, 우리가 따뜻한 손을 내밀어야 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안 하면 안 되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향한 그 사랑과 친구 되어줌이 결국은 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아무튼 다윗은 요나단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도망갈 수 있었는데요. 이러한 친구의 사랑, 이러한 친구의 우정, 그것 때문에 많은 혜택을 얻게 된 것이죠. 잠언서 17장 17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 친구와 형제의 역할이 각각 다르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잠언서에 나오는 이 표현들은 묶어서 생각해야 됩니다.
친구와 형제들은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다고 했는데, 결국 친구 요나단은 다윗에게 아주 좋은 도움을 주어서 결국 다윗이 왕이 될 수 있는 그 조건들을, 그 길의 장애물들을 다 제거하는 아주 좋은 역할을 보여주었다고 하는 것이 놀라운 것이고, 오늘 이 시간 우리가 기억하고 배워야 할 진리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도 친구로 지내야 되고 친구로 도움을 주어야 하고,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데 그냥 나 혼자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동역자들이 필요하고 믿음의 동역자가 되어 주어야 한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감사합니까? 우리 옆에 사람 손 한 번 잡고 감사하다고 얘기 한번 할까요? 감사합니다. 같이 걸어가는 게 성경적인 원리고 하나님의 방법이에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다음에, 그 완벽한 그 상황 가운데서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그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께서 부족하다고 말씀하신 것이 딱 하나 있어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아담이 혼자 살아가는 것이 좋지 못하다.” 그래서 하와를 만들어 짝 지어주셨는데, 그래서 부부 관계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함께 지내야 되는 거예요. 함께 서로 도움을 주면서 살아야 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어떻게 만드셨는가? 하나님을 닮게 만드셨어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는데 하나님은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는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계시는 거죠.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이 세 하나님이 서로 하나가 되고 일치하고 교제하고 완벽한 조화 가운데 이루시는 그 하나님의 모습에 따라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혼자 있으면 안 되는 존재예요. 함께 다녀야 되는 존재, 함께 사랑하고 도와주어야 되는 거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되는 것이고요.
따라서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걸어갈 때도 혼자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걸어가야 됩니다. 넘어지는 동료가 있으면 손잡아 일으켜 주어야 되고, 내가 넘어졌을 때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도와주어야 되고. 그래서 믿음의 길을 함께 걸어가야 되는 것인데, 우리가 함께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이것이 얼마나 유익한가? 다윗과 요나단의 이 관계를 보면서 우리가 배워 나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누가 행복한 사람인가? 사울이 행복한 사람이었을까요? 요나단이 행복한 사람이었을까요? 요나단이 행복한 사람인 것이, 요나단은 사랑했기 때문에, 도와주었기 때문에 행복한 겁니다.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을 때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만이 아니라 나 자신을 돕는 거예요. 누가 불행한 사람입니까? 사울이 불행한 것이죠. 다윗을 적으로 삼고 친구가 되어주지 못할 때, 다윗으로 인해서 유익을 얻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놓쳐버리는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려야 되는가? 믿음의 길을 걸어갈 때든 어떤 길을 걸어갈 때든, 우리가 함께 믿음의 동료들, 친구들 함께 사귀면서 함께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그런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 주저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어요. 그 요소가 무엇이죠? 배신당한 씁쓸한 기억들 때문입니다. 한때 제일 친했던 친구인데 배신해 버려서 상처받으신 경험이 있으신가요? 있어요. 나는 사랑했지만 배신당한 경우가 있어요. 목회하는 가운데 그런 경우 얼마나 많이 당하는지 몰라요. 사랑했지만 배신당하고, 나는 친구가 되어 주고 싶었지만 가시에 찔리는 그런 씁쓸한 배신의 추억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어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는 어떤 마음이 드는가? ‘다시는 내가 내 마음을 주지 않겠다’고 마음을 닫아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심지어 부부 사이에서도 사실은 부부 사이에서 관계를 보면 사랑해 주고 아껴준 게 90이에요. 99예요.
근데 말 한마디 잘못했던 그게 너무나도 커가지고 마음의 문을 닫으려고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끊어버리자’, ‘저런 인간이랑 못 살겠다’ 그런 마음들이 부부 사이에서도 많이 일어나게 되고, 또한 우리 신앙의 동료들 가운데서도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지나가면서 했던 그 농담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깊이 상처가 되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던 그 말 한마디가 우리들의 심장을 꿰뚫는 말이 되어버려서, 그런 상처들을 여기저기 달고 살던 우리들이 우리들의 마음을 열고 친구가 되어주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배신의 추억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적인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친구가 되어줘라. 믿음의 길을 같이 갈 때 혼자 가지 말고 함께 손잡고 가라”**라고 하는 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입니다. 손 잡고 가까이 가면 가시에 찔릴 위험이 훨씬 더 많지만, 가시에 안 찔리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가장 어리석은 방법은 그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해 버리고 산속에 들어가서 자연하고 벗하며 사는 게 제일 바보 같은 선택이에요. 우리는 가까이 가기 때문에 상처가 나는 겁니다. 가까이 있기 때문에 다치는 거예요. 당연한 결과예요. 그것 때문에 피할 게 아니라, 더욱더 사랑하고 더욱더 아껴주고 더욱더 친구가 되어줌으로써 그 상처를 딛고서 일어나는 그런 믿음의 결단을 해야 될 텐데요. 왜 우리는 그렇게 해야 되는가? 그게 바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며 아끼며 돌보라고 말씀해 주셨기 때문인 것이죠. 또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무엇입니까? 우리가 사랑했으나 배신을 당했을 경우, 그것이 우리에게 실패가 아니라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유익으로 온다고 하는 이런 놀라운 모순 같은 진리를 기억해야 됩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2절에서 13절의 말씀에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누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다윗은 사랑을 일방적으로 했어요. 다 요나단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울 왕도 사랑했어요. 하지만 돌아온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울 왕의 그 증오를 경험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 다윗이 노래했던 그 시편에 무슨 내용이 있냐면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미워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나는 기도라’ 그랬어요. 나는 기도라.
왜 그렇게 해야 되는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헛된 사랑, 헛된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갚으시고 하나님께서 그 억울함을 푸신다고 하는 것, 우리의 빈 평안이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빈 평안이 우리에게 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왜 우리가 더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친구가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10절의 말씀에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가 원수 되고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의 마음을 닫아버리고 하나님과 적이 되어 버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와의 관계를 끊어버리신 것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의 친구 되어 주시기를 원하셔서, 그래서 저 높고 높은 보좌 위에서 낮고 천한 이 땅에 우리의 모습으로, 우리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친구가 되어 주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고 은혜를 얻은 줄로 믿습니다.
지난주에 나왔던 뉴스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최근 전주에 있는 어떤 한 사건이 우리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킨 것이 있습니다. **’초코파이 절도 사건’**이라고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다 알고 계시는군요. 현대자동차 출고 센터에서 근무하던 협력업체 직원, 협력업체 경비 노동자가 일을 하다가 물류 업체의 냉장고에서 초코파이를 하나 꺼내 먹었습니다. 초코파이만 먹은 게 아니고 카스타드도 꺼내 먹어서 그 가격이 1,050원어치를 꺼내 먹은 일로 고발을 당했습니다. 죄입니까, 죄가 아닙니까? 죄예요.
남의 것을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가져갔기 때문에 절도죄에 해당하는 것이고, 약식 기소로 50만 원 벌금을 받았다가, 정식 재판을 신청해서 1심에서 5만 원 선고를 받았어요. 5만 원 선고로 끝나는 게 아니라 직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죠. 항소심으로 갔더니 항소심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전 국민적인 관심사가 이루어졌고,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하는 소식이 전해졌어요. 들었습니까?
형식적으로는 절도죄에 해당할 수 있겠지만, 과연 이런 정도의 죄까지 처벌해야만 하는 죄일까라고 하는 것에 전 국민적인 관심이 쏟아지는 이 사건에서 법원은 형식적인 절도는 해당하기 때문에 유죄 선고를 할 수도 있었겠지만 무죄 선고를 했습니다. 무죄 선고를 한 그 근거가 있었는데요. 그 근거는 동료 직원 39명이 다 나와서 **”나도 먹었다”**라고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근데 사실 “나도 먹었다”고 얘기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이 사람이 먹어서 절도죄로 처벌을 받게 되는 상황인데, “나도 먹었다”고 하면 나도 절도죄로 끌려갈 위험이 있는데도 39명의 동료들이 모두가 다 한결같이 “나도 먹었다.” 결국 동료 직원들의 증언으로 재판정에서는 이것은 그저 편의상 준 것으로 이해해서 무죄 선고를 내렸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하신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고, 우리가 마음이 완악해서 이기적인 삶을 살았고, 사랑을 베풀어야 할 때 사랑을 베풀지 않았고, 참고 인내해야 되는 상황 가운데서 분노했고,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지만 그 사명대로 살지 못한 우리들의 모습, 하나님의 심판정 앞에서 유죄 판결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친구 되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내가 대신 죄를 치렀다”고 말씀해 주셨기에 우리가 구원을 얻고 생명을 얻고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 줄로 믿습니다. 성탄은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기쁘고 좋은 소식인지 몰라요. 하나님께서 죄로 가득 찬 우리를 위해 친구가 되어 주시기 위해서 오신 그 놀라운 이야기. 우리가 그런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입었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 외면하며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친구가 되어주고 사랑의 손을 내밀고 믿음의 길을 함께 동료로서 걸어가는 귀하고 복된 결단들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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