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뉴스를 통해서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체벌하는 가운데 자녀가 죽게 되는 그런 사건들, 그런 뉴스들을 듣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 실수를 숨기려고 했었지만 결국 나중에 발각이 되었다고 하는 그런 뉴스들이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한 번씩 나오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안타까운 이야기들이 벌어지는 것이 무지하거나 가난하고 그리고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 사람들의 가정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충격적으로도 정말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가정에서도 그런 일들이 발생하고, 심지어 목회자나 교수의 가정에서도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하는 그런 뉴스를 듣게 되어서 충격을 받을 때가 참 너무나도 많이 있는데요.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다 연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가? 성경적인 관점에서 본다고 한다면, 사람은 다 타락해버려서 그 어느 한 사람도 완벽한 사람이 없고, 하나님 앞에서 다 죄인일 뿐만이 아니라 구제 불능의 인간인 것이 우리들의 모습인 것이죠. 그래서 우리들의 삶 속에서 그런 끔찍한 일들이, 충격적인 일들이 나타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인생들인가? 죄성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가 없다고 한다면, 또 여러 가지 상황 가운데서 여러 가지 그런 참 긴박한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정말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고 한다면, 누구라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에 빠지게 되고 이런 끔찍한 일을 하게 되는, 경험하게 되는 경우가 그 누구에게라도 일어날 수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면서, 우리가 항상 경각심을 가져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항상 넘어질까 조심해야 하는 것이죠.
이 세상에 그 어느 누구도 완벽한 사람이 없고, 어떠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어떠한 형편이 주어지게 된다고 한다면, 그 누구라도 쓰러질 수 있고 그 누구라도 넘어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해야 되고 깨어 있어야 하고, 넘어질까 조심하면서 우리 자신을 늘 주님 앞에 세우지 아니한다면, 우리가 주님 앞에서 늘 우리 자신을 돌아보지 아니한다면, 우리도 그럴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잠언서 19장 18절의 말씀을 보니까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가 네 아들에게 희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되 죽일 마음은 두지 말지니라”**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데요. 이 말씀의 의미가 어떤 의미일까요? ‘자녀에게 희망이 있다면, 희망 있는 자녀들이라고 한다면 징계를 하다가 죽이는 데까지 가지 마라’라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그러니까 희망이 없는 싹수가 노란 자식은 죽여도 된다고 하는 말인가요? 그런 의미는 아니죠.
그런 의미가 아니고, ‘희망이 있는 자녀라고 한다면 죽이지 말라’가 아니라, 모든 자녀는 다 희망이 있다는 겁니다. 모든 자녀는 다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소망이 있다고 하는 것이죠. 소중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자녀들을 볼 때, 그 자녀들이 아무리 못나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 자녀가 정말 망나니와 같은 그런 자녀라고 할지라도, 그 자녀들은 아무런 소망이 없는 싹수가 노란 자녀들이냐? 그게 아니라고 하는 것이죠. 모든 자녀에게 다 소망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말씀이 잠언서 19장 18절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자녀들 가운데 보면 참 천차만별이죠. 어떤 자녀는 정말 착하고 성실하고 그리고 앞가림도 잘하고 정말 뛰어난 그런 자녀가 있는가 하면, 어떤 자녀는 정말 늘 부모의 근심거리가 되고, 하는 일마다 문제를 일으키고, 모든 일에서 부모의 근심과 걱정이 되는 그런 자녀에 이르기까지, 자녀를 보면 천차만별의 그 자녀들이 있다고 할 수가 있겠는데, 그런데 아무리 망나니 같은 그런 자녀라고 할지라도, 아무리 정말 내놓을 수 없는, ‘어떻게 저런 아이가 태어났을까?’ 부모에게 근심과 걱정만 될 뿐 아무런 기쁨도 주지 못하고 늘 마음을 속 썩이게 만드는 그런 자녀라고 할지라도, 그런 자녀는 그러니까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게 아니라, 사실은 어떤 자녀라도 다 소망이 있다. 그 어떤 자녀라도 다 희망이 있기 때문에, 그 희망이 있는 그 자녀들을 함부로 대해서 그래서 죽는 데까지 가게 만들지 말고 소중하게 대하라고 하는 것이 바로 잠언서 19장 18절의 말씀의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왜 자녀들에게 희망이 있는 것일까요? 자녀들을 보면서 왜 우리는 소망을 가져야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모든 아이들이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서 태어난 아이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만드실 때 어떻게 만드셨는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를 빚으셨다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존재인가? 정말 소중한 존재라고 하는 거예요. 정말 가치 있는 존재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닮은 존재라고 하는 것이죠. 정말 소중한 존재가 우리 인생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 자녀들이 정말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운 모습을 보일 때마다, 또 그 문제를 가지고 부모의 마음을 속 썩게 만들고, 또 저런 문제 때문에 늘 부모가 괴롭고 고통스러운, 그래서 자녀들, 자녀만 보면 정말 마음이 아프고 정말 골칫거리고, ‘내가 이 아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정말 해답이 안 나오는 그런 아이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런 아이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아이인가 한다면, 그런 아무런 가치가 없는 아이가 아니라, 사실은 어떤 아이인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습니까? 우리 자녀들을 바라볼 때 그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세상의 것들을 우상으로 삼기 때문에 자녀들을 무가치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고 하나님을 기준으로 보고 그 마음으로 우리 자녀들을 바라보아야 되는데,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우상이 들어서기 시작하면 자녀들이 무가치해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돈이 우상이 되면, 돈을 자꾸만 써버리고 돈 들어가게 하고 내 재정을 힘들게 만드는 그런 자녀들을 본다고 한다면, 그 자녀들이 무가치해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명예나 권력이나 어떠한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이나, 이 모든 것들이 우리들의 우상이 되어 버리게 된다고 한다면, 그러면 자녀들의 가치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게 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너는 다른 애와는 달리 왜 이렇게 멍청하냐? 똑똑하지 못하냐? 너는 왜 다른 아이들과 같이 재능이 없고, 너는 왜 재능이 그렇게 없는가? 부족한가? 왜 키가 작고, 너는 예쁘지도 않고, 너는 살이 많이 쪘고, 너는 이런 문제가 있고 저런 문제가 있고” 수많은 문제들을 보면서 그 아이들을 보면서 부모의 마음 가운데 실망감이 드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렇게 실망감이 드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자녀들의 문제라기보다는, 우리 부모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 세상에 썩어질 것들이 우상이 될 때, 자녀들을 고귀하게 바라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으로 모든 사람들을 바라본다고 한다면, 우리 자녀들을 바라본다고 한다면, 비록 이 세상의 관점으로 본다면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이 많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가? 정말 소중하고 고귀하게,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로 본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되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사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해 주신 그 관점으로 우리 자녀들을 보고 인정하고 그리고 축복하고 돌보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마다 각각 다른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달란트의 비율을 보면,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준 것처럼, 하나님께서 사람들마다 각각 다른 재능을 주시고 다른 사람을 다 다르게 만드셨어요.
어떤 사람은 축구를 잘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시를 잘 쓰고 어떤 사람은 유머러스하고, 어떤 사람은 친화력이 좋고 어떤 사람은 깊이 생각하는 그런 마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연산을 잘하고 여러 가지 수많은 그 달란트들이 사람들마다 다 각각 다른데, 우리 인생들은 어떤 인생들인가? 한 가지만 바라보고 이 세상의 가치에 따라서 사람들을 재단해버리고 함부로 욕해버리고 함부로 무시해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몰라요. 특별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하는데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특별히 우리 자녀들이 공부를 잘하는 것을 제일 중요하게 보잖아요. 근데 그게 전부가 아니란 말이에요. 공부 잘하는 사람은 그냥 한 5%밖에 안 돼요.
하지만 그 아이들이 공부가 아니라 다른 것에서 더 잘할 수 있고, 다른 더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공감의 능력이 있을 수가 있고, 그림을 더 잘 그릴 수가 있고, 또 체육을 더 잘 할 수가 있고, 온갖 재능들이 얼마나 하나님께서 많이 주셨는지 우리가 그 사람들을 판단할 때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고 이 세상의 잘못된 가치관에 따라 바라보게 된다고 하면, 우리 자녀들을 정말 고통 가운데 몰아넣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제 동기 목사님의 아들이 있었는데요. 동기 목사님의 아들이 한국에 있을 때는 늘 학교에서 혼났어요. “너는 왜 이렇게 공부를 못하냐? 너는 왜 수업 시간에 그림만 그리냐?” 그러면서 엄청나게 혼났어요. 엄청나게 혼나가지고 학교 가는 것이 재미없고, 사람들이 늘 ‘너는 공부 못하는 애’라고 엄청나게 혼나고 그렇게 인생을 재미없게 살던 그런 우리 목사님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목사님이 한 번은 국가에서 보내주는 그 연수 때문에 군목이었는데요.
연수 때문에 미국에 가서 미국의 학교에 그 아이가 등록을 하게 됐는데, 어느 날 선생님이 그 아이가 그린 그림을 딱 보더니만, “세상에, 이 그림을 누가 그렸니?” “제가 그렸는데요.” “야, 너 왜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니?” 그러니까 “정말 네 그림이 이렇게 잘 그리니?” 그러니까 “네, 이것도 있고요, 이것도 있고요.” “세상에, 너는 그림을 너무나도 잘 그리는구나. 이 그림이 여기만 있니? 또 그림이 더 있니?” “우리 집에 가면 이만큼 쌓여 있어요.” 그러니 그러면 그 그림을 다 가지고 학교로 와라. 그래서 선생님이 학교에다가 그 아이의 그림을 학교 벽면에 다 붙여줘서, 그 아이의 그림을 학교 전체에 붙여놓고 그 아이의 그림을 칭찬해 주고 박수 쳐주고 그랬더니 이 아이가 신이 낫겠습니까? 어떻겠습니까?
한국에서는 맨날 혼나고 맨날 두드려 맞고, “왜 이렇게 공부 못하느냐? 왜 이렇게 저러냐?” (했지만) 그 아이가 미국에 가가지고 선생님이 그 그림을 그렇게 보여주니까 너무나도 신이 나고 너무나도 행복하면서 그림을 더 많이 그렸는데, 지금은 어떻게 됐어요? 네이버 웹툰 작가가 돼 가지고 지금 어마어마하게 인기를 끌고 있는 웹툰 작가입니다. 최근에 유럽에 무슨 웹툰 무슨 상에서 상도 받았다고 그러고. 늘 제가 배가 아파요.
근데 다른 면에서는 좀 부족한 거 보이고, 다른 면에서는 뭔가 좀 약해 보이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 다르게 만드셨어요. 다 다르게 만드셨는데, 다 소중하게 만드셨어요. 다 필요하게 만드셨어요. 그래서 정말 우리가 어떤 관점으로 바라봐야 되는가? 이 세상의 헛된 우상을 우리들의 마음속에 섬기지 말고, 재물이나 우상이나 이런 권력이나 성공이나 이런 것을 바라보니까 우리가 사람들을 가치를 ‘너는 가치가 떨어진다’고 말하고, ‘너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너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 너는 쓰잘데없는 인간이다’ 그렇게 말하기가 쉽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만드셨는가? 우리를 소중하게 만드셨다. 우리 자녀들은 모두가 다 소중하기 때문에 함부로 대할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가 실수를 많이 했죠. 아들을 보면서는 “아이고 우리 아들” 하다가, 딸을 보면 “너는 딸이 돼가지고” 그렇게 했잖아요.
장남한테는 “아이고” 하다가 둘째한테는 “너는 이러고” 그런 우리의 과거가 있다고 한다면 회개하고, 나중에 우리 자녀들 오면은 손 잡고 “미안하다. 내가 예전에 몰라서 그랬고, 내가 예전에 하나님을 섬기기보다 우상을 섬긴 것 같아서 내가 너에게 잘못한 것이 많다. 미안하다” 하면서 자녀들에게 미안하다고 얘기하세요. 그리고 이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소중한 아들이다, 소중한 딸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정말 우리가 함부로 대하지 아니하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특별히 우리 자녀들은 어떠한 자녀들인가? 깨지기 쉬운 것이 우리들의 자녀들입니다. 어른과 같지 않거든요. 어른들은 맷집이 있고 어른들은 온갖 시련도 겪어서 무엇이든지 견딜 수 있는 힘이 있지만, 우리 자녀들은 어떤 존재입니까? 너무나도 깨지기 쉬운, 너무나도 유약한 자녀들을 우리가 데리고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내가 말하는 그 말 한마디가 우리 아이들의 마음에 못을 박아버리고, 내가 하는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우리 아이들의 그 마음을 상하게 만드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래서 우리 아이들 함부로 다루다가 그래서 그들을 죽여버리는 것이 아니라, 죽인다고 하는 것이 실제로 죽이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낙담하게 만들고 슬프게 만들고 분노하게 만드는 그 모든 것들이 다 죽이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 그러지 말고 늘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아이들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소중하게, 그리고 아주 조심조심스럽게, ‘혹시라도 내가 말하는 이 말 한마디가 우리 아이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을까? 내 기분에 따라서 내뱉는 그 말 한마디가 이 아이로 하여금 의지를 꺾어버리고 이 세상을 살아갈 힘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그리고 이 아이가 이 말 한마디 때문에 주눅이 들어버리지는 않을까?’ 우리가 고민하면서, ‘어떻게 하면 이 아이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까?’ 우리를 살리는 그러한 믿음의 역할을 감당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그리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놀라운 은혜를 우리가 받았다고 한다면, 우리도 그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우리가 우리 아이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 같아도 살려내고 쓰러진 것 같아도 일으켜 세우고,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아이들이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거룩하고 아름답고 하나님의 그 사명들을 잘 감당해 나가는 아이로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는 가운데, 부모로서의 역할들을 잘 감당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우리들 가운데 혹시 자녀를 죽이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계신 분 계십니까? 혹시 계시나요? 다행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왜 이런 비극들이 많이 일어나게 되는 것일까요? 왜 이런 비극들이 많이 일어나게 되느냐 하면, 그것은 우리는 선한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이 때때로 악한 결과를 빚어낼 때가 너무나도 많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의도적으로 죽이려고 하지는 않아요. 의도적으로는 살리고 싶고, 내 의도는 잘 되게 만들고 싶고, 내 의도는 더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게 그게 부모의 한결같은 마음일 거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의도는 나는 저 아이를 좋게 만들어 주고 싶고, 이 아이를 성장시키고 싶어서 징계하기도 하고 훈련하기도 하고 훈육하기도 하는 것인데, 그런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항상 선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선한 동기와 대부분의 선한 의도가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는 게 우리의 문제예요.
내가 말할 때 그 사람을 망가뜨리려고 말하는 사람 있어요? 없어요. 내가 말하는 것은 그 상대방을 오히려 더 좋게 만들어주고 싶고, 그 상대방이 잘못된 길로 가지 않게 만들고 싶고, 우리의 선한 의도는 너무나도 많아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선한 의도의 대부분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죽이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거. 우리의 선한 의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는 거예요. 왜 그렇죠? 의도는 선한데 지혜롭지 못하게 행동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내 의도가 선하다고 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우리 아이들을 사랑하고 또 우리 교회를 사랑하고 내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그런 사랑의 마음이 있으면 그것이 면죄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선한 의도로 행한 그 모든 일들이 사실은 잘못된 결과를 빚어내는 경우, 정반대의 결과를 빚어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목적이 선한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그 목적을 바르게 수행하기 위한 지혜로운 방법이 필요한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신중해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항상 목적을 기억하면서, 그 선한 목적을 어떻게 선한 결과로 만들어낼 것인지 진지하게 상황들을 살펴보면서, 그리고 조심스럽게 신중하게 접근하지 아니하면, 안타깝게도 모든 선한 의도들이 악한 결과로 빚어질 수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아이를 훈육한다고 하십시다. 아이가 무언가를 잘못했어요. 그래서 그 아이에게 무엇인가를 잘 가르치고 제대로 잘 말을 해서 이 아이로 하여금 좋은 길로, 나쁜 아이가 되지 않고 선한 길로 가게 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그 말을 제대로 잘 받아듣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을 더 잘 안 듣고 부모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부모가 폭발해버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처음 의도는 이 아이에게 좋은 길로 가게 만들고 싶었던 그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지만, 이 아이가 내 의도를 제대로 잘 반영하지 않고 잘못된 길로, 내 의도를 제대로 잘 받아들이지 않는 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화가 나서, 결국에는 나중에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 아이에게 내가 분풀이를 하는 거예요. 처음 목적은 사라져버린 분풀이하고 있는 모습으로 바뀌어 버리는 게 우리의 모습인 것이죠.
그것뿐만이 아니라, 정말 우리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할 때에도 과연 이것이 내가 한 말이 선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겠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바둑을 두다 보면 내가 상대방의 돌을 하나 따먹습니다. 초보자는 그 돌을 따먹으면 이길 줄 알고 그 돌을 따먹어요. 그런데 그 돌을 따먹으면 내 대마가 잡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바둑을 둘 때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한 수만 내다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수를 두면 상대방은 어떤 수로 나올 것이고, 그 수가 나오면 내가 어떤 수를 할 것이고’ 그래서 한 수, 두 수, 세 수, 네 수, 몇 수를 앞에 내다보고 그래서 최고의 경지에 올라가는 그 수를 보고 돌 하나를 내려놔야 되는 것이죠. 먹을 것이 있다고 그냥 딱 먹어버리면 지는 거예요. 최고 고수는 어떻게 바둑 을 둡니까? 바둑 탁 해서 상대방이 먼저 딱 돌을 하나 딱 놓으니까 그다음 사람이 쫙 장고를 하더니만 “내가 졌소” 하면서 돌을 놓았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우리가 항상 깊이 신중하게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구하는 가운데, 우리 자녀들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자녀들의 문제들 뿐만이 아니고 우리의 인간관계의 모든 것에 적용이 되는 말씀일 줄로 믿습니다.
교회에서 우리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 어쩌면 교회에도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새로 온 가족들, 신앙생활을 오래 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도 있고요. 이런 단계 저런 단계의 성도들이 참 많이 있는데, 그런 성도들을 보면서 ‘이렇게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던졌던 그 말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일어서지 못하게 만들고 영적으로 죽어버리게 만드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몰라요. 시험을 들고 믿음에서 떠나게 만드는 결과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관계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저희들에게 지혜를 주셔서 죽이는 인생이 아니라 살리는 인생 되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9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자는 벌을 받을 것이라. 네가 그를 건져주면 다시 그런 일이 생기리라.” 노하기를 맹렬히 하면 그것은 결국 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우리 자녀들에게든지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정말 그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으로 대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노를 발한다고 한다면, 뒷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한다고 하면, 결국 그것은 우리에게 저주가 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와 함께 같이 찬양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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