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공주라고 하는 동화가 있는데요. 읽어보셨습니까? 들어보셨습니까? 재미있는 동화입니다. 백설 공주의 새어머니이죠. 새 왕비는 매일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에게 묻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합니다. 거울을 보면서 물어보는 것이지요. 뭐라고 물었습니까?
이렇게 물어봤어요. Mirror, mirror, on the wall, who is the fairest of them all? (거울아, 거울아, 누가 가장 예쁘냐?)라고 물어본 거죠. 그랬더니 거울이 대답하는 겁니다. 거울이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My Queen, you are the fairest of them all.”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하루를 얼마나 행복하게 시작했겠습니까?
그런 삶이 계속 반복되던 이 새 왕비가 어느 날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거울에게 물어봤어요. 물어보니까 그 거울이 대답하는 겁니다. “My Queen, you are the fairest of them all, ’tis true.” (당신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정말이에요.) 거기까지만 하고 말았으면 좋았을 텐데, 거기다 한마디 더 붙이는 것이죠. “but Snow White is a thousand times more fair than you.” (백설 공주가 당신보다 천 배나 아름답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 새 왕비는 그날부터 백설공주를 죽이려고 작정을 하는 거죠. 사냥꾼을 보내서 이 아이를 죽이고 그 아이의 심장을 꺼내 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사냥꾼은 죽이지 않고 멧돼지의 심장을 꺼내서 갖다 주죠. 나중에 죽은 줄 알고 물어봤는데, 또 똑같은 대답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번에는 백설공주를 죽이기 위해서 독이 든 빗을 가지고 가서 꽂아서 죽이려고 하기도 하고, 나중에는 무엇까지 주었죠? 독이 든 사과까지 주었다고 하는 이야기. 아, 재미있는 동화가 기억이 나십니까? 기억이 납니다.
어쩌면 사울 왕의 모습을 보면 백설 공주를 죽이려고 했던 이 새 왕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사울 왕은 왕으로 등극할 때 백성들이 찬양하면서 좋아했습니다. 특별히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암몬 민족의 나하스에게서 몰살당하려고 했던 그 상황 가운데서, 사울 왕은 군대를 이끌고 가서 그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구원하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구동성으로 사울 왕을 칭송했을 겁니다. “우리가 왕을 잘 뽑았다. 우리가 왕을 잘 세웠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사울 왕은 잘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혜성같이 다윗이라고 하는 한 사람이 탄생하게 된 겁니다.
블레셋 민족 앞에서 벌벌 떨고 있고, 골리앗을 앞세운 그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아무도 대항하지 못하고 있을 때, 조그마한 꼬마 소년이 단지 물맷돌을 들고 가서 그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그리고 그 장수를 죽이고,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을 칭송하는 겁니다. 여인들이 노래를 부르는 것이죠.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어쩌면 새 왕비가 거울에게서 들었던 그 대답을 들었을 때 그 충격이 사울 왕에게 있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자기가 최고인 줄 알았는데,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인 줄 알았는데’, 다윗이 더 뛰어나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거울과 같은 여인들의 입을 통해서 듣게 될 때, 사울 왕은 마음속에 시기와 질투가 솟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비극적인 이야기죠. 사울 왕이 왕으로서 백성들을 돌보고 사랑하고 좋은 왕이 되기보다는, 한 사람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는 추한 모습으로 변해 갔다고 하는 이야기가 사무엘상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여인들이 이렇게 노래한 게 잘못일까요? 이런 노래를 안 불렀어야 했던 것일까요? 아마 우리 가운데는 그런 생각을 하실 분들이 많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 여인들이 그런 노래를 불러서 이렇게 되었는가?’ 하지만 이 여인들이 이런 노래를 불렀던 것은, 물론 약간 가사가 좀 수정되면 좋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잘한 사람을 두고서 칭찬하고, 탁월한 능력을 보인 사람을 향해서 박수 쳐주고, 정말 훌륭하고 탁월한 사람을 위해서 높이는 이런 행동들을 하는 것은 그것은 아주 건강한 모습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 공동체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좋은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인가?
어떤 공동체가 좋은 공동체일까요? 누가 선한 일을 한다고 하면, 누가 착한 일을 한다고 하면, 그 사람을 박수 쳐주고 잘했다고 칭찬해 주고 하는 공동체가 좋은 공동체예요. 만일 누군가 악을 행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지 말라고 해야 되고 그런 일을 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고 제지하는 공동체가 좋은 공동체인 거죠. 좋은 공동체는 어떻게 만들어 나가는가? 권선징악을 하는 게 좋은 공동체가 되는 길입니다. 누군가 헌신을 했다고 한다면 그 헌신한 것에 대해서 박수 쳐줘야 되고, 누군가 나쁜 짓을 한다고 한다면 하지 못하게 말려야 되는 게 좋은 공동체가 되는 길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나쁜 공동체, 망해가는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이겠습니까? 누군가 착한 일을 하고 선한 일을 했어도 무시하는 겁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겁니다. 그냥 관심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악을 행하고 잘못을 하는 그런 사람이 있어도 제지하지 않는 겁니다. 그냥 내버려 두는 겁니다.
악을 행하고 있음에도 그냥 방치해 두는 그런 공동체는 망하는 공동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문제는 무엇인가? 권선징악의 그런 반응들이 나올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만일 이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다”**라고 했을 때, 다윗이 그 소리를 듣고 “그럼 그렇지, 내가 최고야”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그리고 자신을 뽐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교만의 길로 갔다고 한다면, 그것은 다윗의 마음이 만일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건 다윗의 문제인 거예요. 다윗이 잘못하고 있는 거죠. 그런 칭찬 소리를 들었다고 할지라도, 내 마음이 교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라. 나를 있게 놔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서 더욱더 겸손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우리들이 가져야 될 자세라고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만일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고 한다면, 시기와 질투 가운데서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질 것이 아니라, 그런 사울 왕과 같은 마음이 아니라, 어떤 마음을 품는 것이 옳겠습니까? 요나단과 같은 마음을 갖는 게 바른 마음인 것이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겁니다. ‘교만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시기와 질투를 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칭찬도 못하게 하고 박수도 못 치게 하고, 너희들이 그렇게 칭찬하면, 너희들이 박수 치고 너희들이 그렇게 소리를 높이면, 교만한 사람 생길지도 몰라, 시기와 질투하는 사람이 생길지도 몰라. 아무것도 하지 말라’ 그렇게 찍어 누르는 것이 바른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먼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울 왕은 안타깝게도 좋은 반응을 보였느냐 하면, 좋은 반응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사무엘상 18장 8절에서 9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그날 이후로 사울 왕의 목표는 다윗을 적으로 삼고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데 혈안이 되어 버리고 망가지죠.
이런 일들이 자꾸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도 동일하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이런 현상들을 많이 겪게 되는 것이죠. 우리는 이 시대를 살면서 어떤 **’거울의 소리’**를 듣습니까? SNS의 소리를 듣는 거죠. ‘좋아요’의 소리를 듣는 겁니다. ‘내게 좋아요를 얼마나 눌러주었는가’, ‘SNS로 얼마나 반응이 있는가’ 그것을 보면서 우리들의 마음이 교만해지거나 시기와 질투의 마음이 생겨서 나락으로 가는 경우가 많이 있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울 왕이 이러한 시기와 질투의 반응을 보였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시기와 질투가 어디에서부터 생기는가? 사실은 다른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이 나보다 뛰어나고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고 나와 다르다고 하는 것을 느끼게 될 때 시기와 질투가 생길 수가 있겠는데요. 그 시기와 질투가 생기는 그 근본적인 그 마음이 어디에서부터 나오냐 하면 부러워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비교하면서 **’나보다 저 사람이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나보다 더 아름다움을 저 사람이 가지고 있고, 저 사람이 더 높은 위치에 가 있고, 나보다 더 많이 인정받는다’**고 하는 사실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부러운 마음이 생기는 것이죠.
이런 부러운 마음들이 생기는 것 이것이 나쁜 것일까요? 부러운 마음이 생기는 것 자체는 그냥 괜찮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괜찮아 보입니까? 부러운 마음이 생기는 것 자체가 나쁜 것입니까? 그렇습니까? 왜 이렇게 정답만 말씀하셔요. 괜찮은 거예요.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부러움이 생기는 거, 좋은 것을 보면 ‘갖고 싶다.’
좋은 것이 있으면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라고 하는 부러운 마음을 갖는 것 자체는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어떤 종교에서는 그렇게 부러운 마음을 갖는 것 자체를 문제시하는 종교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종교에서는 목표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그런 부러움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이 우리가 수양해야 될 목표라고 설정해 놓습니다. 그 종교에서의 목표는 무엇이냐 하면, 부러운 마음 자체가 없어지는 것, 아무리 좋은 것을 봐도 아무리 멋있는 것을 봐도 부러워하지 말고 욕심 내지 말고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냥 마음이 그 평정심을 누리고 아무런 마음의 동요가 없는 그 상태가 되는 것을 그 종교의 최고의 목표라고 생각하는 종교가 있습니다. 무념무상이 최고의 목표인 것이죠. 그 어떤 것을 봐도, 그 아름다운 것을 봐도, 그 어느 좋은 것을 봐도 내 마음속에 전혀 부러움이나 마음의 동요 자체가 안 생기는 것을 목표로 수양을 삼는 종교가 있는데요.
사실 이것은 가능하지 않은 목표입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그런 마음 자체를 없앤다고 하는 것 자체는 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바람직한 목표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사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부러워하는 마음, 더 좋은 것을 추구하려고 하는 마음,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고 사람이라고 한다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현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일까요? 그런 마음이 생겼을 때 좋은 방향으로 행동하는가, 나쁜 방향으로 행동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부러운 마음이 생겼어요. 부러운 마음이 생겼는데, 그것을 나쁜 방향으로 해결한다고 하는 것이 있다고 하면 어떤 식이죠? 훔치는 거죠? ‘나는 얼마 가지고 있지 않는데 저 사람은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니까 내가 저 사람의 것을 훔쳐야 되겠다. 도둑질해야 되겠다’ 잘못된 방법으로 그 부러움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 그게 잘못된 것이죠.
하지만 좋은 쪽으로 그 부러움을 표현할 수가 있는데, 어떤 쪽으로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부러움을 내가 더 발전할 수 있는 선한 동력으로 삼는 거예요. 내 옆에 있는 아이가 공부를 잘해요. 나는 그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아요. 그런데 그 부러움을 **’나도 저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 간절한 소망을 마음의 동력으로 삼아서 나도 더 열심히 공부하는 거예요. 나도 저 아이보다 더 나은 성적을 얻기 위해서 더 많이 노력하는 것이죠. 그래서 부러움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에 대한 갈망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라, 내가 더 열심히 노력하고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게 만들기 위한 선한 동력으로 얼마든지 사용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마음을 갖게 되는가? 부러운 마음을 좋은 방향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쁜 쪽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다른 사람의 것을 훔치거나 아니면 잘못된 방법으로 시험지를 훔쳐와서 그래서 만점을 맞으려고 하거나, 아니면 사기를 치거나, 남의 돈을 빌리고 갚아주지 않거나, 이런 잘못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한다고 하면, 그것은 잘못된 방법으로 우리들의 부러움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 나타나면 잘못된 방법일까요? 그게 바로 시기와 질투로 나타날 때 잘못된 방향으로 우리의 부러움이 표현되는 것입니다. 사울 왕이 지금 그랬습니다. 이 다윗을 바라보면서 **’저 다윗이 나보다 더 칭송을 받고, 저 다윗이 나보다 더 탁월하다고 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다윗을 죽여버릴까, 어떻게 하면 없앨까’**를 고민하고, 상대방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가운데 없애버리려고 하는 표현을 했다고 하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시기와 질투는 괜찮은 것이 아니라, 그것은 악한 것입니다. 부러워하는 것 자체는 괜찮을 수 있는 것이겠지만, 그 부러움이 넘어서서 시기가 되고 질투가 되고 한다면 그것은 아주 악한 것이 될 텐데요. 성경은 시기와 질투에 대해서 뭐라고 가르치고 있는가? 베드로전서 2장 1절에서 2절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그리고 무엇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버려야 될 게 무엇이에요? 시기와 질투를 버려야 되는 믿습니까? 잘 안 믿는 것 같은데, 옆에 사람에게 얘기해 봅시다. “시기와 질투를 버립시다.”
갈라디아서 5장 19절에서 21절의 말씀도 이렇게 기록합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무엇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우리의 마음 가운데 시기와 질투가 있는 게 괜찮은 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성경은 권고하고 있다고 하는 점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못하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가지고 더 뛰어난 모습을 보이고 더 탁월한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면, 그것을 우리의 부러움을 선한 동력으로 삼아서 우리를 발전시키는 그런 계기로 삼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무엇인가 열심을 내면 나도 열심을 내야 되겠다. 다른 사람이 더 헌신을 하면 나도 더 헌신을 했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이 더 착한 일을 하면 나도 더 착한 일을 했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들이 더 뛰어난 모습을 보이면 나도 더 뛰어난 모습을 보여줘야 되겠다. 선한 것을 보고 배우며 그러한 사명, 그런 열정을 우리들이 회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이냐면, 그걸 선한 동력으로 삼아서 나를 발전시키고 싶어도 발전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 게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옆에 친구가 공부를 참 잘하는데 내가 성적이 안 나와요. 그래서 내가 열심히 공부하면 이 친구만큼 공부를 잘할 수 있을까요? 잘 안 되더라고요. 저 사람이 참 돈을 참 잘 벌어요. 그래서 나도 좀 잘 벌고 싶은데, 그런데 내가 그만큼 열심히 노력하면 돈을 많이 벌게 되나요? 안타깝게도 돈을 많이 벌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단 말이에요.
그런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어떤 모습을 보여야 되는가? 그때 우리는 두 가지 방법으로 반응할 수가 있을 겁니다. 하나는 ‘아, 나는 안 되는구나’ 하면서 좌절하고 낙망하는 길입니다. 아무리 해도 나는 안 되는구나를 깨닫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좌절하고 낙망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이죠. 이것은 잘못된 선택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 좌절하고 낙망하는 것은 나 자신을 파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인 것이고요. 또 좌절과 낙망이 어느 쪽으로 나아가냐면 시기와 질투로 나아가게 되는데, 이것은 상대방을 무찌를 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괴롭게 할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역시 파멸로 이끄는 것이라고 하는 점에서, 이런 잘못된 방식으로의 반응이 아니라, 만약 이런 경우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식의 반응을 해야 되는가? 인정과 감사의 반응을 보여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요나단의 반응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요나단은 다윗을 보면서 하나님이 다윗을 나와는 다르게 만드셨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다윗이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나라의 왕은 내가 되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왕이 되어야 된다’**고 하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친구를 삼은 거예요. 하나님의 그 섭리와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나를 다르게 만드셨구나. 다윗을 이렇게 만들고 나를 이렇게 만드셨구나’ 다르다고 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감사하며 친구를 삼는 선택을 했던 것이 바른 선택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 천차만별로 만드셨습니다. 이 세상에 누구도 다 똑같은 사람이 없고 다 다르게 만들어 놓으셨는데요.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마다 거기에 맞는,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서 우리들을 다양하게 창조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해야 되는 것이죠. 우리 육체만 해도 마찬가지인데요.
우리 몸에 눈이 있고 코가 있고, 입이 있고 귀가 있고 머리카락이 있고 얼굴에 붙어 있는 게 참 많죠. 그런데 이것들이 서로가 서로를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똑같아지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서로 눈이 되고 싶어서 얼굴에 다 눈만 잔뜩 있고 코도 없고 입도 없고 귀도 없으면 어떻게 돼요? 괴물이 되는 거죠. 우리는 어떻게 돼야 되는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그 차이를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그 사명의 자리에서 감사하며 순종하고 나아가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안타깝게도 사울은 어떤 선택을 했는가? 사울은 시기와 질투의 선택을 했습니다. 이것은 백해무익한 선택이고 상대를 죽일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죽이는 선택인데, 내게서 기쁨이 사라지고 나는 외롭게 될 수밖에 없고, 결국 내가 메말라 갈 수밖에 없는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백해무익한 선택인데 왜 백해무익한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일까요?
시기와 질투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고, 시기와 질투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나를 파멸시키는 것이 시기와 질투인데, 왜 우리는 시기와 질투를 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썩을 것들을 우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돈이 우상이 되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명예가 우상이 되면, 사람들로부터 박수받는 것이 우상이 되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우상이 되면, 그러면 그때부터 시기와 질투가 나오게 되어 있는 겁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마음의 왕좌 가운데 하나님이 다스리고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바라보며 감사와 찬양으로 반응할 텐데, 하나님이 빠져버리고 우리의 마음 가운데 썩어질 것들이 우리의 마음의 중심에 있다고 한다면, 그러면 결국 시기와 질투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사울 왕은 시기와 질투로 자신을 망쳤을 뿐만 아니라, 결국 자신이 보호해야 될 백성을 향해서 칼을 들이밀고 (맙니다). 왕을 세워준 이유가 무엇입니까? 백성을 왜적으로부터 보호하고 백성을 돌보고 사랑으로 섬기라고 왕을 세워주었는데, 안타깝게도 그 왕이 자신의 백성인 다윗을 향해서 칼을 들이밀고 죽이려고 달려들고, 오히려 보호해야 될 자가 오히려 죽이려고 달려들었다고 하는 게 이게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목격합니까? 이 세상의 통치자들에게 통치권을 준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왜 줬을까요? 그것은 백성을 사랑하고 그리고 백성들을 돌보라고, 그리고 정말 국민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려고 통치권을 통치자에게 주는 것인데, 놀랍게도 사울 왕과 같은 선택을 하는 통치자들이 역사상 얼마나 많이 발생했는지 모릅니다. 히틀러와 같은 자가 나타나서 사람들을 죽이고 전쟁으로 몰아넣는 것이죠.
수많은 악한 독재자들이 일어나서 백성을 향해서 군대를 동원하려고 하고, 백성을 향해서 죽이려고 하는 그런 안타까운 일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이 발생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믿고 선택했지만, 오히려 우리를 향해서 칼을 겨누는 악한 통치자들을 보는 것이 얼마나 씁쓸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놀랍고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의 왕들은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고 모든 권력을 사용해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려고 하는 게 이 세상의 통치자들인데, 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포기하셨어요. 하늘 영광 버리시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내어 주셨어요. 그러기 위해서 저 높고 높은 하늘 위에서 낮고 천한 이 땅에까지 내려오셔서 우리들의 발을 씻으시는 섬김의 왕으로 오셨다고 하는 사실이 오늘 우리들에게 기쁜 소식인 줄로 믿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2절의 말씀에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5절로 뛰어 갑시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사울처럼 자신의 권좌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백성을 향해서 칼을 들이미는 독재자가 아니라, 모든 권세를 다 내려놓으시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한 생명의 구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소망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우리가 믿는 주님은 어떤 주님이십니까? 우리 주님은 마치 우리 할머니와 같은 분이에요. 우리 주님은 어떤 주님이신가? 마치 우리 부모님과 같은 분이세요. 우리 자녀들이 좋은 대학 합격했다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기뻐하고,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우리 할머니가 우리 손주들을 보면서 시기하고 질투하는 게 아니라,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면 그렇게 행복해서 기뻐하고 돈 내면서까지 자랑하고,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세요.
우리 하나님은 사울 왕처럼 시기하고 질투해서 우리를 박살 내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스바냐서 3장 17절의 말씀에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선한 길로 가는 것,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 우리가 더 잘 되는 것을 보고 기뻐하시며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믿음으로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시기하고 질투한다고 해서 괴로워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너는 실패자”**라고 비아냥거리고, **”너 같은 사람은 아무 가치가 없다”**라고 손가락질한다고 해서 괴로워하지 마세요. 아니, 스스로를 생각하면서 ‘나는 왜 이렇게 못났을까? 나는 왜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는가?’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셨기 때문에, 정말 소중하게 여기셨기 때문에, 그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내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켜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이 성탄의 기간에 하나님을 묵상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결단하고 주님 바라보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귀한 백성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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