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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의 반역 (삼하 20:1-13)

2021년 1월 20일 수요예배 설교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베냐민 사람 세바라고 하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킨 것을 기록하고 있고, 그 반란을 제압하는 그 과정을 그 첫 부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이전의 이야기를 우리가 잘 알고 있는데요. 지금까지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서, 쿠데타로 인해서 피난을 가야 했었고, 그래서 피난길에 오른 그 다윗은 엄청난 고생을 해야만 했던 것을 우리가 잘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압살롬의 쿠데타는 결국 다윗의 승리로 끝나게 되어 버렸고요. 비록 자신의 아들이 죽는 그 죽음 앞에서 고통스러움을 겪어야만 했었고, 슬픔을 겪어야만 했었지만, 그래도 쿠데타를 진압했기 때문에 이제는 한숨을 돌릴 수 있는 그런 상황이 되었을 것입니다. 왕 위에서 쫓겨나가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던 그 다윗이 이제는 압살롬의 쿠데타를 진압해 버리고 다시 왕으로 복권되는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있는데요.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났구나. 이제는 어려움이 다 지나갔구나.”라고 생각했던 그 다윗에게 그게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 말에 산 넘어 산이라고 하는 그런 말이 있듯이, 다윗에게는 또 다른 시련이 하나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이번에는 세바라고 하는 사람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입니다. 세바라고 하는 어떤 불량배가 이스라엘 민족을 선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다윗을 따라가 봤자 다윗으로부터는 아무것도 우리가 유익을 얻을 게 없다고 비난하면서, 그래서 쿠데타를 일으켰는데요. 놀랍게도 온 이스라엘이 다윗을 따르는 것을 그치고,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따르기 시작했다고 오늘 본문의 말씀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산을 넘고 “이제는 태평성대가 올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는데, 훨씬 더 큰 실현 더 큰 위험이 다윗에게 닥치게 된 것이죠. 어쩌면 이게 우리들이 경험하는 인생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면, 이제는 한숨 돌리나 이제는 괜찮나 싶은데, 그렇게 한숨을 돌리기가 무섭게 더 큰 어려움이 우리들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죠. 이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이제는 끝났구나. 이제는 좀 쉬고 싶다.”라고 생각 드는 그 상황에, 더 큰 짐이 우리들 앞에 놓여 있는 경험을 우리가 너무나도 자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이 1월 20일인데요. 오늘이 무슨 날이죠? 코로나가 발생한 지, 딱 1년이 되는 해입니다. 끝날 것만 같았던 그 코로나가 1년을 괴롭혔는데, 이 코로나가 끝나면 이제는 우리는 옛날처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이제는 더 이상 걱정과 근심 없이, 이제는 괜찮겠다.” 생각만 할 수 있는 그런 한숨을 돌릴 수 있는 시기가 우리들 앞에 펼쳐질 거라고 기대하십니까? 찬송가 487장에 보면, “어두운 후에는 빛이 오며, 바람 분 후에는 잠잠하고, 소나기 후에는 햇빛 나며, 수고한 후에는 쉼이 있다.”라고 그렇게 찬송하고 있는데, 그런데 “정말 그런 일들이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지느냐?” 하는 것이죠.

우리의 소망은 이 소나기가 지나가 버리면 좀 해결이 되고, 이제는 맑은 날 가운데, 햇빛이 있는 그날 가운데 살고 싶고, 이 문제를 해결해버리면 이제는 걱정 근심 없이 살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소망이고, 간절한 바람인데,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오면서 경험한 것이고,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지 않았지만 우리들의 앞날도 우리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우리들의 앞에 아주 쉽고 평탄하고 행복한 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더 힘든 일 더 고통스러운 일, 아마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한 것보다도 더 큰 어려움이 기다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그게 우리가 만나는 인생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기기 전까지는, 이제는 주님께서 우리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이제는 하나님의 품에서 편히 쉬라 말씀하시는 그때가 되기 전까지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한에 있어서는, 고통과 슬픔이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고통이 지나가면, 또 하나의 더 큰 고통이 다가오고, 슬픔이 지나가는 것 같은데, 더 큰 슬픔을 만나게 되는, 너무나도 힘든 일들의 반복과 연속이 우리들의 삶에서 펼쳐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부인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물론 아예 우리들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고통뿐이고 전혀 행복하거나 전혀 쉼이 없는 그런 삶만 펼쳐진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그 가운데서도 우리가 행복을 누리기도 하고, 그 가운데서 기쁨과 감사를 누릴 수 있기에, 우리는 그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할 순간들이 올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벽하게 모든 것이 다 정리되는 경우는 없는 것이고 우리가 저 하늘나라에 가기 전까지는 수고와 애씀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게 우리들의 인생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이 다윗의 이야기를 보면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다윗의 인생 가운데, 이렇게 압살롬의 쿠데타를 진압한 후에 이제는 또 다른 세바의 쿠데타가 발생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의 생각에 “아, 이게 인생이겠구나.”라고 생각은 할 수가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이 세바의 쿠데타를 보면서 한 번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다윗에게 일어나게 되었을까? 그냥 인생이니까, 그냥 그런가 보다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데 이것이 우연히 다윗에게 찾아온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미 다윗에게 예언해 주신 바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상기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무엘하 12장 10절 말씀을 보면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향해서 이렇게 예언한 바 있습니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무슨 말씀입니까? 다윗의 범죄, 다윗의 죄악으로 인하여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책망하시고, 심판하시는 그 방법의 하나로 들려주시는 이 예언의 말씀이 무엇이냐면, 이 다윗의 집 안에 칼이 영원히 떠나지 아니할 거라고 하는, 정말 무서운 말씀을 해 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다윗의 일생 가운데 압살롬의 쿠데타가 일어나고, 세바의 쿠데타가 일어나고, 힘들고 어려운 그 삶들이 펼쳐지고 있는 이유가 “그냥 어차피 모든 인생이 다 그냥 그런 거야.”라고 무시해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 순간에 깨달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내가 저질렀던 바로 그 파렴치한 죄가 이 고통을 가져왔다”라고 하는 그런 깨달음이 다윗에게 있어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짓는 죄는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짓는 죄는 그냥 흘려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죄의 대가가 너무나도 커요. 우리는 그것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데, 성경에서 말해주고 있는 죄의 대가가 무엇입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만큼 무섭고, 그만큼 처절하고, 정말 우리를 힘들게 할 수 있는 그 모든 것들이 어디서부터 나오는가? 사실은 우리의 죄악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한다고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말 정직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책망하시기 위하여서 다윗의 죄를 그냥 모른 척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아주 심각하게 다루시고, 그 죄에 대해서 철저하게 다루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다윗으로 하여금 압살롬의 쿠데타를 경험하게 하시고, 또 세바의 반란을 경험하게 하시는, 그 일들을 벌어지게 만드시는 것이라고 하는 점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가 그냥 무의식 중에 저지르는 죄가 아무것도 아닐 거라고, 그냥 넘겨짚으면서 그냥 죄악을 계속 저지르면서 살아가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때때로 우리가 아무리 잘못을 해도, 아무도 그 죄를 짓는다고 하는 것을 모를 수 있고, 나만 은밀한 가운데서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아무에게 발각이 되지 않고, 그래서 또한 아무런 심판도 아무런 책망도 없는 것 같아서, 그냥 이 정도의 죄는 저질러도 괜찮은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냥 넘어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리고 내가 그것을 다른 것으로 포장해 버리고, 위선에 가면을 쓰고 적당하게 아름다운 것으로 포장해 버리면, 죄를 지으면서도 사람들의 박수를 받을 수도 있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도 있고, 그런 엄청난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으면 “죄를 지어도 괜찮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넘어갈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 본문의 말씀을 분명하게 보면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죄의 삯은 정말 무섭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분명하게 인식해야 할 것이고, 그러한 두려움과 마음 가운데 죄를 짓지 않아야 되겠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보지 않아도, 내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물론 모든 고난과 모든 슬픔 어려움을 천편일률적으로 어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그렇게 단정 지어서 말하기는 어렵다고 두 차례에 걸쳐서 말씀드렸습니다. 욥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하나님께서는 훈련하시고 연단하시기 위하여서 고통을 주시는 경우도 있고요. 요셉의 경우처럼 아무런 잘못이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섭리 속에서 형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하고 노예로 팔려가기도 하고, 억울하게 옥에 갇히기도 하는 그런 시련을 겪을 수도 있다고 하는 점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고, 나면서부터 소경으로 태어나는 사람처럼 그가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또 이런 일들이 올 수 있기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고 해서 천편일률적으로 다 그것은 다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우리가 회개할 기회를 찾게 된다고 한다면, 내가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은 없는지, 우리 자신을 스스로 돌아볼 수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고난도 우리에게 영적인 유익이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은 세바의 반란인데요. 세바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나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다윗 왕을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다윗과 함께 해봤자 아무것도 얻을 기업이 없습니다. 다윗과 함께 해 보았자, 아무런 득이 될 게 없다고 다윗에 대해서 비난하는 말들을 했는데, 놀랍게도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온 이스라엘이 세바를 따랐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윗을 따르는 것을 중단해 버리고, 세바를 따르기 시작했다고 그렇게 기록하고 있는데요. 이게 참 놀랍고 신기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세바를 따라야 할 어떤 이유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세바가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야 될 어떤 자격을 보여준 적 있습니까? 없습니까? 증명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전혀 그게 없어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다윗을 비방하고 욕하기만 했을 뿐이지, 다윗이 어떠한 비전을 가지고 어떻게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릴 것이고 어떻게 지금까지 잘 해왔는지에 대해서 아무런 증명도 된 것이 없고, 오로지 다윗을 비난하기만 한 것이 이 세바의 한 일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누굽니까? 다윗은 엄청난 증거가 있는 사람입니다. 골리앗을 무찌른 사람이고,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한 사람이고, 다윗은 위대한 업적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강대국으로 만들어낸 이스라엘 민족의 영웅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증거들이 널려 있는데, 그 수많은 증거들이 있는 다윗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믿음을 잃어버렸고, 아무런 증명도 해보지 않고, 아무런 지도자적인 자질을 보여준 적이 없는 세바를, 놀랍게도 이스라엘 민족들은 누구를 선택했는가? 다윗이 아니라 세바를 선택했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고 참 신기한 일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세바가 한 일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다윗을 비방하는 일만 했을 뿐인데, 놀랍게도 사람들은 다 이미 증명된 다윗을 따르기를 중단해 버리고, 아무런 증명이 된 적이 없는 검증이 되지 아니한 세바를 따랐는데, 누가 따랐는가? 온 이스라엘이 따랐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온 이스라엘이라고 표현한 것은 문자 그대로 100%,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이스라엘 민족이 따랐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사용되는 모든 온 이런 표현들이 종종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고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강조의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100%, 모든 사람들이, 다 세바를 따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정말 말 말 상당수의 많은 사람들이 이 세바를 따르므로 말미암아, 다윗이 심각하게 느끼기를 어떻게 느꼈는가? 이번 쿠데타는 압살롬의 쿠데타보다 훨씬 더 치명적인 쿠데타가 됐다고 느낄 정도로 온 이스라엘 민족들이, 많은 사람들이 세바를 따라갔다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에 기록돼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서 이러한 비방과 이러한 선동에 우리들도 쉽게 넘어갈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우리가 이러한 식의 비방과 선동에 쉽게 휩쓸려 가는 그런 어리석음을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결심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이렇게 비방과 선동의 원조가 누구냐면 바로 사탄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을 만드신 다음에 아담과 하와를 그 에덴동산에 두어서, 그리고 그 에덴동산을 잘 다스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담과 하와를 향해서 사탄이 다가가서 하나님을 비방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나무의 모든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더냐?” 하와의 마음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면서, 하와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하와는 그 순간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자신들과 대화하시고 에덴동산을 주셨던 그 검증된 하나님의 은혜를 다 망각해버립니다. 어디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탄이 다가와서, 하나님에 대해서 비방하고, “하나님이 너희를 사랑하지 않는다. 너희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비방하고 유혹하게 될 때, 놀랍게도 하와는 하나님을 믿기보다 사탄을 믿으므로 말미암아 선악과를 따먹는 그런 범죄를 행하고야 말았습니다.

우리는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 순간에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의심할 게 아니고, 사탄에 대해서 의심하는 것이 정상이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탄은 처음부터 사용했던 그 의심하게 하는 방법을 하와에게 썼을 뿐만 아니라, 해를 계속 거듭할수록 수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거짓 선동을 자꾸만 일삼는 겁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될 사람을 의심하게 만들고, 협력해야 될 사람을 적으로 간주하게 만들고, 마음을 닫아버리게 만들어서, 그래서 결국 우리가 하나가 되고 협력해야 되는데, 그것을 협력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사탄의 작전은 우리를 분열로 이끌어버리는 거죠.

지금 이스라엘 민족이 다윗을 중심으로 해서, 하나의 나라를 만들고, 하나의 국가를 만들고, 그래서 외세와 더불어 싸울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굳게 만들어갈 수만 있다고 한다면, 이스라엘 민족이 점점점점 더 강대국이 될 수 있고, 정말 평안한 삶을 살 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이스라엘 민족이 내전의 위험 가운데 빠지게 된 거죠. 적들을 다스리지도 못하는 그런 내전의 상태로 빠지게 되었는데, 다윗의 무리들과 세바의 무리들이 서로 내전으로 인해서 서로 다투다가 서로 피해를 보고 서로 다쳐서 그래서 안으로 싸우다가 망하게 될 수도 있는, 그런 아주 심각한 내전의 상태로 들어가게 만들어버린 작전이 누구의 작전이었는가? 그게 사탄의 작전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세바는 왜 다윗을 거부하고 비난하면서 이런 쿠데타를 일으켰을까요? 왜 세바는 다윗의 왕 됨을 거역했을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오늘 성경 말씀은 전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나와 있는 여러 표현들 가운데 하나를 살펴보면, 왜 세바가 다윗을 미워하고 반역을 추구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 세바는 베냐민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베냐민 지파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베냐민 지파 사울 왕이 떠올라야죠. 사울은 어느 지파 사람이었습니까?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울이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는데, 그 사울 왕이 이제 사라져 버리고, 그 자리를 누가 이었는가? 베냐민 지파의 사울 가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유다 지파에서 다윗이 왕이 되어 버린 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 본다고 한다면, 사울의 왕통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는데, 베냐민 지파의 왕통이 계속 이어지지 않고, 유다 지파에서 왕이 나오는 것 자체가 이 세바의 마음 가운데 들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다윗이 누구냐? 우리 지파가 아니라, 저 유다 지파고,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고, 함께 갈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다윗을 적대시하고 싸우려고 들고, 그래서 결국 내전으로 가게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근데 이게 참 얼마나 아쉬운 대목입니까? 왜냐하면 다윗이 누굽니까? 유다 사람이지만, 크게 보면 누군가요? 아브라함의 아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이삭의 아들 야곱, 야곱 아들 열두 형제들의 자손들이 이스라엘 자손들 아닙니까? 다시 말하자면 베냐민 지파도 이스라엘 민족이고, 유다 지파도 이스라엘 민족이고, 크게 보면 다 이스라엘 민족이고, 어디 저 해외에서 만났다고 한다면, 당신도 이스라엘 사람입니까? 반갑습니다 하면서 서로 허그하면서, 정말 이 외국 땅에서 같은 동포를 만나게 되니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하면서, 서로 협력하고 정말 만나면 반가워해야 될 같은 민족인데, 그 나라 안에서는 서로 갈라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너는 베냐민 지파 사람이 아니고, 나는 베냐민 지파 사람이다. 너는 우리와 다르다고 하는 것에 따라서, 그 조그마한 나라에서 지역감정이 발생한 것이죠. 지파 감정이 발생해서, 우리가 베냐민 지파냐? 네가 베냐민 지파가 아니냐? 그 문제 때문에 지역감정 갈라치기로 해서 결국 하나가 되지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근데 이게 누구의 이야기입니까? 먼 딴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대한민국의 이야기 아닙니까? 이 조그마한 땅덩어리 내에서, 남과 북이 서로 싸우고 있고, 동과 서가 서로 지역감정이 생기고, 그래서 하나 되지 못하는 그런 안타까운 모습이죠.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표를 얻기 위해서 그렇게 갈라치더라도, 깨어 있는 시민들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정치인들의 놀음에 속아 넘어가지 않아야 될 텐데, 거기에 다 넘어가서 서로가 같은 민족이면서도 불구하고 서로 배척하는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고 분열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모습인지 모릅니다.

함께 협력한다고 하면 협력할 수 있을 것이고, 함께 노력한다고 하면 같이 힘을 합해서 아주 위대한 민족을 이룰 수 있을 텐데, 안타깝게도 서로가 배척하면서 하나 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같이 싸우다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꾸만 다른 점을 찾게 된다고 하면 다른 점만 보이는 겁니다. 우리가 함께할 수 없는 이유만 찾는다고 하면, 함께할 수 없는 이유를 찾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른 점을 찾을 게 아니고 어떤 점을 찾아야 됩니까? 공통점을 찾아야 되는 거죠. 공통점.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고 하는 것으로 서로 싸울 것이 아니고, 노인과 젊은이가 세대 차이가 난다고 싸울 것이 아니고, 이 지역과 저 지역이 서로 다른 지역이라고 싸울 게 아니고, 아 당신도 인간이군요. 당신도 우리 한국 사람이군요. 우리가 인류군요.

우리가 코로나를 겪으면서 발견하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온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거죠. 나 혼자만 건강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이웃이 아프면 나도 아플 수 있고, 내가 아프면 다른 사람도 아플 수 있고, 모든 인류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철저하게 깨닫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서로 갈라치기 하려 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예수 비전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고, 당신은 예수 비전 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고, 서로 인사도 안 하고 그럴 게 아니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라고 하는 것 때문에 함께 협력하고 힘을 합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분열의 영에 사로잡히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되는가? 사람들을 바라보면 다른 점을 찾을 게 아니라, 나는 모든 것이 다 정상적인데, 당신은 장애인이군요. 그러니 당신과 내가 다르다고 하면서 비하할 게 아니고, 나는 한국 사람인데 당신은 제3세계에서 왔군요. 다르다고 하는 것에 갈라치기를 할 것이 아니고, 다르다고 하는 점을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하면, 같이 하나가 될 수 있는가? 공통점을 찾고 같은 점을 찾으면서, 함께 협력해 나가야 되는데, 우리가 기본적으로 바라봐야 될 관점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모두가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다. 믿습니까?

죄악을 범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들을 혐오하고 증오하고 가르칠 것이 아니라, 불쌍한 사람들을 포용하고 협력하는 하나가 되는 그런 결단들을 우리가 해 나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한때 저는 우리 딸아이들이 결혼을 한다면, 우리나라 사람과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국에 살면서 세계 여러 민족 인종들을 다 함께 같이 지내는 그런 속에서 살아가면서, 우리 아이들이 배우자를 만나게 될 텐데, 기왕이면 한국 사람 만나서,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그래야 말도 통하고 감정도 통하고 여러 가지 유익할 것이 많을 거라고 생각을 했죠. 그게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러시아계 미국 사람을 데리고 왔어요. 근데 두 사람이 만나서 사는 모습을 보니까, 참 감사해요. 참 감사해요. 만일 제가 너는 한국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이유로 그 결혼을 반대했었다고 한다면, 그러면 너무나도 정말 아쉬울 뻔했을 거예요. 정말 좋은 사위를 맞았다고 하는 그런 것 때문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점을 찾아야 됩니까? 다른 점을 찾을 게 아니라, 같은 점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질문하기에 따라서 답이 결정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대답하느냐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어떻게 질문하느냐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인데요. 우리가 어떻게 질문을 해야 됩니까? 너와 내가 다른 게 무엇인가를 물을 게 아니고, 우리가 무엇이 같은가를 물어보십시오. 그래서 함께 협력하고 함께 사랑하고 주안에서 믿음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그런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교회 내에서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직분에 따라서 서로를 달리 생각하기도 하고, 내가 초창기 멤버라고 하는 사실과 이제 막 교회에 새로 들어왔다는 그 사실로 서로 차별을 하고, 남자냐 여자냐 나이가 많으냐 적으냐의 문제를 가지고 서로 차별하면서 같이 이야기도 안 하고, 서로 다른 점들만을 부각시켜서 하나가 되지 못하는 그런 모습들을 보이고 있는데, 원하기는 성경 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대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는 그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나가 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은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 군대 장관 아마사를 보냈습니다. 3일 내로 군인들을 모아서 그 세바를 진압하라고 부탁했는데, 3일이 되었는데도 아마사가 결과를 가지고 안 오는 겁니다. 오늘날의 군대와 그 당시의 군대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는데요. 오늘날의 군대는 아예 징집이 돼서 훈련을 받고 군대가 있지만, 그 당시의 군대는 군인들이 군대가 따로 조직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물론 소수의 군인들이 있기는 있었지만, 대부분의 군인들은 언제 차출이 되냐면, 평상시는 농사짓고, 평상시는 목축하고 하던 사람들이 전쟁이 났다고 그러면, 군인으로 소집을 하게 됩니다. “다 우리나라를 위해서 나와라” 하고 하면, 그때 농부들이 또 목축을 하던 사람들이 다 몰려나와서 그래서 그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전쟁을 해야 되는 그런 시스템이었는데, 아마사가 이렇게 이스라엘 민족들을 불러다가 그래서 군대를 조직하고, 그래서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려고 하는데, 3일 동안 그렇게 군대를 모집하라 해도 모이지가 않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이 아비새를 보냈습니다. 요압과 아비새가 같이 갑니다. 형제니까요. 같이 가게 되었는데, 결국 요압이 아비 아마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마사를 만나는 그 순간 요압은 아마사를 만나서 인사하는 척하면서 칼로 찔러 죽이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요압이 아마사를 죽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어서,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깜짝 놀랄 만하죠. 왜 요압은 아마사를 죽였을까요? 성경에는 그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성경을 읽다 보면 충분히 그 이유를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아마사를 군대 장관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압이 누구입니까? 요압은 다윗의 충신입니다. 다윗을 위해서 정말 최선을 다했던 사람이 요압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누구를 군대 장관을 삼았냐면, 아마사라고 하는 사람을 삼은 겁니다. 근데 이 아마사가 누군가? 예전에 그냥 다른 일들을 한 사람이라면, 이 요압과는 다른 차원이란 말이죠. 요압의 충성도와 비교해 본다고 하면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이 요압이 아마사를 죽여버리게 된 겁니다.

여기 도표를 한번 보면, 요압의 만행이 기록돼 있는데요. 스루야의 아들들이 요압, 아비새, 아사엘입니다. 요압이 제일 큰 형, 그 밑이 아비새, 그 밑이 아사엘인데, 아마사는 누구냐면 스루야하고 아비가일이, 아비갈이라고도 하고 아비가일이라고도 번역이 이중으로 번역돼 있어서 잘못돼 있는데, 아무튼 스루야하고 아비가일하고는 언니 동생 사이입니다. 그러니까 이모의 아들이죠. 그러니까 외사촌 지간입니다. 외사촌 지간. 그런데 아마사를 다윗이 군대 장관으로 삼으니까, 그게 싫어서 요압이 자기 형 외사촌 형인 아마사를 칼로 찔러 죽여버린 거죠. 그런데 이 요압이 아마사만 죽였던 것이 아니라, 예전에 어떤 누구를 또 죽였죠? 아브넬을 죽였습니다. 왜 아브넬을 죽였습니까? 아브넬은 사울 왕의 사촌인데, 아브넬이 아사헬을 죽인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너무나도 분해 터져가지고, 요압과 아비새가 합작해서 아브넬을 죽인 것이죠. 결국 이 요압은 자신의 생각으로 자신에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요압이 다윗의 군대 장관이었던 아마사도 죽이고, 또 다윗이 아브넬을 자신의 군대 장관으로 삼으려고 했었는데, 아브넬도 죽이고, 다 죽여버린 거예요. (이제 치워도 괜찮겠어요.)

요압이라고 하는 사람은 다윗에 정말 충성을 다한 사람이었지만, 그런데 요압이 다윗에게 진짜로 충성했느냐? 그렇지 않았다고 하는 겁니다. 결국 요압은 다윗에게 충성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기중심의 생각으로, 자기의 원수들을 다 죽여버린 것이죠. 자기의 경쟁자를 죽여버리고, 자신의 원수를 죽이고, 그렇게 해 나가는 것입니다. 다윗의 모습을 보면, 다윗은 원수라도 품습니다. 하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적군에 가담했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신한테 투항이 오면 우리 편으로 만들고 자꾸만 포용 정책을 쓰는 것이 다윗인데, 요압은 결국 갈라치기를 하면서 죽여버리는 것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 다윗은 이 요압에 대해서 뭐라고 유언을 했냐면, 솔로몬에게 나중에 유언할 때, 이렇게 유언을 했습니다. 열왕기상 2장 5절 6절 말씀입니다.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내게 행한 일 곧 이스라엘 군대의 두 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에게 행한 일을 네가 알거니와, 그가 그들을 죽여 태평 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리고 전쟁의 피를 자기의 허리에 띤 띠와 발에 신은 신에 묻혔으니,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의 백발이 평안히 스올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

요압이 다윗에게 충성하는 것 같았지만, 그러나 결국 자기 주변에 있는 경쟁자들을 죽이고, 그리고 다윗이 품었던 사람마저도 죽여서, 과연 이 요압이 다윗에게 유익한 사람이었는가? 의심을 품게 만드는 대목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지금도, 지금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러 가야 되는데,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러 간다고 하면 아마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아마사의 힘도 합치고, 자기들도 같이 요압도 같이 가고, 아비새도 같이 가고 해서, 같이 힘을 합해서 세바를 진압해야 하는데, 요압의 제일 먼저, 제일 최우선 순위가 무엇이냐면, 그 아마사를 죽이는 일부터 하는 거예요. 이런 사람은 결코 유익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전에 어떤 미국 식당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어떤 책에 나온 것인데요. 미국에는 식당이 팁을 주는 문화가 있습니다. 팁 밥을 먹으면 밥값의 한 15% 20%를 팁으로 줍니다. 그런데 식당은 그렇게 해서 종업원들이 손님들이 주는 팁을 많이 받기 때문에, 식당 주인이 주는 월급은 적습니다. 시간당 급여가 팁을 받는 업종은 굉장히 적습니다. 한 2천 원, 3천 원, 그 정도밖에 주인으로부터 안 받고 팁을 받아서 생활하는 것인데, 그 식당에 최고로 잘 나가는 종업원이 한 명이 있었어요. 그 식당에 손님들이 오면, 그 종업원을 찾았습니다. “저는 식사를 하고 싶은데, 그 종업원이 내게 와서 서빙을 해주기를 바랍니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 주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 사람한테 서빙을 하고 저 사람한테 서빙을 하고, 많은 사람들이 하기 때문에, 팁을 누가 제일 많이 받을까요? 많은 사람에게 서빙을 한 사람이 팁을 제일 많이 버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이 식당에서 제일 많이 받는 최고의 종업원으로 그렇게 되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인이 그 종업원을 해고시켰습니다. 왜 해고시켰을까요? 해고를 시키고 난 다음에 그 식당의 매상은 더 많이 올라갔습니다. 알고 보니까, 그 종업원은 자신이 최고의, 사람들이 와서 자기를 찾고 자기의 서빙을 받기 위해서, 다른 경쟁자들과 경쟁을 한 겁니다. 식당을 위해서 일한 게 아니라, 이 손님이 다른 종업원에게 가는 것을 방해하고, 그리고 여러 가지 같이 일하는 종업원들끼리 서로 경쟁을 해서, 결국 그 다른 종업원들의 손님들을 자기가 다 빼앗아와서 그래서 최고의 실적을 올리기는 했지만, 그러나 식당으로 봐서는 분위기도 좋지 않고, 아무튼 모든 것들이 안 좋아서, 매상이 올라가지 않는 것인데, 결국 주인이 그것을 보다가 그 종업원을 해고시키니까, 나중에는 종업원들끼리 서로 유기적으로 잘 활동하면서 전반적으로 똑같이 잘 대우를 하고, 서비스도 많이 올라가고, 그래서 그 식당의 매상이 많이 올랐다고 하는 그런 글을 한번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들 가운데는 그런 식으로 활동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축구 선수로 치면 자기가 무조건 골을 다 넣는 거죠. 볼이 오면, 자기가 볼을 넣을 수 있는 것보다 자기 동료에게 보내서 골을 넣게 하면 훨씬 더 잘 넣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무조건 차서, 많이 차니까 많이 넣기는 하겠지만, 자기 동료에게 줬으면 훨씬 더 많은 골이 들어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협력하지 않는 그런 뛰어난 선수라고 한다면, 결코 팀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그런 사람이 공동체에 있다고 한다면 그런 공동체는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죠. 우리 성도들도 믿음으로 일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박수받고 인정받고, 내가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이 영광을 받으시는 그런 교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함께 협력하고 우리 모두가 다 함께 주님의 형제요 자매라고 하는 공동체 의식으로 하나가 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번 따라서 합시다. 우리 모두 협력합시다. 경쟁자가 아니라 협력자입니다. 믿습니까? 아멘.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경쟁자나 적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어요. 우리를 위해서 살리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지신 것을 생각하면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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