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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 5:1-12) – 팔복강해 4

2021년 1월 24일 주일1부예배 설교

우리 모두에게는 일종의 갈망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마다 그 갈망의 내용은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만, 사람들은 늘 갈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데요. 우리들에게 이러한 갈망이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들에게 부족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다 만족스럽고 하나도 부족함이 없다고 한다면, 갈망이 생겨나지가 않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들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늘 부족하기 마련이고 무엇인가 모자라기 마련이고, 뭔가 참 아쉬운 것들이 많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는 갈망이 솟아오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부족함을 채우고 싶은 욕구가 바로 갈망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들의 몸에 수분이 부족하다고 한다면 물을 마시고 싶은 갈망이 생기게 됩니다. 만일 우리들의 몸에 영양이 부족하고 허기가 진다고 한다면, 무엇인가를 먹고 싶은 욕구가 생겨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들에게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채우려고 하는 욕구가 생겨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70, 80년대에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처절하게 짓밟혀 버렸을 때에, 우리 젊은이들은 민주주의를 갈망하면서,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갈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때 불렀던 노래가 혹시 기억이 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김광석이라고 하는 가수가 불렀던 노래인데요.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하면서, 민주주의를 갈망했던 그런 세대가 있습니다. 그런 노래를 부르면서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왔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갈망을 표현하기도 했었는데요.

아무튼 우리들에게 부족한 것이 물질적이든, 아니면 어떤 자유이든, 어떠한 우리가 갈망하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있는데, 그 원하는 것이 채워지지 않게 되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향한 갈망들이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있다고 한다면 식욕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한 끼만 굶어도 아니 밥 먹는 시간이 조금만 늦어도, 우리들은 먹고 싶은 욕구가 자꾸만 생겨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죠. 우리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 욕구들이 많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요. 수면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잠이 부족하면 잠을 자고 싶다고 하는 그런 갈망이 생기는 것이고요. 사람들에게 있는 여러 가지 공통적인 욕구 가운데는 명예의 욕이 있어서, 명예롭게 살고 싶다고 하는 그런 욕망. 혹은 내가 무엇인가를 좀 다스리고 내 마음대로 해보고 싶다고 하는 그런 권력에 대한 욕망, 또한 성적인 욕망과 물질에 대한 욕망, 그리고 내가 우리의 삶이 안정감 있게 아무런 해를 받지 않고 안전하게 살고 싶다고 하는 그런 안정감에 대한 욕구,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용납을 받고 싶고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그런 욕구 등등, 여러 가지 욕구들이 우리들에게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인데요.

이러한 갈망 이러한 욕구라고 하는 것 자체는 사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욕구와 갈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욕구가 없다고 한다면 갈망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갈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서, 문을 열자마자 “엄마, 먹을 게 없어?”라고 질문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배가 고프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무엇인가를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고, 그리고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면 냉장고로 달려가서 문을 열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인가 과자를 찾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인가를 먹고 싶다고 하는 그 욕망이 가득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아이의 행동이 그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방식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이 갈망이라고 하는 것 욕구라고 하는 것이 우리를 움직이게 만드는 그런 근본적인 동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욕구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겁니다. 행동하지 않게 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욕구가 없는 사람에게 갈망이 없는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하라고 하면 잘할 수가 없어요. 우리 아이들이 공부를 안 하는 이유가 뭘까요? 간단합니다. 공부를 해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공부에 대한 갈망이 없기 때문에 공부하지 않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게임을 열심히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게임을 하면서는 정말 그 게임을 잘해보고자 하는 갈망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이걸 잘해보고 싶은 그런 욕망이 그 마음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 게임에 몰두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부모님들이 그 아이들의 갈망을 일깨우지 않고, 욕구를 창출해내지 않고,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다그치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잔소리하는 것에 불과해서 전혀 쓸데없는 그런 갈등만 야기하는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죠. 잔소리를 하면 공부를 하긴 해요. 왜냐하면 공부하고 싶은 욕구가 있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저 잔소리를 듣기 싫다고 하는 그 잔소리에서부터 피하고 싶다고 하는 욕구 때문에, 그래서 공부를 하게는 되겠지만 아무런 효과는 별로 없을 겁니다.

저는 초등학교 다닐 때 그때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초등학생 시절에 제가 왜 열심히 공부를 했냐면, 제 마음속 깊은 곳에 어떤 욕망이 있었냐면, 같은 반에 있는 우리 반 아이보다 내가 점수가 더 잘 나왔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경쟁심리 갈망이 있었어요. 그 아이가 어디 살았냐면 우리 옆집에 살았는데요. 제가 공부를 하다가 잠을 자려고 생각하면, “내가 지금 잠을 잘까?” 할 때, “내 친구는 지금 잠을 잘까? 지금도 공부를 하고 있을까?” 그게 궁금했어요. 그래서 옆에 옆집에 불이 켜졌는지 불이 꺼졌는지를 봤습니다. 그런데 옆집에 불이 켜 있으면, 그 불이 왜 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친구가 지금 공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그 생각 때문에 제가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 아이가 불을 끄고 잠을 자는 것을 보고서야, 그때서야 내가 안심하고서 잠을 잘 수가 있었는데, 제 마음 가운데 그 아이를 이기고 싶은 욕망 갈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때 그 시절에는 그렇게 하루 한 시간이라도 더 공부하면서 열심히 공부하려고 하던 그런 마음이 있었는데, 그렇게 움직일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제 마음 가운데 어떠한 갈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갈망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그런데 이 갈망이 우리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갈망한다고 해서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고 해서 결코 그 갈망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갈망이 있어서 그 갈망을 채우기 위해서 노력을 하기는 하는데, 그 갈망이 채워지냐면 채워지지 않는 것이죠. 일시적으로 채워지기도 하고, 그리고 부분적으로 채워지기는 하겠지만,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서 물을 마시는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갈증이 나서 물을 마시면, 갈증이 해소되는 것 같아요. 물을 마시면 괜찮은 것 같아요. 그런데 그 걸로 써 완전히 해결이 되느냐면, 완전히 해결되는 것이 아니에요. 또 갈증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또 물을 마셔야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라고 말씀해 주신 것처럼, 우리가 그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물을 마시지만, 그 물이 우리의 갈증을 영원히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만 그리고 일시적으로만 해결해 주는 것이고, 또다시 물을 마셔야만 한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무더운 여름에 우리는 시원하기 위해서 아이스크림을 찾습니다. 아이스크림을 찾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우니까, 아이스크림을 찾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찾아서 먹는 것이 무엇인가요? “월드콘”을 먹는다든지, “12시에 만나요. 브라보콘”을 먹는다든지, 그 콘을 먹게 되는데 처음 배어 물을 때는 얼마나 만족감을 주는지 몰라요. 정말 시원하고 정말 달콤하고 그 더위를 날려버릴 것 같은 그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정말 좋아요. 그런데 그것을 먹으면서 모든 것이 다 해결이 되느냐면 그렇지 않아요.

참 얄팍한 상술이 하나 있는데, 그 월드콘 그 맨 마지막 부분, 브라보콘 맨 마지막 부분에는 꼭 초콜릿이 들어 있어요. 그래서 그걸 먹게 되면 더 갈증이 나요. 더 갈증이 나고 다시 하나 더 먹어야만 들 것 같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 같은데 알고 보면 더 다른 것을 더 원하게 만드는 그런 미끼들이 그 안에 숨어 있는 것이죠. 이 세상의 갈망이라고 하는 것들이 다 이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것을 내가 해결해보려고 노력하지만, 그래서 일시적으로 해결될 수도 있고, 부분적으로 해결이 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완벽하게 해결될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의 그런 해결책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55장 1절 2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헛된 것을 갈망하는 것에 대한 메시지를 주신 바가 있습니다. “오호라. 너희 목마른 자더라 물로 나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갑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사실은 우리로의 그 갈증들을 해결해 주고 우리의 허기진 것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그럴 능력이 없다고 하는 것이죠.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더 갈증이 나게 만들고 오히려 더 고통스럽게 만들고 우리를 더 힘들게 만드는 것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해 주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갈증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무엇일까요? 먹어도 먹어도 또 배고프고 벌어도 벌어도 더 부족하고 명예를 취하고 권력을 취하고, 그 모든 것을 다 가진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배고프고 여전히 더 힘들고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아가는 이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이 무엇이 있을까요?

불교식 해법이 있습니다. 불교식 해법 불교식 해법이 무엇이냐면 갈망을 없애버리라고 하는 것이 불교식 해법입니다. 그 갈망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니까, 내가 욕심을 부리고 내가 집착을 가지고 물질에 대한 집착 명예에 대한 집착 사랑에 대한 집착 미련 이런 모든 것들이 결국 우리를 고통스럽게 해 버리는 것이니까, 불교적인 해법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욕심을 내려놓고 갈망을 비워버리고 집착을 비워버리고 우리들의 그 자를 비워버려서, 정말 무아지경의 상태까지 공허한 상태까지 우리들을 완전히 비워버린다고 한다면, 욕심을 없애버린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하는 것이 불교식 해법입니다. 그래서 물질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무소유로 살거나, 아니면 사람과의 그 모든 인간관계를 다 끊어버리고 출가해서 그냥 산속에서 나 혼자 도를 닦으면서 참선하면서 살아가라고 하는 그런 출가의 방식을 통해서 문제들을 해결하라고 하는 것이 불교식인 해법입니다. 그러면 마음의 평안을 얻을 거라고 하는 것이죠.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러한 불교식 해법은 실현이 불가능한 목표일 뿐만 아니라 실현이 가능한 게 아니죠.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배가 고프면 늘 배고픔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고, 목이 마르면 갈망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고,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있고 있는 이상, 그 갈망을 없앤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이러한 해법은 아주 무서운 논리입니다. 내가 마음이 편하자고 자식들 내 팽개쳐 버리고 출가해서 산속에서 혼자 도 닦고 있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이 사회는 썩어 문들어져 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미련을 다 버리고 관심 다 꺼버리고 나 혼자 그냥 도인이 되어서 그냥 혼자 있는 것이 그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우리는 심각하게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팔복의 말씀 가운데 우리가 오늘 살펴보는 말씀은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향해서 놀라운 말씀을 해 주시고 계십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이 세상의 물질을 추구하고 이 세상의 명예를 추구하고 이 세상에서의 만족을 추구하려고 추하면 추구할수록,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고통스럽게 만들고 더 배고프게 만들고 더 힘들게 만드는 것밖에 없는데, 우리로 하여금 만족하게 만들고 배부르게 만들 것이 있다는 거예요. 불교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니까, 그냥 갈망 자체를 없애버리라고 얘기하고 있는데, 주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것은 그 갈망을 없애버리는 것이 해답이 아니라, 잘못된 갈망이 아니라, 참된 갈망을 하라. 이 세상에 배부르지 못하게 만들 것을 갈망할 게 아니라, 정말 우리를 배부르게 할 것을 갈망하면, 너희가 배부를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이사야 55장의 말씀과 아주 일맥상통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문제가 갈망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배부르게 못할 것을 우리가 추구하고 엉뚱한 것을 갈망한 것이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배부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말 우리가 배부르게 할 것을 찾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다고 한다면, 의를 갈망한다고 하면, 의를 갈망한다고 하면, 배부르게 될 것이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의를 갈망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고 하는 이 말씀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말씀일까요? 보통 사람들은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고 하는 것을 이런 식으로 이해합니다. 즉 이 세상에 불의가 판치고 불의가 자행되는 그 모습을 바라본다면, 악이 권세를 잡고 있는 모습을 바라본다고 한다면, 거기에 편승하거나 그것을 모른 척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라고 이해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회사에 입사했는데, 예를 들어서 내가 공무원이 되어서 정부의 일을 하게 되어 있는데, 거기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회사의 자금을 빼어 돌리거나 국가의 정부의 예산을 아주 잘못된 방식으로 사용하는 그런 모습들을 보았을 때, 그것을 참을 수가 없어서 신고하거나 바로잡으려고 하는 노력이야말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라고 그렇게 의로움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곤 합니다. 교회 내에서도 여러 가지 잘못된 것들을 바라본다고 하면 부조리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그냥 못 본 척할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고 그것을 위해서 정말 정의를 위해서 애쓰는 것이야말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라고 그렇게 이해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실 때 말씀하신 것은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그런 상황 가운데서 모른 척해도 괜찮다 무덤덤해도 괜찮다 그냥 편승해도 된다. 그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상황이라고 한다면 정말 정의를 위해서 여러분들이 노력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회사에서든 정부 기관에서든 그 어떤 교회에서든 사회 어느 곳에서든 악이 득세하고 있고 정의가 짓밟히고 있다고 한다면, 성도로서 정말 정의를 위해서 힘쓰는 것은 그건 당연한 것이고 잘못된 것이 아니고, 우리가 반드시 해야 될 일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고 하는 이야기는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고 하는 이 말씀을 우리가 이해하려면 마태복음 6장의 말씀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마태복음 6장 후반부에 보면 예수님께서 몇 가지 말씀을 해 주셨는데요. 예수님께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가 살면서 너희의 걱정이 무엇인가? 너희의 염려가 무엇인가? 뭘 먹고살지, 돈을 어떻게 벌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되나? 그런 것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왜 주님께서 그렇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6장 27절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 할 수 있겠느냐?” 염려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염려해가지고 문제가 해결된 적 있습니까? 없잖아요. 염려한다고 키가 자랍니까? 염려한다고 생명이 연장이 됩니까? 염려한다고 문제가 해결됩니까? 아무런 해결되지 않는 그런 염려를 하지 말라고 주님께서 아무 도움이 되지 아니하니까 염려를 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유태인으로서 나치 수용소에 갇혔으나 참 믿음을 지키면서 살았던 코리텐 붐이라고 하는 여사가 있는데요. 그리고 코리텐 붐 여사가 했던 말 중에 하나가 무슨 말이 있냐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염려는 내일의 슬픔을 없애주지 않는다. 오직 오늘의 힘만 없앨 뿐이다.”라는 말을 했는데, 염려해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는 그런 쓰잘데기 없는 그런 염려를 하지 말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겁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또 하나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는 겁니다. 공중에 나는 새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들에 핀 꽃도, 오늘 피었다가 아궁이에 던져지는 그 들풀도, 하나님께서 정말 아름답게 먹이신다고 한다면, 그것보다도 훨씬 더 소중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저와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 돌보지 아니하시겠느냐?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너희를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으신다고 하는 그 사실을 기억하면서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감사함으로 살라고 하는 것이 주님께서 해주신 권고의 말씀이 마태복음 6장 그 하반부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면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가 추구해야 될 것, 우리가 갈망해야 될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뭐냐 하면, 먹을 것을 얻으려고 이 세상에 물질을 얻으려고 명예를 얻으려고 우리를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해서 그것을 갈망하며 살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갈망해야 될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추구하며 살아야 될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면서 살아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여기서 “그”는 누구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살라.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며 살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그때 나온 표현이 바로 의가 바로 여기서 등장하는 것,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고 하는 그 표현은 바로 갈망한다고 하는 표현이고 주리고 목마르다고 하는 그런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 그 말씀은 우리가 의를 갈망하고 의를 추구하고 의를 구하며 사는 것이 그것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다고 하는 것과 같은 표현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도대체 그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한다는 것 하나님의 의를 추구한다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뭐고 하나님의 의는 뭡니까? 이 두 개가 다른 표현이 아니라. 사실은 같은 표현의 이중적인 표현이라고 보시면 좋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그 말씀들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표현들이 나오면 그것들이 여러 개를 여러 개의 다른 것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내용을 다른 방식으로 여러 번 표현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여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곧 하나님의 의인 것이고, 이것을 우리가 추구하면서 살아야 된다고 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것,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려주는 것을 갈망하는 거죠. 하나님의 통치를 갈망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의롭게 우리를 통치하시는 것이고요. 성경에서 의라고 하는 말이 어떤 뉘앙스를 가지고 있냐면,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바른 관계 영적인 바른 관계를 의미할 때, 의라고 하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우리가 좀 더 쉽게 표현하자고 한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가운데 우리를 배부르게 못할 헛된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통치를 갈망하면서, 주님께서 우리들의 삶을 다스려주시고 주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을 장악해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그런 삶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고 하는 그런 표현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참된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에게서부터 멀리 떠나서 우리의 소망을 헛된 우상에게 두는 데서부터 우리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우리들의 하나님으로 모시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들의 우상으로 모시면서 살아갑니다. 예를 들자면 돈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처럼 돈을 우상으로 섬기면서 살아갑니다. 우리 아이가 잘 되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냐? 거기에 우리 아이를 우상으로 만들어 놓고 거기에 경배하면서 그 앞에 엎드리면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우상들은 우리들에게 해답을 줍니까? 우리들에게 해결책을 줍니까? 해결책을 주는 게 아니라, 늘 배반해버려요. 저놈의 자식이 공부 좀 잘했으면 좋겠는데, 공부를 못해요. 돈 좀 잘 벌었으면 좋겠는데, 벌리는 게 아니라 더 손해만 봐요. 그게 우리의 문제란 말이에요. 이 세상 우상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 내가 예뻐 보이고 날씬해져서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데 그게 안 되는 거예요. 돈을 많이 벌어서 떵떵 버리고 싶은데 그게 안 되는 거예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고 박수받고 싶고 그래서 내가 좀 내 마음이 기분이 좋고 싶은데, 그런 우상을 추구할 때 그게 되냐 하면 그게 안 되고 오히려 손가락질만 당하는 그런 삶을 살게 되는 배부르지 못하는 결과만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우상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을 통치하시고 주님으로 인하여 만족하여 살려고 하는 그 마음이야말로 의를 추구하며 사는 삶이라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원하기는 우리 모두가 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참된 만족을 주시는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의 뜻이 우리들의 마음을 장악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그런 갈망이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기도 제목이 무엇입니까? 주의 성령께서 우리들의 마음을 채워주옵소서. 이 세상의 헛된 욕망이 우리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주의 성령께서 저희들의 마음을 채워주셔서, 우리들의 발걸음 하나하나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하나님이시고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해 주신 그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밖에는 우리에게 소망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우상들은 우리에게 화려한 약속을 해주지만, 우리에게 화려한 약속했던 것들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오히려 착취하고 우리를 더 허기지게 만드는 마약과 같은 그런 것들인데, 그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주님 앞에 주님의 품 안에 안길 때 그 안에서 참된 만족과 배부름과 행복이 있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면서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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