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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히 여기는 자 (마 5:1-12) – 팔복강해 5

2021년 1월 31일 주일2부예배 설교

팔복을 강의하기 시작한 지 벌써 다섯 번째 시간이 됐습니다. 오늘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는 말씀을 함께 묵상하면서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데요. 사실 이 말씀은 그렇게 어려운 말씀도 아니고,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제가 굳이 여기서 설명을 더 자세하게 해 드릴 필요는 없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긍휼히 여긴다. 불쌍히 여긴다. “측은하게 여긴다”라고 하는 말의 뜻을 모르시는 분 계십니까? 다 아시죠? 다 아는 내용입니다.

긍휼히 여긴다, 자비를 베푼다, 불쌍히 여기고, 측은한 마음을 갖고 사람을 대한다고 하는 것,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내용이기 때문에, 더 이상 설명할 것은 없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어떤 복이 있는가? 우리가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될 거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거라고 했을 때, 우리를 긍휼하게 여기는 주체는 누구일까요? 누가, 우리가 긍휼하게 여기면, 누가 우리를 긍휼하게 여길 거라고 하는 그런 말씀일까요? 사람들이,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히 여김을 베풀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긍휼히 여긴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일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다고 하는 그런 말씀일까요?

누가 그렇게 긍휼히 여기는지에 대해서는 생략되어 있기 때문에,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이 표현을 가리켜서 흔히 신적 수동태(divine passive)라고 표현합니다. 신적 수동태 영어로는 divine passive라고 하는 표현인데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발설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실 거라고 능동태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의 이름을 생략한 채 수동태로 표현하기를 자주 즐겨했습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는 그 말은, 거기에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실 거라고 하는, 그 하나님의 표현이 들어가 있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이 성경에 나와 있는 표현은 그 주체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이해하시는 것이 대부분 맞습니다.

너희가 소금이라, 빛이라 말씀하시고, 소금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너희가 짓밟힐 거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는데, 거기서도 역시 주체가 누구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너희를 짓밟아 버릴 거라고 하는 그런 의미로 신적 수동태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되냐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긍휼하게 대한다고 하면, 우리가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하고, 자비를 베풀고, 선을 베풀며 살게 된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에게 긍휼히 여기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하게 여기실 거라고 하는 말씀으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아주 간단한 말씀이고 쉬운 말씀이고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말씀인데, 그런데 이 말씀과 더불어서 관련된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거라고 하는 이 너무나도 쉬운 말씀에 문제가 하나 있는데,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이것을 모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알기는 알지만 우리가 긍휼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완전히 긍휼히 대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고, 어느 정도는 우리가 사람들을 향해서 긍휼한 마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친절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랑 아무런 관련이 없는 그런 불쌍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는 우리가 도와주려고 하는 마음도 생기고, 가끔씩 자비를 베푸는 그런 마음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생기게 됩니다.

종종 자연재해를 당하게 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요. 수해가 있어서, 수해들로 인해서 모든 재산을 다 날려버린 그런 수재민들을 바라보면,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불쌍한 마음이 들어요. 그래서 수재의연금을 내는 겁니다. 좀 그런 사람들 좀 도왔으면 좋겠다고 캠페인을 벌이면, 우리나라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그 수재의연금을 내면서 그 정말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하는 그런 마음들이 있습니다. 화재가 일어나서 자신의 재산을 다 날려버린, 그래서 펑펑 울고 있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그런 사람들을 돕고 싶은 마음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지진의 피해를 당하거나 쓰나미로 인해서 목숨을 잃어버리거나, 아니면 저 아프리카 땅에서 말라리아로 고생을 하거나, 그런 불쌍한 사람들을 바라보게 된다면, 그런 사람들을 좀 돕자고 이야기하면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고 감동으로 함께 참여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지역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좀 도웁시다.”라고 이야기하면,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고 찬성하고, 우리가 지난 시간에 라면 박스라도 좀 전달했는데, 그걸 보고 너무나도 우리 성도님들이 다 좋아하시고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이 말씀은 단순히 그런 사람들에 대한 긍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긍휼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면,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풀어주는 호의를 가리켜서 긍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호의를 받을 자격이 없는, 정말 마땅하지 않은 그 사람을 향해서, 베푸는 사랑, 전혀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주는 그 은혜, 그걸 가리켜서 긍휼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유대인들이 한 여인을 붙잡아가지고 왔습니다. 그 여인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이었습니다. 그 주변에 수많은 유대인들이 둘러 서서 돌을 하나씩 들고서, 그 여인을 때려죽이려고 하는, 돌로 때려서 사형을 시키려고 하는 그런 자세로 예수님 주변에 둘러섰습니다. 유대 사회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선택된 민족인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더러운 죄를 지으면서, 악을 행하는 그런 사람들이 유대 사회에 있다고 하는 것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고, 저런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반드시 돌로 쳐 죽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유대인들이 다 같이 의분을 일으키며, 우리 민족에게 이런 악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하는 심정으로 모든 사람들이 다 둘러 섰습니다. 그리고 그를 죽이려고 하는 그 순간에 주님께서는 그 여인을 불쌍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안아주시며 포용하시며 용서해 주셨습니다. 긍휼한 마음을 표현해주신 것이죠.

이때 예수님은 돌을 들어서 이 여인을 죽이는 것이 옳았습니까? 이 여인을 향해서 긍휼을 베푸는 것이 옳았습니까? 어느 것이 옳았습니까? 긍휼을 베푸는 것이 옳다고 생각을 해요. 왜? 우리가 그렇게 생각을 하냐면, 우리와 관계없는 저 2천 년 전 유대 땅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21세기를 살고 있는 이 대한민국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경우에, 이런 경우에는 여러분들이 긍휼을 베풀어야 된다고 생각합니까? 이런 사람들은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얼마 전에 한 사람이 감옥에서 출옥했습니다. 몇 년 전, 정말 연약한 여자 어린아이를 향해서 몹쓸 짓을 해서 그 아이로 하여금 장애를 입게 만들고, 그런 파렴치한 짓을 했던 그 사람이 감옥에서 몇 년 정말 작은 해수만을 감옥에서 살고 형기를 마치고, 이제는 자유의 몸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조 아무개라고 하는 사람인데요. 그 어린아이에게 몹쓸 짓을 하고, 그리고 그 아이로 하여금 평생 트라우마 가운데 살게 만든 그 악한 악당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이 옳을까요? 그 사람을 향해서는 돌을 던지는 것이 옳을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아마 이런 사람에게 긍휼히 여기자고 이야기한다면 즉각적으로 반발할 겁니다. 목사님, 그건 옳지 않은 겁니다. 그 사람은 가해자고, 그 사람 때문에 피해자가 생겼고, 그 피해자는 평생을 고통 가운데 살아가야 되고, 트라우마 가운데 살아가야 하는데, 그 악한 일을 행했던 그 가해자를 두둔하고 긍휼을 베푼다고 하는 것은, 제2차 가해가 되는 것이고, 그 사람에게 마땅한 것은 처벌이지 긍휼히 아니라고 대답할 겁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마 그렇게 대답할 겁니다.

최근에 우리 사회를 아주 분노에 떨게 만들었던 한 사건이 있습니다. 어떤 부부가 한 아이를 입양했는데, 그 아이를 굶기고 때리고 죽여서 그래서 정말 사악한 짓을 했던 그 양부모가 있는데, 그런 양부모에게 긍휼을 베풀을 수가 있습니까? 아니면 분노하면서 책망하고 비난해야 맞습니까? 지금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우리와 관계없는 이야기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저는 예수님께서 긍휼을 베푸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이런 순간에 가해자를 두둔하신 거예요. 가해자에게 긍휼을 베푸신 거예요.

우리는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불쌍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억울한 피해를 당한 사람을 보면 정말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런 사람들에게 도와주고 싶고 사랑을 베풀고 싶고 긍휼을 베풀고 싶지만, 그러나 악을 행한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긍휼하게 대할 수가 없는 겁니다. 바쁜 출근길에 나는 법을 지키겠다고 차례를 지키며 서 있는데 얌체같이 내 앞에 끼어들고 있는 그 차량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긍휼의 마음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온 가족이 모처럼 식당에 가서 정말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싶고 맛있는 음식을 즐기고 싶어서 찾아갔는데, 아주 형편없는 음식에 재사용하는 반찬 그리고 더러운 위생 상태를 통해서 정말 그 하루 저녁을 망쳐버린 그 식당 주인을 향해서 긍휼의 마음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이를 지시해 놓았는데 일을 엉터리로 해버려서 이를 망쳐버리고 엄청난 손해를 일으킨 그런 직원이 있다고 한다면, 그런 직원을 향해서 긍휼한 마음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아이의 팔을 부러뜨려 버린 그 반 아이의 우리 아이의 그 친구를 향해서, 과연 긍휼의 마음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6.25 동란을 일으켜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게 만들었던, 저 북한 정권을 향해서 우리는 긍휼의 마음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들을 향해서 긍휼의 마음을 가져주기를 바라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에는 화를 내고 분노해야 될 정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분명히 나쁜 짓을 한 사람이고, 나쁜 짓을 한 사람에게는 당연히 심판을 행하는 것이 정의인 것이지, 우리가 그런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조차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물론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악을 행해도 괜찮고 악을 행하는 것을 두둔해도 괜찮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악을 행하는 것이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죄는 죄고 죄는 심판받는 것이 마땅한 것이고, 그러한 법적인 절차를 통해서 정의를 이루는 것이, 죄를 지었는데도 떵떵거리면서 아무런 회개 없이 여생을 편안하게 즐기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고, 함부로 그런 회개도 없는 사람들을 무조건 용서해 준다고 하는 것 자체가 괜찮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긍휼히 무엇이냐면, 자격 없는 자를 향해서 베풀어 주시는 긍휼입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초대를 받아서 그 집에 식사를 하러 가셨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이라고 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초대하셨는데요. 예수님이 그곳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고 하는 소문이 그 즉시 수많은 사람들에게 동네 사람들에게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만나려고 사람들이 한 명씩 두 명씩 찾아왔는데, 그중에 한 사람이 누구냐면 어떤 한 여인이었습니다. 어떤 그 여인도 예수님이 계시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그 시몬네 집에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는 그 순간에 눈물이 푹 받혀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어요. 펑펑 울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그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로 예수님의 발을 닫고 입을 맞추며 향유를 붓는 그런 여인이 있었습니다. 근데 그 여인을 보는 그 순간 예수님을 초대했던 바리새인 시몬은 마음속이 굉장히 불편했습니다.

예수님이 선지자라고 한다면, 저 여인이 어떤 여인인 줄 알 텐데, 저 여인은 더러운 여인이고 유대 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는 그런 더러운 죄를 지은 여인인데, 저런 여인이 예수님에게 와서 저렇게 하는 것을 그냥 용납해 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정확하게는 기록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이 여인은 창기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너무나도 이 사회의 지탄을 받을 만한 그런 엄청난 죄를 저지르는 그런 여인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그 더러운 죄를 지은 여인을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그냥 그때의 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상황으로 치환해서 생각해 보셔야 돼요. 양 부모와 같이 그 아이를 죽인 그런 사람과 같은 사람이고, 조 아무개처럼 그런 나쁜 짓을 한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발 앞에 있는 것이라고 대치해서, 생각해 봐야 되는 것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물리치고 이 더러운 죄인 하면서 쫓아내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품으시고 긍휼의 눈으로 그를 영접해 주셨다고 하는 겁니다. 심지어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도 긍휼의 마음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다. 기도하면서 십자가 위에서 죽었는데요. 시몬의 관점과 예수님의 관점이 어디에서부터 차이가 났습니까? 이 시몬의 관점, 바리새인의 관점과 예수님의 관점, 예수님께서는 이 시몬을 향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시몬의 생각을 아셨던 우리 주님께서 물어보십니다. “얘야, 너는 이 여인을 보느냐?”라고 물으신, “너는 이 여자를 보느냐?”라고 묻는데 당연히 보고 있는 것이죠. 보고 있는데 뭘 보고 있습니까? 이 바리새인은 그 여인이 행했던 악한 일을 본 겁니다. 나쁜 일을 본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여인을 보면서 무엇을 보았는가? 그 악한 일을 본 것이 아니라 이 여인의 가치를 보는 거예요. 이 여인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실을 본 것이고 이 여인이 소중한 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본 것이죠. 그러기에 이 하나님의 자녀 잃어버렸던 한 사람이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그 모습을 귀하게 여기시며, 이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봐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죄와 더러움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요, 소중한 인간이며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을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고물상을 인수해가지고 고물상에 있는 물건들을 살펴보고 있는 가운데 있는데, 거기서 어떤 한 그림을 발견했다고 합시다. 그 그림에는 온갖 먼지가 묻어 있고 흙이 묻어 있고 더러운 것들이 덮여 있는 그 그림이라고 한다면 그냥 갖다 내버리면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 그림을 보니까, 누구의 그림이냐면 피카소의 그림이에요. 갖다 내버려야 될까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아무도 그 그림을 내버리지 않습니다. 먼지가 아무리 묻어 있고 진흙이 그 위에 묻어 있어도, 그것만 벗겨내면 피카소의 그림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꺼내다가 갈고닦고 깨끗하게 해서, 값어치 있는 그림으로 파는 것이죠.

우리가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바라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우리는 더러운 것을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쁜 것을 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우리 어머니들은 무엇을 보느냐? 우리 자녀들을 바라볼 때 무엇을 보고 봅니까? 사랑스러운 아이라고 하는 것을 보기 때문에 그 누가 비난을 해도 긍휼의 눈으로 보는 것이죠. 사랑의 눈으로 보는 거예요, 우리가 보아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회복해야 될 관점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사람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보냐면, 사람을 보면서 제일 먼저 보는 것이 단점을 보는 겁니다. 비난할 것을 보는 겁니다. 그리고 비난할 것이 하나라도 보이면 비난하고 욕하고 정죄하면서, 그 사람을 향해서 마음을 닫아버리는 것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습성일 수밖에 없습니다.

근데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나쁘다고 하는 것, 다른 사람들에게서 더러운 모습을 찾아내고 단점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은 사실은 그 사람이 나쁘다고 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실은 그렇게 보는 내가 영적으로 삐뚤어져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다른 사람들의 그 더러운 것을 비난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 비난 속에서 우리 자신을 숨으려고 하는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더럽다고 하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숨기는 일을 하고 싶어 하는데 나 자신을 숨기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이냐 하면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을 향해서 비난의 계란을 던지는 그 순간에 저 사람은 나쁜 놈이 되고 나는 정당한 사람으로 된다고 하는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이 나는 적어도 당신과 같은 나쁜 놈은 아니다고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고, 그러한 것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면서 나는 저 사람보다는 괜찮아 나는 저 사람보다 괜찮은 사람이라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속이면서 그래서 나는 그 속에서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는 그런 못된 습성이 우리 모두에게 다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바리새인 증후군이라고 부르고 싶은데요. 놀랍게도 우리 크리스천들이 자주 빠지는 영적인 질병이 있다고 한다면 바리새인 증후군입니다. 치명적인 질병으로서 우리 스스로를 스스로 의롭다고 착각하게 만들고 그리고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만들어서 결국 타락해버리고 결국 구제 불능이 되어, 구원받지 못하게 되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그 악한 질병이 바리새인 증후군인데, 다른 사람들의 단점과 비난할 거리가 자꾸만 눈에 들어오고, 그리고 내 눈에 긍휼의 마음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이 바리새인 증후군에 걸린 것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겁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것이죠.

C. S. 루이스가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진실로 겸손하고 도량이 넓고 균형감이 있는 사람일수록 칭찬을 많이 하고, 괴짜이고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불평만 늘어놓는 사람일수록 칭찬에 인색하다. 훌륭한 비평가는 불완전한 작품들에서도 칭찬할 점을 찾아내지만, 시원찮은 비평가는 끊임없이 금서의 목록만 늘려간다. 건강하고 꾸밈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화려한 환경에서 근사한 요리를 두루 경험하며 자랐을지라도, 소박한 음식에서 칭찬거리를 찾아낸다. 그러나 소화불량 환자나 늘 까다롭게 구는 속물들은 모든 음식에 대해 트집을 잡는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거슬리는 대상과 마주한 것이 아닌 한, 언제나 찬양은 칭찬은 우리의 내적 건강이 밖으로 표출되는 소리이다.” 우리 자신을 스스로 영적으로 진단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내 눈에 무엇이 들어오는가? 사람들을 보면서 단점과 여러 가지 잘못된 것을 보면서, 그것을 비난하고 있는가? 나는 분노하고 있는가? 그것은 그 사람이 잘못되었기보다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안목이었기 때문에 그래요. 어머니의 눈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아무리 못난 자식도 어머니의 눈으로 보면,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의 눈으로 보면, 사랑스럽고 너무나도 고귀하고 너무나도 좋은데, 우리가 영적으로 병들어 있으면, 모든 것이 불만이고, 모든 것이 나쁘고, 비난할 거리만 보이고, 긍휼의 마음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나타나지 못하는 것이죠.

왜 우리는 분노하고 온유하지 못합니까? 왜 우리는 갑질을 하면서 행패를 부리면서도 나는 정당하다고 생각합니까? 왜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학대하면서도 아무런 양심에 거리낌이 없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다 나쁘기 때문이기보다는, 내가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하고 내가 악한 죄 가운데 빠져 있기 때문에, 정말 중요한 그 가치와 존엄성을 보지 못하고, 비난할 거리만 찾기 때문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신앙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그리고 진리를 수호해야 한다고 하는 그런 명분으로, 긍휼히 없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정통이 아닌 것들에 대해서는 긍휼을 베풀지 않아도 되고, 오히려 억압하고 전투적인 자세로 그들을 핍박해도,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경향,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군병들로서 저런 나쁜 놈들에 대해서는 악하게 대해도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경향들이 교회 내에 너무나도 만연해 있는데, 사실은 그게 예수님의 마음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악한 질병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그런 모습에 빠져 있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리가 패거리가 되어버려서, 교회라고 하는 진영을 무너뜨리는, 교회를 무너뜨리는 자들에게는 우리가 포악하게 되어도 되고,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우리가 악하게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면,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긍휼히 여기는 눈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긍휼이란 무엇인가? 자격이 있는 자에게가 아니라,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는 것이 긍휼이에요. 긍휼히 무엇인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그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며 저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는 것이 긍휼이에요. 긍휼히 무엇인가? 자기 자식을 죽인 그 범인들에게 저 범인들을 위해서 장학금을 쓰게 해달라고 돈을 부치는 게 그게 긍휼이에요. 나에게 잘해주고 나에게 좋게 해주는 사람들을 향해서 해주는 것이 그것으로 나는 긍휼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장 46절 48절 말씀에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오? 세리도 이 같지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단점을 보면서 비난할 거리를 찾을 게 아니라, 가치를 봐야 하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만일 그렇게 되지 못한다고 한다면, 우리의 눈에 자꾸만 단점들이 보인다고 한다면,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우리들의 영적인 눈을 바꾸어 주옵소서. 저 뛰어난 피카소의 그림에 묻어 있는 그 먼지와 흙을 바라보지 말게 하시고, 그 그림을 볼 수 있는 안목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왜 우리는 긍휼하게 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까? 왜냐하면 사실은 우리가 아무런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악한 죄를 저지른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죄악을 바라보시고 우리의 악한 면을 보시고 심판해 버리고 끝내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사 단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그 구원의 은혜를 우리가 입었다고 한다면, 그 은혜를 받은 자로서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며 사랑을 베풀며 그 사랑의 손을 내미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죄를 옳다고 말해도 괜찮다고 하는 그런 의미도 아니고 죄에 대한 심판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말씀도 아니고, 그 죄를 미워하는 것이 틀렸다고 하는 말씀도 아니고, 죄를 지은 것은 죄를 지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에 대한 긍휼의 마음을 갖는 것은 우리가 가져야 할 성도로서의 당연한 자세일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매번 여기서 넘어집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기도하며 나가야 합니다. 주님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단점과 비난할 점과 여러 같이 화를 낼 요소들만 찾아볼 것이 아니라, 측은히 여기는 마음, 사랑을 베풀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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