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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이 묻은 피카소의 그림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이 말씀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우리가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살지 못한다는 데 있다. 물론 가난한 사람들이나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 그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하지만 이 말씀은 그런 정도의 수준에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긍휼이란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호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에 지탄을 받아 마땅한 여인을 향하여 긍휼히 여기셨다. 모든 사람들이 그 여인을 향해 돌을 던지려 들었지만, 주님은 그 여인을 용납하셨다. 이러한 모습을 오늘날의 상황에서 찾아본다면, 파렴치한 죄를 지은 사람에 해당할 것이다. 과연 그런 사람에게도 긍휼을 베푸는 것이 옳은 것인가? 우리들의 마음에 그럴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가해자이고, 처벌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이지, 긍휼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바로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바리새인들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은 그들을 향해 긍휼을 베풀어주셨다. 심지어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을 박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피카소의 그림에 흙먼지가 묻어있다면, 그 흙먼지를 보고 그 그림을 버려버릴 것이 아니다. 그것만 잘 닦아내면 엄청난 가치의 그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난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단점들만 보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단점들을 보고 비난하는 것은 자신이 영적으로 삐뚤어져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징표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비난의 계란을 던지면서, 나는 적어도 너희들과는 다른 사람이며,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착각을 하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영적인 질병이다. 바리새인 증후군이며, 영적으로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

C. S. 루이스가 말한 것처럼,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거슬리는 대상과 마주한 것이 아닌 한, 언제나 찬양(칭찬)은 우리의 내적 건강이 밖으로 표출되는 소리이다.” 만일 우리에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며, 그 사람의 가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가치와 존엄성을 볼 수 있는 눈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없었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그렇다면 우리도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런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연관 설교: http://www.jjvision.org/?p=3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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