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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의 증거(고후 1:12-24)

초지일관(初志一貫)이란 말이 있다. 처음에 세운 뜻을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을 가리키는 것인데,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여기 기웃거리고 저기 기웃 거리지 않고 한 우물만 판 사람들이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심삼일(作心三日)일 경우가 많이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존경할만 하다 할 것이다.

하지만 초지일관하는 것이 항상 좋은 것일까? 믿음이야 초지일관하는 것이 중요하고 사랑도 초지일관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대부분의 많은 것들은 상황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 바꾸어야 할 필요도 있다. 사실 한 때 잘 나가던 기업들이 중간에 도태된 이유는 변화하는 상황과 여건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과거의 방식을 고집스럽게 매어 달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변화하고 대응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꿈이나 계획의 변화는 오히려 바람직할 수도 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려는 계획을 세웠었다. 하지만 중간에 그 계획을 취소해야만 했었다. 상황이 바뀌고 여건이 바뀌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이 빌미가 되어 고린도 교회 내에서 바울 사도를 비방하게 되었다. 아마도 바울 사도는 신의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했을 것이고, 이러한 비난은 복음의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바울 사도에게는 아주 치명적인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1장에서 자신의 말 바꾸기에 대한 변호를 하고 있다.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가겠다고 계획한 것은 경솔하게 한 것이 아니었으나, 나중에 고린도에 가지 않기로 번복하게 된 것은 어떤 알량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고린도 교회 교우들을 위한 결정이었다는 것이 요지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지금까지 정직하게 진실하게 행해왔다고 단언한다. 이러한 사실은 양심이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양심의 증거는 본인과 하나님 외에는 확인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처럼 정말 진실하게 행동한 것인지 아닌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마음까지 꿰뚫어보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헤롯 왕은 아기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 했으면서도 아기 왕께 경배하고 싶다고 이야기했고, 가룟 유다는 돈궤에서 돈을 훔쳐가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서도 향유를 300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했었더라면 더 좋았었겠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진실하게 행해야 한다.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정직함과 진실함으로 행해야 한다. 때로는 우리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율배반적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필연적인 이유로 계획을 바꾸게 될 때 그렇게 보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행동해야 한다. 그 옛날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인들을 대할 때 진심으로 대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실하게 대하셨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외면하시는 것 같고,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는 것 같아서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신 적이 없다. 비록 우리가 느끼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외면하시는 것처럼 생각될 때도 있지만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진실하게 대하셨다. 심지어 우리가 죄인이 되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을 때에조차도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위하여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시면서까지 우리에게 신실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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