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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의 딜레마(왕하 5:15-19)

나아만 장군은 나병에서 기적적으로 낫게 되는 체험을 한 후에 이제부터는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결단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섬겨오던 신들은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전혀 말도 하지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역사하지도 못하는 가짜 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고,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아만 장군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예배할 것이라고 다짐하였다.

그런데 나아만은 엘리사 선지자에게 이런 말을 덧붙였다. 자신이 하나님만을 섬길 것이지만, 아람 왕의 신하이기 때문에 왕을 보좌하여 림몬의 신당에 들어가서 몸을 굽히는 일이 있을 것인데, 이런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실 것을 구하였다(왕하 5:18). 이러한 나아만의 태도는 바람직한 것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은 100%의 헌신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시지, 단 0.1%라도 이방신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원하지 않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엘리사가 이러한 나아만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아만 장군을 책망한 것이 아니라 평안을 빌어주었다는 점이다(왕하 5:19). 그렇다면 나아만의 선택이 괜찮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것이 편리할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기는 하지만 장손이기에 제사를 드려야 하는 상황에서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정당화되거나, 국가의식이라고 생각하여 신사참배를 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나아만의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니엘의 세 친구의 이야기도 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느브갓네살 왕이 금신상을 만들어놓고 그 앞에 절하라고 강요할 때, 단호하게 거부한 바 있다(단 3:16-18).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어느 한 구절에만 근거해서 우리의 편리한대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적인 교훈에 맞추어서 해석해야 한다. 성경 전체적인 가르침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고 우상에게 절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이다.

우리의 문제는 그렇다면 왜 엘리사는 나아만의 이야기를 듣고 책망하지 않고 그냥 평안을 빌려 그를 보냈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나아만이 하나님도 섬기도 동시에 우상을 섬겨도 좋다는 것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기 원했던 나아만 장군이 아람 나라에 돌아가 신하로서의 삶을 살 때, 왕을 도와서 일하는 것마저도 마음에 걸려서 어떻게 하면 좋은지 고민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신앙인의 고민이 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세상은 하나님의 법칙이 아니라 이 세상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다. 나아만은 그런 상황에서 편리하게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겠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만을 섬기고 싶은데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혹시나 자신의 신앙이 타협될까보아 고민 가운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인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쉽고 편한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 세상과 작별해버리고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상과의 인연을 끊어버리고 돌기둥 위에서 오로지 성경을 묵상하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일에만 매어 달렸던 5세기의 기둥성자 시므온처럼 말이다. 오늘날에는 그렇게 하는 사람은 적지만 비슷하게 직장을 그만두고 신학교에 들어간다든지, 이 세상의 친구들과는 작별해버리고 오로지 교회의 일에만 매어달린다든지 하는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바른 태도가 아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 세상과의 인연을 끊어버리고 살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살 것을 요구한다. 이 세상에(in the world)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채(not of the world)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극단적인 두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다. 하나의 방법은 이 세상과 동화되어 전혀 크리스천의 향기를 나타내지 않은 채 죄를 지으며 사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의 방법은 이 세상을 떠나서 세상과의 관계를 끊고 사는 것이다. 이런 방법들은 모두 성경적이지 않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되,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한다.

나아만 장군의 선택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나아만은 아람 나라에서의 직장을 포기하고 엘리사의 제자가 되어 선지생도가 되는 것은 선택하지 않았다. 선지생도가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특별한 소명으로의 부르심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반대로 나아만 장군은 다시 아람 나라로 돌아가 계속해서 우상을 섬기며 살지도 않았다. 오히려 나아만은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결단했고, 자신이 하는 일들이 과연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에 저촉되지는 않는지 고민하면서 그 문제를 풀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산다. 직장에서 또는 가정에서 산다. 하나님의 자녀가 그런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그 현장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다가 실패하기에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하다. 그리고 성도들이 다시 모여 서로 격려하며 위로하고 힘과 용기를 얻어 다시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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