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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왕하 5:20-27)

엘리사 선지자는 나아만이 나병에서 낫게 된 후 주는 예물을 거절하였다. 그는 왜 예물을 거절하였을까?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 이유가 신앙적인 이유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그 예물을 받으면 나아만 장군의 병을 고친 사람이 엘리사가 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민족과 전쟁을 하여 이기게 되면 하나도 전리품을 챙기지 말고 다 불태워버릴 것을 명령하신 적이 있다. 그 이유는 우상숭배에 미혹되지 않게 하기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전리품을 챙기면 전쟁에서의 승리가 이스라엘 민족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엘리사는 나아만의 선물을 거절하였다. 나아만이 나병에서 나은 것은 엘리사의 경건과 능력으로 인하여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였음을 고백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배울 점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신앙생활을 해야지 사람을 보고 일희일비(一喜一悲)할 것이 아니다.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을 영접하지 않았다고 해서 화낼 것도 아니고, 엘리사를 통해서 나아만 장군의 병이 고쳐졌다고 해서 엘리사에게 열광할 것도 아니다. 우리는 사람을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

엘리사가 선물을 거절했을 때 눈이 돌아간 사람이 있었다. 그는 엘리사의 종 게하시였다. 그는 나아만 장군에게 가서 선지생도들을 돌보는데 필요한 물품을 요청하였다. 에브라임 산지에서 두 사람이 왔다는 말은 사실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엘리사가 보냈다는 말은 순 거짓말이었다. 그런데 엘리사의 이름을 사용한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그래야 설득력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게하시는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이 말을 했던 것뿐이다.

이와 비슷하게 명분은 선교사업을 한다고 하고 복지사업을 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선교실적이 마치 자신의 것인 양 포장하고 선전해서 후원을 받아내고 가로채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그런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신중해야 한다.

왜 게하시는 이런 탐욕에 빠지게 되었을까? 처음부터 이런 악한 목적을 품고 엘리사의 제자가 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물질에 대한 욕망이 있었다면 비즈니스맨이 되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신실했었을 그가 왜 이렇게 타락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우리 인간이 너무나도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변에서 왜 목사가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난다. 우리는 주변에서 왜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집사가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기에 우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첫 사랑을 잃어버리고 지금 탐욕의 자리에 서 있지 않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안타까운 것은 게하시가 엘리사가 받을 뻔 한 재물에 대해서는 욕심을 냈지만, 엘리사가 가졌던 영적인 능력에 대해서는 욕심이 없었다는 점이다. 엘리사를 통해서 기적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자신도 그런 영적인 능력을 얻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어 달렸어야 하지 않는가? 이것이 게하시와 엘리사의 차이점이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가진 영감의 갑절을 얻기를 소원하였다. 그래서 돌아가라는 권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엘리야를 좇았다.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할 것인가? 우리가 추구할 것은 하나님과의 생생한 관계를 추구해야 한다. 더욱 더 영적으로 께어 있기를 추구해야 한다.

아쉽게도 수많은 성도들이 장로나 권사나 집사와 같은 직분과 명예는 탐욕을 부리면서,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능력을 사모하지 않는다. 그게 아쉽다. 우리 주님은 사람들의 인기를 추구하거나 명예를 추구하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온갖 조롱과 모욕과 핍박을 당하셨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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