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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의 변화(눅 19:1-10)

딱지 (이국진 詩)

한때 너는 나의 전부였다. / 모든 종이는 / 딱지가 되어야 했고 / 너는 나의 자존심이었고 / 너는 바로 나였다. // 어느 순간 / 너는 내 삶에서 사라졌다. / 배설물처럼 사라졌다. / 그렇게 소중했던 네가 // 너는 진화했다. / 딱지에서 게임기로 / 게임기에서 돈으로 / 돈에서 명예와 권력으로 / 그래도 너는 여전히 딱지다. // 지금은 / 또 다른 딱지를 모은다. / 언젠가 다 사라져 없어질 것이 뻔한 딱지를 / 그래도 지금은 그 딱지가 전부이니까 / 그게 나를 지탱해주니까 / 그게 나니까 // 나는 갈망한다. / 사라지지 않을 것을 / 그 어느 것으로도 대치될 수 없는 것을 //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는 돈을 우상으로 삼았던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돈이 가장 소중했다. 그래서 그 소중한 것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었다. 민족을 배반할 수도 있었고, 사람들의 손가락질도 참을 수 있었다. 그에겐 돈이 가장 소중한 것이었으니까.

그런 삭개오가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다. 왜 일까? 단순한 호기심은 아닐 것이다. 그냥 호기심이었다면 장애물이 앞에 있을 때 포기하고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장애물이 있어도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다. 그 이유는 돈이라는 우상이 가지고 있는 한계 때문일 것이다. 돈만 많으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전혀 행복하지 않았고 오히려 고통스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게 우상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우리에게는 행복을 약속하지만 실제로는 우리를 노예로 삼아버리는 것이 우상이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을 때의 가장 큰 장애물은 그 자신이 아무런 자격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신앙적으로 살려고 노력했던 바리새인들에게조차 위선자라고 책망하신 주님이 보신다면, 세리는 얼마나 더 더러운 죄인이겠는가? 과연 주님께서 만나주시기나 할 것인가?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을 제치고 삭개오에게 오셨다. 그리고 삭개오의 집에 머무시겠다고 하셨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사실 예수님을 향해서 비난했던 말,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눅 7:34)라는 말은 신명기 21:20-21의 말씀에 따라 돌을 던져 사형에 처할 패륜아라는 비난이었다. 이게 바로 성탄의 모습이다. 죄로 인하여 더러워진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죄인들 가운데로 주님이 오신 것이 성탄이다.

주님을 만난 삭개오는 놀라운 반응을 보였다. 자신의 재산의 반적을 가난한 자에게 주고, 속여 취한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는 반응이었다. 이것은 사실 십일조를 규정하고, 속여취한 것은 1/5을 배상하라는 율법의 요구를 훨씬 초과하는 것이었다. 왜 그랬을까?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그저 율법의 요구를 행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마치 자녀를 시집보내기까지 길렀으니 이제 내 할 일을 다했다고 말하는 부모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어머니는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식을 걱정하면서 산다. 사랑하니까 말이다.

삭개오는 돈이 가장 소중한 줄 알고 살았으나, 이제는 주님을 가장 소중하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었다. 이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의 반응이다. 전에 유익했던 것을 다 해로 여겼고 배설물처럼 여겼다는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말이다(빌 3:7-8).

그런데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그런 고백을 하신다. 내가 천지창조를 아름답게 잘 했으니까 내 할 일 다 했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용서하고 또 용서하셨고, 7번 용서했으니 이젠 됐다 말씀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심지어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포기하시기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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