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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 다툼의 비극(마 2:13-23)

바다 속에 빠져 위험에 처한 사람에게 가장 큰 기쁨의 소속이 무엇일까? 그것은 구조선이 왔다는 소식일 것이다. 화재의 현장에서 위험에 처한 사람에게 가장 큰 기쁨의 소식은 무엇일까? 그것은 소방차가 왔고 불길 속에서 건져낼 사다리차와 소방관이 왔다는 소식일 것이다. 그 순간에 수영을 가르쳐줄 수 있는 강사나 점프 뛰기를 연습해서 다른 건물로 건너뛸 수 있게 가르쳐주는 강사가 왔다는 소식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더러운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은 참으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기쁜 소식이 달갑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헤롯 왕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헤롯왕은 메시아로 탄생한 예수님을 죽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아무 죄가 없는 베들레헴 근처의 남자 어린아기들을 죽이고야 말았다.

성탄의 이야기에 이런 유아학살의 이야기는 당혹스럽다. 성경에 이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 불편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왜 성경은 성탄과 관련된 좋은 이야기만 기록하지 않고, 이런 이야기까지 기록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 이야기가 사실이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이 일은 그때만 있었던 일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계속 반복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실 왕이다. 마음은 우리가 다스리는 영역이고 우리가 지배하는 나라이다.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살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의 마음의 왕좌에 오르시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청종하려 하지 않고 억눌러버리려고 한다. 마치 헤롯이 베들레헴에 탄생하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왜 우리는 주님이 우리 마음의 왕좌에 앉는 것을 거부하는가? 그것은 주님이 우리의 왕이 되시면, 그 순간 우리는 주님의 종이 되어 우리의 자유와 기쁨과 행복이 없어질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데, 내가 원하지 않는 힘든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오해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왕이 되시는 것은 이 세상의 왕처럼 우리를 착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주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섬기고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잔치에 참여하게 하신다(계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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